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파는 매장인지, 옷 만드는 작업실인지 구별되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판매하는 제품 옆에 수선 장비와 염료가 어지럽게 놓여 있고 그 안에서 패션 디자이너가 수작업으로 옷을 만듭니다. 덕분에 디자이너와 고객이 매장에서 자연스럽게 소통하며 영감을 주고 받습니다. 사라진 것은 매장의 물리적 경계만이 아닙니다. 지난 시즌에 남은 옷과 버려지는 재료만을 활용하여 세상에 하나뿐인 새 상품을 만드니, 신상품과 재고품의 경계도 모호해집니다. 지속가능한 패션의 미래를 그리는 스웨덴의 패션 실험실, 아워 레거시 워크샵(Our Legacy WORK SHOP)입니다.
아워 레거시 워크샵 미리보기
• #1. 매장의 경계를 허물다 - 창작과 판매 공간이 하나로
• #2. 상품의 경계를 허물다 - 신상보다 인기있는 재고품
• #3. 창작의 경계를 허물다 - 적극적인 외부 협업 및 확장
• 소확지 - 작지만 확실한 지속가능성
스톡홀름에서 약 100km 떨어진 배스테로스(Västerås) 시에는 화력발전소 단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석유, 석탄, 가스 등의 화석 연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탄소 배출량 제로에 도전하는 스웨덴 정부의 환경 정책에 따라 2020년부터 모든 화석 연료의 사용이 금지되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이들은 시에서 버려지는 의류, 목재 등의 폐기물을 연료로 사용합니다. 특히 이 도시에서 설립된 스웨덴의 대형 패션업체 H&M으로부터 제공받는 의류 폐기물이 이들이 사용하는 주요 연료입니다. 40만톤의 폐기물을 태울 경우, 한해 약 15만 가구에 필요한 전력을 친환경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고 합니다. 더이상 재활용이 불가능한 의류를 연료로 제공함으로써 정부 정책을 지원하고, 동시에 자사에서 배출되는 의류 폐기물의 양도 줄여보려는 노력이 엿보입니다.
그럼에도 패션업계에 대한 시선은 그다지 곱지 않습니다. 제아무리 창의적인 방법을 고안하며 노력한들 패션업계에서 유발하는 환경 파괴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입니다. H&M, 자라, 유니클로 등 최신 유행을 반영한 제품을 대량으로 신속하게 생산-유통하는 ‘패스트 패션(Fast Fashion)’이 지난 십수년간 전세계를 휩쓴 것이 주효합니다. 현재 패션 산업의 탄소배출량은 약 120억톤으로 전세계 모든 항공기와 선박에서 배출되는 양보다 많습니다. 이러한 추세가 유지되면 2050년에는 전세계 탄소 소비의 1/4이 패션 산업에서 유발될 것이라 합니다. 수질과 토양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심각합니다. 의류 염료 사용의 증가로 전세계 모든 수질 오염의 20%가 패션 산업에서 유발되며, 필요를 넘어서는 과도한 생산에서 발생하는 엄청난 양의 의류 폐기물은 단 1% 만이 재활용되고 버려진다고 합니다. 패션 산업 자체가 지구에 석유 다음으로 치명적인 환경 오염원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이에 따라 패션 업계 내외부에서는 ‘지속가능한 패션'이 최대의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현재의 의류 생산-유통-소비 방식은 더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공감대가 의류 회사는 물론 소비자들에게도 알려지고 있습니다. 특히 환경 문제에 대한 인식 수준이 높은 스웨덴에서는 보다 친환경적이고 윤리적인 대안을 찾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증가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객의 니즈를 반영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보다 지속가능한 방식을 찾아가는 패션 스타트업 업체들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중고 빈티지 의류를 서로 교환하는 플랫폼을 제공하거나, 의류를 대여 또는 구독하는 등의 ‘공유’ 방식을 적용하며 의류 폐기물을 줄이려는 업체들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아워 레거시 창업자인 조쿰(Jockum Hallin), 크리스토퍼(Cristopher Nying), 리카르도스(Richardos Klarén)입니다. ⓒScandinavian MAN, Mikael Olsson
이러한 업체들 중 유독 독특한 사업 모델과 실험적 매장을 도입하며 적극적으로 사업을 키워 나가는 스웨덴의 한 패션 업체가 업계의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바로 스톡홀름의 독립 패션 브랜드 아워 레거시(Our Legacy)입니다. 아워 레거시는 2005년 심플한 남성용 셔츠를 파는 작은 의류점에서 시작해 이제 여러 유럽 국가, 미국, 일본에도 매장이 있는 글로벌 종합 패션 브랜드로 자리 잡았습니다. 아워 레거시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스웨덴 의류 브랜드 특유의 미니멀하고 매력적인 디자인 덕분이기도 하지만, 지속가능한 패션을 향한 남다른 신념이 이들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2016년 스톡홀름에 새로 오픈한 아워 레거시의 ‘워크샵(WORK SHOP)’ 매장은 이들의 신념과 실험 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속가능한 패션을 만들어가는 신개념 패션 실험실, 아워 레거시 워크샵입니다.
ⓒOur legacy workshop
#1. 매장의 경계를 허물다 - 창작과 판매 공간이 하나로
통로에 가방을 두고, 매장 곳곳에 제각각인 패턴의 패브릭을 깔며, 입구에 박스를 쌓아두는 등 정리되지 않은 듯한 분위기 속에 자연스러움이 묻어납니다.
아워 레거시 워크샵에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약간 당황할 수도 있습니다. 판매하는 매장인지 디자이너의 작업실인지 도통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협소한 공간에 잘 정리되지 않은 박스와 의류 바구니가 자유롭게 놓여 있고, 매장 중앙 테이블에는 염색용 물감이 담겨있는 바구니와 각종 수선 장비가 어지럽게 흩어져있습니다. 천으로 아무렇게나 가려진 구획에는 옷가지들이나 천조각이 담긴 이케아 플라스틱 통들이 가득합니다. 매장 안의 사람들도 자유롭습니다. 작업복을 입고 매장 한복판에 주저앉아 패션 소품을 제작한다든지, 그래피티하듯 다양한 염료로 옷에 그림을 그리는 디자이너를 쉽게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스웨덴 패션 매장에서 느껴지는 깔끔한 느낌과는 확실히 거리가 멉니다.
오래된 건물의 주차 공간을 최소한으로 개조해 공간 자체에 거친 느낌이 남아 있습니다. ⓒOur legacy workshop
워크샵이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곳은 작업(WORK)과 매장(SHOP)이 하나로 합쳐진 공간입니다. 즉, 디자이너의 작업실이자 방문객에게 의류를 판매하는 하이브리드 매장입니다. 사실 보기보다 쉽게 따라하기 어려운 공간 구성과 운영 방식입니다. 깨끗한 새 제품에 염료가 묻어 하자가 생긴다든지, 옷 재단을 위해 부피가 큰 기계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과감히 워크와 샵을 결합할 수 있었던 건 아워 레거시 워크샵이 시즌이 지난 아워 레거시의 제품들과 남은 재료, 소품 등으로 새롭게 만들어낸 제품을 판매하기 때문입니다. 아워 레거시 워크샵에서 판매하는 대부분의 제품은 매장 현장에서 수작업으로 만듭니다. 제품을 제로부터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기에 공정이 비교적 간단하고, 제품이 꼭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여서 제품 관리에 대한 부담이 덜합니다.
아뜰리에를 방불케할만큼 다양한 염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Our legacy workshop
테이블 위 플라스틱 통에는 염색용 물감이 담겨있고, 각종 스프레이와 남은 천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가능하다고 해서 꼭 채택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별도의 공간에서 의류 재생 작업을 마친 후 판매 공간으로만 활용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편리합니다. 그럼에도 아워 레거시가 판매와 제작의 경계를 허무는 공간 운영 방식을 가져가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방식이 기존 의류를 재활용하는 아워 레거시 워크샵의 정체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 주기 때문입니다. 재활용 작업의 과정을 투명하게 보여줌으로써 시즌이 지난 제품들과 재료들이 활용되고 있다는 것을 고객이 더욱 명확히 인지하게 됩니다. 재활용 의류에 대한 심리적 장벽이나 편견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창작자와 소비자의 거리가 가까워집니다. 고객들은 기존 제품의 재해석 방식에 대해 디자이너와 보다 편하게 소통할 수 있으며, 의류 디자이너들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창작에 대한 영감을 얻습니다. 패션 감각에 자신있는 고객이라면 보다 자기 취향에 맞는 의류 제작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해볼만 하며, 즉석에서 자신의 니즈에 맞춤화된 제품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2. 상품의 경계를 허물다 - 신상보다 인기있는 재고품
재활용 의류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재활용 의류가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워 레거시 워크샵에는 신규 제작, 리사이클, 업사이클, 아동, 빈티지, 소품, 레퍼런스, 샘플, 재고품 등 무려 9가지 카테고리의 상품이 있습니다.
• 신규 제작(Craft) - 기존의 아워 레거시 제품을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만들어집니다.
• 리사이클(Recycle) - 기존 재고품에 새로운 워싱을 입히거나 장식을 추가하는 등의 변형을 준 제품입니다.
• 업사이클(Upcycle) - 기존 제품을 만들고 남은 재료와 천을 활용해 새롭게 디자인한 제품입니다.
• 아동, 소품(Kids, Objects) - 기존 아워 레거시의 제품을 재활용해 제작된 아동용 의류와 소품입니다.
• 레거시(Legacy) - 직원이나 고객이 사용한 빈티지 중고품입니다.
• 레퍼런스(Reference) - 외부 작가가 작품의 재해석에 참여한 제품을 의미합니다.
• 샘플(Sample) - 샘플용으로 제작되거나 진열로 인해 하자가 발생한 제품입니다.
• 재고품(Deadstock) - 팔리고 남은 상품을 할인해 판매합니다.
매장 내 진열된 의류와 패션 소품입니다.
모든 카테고리는 공통적으로 버려진 재료들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여 다시 사용할 수 있는 제품으로 시장에 환원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리고 제품마다 카테고리 태그를 달아두어 의류가 다양한 방식으로 재생된다는 것을 고객도 쉽게 인지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일반 고객들도 재활용 의류에 대한 인식의 폭을 확장합니다.
카테고리 분류 기준만큼이나 상품도 고유합니다. 대부분의 제품을 매장에서 수작업으로 만들기에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제품입니다. 아워 레거시 워크샵의 디자이너들은 자신만의 개성을 담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기존에는 시도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작업 방식을 적용해보거나, 고객의 의견을 반영해 새로운 재료를 접목시키기도 합니다. 아워 레거시의 창업자 조쿰이 워크샵 매장을 아워 레거시의 테스팅 키친 (Testing kitchen)으로 부르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들 덕분에 재고품으로 만들어낸 옷이 신상품보다 더 큰 인기를 끄는 경우도 흔하게 나타나며, 이곳에서 새롭게 발견한 영감들이 아워 레거시의 다음 시즌 콜렉션에 반영되기도 합니다. '청출어람'이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이러한 워크샵 제품군에 특히 관심을 보이는 고객들은 소위 밀레니얼 세대로 분류되는 젊은 고객층입니다. 신념에 따른 소비를 중시하는 밀레니얼 세대 고객들은 지속가능한 패션을 지향하는 이들의 노력에 공감하며 아워 레거시의 메인 제품 이상으로 워크샵 브랜드의 제품을 찾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패션은 자신의 신념과 정체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수단인만큼, 친환경적으로 생산 방식은 그 자체로 중요한 구매 동인이 됩니다.
#3. 창작의 경계를 허물다 - 적극적인 외부 협업 및 확장
아워 레거시는 새로운 제품 디자인에 있어서 회사 내부 디자이너팀 외에도 외부 아티스트들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킵니다. 이러한 철학은 아워 레거시 워크샵의 작업 방식에도 반영됩니다. '워크샵'이라는 브랜드는 해외 유명 업체 및 디자이너들과의 콜라보레이션 활동을 위한 플랫폼으로도 활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아워 레거시의 메인 브랜드로는 다소 부담되는 흥미로운 실험들을 워크샵 매장에서 독립적으로 진행하기도 합니다. 특히 이러한 이벤트에는 스톡홀름 매장 외에도 도쿄, 런던 등 세계 각국의 워크샵 매장들을 적극적으로 참여시켜 더욱 개성있고 매력적인 제품들이 만들어집니다.
최근 핀란드의 대표적인 가구업체 아르텍(Artek)과 함께 진행한 콜라보레이션 행사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핀란드의 유명한 건축가이자 가구 디자이너인 알바 알토(Alvar Aalto)의 시그너처 디자인으로 유명한 의자 스툴 60 우스타바(Stool 60 Ystävä)에 아워 레거시 워크샵만의 고유한 개성을 담아 새로운 제품군을 선보였습니다. 이 역시 기존에 남겨진 자재들을 재활용하는 업사이클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특히 도쿄 긴자에 위치한 워크샵 매장에서는 아워 레거시 창업자들과 함께 진행된 프레젠테이션 행사를 열어 고객이 실시간으로 자신에게 맞춤화된 의자를 주문하고 제작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창작의 대상과 주체는 물론 지역적 범위도 크게 확장되면서, 워크샵의 제품들은 더욱 독특한 개성을 지니게 되는 셈입니다.
아워 레거시 워크샵이 아르텍과 콜라보레이션한 스툴입니다. ⓒOur legacy workshop
아워 레거시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19년 11월부터 온라인에서도 워크샵의 제품을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아워 레거시 워크샵은 지속가능한 패션이라는 컨셉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알음알음 찾아오던 소규모 공방 형태로 유지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온라인에서도 워크샵 제품을 찾아볼 수 있는 만큼, 이들이 가진 패션에 대한 철학과 개성적인 디자인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워크샵 매장의 슬로건입니다. 새생명을 얻은 제품(One thing)이 기존 제품(Another)보다 좋냐고 묻습니다. 아워 레거시 워크샵은 매장 앞의 문구로 그들의 생각을 드러냅니다.
소확지 - 작지만 확실한 지속가능성
보그 이탈리아 2020년 1월호 표지입니다. @Vogue
패션잡지 보그 이탈리아는 최근 이러한 기후변화의 시급성을 알리기 위해 2020년 1월 호에서 발간 이래 처음으로 화보 사진 대신 일러스트를 사용하여 주목을 받았습니다. 잡지에 들어가는 패션 화보 촬영에도 평균 20번의 비행과 12회의 기차여행, 60여개의 국제 배송 등으로 막대한 탄소배출이 발생한다는 것을 지적하며, 패션 업계에 자성의 목소리를 던진 것입니다. 편집장 엠마누엘 파네티(Emanuele Farneti)는 “우리가 지속할 수 없는 산업에 속해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과정”이라는 소신을 밝히며, 패션 업체들이 현재 당면한 문제를 직시하고 시급히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대형 글로벌 패션업체와 비교할 때 아워 레거시는 여전히 작은 독립 브랜드입니다. 아워 레거시 워크샵에서 재활용되는 의류 자재의 규모는 전체 패션 업계에서 버려지는 폐기물의 양과 비교할 때 매우 미미할 것입니다. 하지만 위 보그 사례처럼 아워 레거시 워크샵의 시도가 뻔하지 않고 참신하며 무려 힙하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작지만 반응이 확실한 노력들이 쌓여야 합니다.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사는 것을 그만둬야 하는 이유다."라고 말한 스웨덴의 16세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의 말처럼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내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Refer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