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 있는 트리(Tree)의 가구들은 사연 있는 나무들로 만들어집니다. 선박, 집, 기차 침대칸 등에 쓰던 나무를 재활용해 상처 나고 휘고 갈라졌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흠이 세상에 하나뿐인 가구를 만듭니다. 트리의 고객들은 불완전함이 주는 아름다움에 지갑을 엽니다. 친환경을 설득하는 세련된 방법입니다.
친환경 가구의 개념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던 2005년에 시작해 연간 130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상장사로 거듭난 트리의 사연을 공유합니다.
가구를 중심으로 하여 원룸 공간을 거실, 침실, 서재 등으로 나눌 수도 있습니다. @Ori Living
2020년 이케아에서 트랜스포머 가구를 출시합니다. 침대, 옷장, 책상, 소파 등을 합친 가구 로그논(Rognon)은 밀어서 간단히 위치를 옮길 수도 있고, 필요 없으면 접어둘 수 있습니다. 터치 패드로 조작할 수 있어서 미래적이지만 사실 현실을 철저하게 반영한 가구입니다. 비좁은 도심 주거 환경에 맞춰 가구를 작게 만드는 대신 한 가구가 필요에 따라 여러 기능을 할 수 있도록 발상을 전환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로봇 가구를 이케아 본사가 있는 스웨덴도 아니고, 협업한 스타트업이 있는 미국도 아닌 홍콩에서 가장 먼저 런칭합니다. 이 가구를 가장 필요로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1~2인 가구까지 갈 것도 없이 홍콩은 대부분의 집이 절대적으로 좁습니다. 그래서 공간 효율적인 가구가 대세입니다. 심지어 홍콩 이케아는 매장마저 공간 효율적으로 운영됩니다. 홍콩의 4개 매장 중 2,500평이 가장 큰 규모로, 평균 10,000평인 다른 도시에 비해 4분의 1 수준입니다. 이케아는 보통 창고형으로 도심 외곽에 있는데 홍콩에서는 작은 규모 덕에 번화가인 코즈웨이 베이에 자리합니다.
이렇듯 홍콩 가구 시장이 효율 위주로만 돌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 반대편에 또 하나의 축이 우직하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바로 친환경 가구입니다. 공간 효율과는 거리가 멀지만 친환경 가구는 전 세계적인 트렌드로 홍콩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어느덧 홍콩 리테일 가구 시장에서 친환경 가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11%에 다다랐습니다. 그런데 에코 가구에 대한 개념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던 2005년부터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꾸준히 에코 원목 가구를 팔던 곳이 있습니다. 홍콩의 트리(Tree)입니다. 다른 가구 브랜드가 기존 가구에 친환경 도장재, 접착제를 쓰는 등 친환경적인 특성을 보강하는 정도인 반면 트리는 아예 브랜드 비전부터 환경 친화적입니다. 그렇다고 니치한 부띠끄에 그친 것도 아닙니다. 트리는 연간 130억 원의 매출을 내는 상장사입니다. 효율이 절대 강세인 홍콩 시장에서 친환경 가구 시장을 어떻게 개척했을까요?
중고가 아니어도 지나온 세월을 팔 수 있다
홍콩섬 남부의 호라이즌 플라자 아울렛(Horizon Plaza Outlet). 꼭대기층인 28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별안간 나무숲이 펼쳐집니다. 700평을 가득 메운 원목 가구들 사이사이를 걷자면 나뭇잎이 없다 뿐이지 숲을 산책하는 듯 합니다. 시원한 나무향과 함께 적절한 습도와 온도를 유지해주는 나무의 정화 작용 덕분인지 산뜻한 공기마저 느껴집니다. 트리에서 새가구 증후군은 먼 나라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상처가 나고 갈라지거나 휘고 패여있는 등 하자 있는 가구들이 많습니다. 난파된 선박, 버려진 집, 부서진 뗏목, 기차 침대칸 등에서 쓰던 나무를 업사이클링해 만든 가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싼 맛에 사는 가구는 아닙니다. 어지간한 원목 가구 브랜드에 버금가는 가격입니다. 물론 친환경적인 이유도 있지만, 사람들이 트리를 찾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원래 원목은 나무마다 톤, 결, 옹이의 위치가 모두 달라서 고유합니다. 게다가 수십년 전 나무는 인위적으로 성장을 촉진해 서둘러 수확하는 지금과 나무 자체가 다릅니다. 더 밀도가 높고 단단하며 결이 자연스럽습니다. 품질 좋은 수종에 흠은 있을지언정 수십년간 썪지 않고 상태가 잘 보존되어 있는 재생목은 귀합니다. 여기에 히스토리까지 얹어지면 아주 특별해집니다. 태평양을 항해하던 어선의 갑판, 수대에 걸친 가족이 나고 자랐던 인도네시아의 통나무집 등 아직 팔리지 않은 가구도 이미 그들만의 세월을 지났습니다. 지나온 세월만큼 앞으로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을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나무가 지나온 시간과 주변 환경이 고스란히 흔적으로 남아 있는데, 그저 빈티지스럽게 후처리해서는 흉내낼 수 없는 리얼리티입니다. 그래서 트리는 가공을 최소화하며 흠도 그대로 남겨둡니다. 고객들은 가구에 담겨진 이야기까지 사는 것입니다. 접착제, 마감재 등 사용을 최소화하기에 친환경적인 것은 덤입니다.
더 나아가 '불완전함의 미학'으로도 트리의 매력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와비사비'라는 일본 특유의 미의식이 있습니다. 미완성, 단순함을 가리키는 일본어 와비(わび)와 오래됨, 낡은 것이란 의미의 사비(さび)를 합쳐 ‘미완성의 아름다움’을 뜻합니다. 오래되고, 낡고, 투박하며,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를 존중하고 아름답게 느낄 수 있는 마음가짐을 지향합니다. 트리는 와비사비를 그들의 방향성으로 삼습니다. 홍콩이 앤티크와 빈티지의 도시인 만큼 옛것에 대한 선호가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와비사비는 라이프 스타일에 가깝습니다. 홍콩인들에게 이해가 더 쉬울 앤티크나 빈티지가 아닌 '와비사비'라는 표현을 트리가 굳이 가져다 쓰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바꿀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친환경이 발목을 잡지 않기 위한 조건
'에코'라는 필터를 걸면 선택지가 확 좁아지게 마련입니다. 가격대는 차치하더라도 선택할 수 있는 브랜드나 제품의 가짓수가 얼마 없는 것입니다. 특정한 디자인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그에 맞는 에코 가구를 찾기 요원할 수 있습니다. 제아무리 지속가능한 라이프 스타일을 실천하겠다고 결심한들, 발품 팔다보면 의지가 사라질 것만 같습니다. 사연 있는 나무를 업사이클링한 트리도 분명 이런 에로 사항이 있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트리에서는 600여 가지의 가구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목재와 사이즈 옵션까지 고려하면 그 숫자는 몇 배로 올라갑니다. 700평의 매장을 다 메우는 것은 물론 온라인 웹사이트에서 더 많은 옵션을 제공합니다. 나무 종류, 나무 산지, 제품군 등을 입맛에 맞게 고를 수 있고, 마감이나 사이즈를 커스터마이즈할 수 있습니다. 에코 가구를 원스탑으로 쇼핑할 수 있습니다. 트리가 이렇게 방대한 에코 가구 셀렉션을 가질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사업 초창기부터 동남아의 소규모 공방들을 발굴해 공고한 파트너십을 구축한 덕입니다. 단순히 바이어로서 제품만 사오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생산과 브랜딩에도 관여하며 부가가치를 함께 높여 갑니다. 동남아의 영세한 공방들은 나무를 다루는 기술과 장인 정신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현대 도시 생활자들의 입맛에 맞는 디자인이나 마감 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시장성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트리는 홍콩 시장에 적합한 디자인을 조언해주거나 마감만 홍콩에서 하는 식으로 생산 과정에 일부 참여합니다. 기획과 디자인을 도맡는 것은 아니면서 선택적으로 보완하며 함께 성장하는 것입니다. 상호 간의 신뢰가 바탕이 되기에 가능한 방식입니다. 지금은 어엿한 글로벌 에코 가구 브랜드로 성장한 디보디(dBodhi)도 2007년 설립 초기부터 트리와 함께 커 왔습니다. 트리는 사업 규모가 커지고 브랜드가 안정화된 후에도 대량 생산 체계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소규모 공방들을 발굴하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사회에 환원하는 방법이자, 고유함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트리가 FSC 인증 마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소규모 공방의 브랜딩을 돕습니다. FSC(Forest Stewardship Council)는 환경 친화적으로 키운 나무를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유통했음을 인증하는 비영리 단체입니다. 이 마크는 나무를 불법으로 벌목하지 않고, 생산 과정에서 인권의 침해나 안전에 문제가 없었으며, 숲의 동식물 서식처를 보존했다는 것 등을 의미합니다. FSC의 회원사인 트리는 이 마크를 가지고 브랜드가 없거나 약한 공방의 제품에 공신력을 부여합니다. 또한 FSC 인증 마크는 트리의 제품 범위를 넓히는 데도 좋습니다. 재생목으로 만든 가구만 고집한다면 확장에 제한이 있습니다. 제품 확보도 어려울 뿐더러 다양한 니즈를 가진 고객층을 포용하기에도 어렵습니다. 트리의 방점은 친환경이지 무조건적인 고유함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연은 없어도 근본 있는 나무로 일관성을 가져갑니다. FSC 인증을 받은 나무로 만드는 공방을 발굴하거나 기존에 거래하던 공방에 FSC 인증 나무를 사용할 것을 권장하기도 합니다.
각 브랜드를 드러내 구분하지 않고 스타일에 따른 컬렉션으로 분류합니다. ⓒ트리
이렇게 공방과 함께 풀뿌리부터 쌓아올린 네트워크는 보다 규모 있는 에코 가구 브랜드의 독점 판권을 확보하는 선순환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트리는 에쓰니크래프트(Ethnicraft), 카펜터(Karpenter) 등 유럽의 에코 가구 브랜드를 홍콩에서 독점적으로 공급하고 있습니다. 시작이 미약한 덕에 끝이 창대합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널리 퍼진다
트리의 매장 내에는 30여 석 규모의 트리 카페가 있습니다. 트리에서 판매하는 원목 제품으로 인테리어해 매장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트리의 가구도 캐주얼하게 경험해 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유기농 메뉴, 옥수수로 만들어 28일 후 생분해되는 테이크아웃 용기, 라마섬이 내다 보이는 전망까지 모두 자연 친화적입니다. 넓은 매장을 둘러보느라 지친 고객들의 쉼터로 아주 그만입니다. 원래 트리에서 가구를 살 계획이 없던 아울렛 고객들도 트리 카페에 올 겸 매장을 방문합니다. 현재는 매장 내 고객 서비스 차원의 오퍼링이지만 홍콩 시내에 진출하기에도 좋습니다. 땅값 비싼 도심에서는 가구점보다 쇼룸을 겸한 카페가 공간 대비 수요를 창출하기에 더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이엔드 가구점과 달리 좀 더 편안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도 이 카페가 제 역할을 합니다. 이 외에도 트리는 렌탈 비즈니스, 홈 컨설팅 서비스 등을 운영하며 초심자도 가구를 통해 지속가능한 라이프 스타일에 입문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나무 외에 철제, 흙, 패브릭, 돌 등 소재도 확장하고 있습니다. 소파, 화병, 카페트 등 생활을 구성하는 데 꼭 필요함에도 나무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제품군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습니다. 친환경 원목 가구로 포지셔닝을 충분히 다진 다음에야 소재 및 관련 카테고리를 확장했습니다. 사업을 시작하고 무려 10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이거 왠지 트리에서 산 것 같은데?'라는 표현이 홍콩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때 쯤에야 조심스럽게 소재를 넓혀 간 것입니다. 나무 받침대가 있는 조명, 나무 프레임을 덧댄 거울 등 나무가 일부 포함된 제품부터 러그나 화병 등 나무가 아예 없는 제품까지 진정한 원스톱 쇼핑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소재를 확장할 때도 친환경을 내려놓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매트리스와 소파에는 분해가 안 되고 화학물질 알러지를 일으키는 폴리우레탄 폼 대신 천연 라텍스를 쓰고, 철제를 녹여 재활용합니다.
미국 워싱턴 터코마에 있는 트리 매장입니다. ⓒjust at in a bit
트리의 사업 확장은 지역적으로도 나타납니다. 트리는 홍콩의 3개 매장 외에도 중국과 미국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밌게도 3개 나라에서의 판매 방식이 모두 다릅니다. 트리가 직영하는 홍콩과는 달리 중국에서는 트리의 제품을 '납품'합니다. 홍콩의 최대 무역국인 중국은 아직 친환경 제품의 수준이 충분히 올라오지 않아 납품만으로도 경쟁력이 있습니다. 반면, 친환경 트렌드의 본진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는 진출 이유도, 사업 방식도 다릅니다. 미국에는 트리 브랜드의 라이센스를 줬습니다. 이미 에코 가구 문화가 자리 잡았기에 상품 단위가 아니라 유통 브랜드 단위로 소구해야 경쟁력이 있을 듯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개인 고객을 넘어 레스토랑, 호텔 등 기업 고객에게 다가가기 위한 기지로 기능합니다. 친환경 가구를 찾는 기업 고객들은 아무리 홍콩에서 날고 긴다 한들 홍콩에서는 찾기 어려운 고객입니다. 지역을 확장하며 단순히 고객의 국적만이 아니라 고객의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한 것입니다. 현재 홍콩 본사 직원 40명이 10개 국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홍콩이 워낙 다국적 도시이기도 하지만, 지역 확장 방향을 내다본 인력 구성이 아닐까요.
파운더의 이유 있는 귀환
사실 라이센스로 미국 매장을 운영하는 이는 이제 회사를 떠난 트리의 파운더 니콜 웨이클리(Nichole Wackley)입니다. 2011년에 투자 은행에 트리를 매각할 때 미국 시장에서의 운영 라이센스를 요청한 것입니다. 누가 미국 진출을 요구한 것도 아니고 니콜이 자원하고 설득해 낸 것입니다. 니콜은 라이센스 수수료를 트리 홍콩 본사에 지불하고 있으며, 이는 전체 매출의 3~4%를 차지합니다. 사업을 매각한 돈으로 편하게 살 수도, 혹은 다른 사업을 벌일 수도 있을텐데 굳이 트리의 해외 진출을 돕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교과서나 뉴스에 많이 나오니 익숙하겠지만, 해외 진출은 말처럼 쉬운 옵션이 아닙니다. 잘 모르는 시장이며 브랜드나 각종 기반을 원점부터 다시 쌓아야 하는데다 전력이 분산됩니다. 바람직한 방향일지라도 회사에 자칫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정작 현직에 있을 때는 엄두내기 어려웠던 해외 진출을 밖으로 빠져나와서야 비로소 추진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요? 사비를 털어서라도 하고자 하는 데서 진정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간 트리는 가구를 팔 때마다 수익의 일부를 나무 심는 비영리 단체인 트리4트리(Tree4Tree)에 기부해 왔습니다. 그렇게 심은 나무가 약 7만 그루입니다. 트리가 심은 나무로 다시 가구를 만들 수 있을 때쯤 트리가 얼마나 더 깊이 뿌리를 내릴지 기대됩니다.
Refer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