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 H&M 등 옷의 기획, 생산, 유통 단계를 모두 전담하는 SPA 패션 브랜드가 스스로 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옷의 원재료를 만드는 일입니다. SPA 브랜드가 A to Z를 하는 것 같지만, SPA의 일은 보통 원단을 떼어오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B to Z를 하는 셈입니다. 그런데 홍콩의 셔츠 전문점 파이(PYE)는 목화씨부터 심습니다. 10여 년에 걸친 씨앗 R&D로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최고급 품종을 생산하고, 구현하고자 하는 디자인에 최적인 원단을 기획해 자체 제작합니다. 옷을 만드는 데까지 필요한 A to Z를 다 하는, 진정한 SPA 브랜드인 것입니다. 이쯤되면 범접할 수 없는 가격대일 것 같은데 가격은 합리적인 편입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세상에 없는 완벽한 셔츠를 만들기 위해 세상에 없던 방식으로 접근하는 파이의 A to Z를 살펴보겠습니다.
H&M이 에르메스를 앞섰습니다. 브랜드 가치 평가 기관인 브랜드 파이낸스에서 2018년 패션 브랜드 가치 순위를 발표했는데, H&M이 2위 , 자라가 3위로 SPA 브랜드의 존재감이 상당합니다. 에르메스(5위), 루이비통(6위), 까르띠에(7위), 구찌(8위) 등 유서 깊은 명품 브랜드들보다 순위가 앞설 정도입니다. SPA 브랜드는 브랜드 가치 뿐 아니라 정량적으로도 영향력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SPA 브랜드는 2015~2017년 동안 21% 성장한 반면, 같은 기간 동안 전체 패션 시장의 성장률은 5% 미만에 그쳤습니다. 기획부터 생산, 유통까지 한 회사가 도맡는 SPA 비즈니스 모델이 패션업계에 공고히 자리잡았음을 보여줍니다.
패션의 도시 홍콩 역시 SPA 브랜드들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H&M, 자라, 유니클로는 물론이고, 지오다노, 에스프리트 등 20년 이상 된 홍콩의 SPA 브랜드도 건재하고, 초콜릿, I.T 등 개성있는 디자인을 선보이는 홍콩의 신흥 SPA 브랜드 부상하는 등 그야말로 SPA 춘추전국시대입니다.
SPA 브랜드가 기획부터 생산, 유통까지 A to Z를 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원단을 만드는 일, 더 나아가 원료를 재배하는 일은 그들의 업무 밖의 영역입니다. SPA의 일은 기획한 디자인에 적합한 원단을 떼어오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사실상 B to Z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여기 진짜 A to Z를 하고 있는 브랜드가 있습니다. 홍콩의 셔츠 전문점 파이(PYE)는 목화씨부터 키웁니다. 카카오 원두 선별부터 초콜릿 바 생산까지 모든 공정에 직접 관여하는 '빈 투 바(Bean to Bar)'처럼, 파이는 목화씨 재배부터 셔츠 제작에 이르는 '씨드 투 셔츠(Seed to Shirts)'를 직접 구현합니다. 하지만 여느 SPA 브랜드처럼 중간 유통 과정을 없애 비용을 절감하기 위한 것도, 상품 출시를 빨리 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 없는 완벽한 셔츠를 만들기 위함입니다. SPA지만 SPA 같지 않은 파이의 행보를 목화씨 농장부터 동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재료가 반이다
중국 북서부 신장(Xinjiang)에 위치한 파이의 목화 농장. 이 곳에서 파이는 15년간의 씨앗 연구와 실험을 거쳐 개발한 목화를 재배하고 있습니다. 일반 목화솜에 비해 섬유 길이가 최소 8mm 더 긴 ELS(Extra Long Staple)라는 품종으로, 전 세계 목화 생산량의 3%에 불과할 정도로 귀합니다. 어딜 가나 최고급으로 대우받는 이집트산 코튼도 ELS 품종 중 하나입니다. 섬유 길이가 길면 더 가는 실을 만들 수 있고, 실이 가늘면 씨실과 날실을 더 촘촘하게 엮을 수 있어 원단의 내구성이 높아지고 촉감이 부드러워지며 색을 보다 선명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스레드 카운트(thread count: 1 제곱 인치 안에 씨실과 날실의 교차 수)가 보통 200~300 정도인데 파이의 목화씨로는 스레드 카운트가 700까지 가능합니다.
파이는 자체 개발한 목화 품종을 자체 농장에서 재배하고 있습니다. ⓒ파이
파이는 자체 농장에서 수확한 최고급 목화로 실, 원단, 옷도 직접 만듭니다. 실을 뽑는 방적 공장, 원단을 짜는 직조 공장, 옷을 제작하는 봉제 공장을 자체 보유하고 있습니다. 자체 공장의 최대 이점은 '고유함'을 만들어내는 데 있습니다. 만들고자 하는 셔츠에 따라 실의 굵기, 직조 방식, 원단 밀도 등 디테일을 하나하나 결정하며 최적의 실과 원단으로 제작합니다. 이를테면 보통의 경우 원단 공급업자로부터 생지 원단을 받아 후가공을 하는 것과 달리, 파이는 원단으로 직조하기 전에 미리 실을 염색해 색이 보다 선명하고 오래 가도록 만드는 등 새로운 시도를 합니다. 또한 공정을 직접 살펴보기에 혁신할 기회를 틈틈이 만들 수 있습니다. 재료와 프로세스를 혁신하면 따라올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가 생깁니다.
셔츠 안쪽 라벨에 201-301-531등으로 표시된 코드는 각각 방적 공장, 직조 공장, 봉제 공장을 뜻합니다. ⓒ파이
이처럼 재료와 공정의 오리지널을 중시하는 태도는 라벨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셔츠의 안쪽 라벨에는 3세트의 숫자로 이루어진 프로덕션 코드가 적혀 있습니다. 이 코드는 각각 방적 공장, 직조 공장, 봉제 공장을 뜻합니다. 익명의 공장에서 무작위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파이에서 직접 관리하는 공장이라는 것을 표시해 신뢰를 줍니다.
#2. 과정이 나머지 반이다
SPA 브랜드라고 해서 전략이 다 같지 않습니다. 자라처럼 고객 트렌드를 그때 그때 파악해 80%의 라인업을 시즌 중간에 출시하며 기획력에 집중하기도, 유니클로처럼 기능성 있는 기본 아이템을 상시 제공하며 생산력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파이는 SPA 방식을 통해 소재를 차별화하는 것 외에 또 하나의 방향성을 더했습니다. 만드는 사람과 환경에 미치는 영향까지 고려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러한 방향은 공정 상의 모든 디테일에 대한 가시성을 확보하고 결정할 수 있기에 가능한 선택입니다. 모르면 모를까, 어떻게 만드는지 훤히 알고 있고 직접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파이는 눈 가리고 아웅하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씨앗에서 셔츠에 이르기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만들겠다는 의지입니다. 이를 통해 파이를 입는 사람도, 만드는 사람도 셔츠에 대한 기준을 높일 수 있길 바라는 것입니다.
파이는 모든 프로세스를 자체적으로 진행하기에 책임 소재가 분명하고 변수 통제가 쉽습니다. 그래서 과정에서 환경에 미치는 영향력도 최대한 줄이려 합니다. ⓒ파이
먼저 환경에 미치는 영향력을 최소화합니다. 의류 산업은 석유 산업에 이어 환경을 가장 많이 파괴하는 산업입니다. 빠른 신제품 출시로 의류 과소비를 유발하고 플라스틱으로 만든 값싼 폴리에스터 섬유를 주로 사용하는 패스트 패션만 환경 파괴의 주범이 아닙니다. 의류 생산 자체가 물과 화학 약품을 많이 사용하기로 악명이 높습니다. 그래서 파이는 제작 공정 전반에 있어 물과 에너지의 사용량을 적정하게 규제하고 관리합니다. 씨앗 재배 과정에서도 개선점을 찾습니다. 물을 나무 뿌리 부분에 가깝게 한 방울씩 천천히 떨어뜨려 최대한 효율적으로 스며들 수 있도록 돕는 드립식 관개 시스템을 설치하는 등의 노력 덕분에 지난 10년간 물 사용량을 무려 64%나 줄였습니다. 또, 화학 고엽제를 쓰지 않기 위해 농작물을 손으로 따거나 해충 방지를 위해 벌을 키우는 등 자연적인 방법을 활용함으로써 화학 물질 사용량을 줄입니다. 자체 공장이라 책임 소재가 분명하고 변수 통제가 쉽기에 책임지고 이끌어낸 변화입니다.
다음으로 생산자들의 근무 환경을 개선합니다. 의류 생산 공장 주변의 토지와 수원이 오염되고 주민들은 질병에 걸리는 등 커뮤니티가 와해되는 건 의류업계에 만연한 악습입니다. 많은 의류 업체들이 원단을 외부 공급업체로부터 소싱받고 공급업체 역시 하청업체를 통해 납품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공급업체 및 하청업체에서 근로 기준을 위반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의류 업체들이 꼬리 자르기를 하기 쉽습니다. 반면 파이는 그들 소유의 공장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적극적으로 원칙을 세웁니다. 또한, 공장 내 의료 클리닉을 두고, 건강과 교육 관련한 지역 주민 대상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마이크로 파이낸스를 지원하는 등 직원 복지에 신경을 씁니다. 이렇게 티끌 하나 없는 청정한 과정을 통해 파이는 더욱 완벽한 셔츠를 만들고 있습니다.
#3. SPA 반, 비스포크 반이다
고급스러운 외관을 자랑하는 홍콩 센트럴 지점입니다.
씨앗부터 재배하는데다 지속 가능성까지 챙긴다면 범접할 수 없는 가격대가 아닐까 염려됩니다. 고급 백화점과 명품샵이 즐비한 센트럴 지역에 고고하게 자리한 매장을 보면 더욱 망설여집니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파이의 셔츠의 가격은 800HKD(약 11만 원)에서 시작해 합리적인 편입니다. SPA 방식으로 원가를 절감한 것도 한 몫 하지만, 레디 메이드(Ready-made) 셔츠이기에 가능한 가격대입니다. 물론 요청에 따라 커스텀 제작도 가능하지만 대부분은 이미 만들어진 제품 중 골라가는 방식입니다.
사실 이 정도 정상급 원단과 재단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 비스포크를 전면에 내세우며 초고급화 전략을 펼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파이는 당장 셔츠를 입고 나가 일을 해도 무리가 없을 실용적인 워크웨어를 지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래 걸리고 가격대가 높은 비스포크 대신 레디 메이드 제품으로 제안하는 것입니다.
파이에서는 깃, 원단, 소매 등 옵션을 다양하게 제공해 기성복임에도 마치 비스포크 서비스를 받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대신 기성복임에도 마치 맞춤 셔츠인 것처럼 다양한 옵션을 구비해 선택의 폭을 넓혔습니다. 원단의 종류 및 스타일에 따라 인피니티, 클래식, 데퍼니티브, 유니버셜 4단계의 컬렉션으로 나누고 트래디셔널, 레귤러, 테일러드, 슬림 등 4단계의 핏으로 제공합니다. 컬렉션과 핏의 조합에 따른 제품들은 매장에 모두 비치되어 있습니다. 이외 팔 길이와 넥 카라 길이, 10가지 넥 카라, 4가지 커프스, 단추 종류, 주머니 추가 여부, 이니셜 등으로 변주를 줄 수 있습니다. 매장에 없는 경우 몸에 맞춰 재단을 한 후, 주문을 넣어놓고 며칠 뒤에 찾아가거나 배송을 받습니다.
홍콩을 거점으로 하는 영국계 항공사 캐세이 퍼시픽의 1등석 잠옷으로 납품한 PYE IN THE SKY 에디션입니다. ⓒ파이
매 시즌 트렌디하고 고급스러운 룩북을 촬영해 프리미엄 이미지를 유지합니다. ⓒ파이
파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어지간한 맞춤셔츠보다 다양하지만 기성품이라는 이유로 자칫 평가 절하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파이는 프리미엄 이미지를 지키기 위한 마케팅 활동을 꾸준히 전개합니다. 항공사 캐세이 퍼시픽의 1등석 잠옷을 제작하고, 스레드 카운트 300에 달하는 초고급 원단으로 셔츠를 한정 제작해 5,380HKD(약 78만 원)에 판매하며, 현대 예술작품 같은 룩북을 촬영하고, ELS 소재를 활용한 전시회를 열기도 합니다. 여기에 매장 경험에 고유함과 고급스러움을 더하는 것도 놓치지 않습니다. 아이리스와 파피루스 향을 혼합해 만든 맞춤 향이라든지, 전체적으로 원목을 활용하면서도 철과 스톤을 섞어 모던함을 강조한 인테리어라든지, 중국식 종이접기를 연상케하는 패키지 디자인 등 명품샵이 즐비한 센트럴 한복판에 있어도 손색이 없습니다.
가능성을 품은 씨앗
랄프 로렌, 휴고 보스, 바나나 리퍼블릭 등 글로벌 리테일 브랜드에 프리미엄 면 원단을 공급하는 에스퀄(Esquel)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공급 업체였던 에스퀄이 1984년 자체 의류 브랜드를 낸 것이 파이의 시작이었습니다. 원단의 퀄리티는 이미 증명됐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이 좋은 원단을 가지고 어떤 고객을 타깃하고 어떤 가치를 제안할지 등 브랜드를 쌓아가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글로벌 리테일 브랜드들의 파트너로서 어깨 너머로 배운 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이렇게 거의 흔적만 남아있던 파이를 창업주의 2세인 디 푼(Dee Poon)이 맡아 기사회생시킵니다. 디 푼은 모회사가 공급업체인만큼 가치 사슬의 상단부터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씨드 투 셔츠'라는 컨셉을 이끌어낼 수 있었고, 이를 중심으로 브랜드를 다시 갖춰 나갑니다. 씨앗부터 키운다는 관점이 과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가치사슬의 상단이 더 익숙한 디 푼에게는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관점이 다르면 완전히 다른 브랜드가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디 푼이 파이를 맡으며 브랜드의 방향성은 달라졌지만, 브랜드에 담긴 의미는 1984년 처음 시작할 때 그대로입니다. 파이는 무한히 이어지는 수학 기호 파이(π)를 뜻함과 동시에, 중국어로 스타일 혹은 철학과 발음이 비슷한 단어입니다. 고유한 스타일과 철학을 바탕으로 그 가능성을 무한대로 펼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의미입니다. 씨앗에는 가능성이 담겨 있습니다. 꽃이 될 수도 있고, 열매가 될 수도, 더 나아가 숲이 될 수도 있습니다. 씨앗부터 시작하는 이들이기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가능성을 만들어낼 확률이 높은 것입니다. 이제 빛을 보기 시작했지만, 파이는 이미 만들 때부터 이러한 가능성을 품고 있지 않았을까요.
Refer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