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성급 호텔 레스토랑의 주방을 엿볼 수 있다면?

원 하버 로드

2022.05.22


그랜드 하얏트 홍콩의 원 하버 로드 레스토랑에서 셰프스 테이블을 예약하면 주방 안에서 식사할 수 있습니다. 한 편의 오케스트라에 비유될만큼 일사불란하게 요리를 만드는 과정을 공식 메뉴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손님이 주방을 직접 들여다보는 것이 아닙니다. 주방에 카메라를 두고 룸에 있는 모니터를 통해 실시간으로 주방을 확인하는 방식입니다. 원 하버 로드가 셰프스 테이블에 모니터를 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달콤한 상상을 하나 해봅시다. 파티셰가 눈 앞에서 디저트를 만들어주는 겁니다. 그것도 즉흥적으로. 홍콩의 디저트 바 아툼 데저런트(Atum Desserant)에 가면 상상이 현실이 됩니다. 바 테이블마다 파티셰가 즉흥 디저트쇼를 보여줍니다. 메뉴 이름도 재즈 즉흥 연주를 뜻하는 '임프로바이제이션(Improvisation)'입니다. 스테이크같은 브라우니, 석탄 초콜릿 아이스크림 등 단품 메뉴도 위트 만점이지만, 아툼 데저런트의 최고 인기 메뉴는 단연 임프로바이제이션입니다.



임프로바이제이션 메뉴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메뉴의 일부입니다. 유튜브 영상 보러가기


먼저 바 테이블에 앉아 흰색, 회색, 검은색 중 하나를 골라 실리콘 매트를 깝니다. 이 매트를 캔버스 삼아 바 건너편의 파티셰가 손님 눈 앞에서 디저트를 한땀한땀 ‘그려’ 나갑니다. 색색깔의 소스로 난 치듯 시원시원하게 획을 긋고 점을 찍으며 밑그림을 다집니다. 화포 위에 물감을 즉흥적으로 흩뿌리며 우연한 작품을 만들어내던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을 연상케 합니다. 그리고 무스 타입, 슬레이트 타입, 털실 타입, 큐브 타입 등 다양한 제형과 색의 초콜릿, 푸딩, 생크림, 마시멜로, 모찌, 과일 등을 차곡차곡 쌓아올립니다. 여기에 드라이 아이스 연기를 내뿜는 액화 질소 아이스크림을 즉석 제조해 얹으면 현장감이 배가 됩니다. 보통 디저트는 식사를 마무리하는 조연인데 여기서는 어엿한 주인공입니다. 레스토랑이나 위스키 바의 전유물이던 16층 전망을 누릴 수 있게 한 것도, 밤 11시 30분까지 심야 영업하는 것도 모두 간만에 주인공 자리를 꿰찬 디저트를 최대한 여유롭게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원하는 문구도 새길 수 있어 기념할 일이 있을 때 적격입니다. 한국어로 '퇴사준비생의 홍콩'을 부탁해도 거뜬합니다.


임프로바이제이션 메뉴는 328 홍콩달러(약 49,200원)로 일반 단품 메뉴 가격의 2배가 넘습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의 제대로 된 한 끼 식사 값에 버금갑니다. 사실 디저트에 선뜻 쓰기에는 꽤 부담스러운 가격입니다. 그렇다고 파티셰의 실력이나 재료의 퀄리티가 월등하게 뛰어난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기다리면서까지 임프로바이제이션 메뉴를 찾는 건 과정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잭슨 폴록이 결과물이 아니라 제작 과정 그 자체도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듯, 아툼 데저런트도 디저트 만드는 과정을 메뉴화하였습니다. 단순히 오픈 키친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흥미로운 제조 과정을 별도로 만들어 선보임으로써 한 편의 쇼를 본 듯 합니다. 아툼 데저런트의 바 테이블을 '테이블 극장(Table Theatre)'이라고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내부 사정으로 아툼 데저런트의 디저트 쇼는 더 이상 볼 수 없습니다. 다행히 홍콩에는 아툼 데저런트보다 더 전문적이고 희소한 조리 과정을 메뉴로 선보이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5성급 호텔 그랜드 하얏트에 있는 레스토랑 '원 하버 로드(One Harbour Road)'입니다. 원 하버 로드에서 '셰프스 테이블(Chef's Table)' 메뉴를 예약하면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호텔 주방을 엿볼 수 있습니다.



셰프의 손님





눈길이 닿는 하나하나 모두 고급스러운 원 하버 로드지만, 셰프스 테이블을 위한 특별한 공간은 따로 있습니다. ⓒ원 하버 로드


원 하버 로드는 1930년대 상하이의 고급 대저택을 모티브로 한 광둥 요리 전문 레스토랑입니다. 유리 모자이크로 장식한 분수대와 커다란 나무가 홀의 한 가운데 자리해 야외 정원을 통째로 실내로 들여온 듯 하고, 로즈우드 마감재와 앤티크 장식이 따뜻하고 기품있는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그러면서도 육중한 대들보와 유리천장으로 궁전같은 화려함을 뽑냅니다. 홀 절반은 2개 층으로 나누고 계단과 난간을 설치해 고급 맨션의 발코니 같은 장면을 연출하며, 나머지 절반은 2층 층고를 터서 통유리 너머로 빅토리아 하버 전망이 펼쳐지게 했습니다. 한 눈에 봐도 손꼽히는 고급 레스토랑입니다. 셰프스 테이블이 이 고급스러운 홀 어딘가에 자리하나 싶지만, 예약 손님들이 안내받는 곳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주방입니다. 손님들에게는 금기의 영역이던 주방 한복판을 그대로 가로질러 갑니다. 접시 달그락거리는 소리, 치익하고 팬에 기름 두르는 소리, 광둥어로 서로 지시를 주고 받는 소리와 함께 수십 명의 조리사들이 분주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셰프스 테이블은 이 주방의 가장 안쪽에 자리합니다.





주방 안쪽에 있는 셰프스 테이블입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갈합니다. ⓒ원 하버 로드


셰프스 테이블의 가격은 디너가 인당 최소 1,527 홍콩달러(약 23만 원)으로 최소 1,068 홍콩달러(약 16만 1,200원)인 일반 코스 메뉴 대비 비싼 편입니다. 최대 2,957 홍콩달러(약 44만 5,300원)까지 가격이 올라가기도 합니다. 일반 메뉴를 먹을 수 있는 홀이 저 정도로 고급스러우니, 셰프스 테이블은 얼마나 호화찬란할지 기대가 됩니다. 그런데 의외로 셰프스 테이블은 굉장히 소박합니다. 원래 요리사들이 레시피를 개발하고 회의를 하는 등 실무를 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한 켠에 컴퓨터와 프린터도 있고, 각종 향신료와 말린 해산물 등 식재료를 수납한 찬장도 있습니다. 영업시간 전후로 사무 업무를 보고 있을 셰프의 뒷모습이 그려집니다. 진정한 '셰프의 테이블'로 셰프의 손님을 셰프의 사적인 공간에 초대한 것입니다. 과한 인테리어를 하지 않은 것도 사적인 공간이라는 컨셉을 해치지 않기 위함입니다.


셰프의 사무 공간을 셰프스 테이블로 함께 쓰는 것은 레스토랑 입장에서도 효율적입니다. 셰프스 테이블은 음식을 만드는 주방 안에 위치하기에 공간을 넓게 쓰면 자칫 운영에 지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바 테이블 형태로 간소화하고 등받이 없는 높은 의자에 앉히는 등 비싼 돈 내고 온 손님을 불편하게 해서도 안 될 일입니다. 반면 원 하버 로드의 셰프스 테이블은 평소에 사무 공간으로 쓰기에 12인 수용한 가능한 원형 테이블을 둬도 부담이 덜합니다.



직접 가지 않고도 주방을 엿보는 방법

원래 셰프스 테이블은 프랑스 등 서유럽에서 시작된 아이디어입니다. 홍콩에서도 대개 프렌치,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셰프스 테이블을 운영합니다. 프렌치 코스는 여러 메뉴가 시간을 두고 나와 식사 시간이 깁니다. 그래서 주방의 일부를 노출해 보여줌으로써 기다리는 시간을 기대하는 시간으로 만들어주자는 것이 셰프스 테이블의 기본적인 취지입니다. 완성된 요리만을 접하던 사람들에게 이를 만드는 과정을 공유함으로써 재미 뿐 아니라 신뢰감도 높일 수 있습니다. 원 하버 로드도 셰프스 테이블을 운영하며 주방을 오픈했습니다. 특히 한 편의 오케스트라로 비유될만큼 일사불란한 5성급 호텔 레스토랑의 주방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기에 다른 오픈 키친과 차별화됩니다.


그런데 프렌치와는 달리 광둥 요리는 손님이 주방과 너무 가까우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광둥 요리는 약간의 기름으로 센 불에서 빨리 볶거나 튀기는 조리 방식이 대표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곳 저 곳에서 화염이 치솟고 주방이 열기로 가득차기 일쑤며 사방에 기름이 튀는 것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여기에 딤섬 등 찜 요리도 많기 때문에 습도도 높은 편입니다. 아무리 조리 과정이 흥미롭다고 하더라도 그런 주방 안에 있으면 손님도 불편할 수 있습니다. 또, 광둥 요리는 원재료 맛을 살리도록 조리 시간을 최소화하기에 요리 호흡이 빠른 편이라 옆에 사람이 있으면 요리하는 사람에게도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셰프스 테이블 한 켠에 비치한 모니터로 주방에 가지 않고도 조리 과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gourmetkc


그래서 원 하버 로드의 셰프스 테이블에는 모니터가 있습니다. 주방에 카메라를 설치해 셰프스 테이블 공간 내 모니터로 주방 상황을 실시간 중계합니다. 카메라는 팬 프라잉 등 조리 과정에 재미있는 볼 거리가 많은 구역을 비춥니다. 물론 손님들이 원하면 셰프를 대동해 직접 주방으로 가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리에 앉아 음식을 기다리며 모니터를 지켜보기만 하면 됩니다.



홍콩 원 하버 로드 주방에는 카메라가 있다? 유튜브 영상 보러가기



결국에는 사람

<셰프스 테이블>이라는 동명의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시리즈가 있습니다. 흔한 먹방이나 음식 경연 프로그램과는 달리 음식을 매개로 하여 세계 각국 유명 셰프들의 인생과 철학을 조명합니다. 셰프의 식탁은 식재료와 조리법의 단순 조합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셰프 본인이 중심이 되어 그의 생각과 개성을 잘 녹여내야 합니다. <셰프스 테이블>은 미식에 대한 남다른 관점으로 에미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원 하버 로드의 셰프스 테이블 역시 이 관점에 공감합니다. 별도의 공간, 조리 과정을 편하게 관람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 외에도 셰프 본인의 색깔을 담기 위해 노력합니다. 원 하버 로드의 셰프스 테이블은 1989년 원 하버 로드 오픈부터 함께한 리 슈 팀(Li Shu Tim) 총괄 셰프가 쭉 맡아 왔고, 2017년부터는 현재 30년 경력의 찬 홍 청(Chan Hong Cheong) 셰프 그 뒤를 잇습니다. 이 관록있는 셰프가 온전히 그만의 식탁을 꾸리기 위해서는 메뉴와 서비스가 달라야 합니다.



셰프스 테이블을 맡고 있는 찬 홍 청 셰프입니다. ⓒ원 하버 로드


첫째, 셰프스 테이블에서는 셰프 재량으로 메뉴를 조정할 수 있습니다. 일단 셰프스 테이블만을 위한 코스 메뉴가 따로 있습니다. 무엇을 먹어야할 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손님들을 위한 기본 메뉴일 뿐 매우 유동적입니다. 예약 손님의 기호 등을 미리 파악하여 기존 코스 메뉴를 조정하거나 메뉴를 새로 만들어 선보입니다. 보통 여러 명이 그룹을 이루어 한 테이블을 예약하기에 각기 다른 니즈를 이야기하는데 이를 종합해 반영합니다. 심지어 아예 '서프라이즈 메뉴'를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일식당의 오마카세와 같은 이 메뉴는 기존 메뉴에 없던 요리를 셰프가 알아서 코스로 선보이는 것입니다.


요리사 한 명 있는 심야식당류의 가게라면 모를까,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일수록 메뉴를 변형하기 어렵습니다. 여러 조리사의 협업으로 요리를 만들며 예정에 없이 섣부르게 새로운 시도를 했다가 맛이 떨어지면 큰 비용을 지불하고 오는 고객들을 크게 실망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5성급 호텔 레스토랑의 셰프들은 정작 개인기를 발휘할 일이 많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셰프스 테이블이 어찌보면 경력 30년 베테랑 셰프의 진짜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일 수 있습니다.


둘째, 셰프가 주방에서 나와 손님들을 테이블에서 밀착 케어합니다. 셰프가 직접 테이블로 와서 메뉴를 하나씩 설명해줍니다. 서버가 단순히 레시피를 읊는 것과 달리 이 레시피를 직접 만들고 요리한 사람이기에 제대로 된 설명을 해 줄 수 있습니다. 음식이 나올 때 외에도 테이블에서 담소를 나누고 사진을 찍는 등 셰프스 테이블이 진행되는 순간에는 메인 셰프가 늘 이 테이블과 함께 합니다. 셰프스 테이블의 손님들은 조리 과정 뿐 아니라 셰프와의 관계에도 비용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셰프스 테이블이 비로소 완성됩니다.



레스토랑에 분수대를 만드는 마음

원 하버 로드 레스토랑의 시그니쳐는 홀 가운데 자리한 커다란 분수대입니다. 이 분수대는 1930년대 상하이의 고급 맨션이라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일조하지만, 진짜 존재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원 하버 로드는 글로벌 오피스가 밀집한 완차이 지역에 위치하기에 비즈니스 미팅 목적으로 찾는 고객이 많습니다. 이 때 분수대는 대화 중에 자연히 오갈 법한 민감한 이야기들을 다른 테이블에서 우연히 듣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꼭 밀폐된 룸에 들어가지 않고 개방된 공간을 즐기면서도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분수대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의 크기를 세심하게 조절합니다. 대화를 방해할만큼 너무 크지도 않으면서, 먼 발치의 대화가 들리지 않을만큼은 충분히 큰 소리를 유지합니다.


레스토랑에 분수대를 만드는 마음에 고객들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깔려 있습니다. 조리 과정을 메뉴로 만든 것, 주방 안에 모니터를 두어 편하게 조리 과정을 볼 수 있도록 한 것 역시 이러한 사려깊음의 결과가 아니었을까요. 만약 유럽의 셰프스 테이블을 게으르게 벤치마킹했다면 홍콩 최고의 셰프스 테이블로 손꼽히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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