호텔의 공용 공간이 점점 넓어지고 있는 가운데 홍콩에 끝판왕이 있습니다. 이튼(Eaton) 호텔의 공용 공간은 대형 푸드 코트, 코워킹 스페이스, 갤러리, 공연장, 라디오 방송국, 영화관 등으로 호텔이라는 걸 깜빡할 정도입니다. 덕분에 투숙객은 물론 투숙하지 않는 여행자와 현지인이 한 데 어우러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벌어지는 이벤트들이 심상치 않습니다. 아트 위크를 열어 로비에서 행위 예술을 하질 않나, 공중파에서 잘 다루지 않는 주제로 라디오를 녹음하고, 컨퍼런스룸에서는 난민이 큐레이션한 옷으로 패션쇼를 엽니다.
사실 이튼은 사회운동가가 만든 호텔입니다. 이튼이 어떻게 사회적 변화를 만들어가는지, 이를 위해 어떻게 밀레니얼들에게 어필하는지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호텔계의 파타고니아'의 탄생을 기대해볼 만 합니다.
마천루를 만든 현대 건축의 거장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가 설계한 호텔이 있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마지막 작품인 330 노스 와바시입니다. 그가 무려 1920년에 마천루 계획안에서 제안한 커튼 월 공법은 건설 자재가 적게 들어 고층 건물을 빠르게 지을 수 있습니다. 현대 도시의 모습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Jeffery Howe, Bluffton University
로비 내부에도 커튼 월 구조를 모티브로 한 디자인을 선보입니다. ⓒ랭햄 시카고
미스의 손자인 더크를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만든 일등 공신이 있습니다. 바로 로 카 수이의 딸인 캐서린 로(Katherine Lo)입니다. 예일대에서 인류학 공부를 마치고 서던 캘리포니아대에서 영화를 만들며 예술과 문화를 탐닉하는 데 여념이 없던 캐서린은 원래 아버지가 하는 럭셔리 호텔 비즈니스에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비즈니스 논리의 대척점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 운동가로서의 이력도 있습니다. 이라크 전쟁에 반대해 학교 기숙사에 미국 국기를 거꾸로 게양해 징계를 받고, 한국 농부들이 홍콩에 와서 WTO에 시위를 할 수 있도록 돕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만은 달랐습니다. 영화학도인만큼 거장의 마지막 작품이 어떻게 호텔로 재탄생하는지 영상으로 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캐서린은 다큐멘터리 제작 차 리노베이션 내내 함께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호텔 비즈니스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었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캐서린은 몰랐습니다. 이 경험이 패밀리 비즈니스에 한 발 들여놓게 되는 계기가 되리라는 것을요.
트로이 목마가 된 호텔
"홍콩에 있는 이튼 호텔을 너가 바꿔볼래? 밀레니얼을 위한 호텔로 말이야."
랭햄 시카고 프로젝트가 끝나고 다시 영화판에 돌아간 캐서린에게 아버지가 또 다른 제안을 합니다. 이번에는 미스 반 데어 로에 같은 거장의 건축물이 아닙니다. 1999년 지은 홍콩의 4성급 비즈니스 호텔, '네이선 로드(Nathan Road)에 그 오래된 거(that old thing) 있잖아'라고 하면 모두 아는 이튼 호텔을 다시 여는 일입니다. 에어비앤비나 호스텔이 급부상하는 시대에 랭햄 호텔과 같은 초럭셔리 라인 외에도 대항마가 필요했던 터였습니다.
평소 같으면 대번에 거절할 캐서린이지만 '밀레니얼을 위한 호텔'이 어쩐지 남다르게 들렸습니다. 밀레니얼이 베이비붐 세대 이후 가장 유망한 소비층이어서가 아닙니다. 캐서린은 밀레니얼이 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많고 변화에 유연하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닐슨의 조사에 따르면 66%의 밀레니얼들이 지속 가능한 브랜드를 위해 비용을 더 지불할 의사가 있음을 밝힐만큼 밀레니얼들은 보다 의식적이고 윤리적인 소비를 지향합니다. '사회적 임팩트'가 구매를 결정할 때 주요한 고려 요소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밀레니얼을 제대로 타깃한다면 어쩌면 캐서린이 바라는 사회적 변화를 앞당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텔을 목표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접근한 것입니다. 패션이나 F&B 업계에서는 파타고니아, 홀푸드 등 사회적 변화를 이끄는 선도 기업들이 있는데 호텔업에서는 이런 역할을 해줄 규모 있는 기업이 없습니다. 그래서 캐서린은 '호텔계의 파타고니아'를 만들겠다는 포부로 아버지의 제안에 응했습니다. 그렇게 4년에 걸쳐 준비한 밀레니얼을 위한 호텔이 이튼입니다.
4성급 호텔에 대형 푸드 코트가 있는 이유
왁자지껄한 야시장, 차와 식사를 같이 할 수 있는 캐주얼한 홍콩식 카페 차찬탱을 연상케 하는 중정형 푸드 코트입니다. ⓒ이튼
이튼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3개 층에 걸쳐 펼쳐진 거대한 푸드 코트입니다. 로비층부터 지하 2층까지 중정을 뚫어놓아 어디에 있어도 푸드 코트 전체를 조망할 수 있습니다. 지하 1층에 11개의 다국적 음식점이 입점되어 있고, 지하 2층은 아예 뷔페 아스토(Astor)로 운영해 전 세계 음식을 한 자리에서 맛볼 수 있습니다. 지하 3층에는 광둥 레스토랑 얏퉁힌(Yat Tung Heen)이 있는데 미슐랭 원스타이지만 격식을 차리기보다 캐주얼하고 개방적인 느낌입니다. 북적북적 활기찬 야시장 분위기의 푸드 코트와 결이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요새 호텔들이 식음료 파트를 강화하는 추세지만, 미슐랭 스타를 받은 고급 레스토랑이나 해외 유명 레스토랑의 지점을 유치하는 방식인 것과 구분됩니다. 이튼처럼 마치 쇼핑몰에 온 양 대중적인 푸드 코트로 승부하는 곳은 드뭅니다.
갤러리 투모로우 메이비에서는 컨템포러리 아트를 선보입니다. ⓒ이튼
이튼 호텔의 공용 공간은 푸드 코트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튼 하우스(Eaton House)라는 코워킹 스페이스, 투모로우 메이비(Tomorrow Maybe)라는 갤러리, 테러블 베이비(Terrible Baby)라는 공연장과 가든 테라스 바, 라디오 방송국, 루프탑 풀을 바라보며 요가할 수 있는 웰니스 룸 등 다양한 용도가 더해진 하이브리드 호텔입니다. 물론 450여 개에 달하는 객실을 보유한 꽤 규모있는 호텔이지만, 객실 외에 투숙객이 아니어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상당히 넓습니다. 호텔이라는 것을 잠시 잊을 정도입니다. 이튼이 이렇게 호텔 아닌 호텔을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공연장 테러블 베이비입니다. 언더그라운드 밴드부터 해외 순방 중인 유명 밴드까지 다양한 공연을 펼칩니다.
가장 유동 인구가 많은 푸드 코트 내에 라디오 방송국이 위치해 있어 이튼이 호텔로서는 드물게 미디어 역할도 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쉽게 인지할 수 있습니다. ⓒ이튼
루프탑 풀을 바라보며 실내 운동을 할 수 있는 웰니스 룸입니다. 요가는 물론이고 태극권, 명상, 기 치료 등 이색적인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이튼
다만, 옛 홍콩을 표현하는 방식이 천편일률적입니다. 네온 사인, 붉은색 초롱불, 왕가위의 영화 포스터, 치파오 등 옛 것을 그대로 가져옵니다. 이렇다보니 레트로풍의 공간에 가면 진부하고, 어딘지 가짜 같아 관광 기념품점에 온 듯한 느낌을 지우기 힘듭니다. 오히려 실제 홍콩과는 거리가 있는 쇼윈도 홍콩입니다.
반면 이튼이 재해석한 홍콩은 고유합니다. 오브제를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주변 지역에서 실제 볼 수 있는 공간과 사물에서 모티브를 얻어 이를 변형하고 추상화하기 때문입니다. 야시장, 차찬탱 등 오랜 세월을 거쳐 현재까지도 함께하며 대표성이 검증된 것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이로써 과거에 멈춘 홍콩이 아니라 이후 세월의 더께까지 더한 홍콩을 담을 수 있습니다. 박제된 문화유적이 아니라 현재의 로컬을 느끼고자 하는 밀레니얼들에게 진짜배기 홍콩을 경험한다는 인상을 아낌없이 줍니다.
홍콩 건설 현장에서는 시설물 관리와 고층 공사를 위해 외벽에 설치하는 임시 가설물을 금속이 아닌 대나무로 만듭니다. 가볍고 변형이 쉬우며 끈으로 쉽게 결합할 수 있고 습한 홍콩의 기후에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버밀리온 레드 색상으로 칠한 철제 골조가 뉴트로한 홍콩을 잘 보여줍니다. ⓒ이튼
중앙 장식물 뿐 아니라 푸드 코트 자체도 홍콩스럽습니다. 푸드 코트는 야시장 '템플 스트리트 마켓(Temple Street Market)', 카우룽 지역의 유서 깊은 차찬탱(차와 식사를 함께 할 수 있는 홍콩식 카페)인 '미도 카페(Mido Cafe)', 상점의 이중 철창문에서 디자인 모티브를 따왔습니다. 일단 야시장 분위기 조성에는 중정 구조가 한 몫 합니다. 야시장의 중앙통로처럼 모든 곳과 연결되는 열린 공간을 만들기 위해 중앙 부분을 뚫어 중정을 두고 그 주변으로 방사형 푸드 코트를 만들었습니다. 원래 연회장으로 쓰이던 막힌 공간이었는데 지금은 3개층 전체가 소통합니다. 푸드 코트 내 각각의 매장은 철제 골조로 만들어 야시장의 가판대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런데 이 철제 골조 색깔이 오렌지빛이 도는 차분하고 선명한 빨간색 ‘버밀리온 레드(Vermiliion Red)’입니다. 중화권의 전형적인 붉은색이 아니라 염색 컬러로도 애용할 만큼 세련된 버밀리온 레드를 기본 색상으로 선정해 홍콩의 이미지를 스타일리시하게 만듭니다. 주로 허름한 곳에 쓰이던 철제 골조지만 무광의 버밀리온 레드를 덧입혀 대조를 이루니 팝한 느낌마저 듭니다.
주윤발이 단골이라는 카우룽의 오랜 차찬탱 '미도 카페'의 모자이크 타일입니다. ⓒnonameforum
타일을 부착하기 어려운 곳에는 모자이크 타일의 패턴만 따와 패브릭에 적용하기도 합니다. ⓒ이튼
영화 '화양연화'에서 모티브를 딴 얏퉁힌은 영화 세트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은근하게 구현합니다. ⓒ이튼
개념있는 밀레니얼들이여, 오라
이쯤되면 트로이의 목마가 홍콩 시내 한복판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듯 합니다. 이제 목마 안에 숨어있던 정예부대가 출동할 차례입니다. 정예부대의 정체는 이튼의 존재 이유나 다름 없는 '사회적 변화'를 위한 활동들입니다. 인디나 신예 아티스트에게 기회를 주어 문화적 다양성을 넓히고, 성 소수자, 난민, 소수 인종 등 소외받는 계층을 지지하며, 환경 보호를 실천합니다. 이를 호텔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지원합니다. 바로 공간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로컬 아티스트 아파 안파(Afa Annfa)가 태양 주변을 도는 여자들을 이튼 하우스의 벽면에 그렸습니다. 주체적인 여성을 뜻합니다.
또, 아티스트를 위한 객실인 '아티스트 스튜디오 룸'이 있습니다. 침실 외 작업 공간을 별도로 둔 것이 특징입니다. 뮤지션을 위한 객실은 드럼 패드, 마이크, 키보드, 맥 컴퓨터 등 750만 원 상당의 최첨단 오디오 장비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비주얼 아티스트를 위한 객실에는 드로잉과 페인팅을 할 수 있는 넓은 캔버스와 미술 도구를 두었습니다. 아티스트들이 여행하면서도 창작 활동을 지속할 수 있고 심지어 작은 콘서트나 전시회를 즉흥적으로 열 수도 있습니다. 종종 장기 체류용 레지던스로 무상 제공되기도 합니다.
일회성 이벤트뿐 아니라 일상적인 실천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푸드 코트에서는 플라스틱을 쓰지 않고 루프탑에서 채소를 재배해 식당들이 사용하도록 하는 등 로컬 소싱을 장려합니다. 비건 메뉴가 많은 것도 그저 비건이 힙하거나 구색을 갖추기 위함이 아니라 비건이 지향하는 라이프 스타일이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범죄자 인도 반대 시위를 지지하고, 동성애 탄압 반대에 항의해 열렸던 집회인 스톤월 라이엇 50주년을 기리는 등 정치적으로 예민할 수 있는 사안에도 주저함이 없습니다. 이 정도 규모 되는 호텔이 공식적으로 입장을 표명한다는 것 자체가 사회 운동에 큰 힘이 됩니다. 사회적 변화가 단순 CSR 차원이 아니라 존재 이유 그 자체이기에 가능한 행보입니다.
임팩트가 있어야 소셜 임팩트를 논할 수 있다
요새 절반 가량 줄기는 했지만 홍콩은 여전히 샥스핀 최대 거래국입니다. 중화권의 진미 샥스핀 요리는 입은 즐겁게 할 지언정 만드는 과정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상어를 잡으면 1kg에 최소 80만 원을 호가하는 지느러미만 도려내고, 질긴 식감으로 인기가 없고 어선의 공간만 차지하는 몸통은 바다에 버립니다. 지느러미가 없어진 상어는 헤엄칠 수가 없어서 고통스럽게 죽어갑니다. 그렇게 죽어간 상어가 연간 72,000마리입니다.
이튼 호텔에는 샥스핀이 없습니다. 보통 고급 광둥 레스토랑에는 있기 마련인데 미슐랭 레스토랑 얏퉁힌에도 없고, 결혼식 피로연에도 없습니다. 상어 지느러미를 식재료로 이용한다는 발상 자체를 거부해 인조 샥스핀조차 쓰지 않습니다. 이튼에서 결혼하는 이들은 적어도 하객들에게 샥스핀 금지 캠페인을 실천한 셈입니다. 혼자 샥스핀 요리를 안 먹거나 블로그에 글 하나 올리는 것보다 더 효과적입니다. 이렇게 이튼은 사람들이 사회 변화에 참여하게끔 하며 실질적인 임팩트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Reference
- • 이튼 워크샵 공식 홈페이지
- • 이튼 워크샵 공식 인스타그램
- • 이튼 홍콩 공식 인스타그램 / 페이스북
- • AvroKo Eaton HK
- • EATON HK: THE COUNTERCULTURE HAVEN THAT WANTS TO BE MORE THAN JUST A HOTEL
- • 이튼 홍콩 객실 설명
- • First look: The gourmet renaissance in newly refurbished Eaton HK
- • Daughter's Artistic Taste At HK Billionaire's Langham Hotel Chain
- • Mediating Mies: Dirk Lohan's Langham Hotel Lobby at the IBM Building
- • 전설적인 건축가, 미스 반 데 로에
- • The Langham Chica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