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락해가는 지역을 살리려, 족보를 따지기 시작한 귤 전문점

10 팩토리

2022.09.21

이대로 지켜만 볼 수는 없었어요. 아직까지야 일본에서 귤 수확량 2위의 지역이지만, 에히메현의 앞날에는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었죠. 후계자도 없고, 자본도 부족하며, 수요와의 접점도 충분하지 않았어요. 점점 기운이 빠져가는 지역 경제를 살리겠다고 ‘에이트 원(Eight One)’이라는 기업이 팔 걷고 나섰어요. 지방 전통 산업에 비즈니스 관점을 적용해 독창적인 브랜드를 키우기로 결심한 거예요.


귤과 함께하는 풍요로운 삶’을 추구하는 ‘10(Ten)’은 그렇게 시작한 브랜드예요. 하지만 매장인 ‘10 팩토리’에 가보면 생과일로서의 귤은 볼 수도, 살 수도 없어요. 귤 가공식품만 판매하기 때문이에요. Ten은 귤과 고객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귤 자체가 아니라 귤을 다양한 제품으로 변형시키는 방향을 택했어요. 귤을 과일로 바라보고 ‘생’을 강조하려는 보통의 관점과는 반대의 행보죠.


물론 귤을 가공과일 식품으로 만든다고 수요가 늘어나는 건 아니에요. Ten은 도시의 젊은이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 만큼 감각적인 귤 전문점 10 팩토리를 만들고 도쿄로 진출했죠. 과연 10 팩토리는 도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10 팩토리 미리보기

• 만화책처럼 시작한 기업의 교과서 같은 비전

 ‘지역다움’은 촌스러움과 달라야 한다

 생과일이 ‘가공’과일보다 더 낫다는 고정관념을 깬다

 미래를 목격할 수는 없어도 미래를 ‘목적’할 수는 있다






귤을 팔아 생계를 꾸리던 작은 마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렌지 수입 자유화와 산지 간 경쟁 심화로 마을은 점차 쇠락해갔죠. 게다가 2,000여명이 넘지 않는 인구에, 그 중 절반 이상은 65세 이상의 노인이었기 때문에 마을이 다시 활기를 찾기는 어려워 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겨울, 국지적 이상 한파가 이 마을을 덮쳐 귤 생산량이 뚝 떨어진 것은 물론이고 귤 나무에도 이상이 생겨 귤 농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절망이 불어닥친 마을에 희망을 불어넣은 건 일본 농협 직원이었던 '요코이시 도모지'였습니다. 그는 고급 식당에서 한 손님이 초밥 위에 장식된 단풍잎을 기념으로 가져가는 것을 보고 나뭇잎을 파는 아이디어를 떠올립니다. 요리를 돋보이게 하는 나뭇잎 장식인 '쓰마모노'를 마을의 사업으로 만들자는 거죠. 마을 면적의 85%가 산림이고, 일본 고급 식당에서는 시각적인 조화에도 세심하게 신경쓰기 때문에 틈새시장을 공략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IRODORI



ⓒIRODORI


그는 전국의 고급 식당을 돌며 요리사들이 쓰마모노를 사용할 때 중요시 여기는 요소를 파악합니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건 나뭇잎 자체가 아니라 요리와 어울리는 모양과 계절을 나타내는 색감 등을 가진 나뭇잎이었어요. 가치 있는 나뭇잎을 공급할 수 있다면 시장을 만들 수 있을 거라 확신한 후, 마을 주민들의 참여를 독려하기 시작했죠. 하지만 반응은 냉랭했습니다. 나뭇잎을 주어다 파는 게 쓰레기를 파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반문했을 정도예요.


말로는 설득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는 마을 주민들을 모시고 고급 일식당에 현장탐방을 갑니다. 거기서 마을 주민들은 마을 지천에 널린 나뭇잎이 음식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을 보며 마음을 열었고, 마을은 점차 변해갑니다. 봉이 김선달 같은 사업으로 ‘도쿠시마’현의 ‘가미카쓰’ 마을은 부활에 성공하죠. 이 마을에서 출하하는 나뭇잎은 일본 쓰마모노 시장의 약 70%를 차지할 정도예요. 이 곳의 스토리는 책과 영화로 만들어지며 지역 경제 활성화의 모범적인 사례로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에히메'현도 귤 재배가 주요 산업이고 고령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가미카쓰 마을 사례를 참고하기는 어렵습니다. 가미카쓰 마을은 이상 기후로 귤 나무가 망가진데다, 귤 재배경쟁력이 높았던 것도 아닌데다, 인구수가 적어 틈새시장으로도 생계 유지가 가능했기 때문이죠. 에히메현은 일본내에서 귤 생산량이 2위일만큼 규모가 커서 쉽사리 지역의 먹거리를 바꿀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귤 산업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에히메현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만화책처럼 시작한 기업의 교과서 같은 비전

에히메현의 미래를 위해 팔 걷고 나선 건 정부나 지자체가 아닙니다. '에이트 원(Eight One)'이라는 기업이죠. 이 회사의 시작은 만화책처럼 비현실적이지만, 비전은 교과서처럼 진지합니다. 에이트 원의 대표 '오오야부 타카시'는 대학시절 파칭코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학점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고, 취직하기도 어려웠어요. 그래서 본의 아니게 개인 투자로 경제 활동을 했는데, 이 때 투자로 15억엔(약 150억원)을 벌며 에이트 원을 설립합니다.


투자자답게 처음에는 부동산 임대업으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사업을 하다보니 지역 경제의 문제를 체감할 수 있었어요. 각 지역에는 독자적인 문화에 뿌리를 둔 좋은 제품이 많으나, 시대의 흐름 속에서 그 가치와 장점을 발전시키기 어려울 거란 생각을 하죠. 후계자도 없고, 자본도 부족하며, 수요와의 접점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지방의 전통 산업에 비즈니스 관점을 적용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독자적 브랜드들을 키우기로 결심합니다.



ⓒ시티호퍼스


‘일본의 유전자를 미래에.’


에이트 원이 추구하는 비전입니다. 일본다움을 소중하게 남기고, 그것을 성장시키고 넓혀가는 것을 추구하죠. 그래서 사용하는 것, 먹을 것, 즐길 것 등 3가지로 사업 영역을 구분하고, 그 아래 수건, 도자기, 온천 등 총 12가지의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주목할만한 브랜드가 '10(Ten)' 입니다. Ten은 에히메현의 주요 생계원인 귤 산업의 부흥을 위해 만든 브랜드이기 때문이죠.



지역다움은 촌스러움과 달라야 한다

Ten은 에히메현의 귤 산업을 발전시키고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만든 브랜드입니다. 하지만 선한 의도만으로 고객들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죠. 게다가 지역의 브랜드라고 해서 촌스러우면 도시의 소비자들의 눈높이를 맞추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Ten은 선한 의도와 애향심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도쿄와 같은 대도시에서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명확하게 컨셉을 세워 제품 개발, 패키징, 그리고 판매 방식까지 일관되게 적용합니다.


'귤과 함께하는 풍요로운 삶'을 추구하기 위해 Ten이 선택한 건 '젊은 감각의 가공과일 식품'이라는 컨셉입니다. 보통은 브랜드를 입혀 무형의 가치를 높이거나, 판로를 개척해 판매량을 늘리거나, 품종을 개량해 새로운 수요를 만드는 등의 시도를 하죠. 하지만 Ten은 스스로의 역할을 가공과일 식품을 개발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귤을 소재로한 다양한 제품들을 만듭니다. 귤을 과일로 바라보고 '생'을 강조하려는 보통의 관점과는 반대의 행보입니다.



ⓒ시티호퍼스


물론 가공과일 식품 자체가 특별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미 여러 귤 재배 농가에서 가공과일 식품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매장 구성, 제품 패키징, 그리고 제품 개발 등을 살펴보면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Ten 브랜드의 제품을 판매하는 매장인 '10 팩토리(Ten Factory)' 긴자점에선 생과일로서의 귤은 볼 수도, 살 수도 없습니다. 귤을 대신해 귤 가공품들이 노란색과 주황색 사이를 오가며 그라데이션처럼 진열되어 있어, 귤 관련 제품을 판매하는 매장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리죠. 또한 에히메현의 귤 산업을 알리는 전초기지로 매장을 활용하지만, 그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도시의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세련된 매장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시티호퍼스


매장 안에 진열되어 있는 제품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스, 젤리, 잼, 건과, 꿀, 드레싱, 가향 커피 등 다양한 가공과일 식품이 놓여 있습니다. 카테고리가 많지만 복잡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귤을 상징하는 로고를 중심으로 통일성 있게 제품 패키징을 구성했기 때문이죠.


로고 외의 부분에는 이미지나 텍스트를 최소화했습니다. 원재료 특징 등의 구체적인 정보는 제품이 아니라 매대를 통해 전달하죠. 투명한 패키징에 색감이 직접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눈으로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심플함을 넘어 고급스럽기까지 합니다.



ⓒ시티호퍼스


또한 매대 위에는 '귤 가계도'가 놓여 있습니다. 여기에 매장에서 판매하는 제품 가짓수의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제품 가짓수는 카테고리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카테고리별로 여러 종류의 귤로 가공을 하기 때문에 제품의 수는 카테고리 수에 종류의 수를 곱한만큼 늘어납니다.


주스의 경우도 8종의 귤로 가공할 정도로 선택의 폭이 넓습니다. 귤 가계도는 '귤이 귤이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개량 방식에 따라 귤이 달라진다는 것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바나나와 딸기를 섞은 바나나 딸기 주스가 어떤 맛인지 상상 가능한 것처럼 족보를 통해서 개량 품종의 맛을 유추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도 합니다.


귤 재배를 하는 여러 농가에서 판매하는 가공품의 경우 생과일의 보조제입니다. 반면 Ten에서는 가공과일 식품 자체가 주인공이며 가공품이라는 컨셉을 부각시키기 위해 제품 개발부터 매장 구성까지 세심하게 신경쓴 흔적을 엿볼 수 있죠. 고민한만큼 애향에 호소하는 촌스러움이 사라지고 도시가 공감하는 지역다움이 드러나는 것은 물론입니다.



생과일이 ‘가공’과일보다 더 낫다는 고정관념을 깬다

Ten은 생과일로 승부해서는 다른 산지에서 생산하는 귤들과 차별성을 갖기 어렵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생과일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젊은 감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가공과일 식품을 선택한 거죠. 하지만 가공과일 식품은 생과일과 다르다는 것 외에도 가공품이기 때문에 갖는 장점이 있습니다.


생과일에 브랜드를 입히는 건 쉽지 않습니다. 강풍에도 떨어지지 않은 사과인 아오모리현의 '합격 사과'처럼 공감할만한 스토리가 있거나, '돌(Dole)' 처럼 오래된 역사 또는 대규모의 자본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브랜딩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입니다. 브랜드 로고를 만들어 과일 박스에 표기하거나 과일에 스티커를 붙이는 정도에 그치죠. 그러나 가공과일 식품은 다릅니다. 가공 방식에 따라 다양한 제품 개발을 할 수 있고, 패키지 디자인을 통해 컨셉을 입히고 고유한 브랜드를 만들어 낼 여지가 충분합니다.



ⓒ시티호퍼스


또한 생과일은 싱싱한 대신 유통기한이 짧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귤의 대명사인 감귤류의 경우 1개월이고, 천혜향, 레드향 같은 만감류의 경우는 1주일 내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요와 공급을 맞추기가 어렵고 유통기한에 따른 손실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죠. 하지만 생과일을 가공과일 식품으로 만들면 유통기한이 달라집니다. 주스는 1개월, 젤리는 3개월, 잼 등의 제품은 1년 등 생과일 보다 생명력이 길어집니다. 이에 따라 수급 조절이 용이해지고 폐기율을 줄일 수 있어 수익적인 측면에서 유리합니다.


그 뿐 아니라 가공과일 식품으로 만들면 과일 매장은 물론 다른 유통 매장이나 온라인에서 판매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유통 채널 확대는 Ten 브랜드를 만들 때부터 염두에 두었던 부분이죠. 자체 매장에서만 판매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고, 도매 판매망에 유통할 수 있어야 사업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Ten의 경우도 가공과일 식품이다보니 일본의 대표적인 편집숍인 '빔스(BEAMS)'에서 운영하는 일본 고유 문화 편집 매장 '빔스 재팬(BEAMS JAPAN)'에서도 취급할 정도입니다.


여기에다가 지역 사회의 부가가치를 높일 수도 있습니다. 귤을 따서 출하하는 것보다, 귤을 가공해서 유통한다면 더 비싼값을 받는 것이 가능합니다. 또한 가공하는 과정에서 일손이 필요하니 지역의 고용이 늘어나 경제 활성화에도 도움을 줍니다. 농업의 부흥뿐만 아니라 고령 노동인구를 지원하겠다는 회사의 목표와도 부합하는 거죠.


아무리 회사에 유리한 점이 많아도 고객에게 가치를 줄 수 없다면 사업으로서 의미를 갖기 어렵습니다. 가공과일 식품으로서의 Ten 브랜드는 고객에게도 생과일 대비 차별적인 편익을 제공합니다. 주스, 젤리, 아이스크림 등 다양한 형태로 즐길 수 있기 때문에 기호에 맞게 소비할 수 있으며, 익숙한 제품군을 통해 새로운 귤 종류의 맛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패키지 디자인이 세련되고 고급스럽기 때문에 선물용으로도 안성맞춤입니다.


이처럼 언뜻 보기엔 생과일이 가공과일 식품보다 나은 듯하지만, 알고 보면 가공과일 식품도 생과일만큼의 가공할만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래를 목격할 수는 없어도 미래를 ‘목적’할 수는 있다

Ten 브랜드를 운영하는 에이트 원은 회사 이름도 만화 속의 한 장면처럼 즉흥적으로 지었습니다. 설립자인 오오야부 타카시의 생일이 8월 1일이라 생일에 있는 숫자를 따서 에이트 원으로 지은 거죠. 그렇다면 Ten 브랜드의 숫자 10은 무엇을 뜻할까요? 회사 이름과 달리 브랜드 이름에는 추구하는 철학이 담겨져 있습니다. 숫자 10은 Ten이 지켜나갈 10가지 약속을 의미합니다.


'소재 자체의 맛을 살려 자연 특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제품을 만든다.' 이 약속으로 시작해 '현대의 라이프 스타일에 적합한 가공품을 만들어 귤과 함께 하는 풍요로운 삶을 제안한다.'는 약속까지. 10가지 약속에는 자연에 대한 존중, 품질에 대한 고집, 지역에 대한 비전, 고객에 향한 가치가 포함되어 있죠. 그리고 10가지 약속을 브랜드 이름 전면에 내세워 이름을 걸고 지키겠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Ten의 이러한 노력이 에히메현의 고령화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생계를 꾸려 나가는 고령자들에게 활기를 불어넣고, 지역의 산업이 내일과 이어질 수 있다는 기대를 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시도입니다. 게다가 Ten이 말하는 10가지의 약속을 꾸준히 실천할 수 있다면 그들이 원하는 미래를 만나는 덤을 얻을 수도 있죠.


미래를 목격할 수는 없지만, 미래를 ‘목적’할 수는 있습니다. Ten이 스스로 내건 10가지 약속을 지켜면서 묵직히 나아가다보면, 어느새 목적한 미래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요.






Reference

시장을 만드는 사람들, 21세기 북스, 치키린

 It is the Japanese future security police second in the country, TV Tokyo

 Ten 홈페이지

 에이트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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