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C.R.B는 축구를 모티브로 한 패션 브랜드예요. 유니폼은 기본, 선수들이 기자회견을 위해 입는 수트, 훈련에서 입는 기능성 의류, 서포터들을 위한 일상복과 스카프까지. 축구 팀과 관련한 패션을 팔죠. 그러려고 풋볼 클럽 리얼 브리스톨(F.C.R.B)이라는 가상의 축구 팀도 만들었어요.
그런데 F.C.R.B의 신제품을 소개하는 룩북을 보면 낯선 점을 발견할 수 있어요. 패션 감각을 보여주는 멋진 모델을 찾아볼 수 없거든요. 정확히 이야기하면 사람을 찾을 수 없죠. 대신 모델로 마네킹을 활용해요. 축구 경기장, 기자회견장 등 축구 선수와 팬들이 있을 법한 다양한 상황을 마네킹으로 표현하는 거예요.
이런 마케팅 방식은 가상의 팀을 중심으로 전개하는 패션 브랜드이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어요. 가상의 팀에는 가상의 선수가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울 수밖에요. 그렇다면 F.C.R.B는 어쩌다 가상의 팀을 만들고 마케팅 전면에 마네킹을 내세우게 된 걸까요? 참고로 무언가의 덕후라면 롤모델로 삼고 싶을 거예요.
F.C.R.B 미리보기
• 패션 잡지를 교과서 삼아 패션계에 들어서다
• 패션과 음악을 사랑한 축구 덕후가 벌인 일
• 마네킹을 마케팅하는 선수로 발탁하다
• 축구 패션 브랜드가 미래과학관에 초대된 이유
• 가상의 축구팀에서 진짜 축구팀으로
유니폼을 입으면 소속감이 생겨요. 그래서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유니폼을 사모아요. 벽에 걸어두거나 액자에 넣어 소장하기도 하고, 응원하는 팀의 경기를 보러갈 때 입기도 하죠. 응원의 도구로 유니폼을 사거나 입는 거예요. 축구팬들도 예외는 아니고요. 그런데 2022년, 축구팬들에게 반가운 패션 트렌드가 등장했어요. 바로 ‘블록코어’예요.
ⓒTicTok - 틱톡에서 유행처럼 번진 블록코어
블록코어는 전세계에서 축구에 가장 미쳐있는 나라 영국에 뿌리를 둔 트렌드에요. 친구를 부르는 브로(Bro)나 두드(Dude)와 비슷한 의미의 영국 속어 ‘브록(Bloke)’과 꾸민 듯 안 꾸민 듯한 스타일 말하는 ‘놈코어(Normcore)’가 합쳐져 만들어진 말이에요. 주말만 되면 어김없이 축구팀 유니폼을 입고 펍으로 응원을 가는 영국 축구 골수팬들의 패션에서 시작됐죠.
이 트렌드는 축구 유니폼을 패션 아이템으로 바꿔놨어요. 아디다스와 협업한 ‘웨일즈 보너’나 ‘에임 레온 도르’ 같은 핫한 브랜드에서도 축구 유니폼을 연상시키는 신상품을 발표할 정도로 인기가 높죠. 해외 유명 스타들부터 뉴진스, 블랙핑크 같은 한국 아이돌까지 블록코어를 많이 입어요.
블록코어 패션에는 암묵적인 공식이 있어요. 아디다스 스니커즈에 청바지를 입고 빈티지한 축구 유니폼 상의를 입어주는 거죠. 긴팔 유니폼, 반팔 유니폼부터 축구선수들이 훈련에서 입는 옷까지 축구와 관련된 여러 아이템들을 사용하면서 자기만의 멋을 낼 수 있다는 것이 매력 포인트에요.
그런데 블록코어 트렌드가 생기기 20년도 더 전인 1999년. 지금의 블록코어 트렌드처럼 축구 유니폼을 일상의 영역으로 옮겨운 사람이 있어요. 일본의 한 축구 덕후, 키요나가 히로후미예요. 그는 단순히 평상시에 입을 수 있는 유니폼 상의만 만들어 판 게 아니에요. 가상의 축구팀을 만들어서 그 축구팀 선수들이 입는 유니폼뿐만 아니라 일상복까지 제품으로 출시했죠. 그렇다면 키요나가는 어떻게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팀의 패션으로 블록코어의 선구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패션 잡지를 교과서 삼아 패션계에 들어서다
패션 브랜드를 런칭했지만 키요나가 히로후미는 패션계에서 커리어를 시작하지 않았어요. 그의 첫 직업은 치과기공사였죠. 하지만 안정적인 직업도 그의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어요. 그는 음악과 패션에 더 관심이 많았고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패션을 업으로 삼기 위해 퇴사를 결심하죠.
치과기공사를 그만두고 동네 옷 집에서 차근차근 패션 공부를 시작했어요. 혼자서 패션을 공부하면서 그는 패션 잡지 ‘뽀빠이’와 ‘앙앙’을 교과서처럼 읽었어요. 두 잡지 모두 패션뿐만 아니라 스포츠, 음악, 여행 등 문화 전반을 다룬 매거진이었기 때문에 키요나가는 자연스럽게 패션 외의 영역에도 눈을 떴죠. 그렇게 패션을 다른 영역과 결합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가지게 됐어요. 독학을 하던 그는 아페쎄(A.P.C)의 디렉터 장 투이투의 밑에서 일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패션 디렉터의 길에 들어섰어요.
키요나가의 교과서가 되어준 매거진 뽀빠이
당시 스트릿 패션계에서 입지가 탄탄했던 장 투이투는 키요나가에게 큰 영향을 미쳤어요. 브랜드만의 정체성과 이야기를 옷에 담아 더욱 고차원적이면서도 근본적인 의미를 만들라는 가르침이었죠. 그렇게 키요나가는 돈을 벌기 위한 옷이 아니라, 자신의 철학을 담은 패션 브랜드를 런칭했어요. 바로 1998년에 시작한 ‘소프(Soph)’예요.
ⓒSOPH 공식 페이지
소프는 세련되다는 뜻의 영어 ‘Sophisticated’에서 따온 브랜드 이름이에요. 이처럼 기존의 하이엔드 패션과 당시 떠오르던 스트릿 패션을 합치고자 했어요. 개성이 뚜렷한 스트릿 패션이 가끔은 착용감이 불편한 점을 짚어서, 세련되면서 편안한 패션 브랜드를 만들었죠. 멋을 살리면서도 실용적인 디테일을 살린 소프는 런칭부터 큰 인기를 끌었어요. 그는 소프 브랜드의 정체성을 ‘Real Cloth’라고 설명하는데요. 디자인에만 집중하던 스트릿 패션에 기능성을 더해서 ‘진짜’ 옷을 만든다는 의미죠.
키요나가는 소프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옷으로 표현하려고 했어요. 그러다 자신이 사랑하는 축구를 패션의 영역으로 들어오면서 만들게 된 브랜드가 바로 풋볼 클럽 리얼 브리스톨(이하 F.C.R.B)예요.
패션과 음악을 사랑한 축구 덕후가 벌인 일
키요나가는 브랜드 컨셉을 고민했어요. 그러고는 전에 없던 패션 브랜드를 런칭하기 위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가상의 축구팀을 만들었어요. 구단의 선수부터 서포터까지 팀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상상해보고 이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입을만한 옷을 선보이기로 한 거예요.
축구 구단 관련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팀 유니폼은 기본. 선수들이 기자회견을 위해 입는 수트, 훈련에서 입는 기능성 의류, 서포터들을 위한 일상복과 스카프까지. 키요나가는 자신의 상상력을 총동원해서 진짜 축구팀 굿즈로 보이는 옷들을 만들어냈어요. 심지어는 어린이 팬들을 위한 의류까지도 시즌마다 발표하죠.
ⓒcotwohk - 가상의 선수들이 입을 일상복, 유니폼, 기자회견용 정장까지 구성. 정장의 경우 타 구장으로 경기를 간다는 컨셉으로 팩커블 기능까지 갖춤.
브랜드 이름도 풋볼 클럽 리얼 브리스톨(F.C.R.B)이라고 지어 축구팀과 관련한 패션이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죠. 심지어 가상인데도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 리얼이라는 단어를 넣었어요. 그런데 브랜드 이름에 브리스톨이라는 도시가 눈에 띄어요. 보통의 경우 축구 클럽을 뜻하는 FC 뒤에 지역 이름이 오니 어색할 건 없지만, 왜 하필 영국의 도시인 브리스톨을 연고지로 정했을까요? 일본 브랜드이니 일본의 도시가 들어갈 법도 한데 말이죠.
ⓒBristol Museum Collection - Massive Attack의 초창기 모습
그 이유는 키요나가의 덕질에 있어요. 그는 힙합과 하우스 장르를 합친 ‘트립 합’이라는 마이너한 장르를 좋아했어요. 이 장르를 탄생시킨 밴드로 알려진 ‘매시브 어택(Massive Attack)’의 광팬이었죠. 그리고 매시브 어택의 본고장이 바로 브리스톨이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브리스톨은 트립 합 장르의 성지로 불리고 있죠. 이렇게 자신이 좋아하는 밴드의 발상지를 연고지로 정한 후, 팀의 로고에까지 팬심을 담아요. 매시브 어택의 앨범 로고에서 영감을 얻어서 F.C.R.B의 로고를 만든 거예요.
축구와 음악에 대한 키요나가의 팬심을 담은 스토리는 F.C.R.B의 정체성이 되었어요. 옷에 먼저 관심을 가졌던 고객들이 키요나가의 스토리를 듣고 음악이라는 새로운 분야에까지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경우도 생겨났죠. F.C.R.B는 이런 정체성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는데요. 신상품이 나올 때마다 브리스톨 거리를 찾아 트립합 음악을 즐기는 식으로요.
마네킹을 마케팅하는 선수로 발탁하다
F.C.R.B에서 매 시즌 발표하는 룩북도 컨셉에 충실해요. 룩북은 매 시즌의 테마와 새롭게 출시한 제품을 고객들에게 보여주죠. 그렇기 때문에 패션 감각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멋진 모델들이 등장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에요. 하지만 F.C.R.B의 룩북에는 멋진 모델을 찾아볼 수 없어요. 정확히 이야기하면 사람을 찾을 수 없죠.
F.C.R.B는 모델로 마네킹을 활용해요. 길거리나 축구 경기장, 기자회견장까지 축구팬과 선수들이 있을 법한 다양한 상황에 맞게 마네킹을 세팅하고 촬영을 진행하는데요. 선수들의 역동적인 자세부터 응원하는 팬들의 모습까지 전부 마네킹으로 표현하는 거예요.
이런 마케팅 방식은 가상의 팀을 중심으로 전개하는 패션 브랜드이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어요. 가상의 팀에는 가상의 선수가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울 수밖에요. 그리고 F.C.R.B가 패션 브랜드라는 점도 마네킹을 통해서 알릴 수 있죠. 이렇게 마네킹을 사용한 마케팅은 F.C.R.B의 시그니처가 되었어요.
ⓒSOPH.NEWS
ⓒSOPH.NEWS
ⓒSOPH.NEWS
마네킹을 마케팅 전면에 내새우는 방식은 키요나가의 발상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예요. 그는 기존의 방식에 갇혀 있기보다 틀을 깨는 깨고 나오는 것을 추구하는데요. 그래서 매대에서 옷을 디스플레이하는 데에만 쓰이는 마네킹을 일상과 스포츠의 영역으로 끌고 온 거예요. 덕분에 경쟁이 치열한 패션 브랜드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갖게 되었고요.
축구 패션 브랜드가 미래과학관에 초대된 이유
F.C.R.B는 특이한 컨셉과 마케팅뿐만 아니라 별난 이력이 하나 더 있어요. 바로 일본 과학미래관에 초대됐었다는 거에요. 오다이바에 위치한 일본 과학미래관은 일본 최초 우주인 모리 마모루가 관장으로 있고, 미래 과학 기술을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곳인데요. 이런 곳에 스포츠 패션 브랜드가 도대체 왜 초대된 걸까요?
ⓒYURIKAMOME
2004년에 키요나가는 자신의 상상력을 한 번 더 업그레이드 했어요. 가상의 팀을 위한 스타디움을 지어보겠다는 프로젝트였죠. 정식 크기의 스타디움은 아니지만 축구팬이라면, 그리고 F.C.R.B 팬이라면 구미가 당기는 시도였어요. 게다가 이 프로젝트를 위해서 일본 유명 축구 만화 ‘캡틴 츠바사’의 특별편도 만들었어요. 가상으로 만들어진 스타디움에서 츠바사의 팀과 츠바사의 라이벌이 이끄는 F.C.R.B가 개막전을 펼치는 특별 단편이었죠.
ⓒfandom - 스타디움 프로젝트를 위해 만들어진 캡틴 츠바사 특별판. 유니폼에 F.C.R.B 로고를 볼 수 있다.
그런데 키요나가의 기발한 상상력을 구현하는 것처럼 보이는 프로젝트는 도대체 일본 과학미래관이랑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걸까요? 이 프로젝트의 취지 덕분이에요. 사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히 작은 버전의 스타디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타디움의 탈을 쓴 환경 운동이거든요. 축구 스타디움을 건설하면서 생기는 환경 문제도 지적하고 이 밖에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한 경각심을 깨우기 위함이었죠.
그래서 스타디움을 지을 때 친환경적으로 접근했어요. 이 스타디움을 지으면서 파냈던 흙을 따로 모아 놓았다가 프로젝트가 마무리된 이후에 다시 그 흙을 그대로 원상복구시키면서 재생가능성을 보여어요. 그리고 축구장 잔디가 있어야할 자리에도 플라스틱, 고무 등을 사용하는 인조 잔디가 아니라, 관동 지역 화산층에서 가져온 비옥한 흙을 깔고 천연 잔디 씨앗을 뿌렸죠. 이벤트가 진행되는 과정동안 방문객들이 잔디가 자라는 과정을 보면서 환경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도록 한 거예요.
관중석 스탠드도 특별해요. 세계적인 화학기업 듀폰에서 제작한 생분해 소재를 사용해서 기존의 플라스틱 의자들과는 다르게 철거 이후에도 환경 오염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이외 구조물들도 전부 재생 가능한 목재, 철재만 사용해서 환경 문제를 최소화했어요. 덕분에 프로젝트가 마무리된 이후에 구조물과 땅을 그대로 복원할 수 있었죠.
일본 과학미래관은 이 프로젝트를 미래를 위한 메시지로 보고 공간을 내주었고요. 당시에는 ESG나 지속가능한 발전 같은 키워드가 지금처럼 사회적 화두가 아니었다는 걸 감안하면, 키요나가가 얼마나 선구자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어요.
가상의 축구팀에서 진짜 축구팀으로
F.C.R.B를 통해 축구에 대한 애정을 계속해서 보여주던 키요나가는 결국 진짜 축구팀 스폰서가 되었어요. 자신이 응원하는 고향 팀 오이타 트리니타가 2부 리그로 강등되어 허덕이는 모습을 본 키요나가는 직접 구단에 전화를 걸어서 F.C.R.B로 스폰서가 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어요.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들어온 스폰서 역제안이었어요. 그만큼 파격적인 일이었지만 구단에선 흔쾌히 오케이를 했죠. 이후에도 키요나가는 오이타 지역 풋살팀인 오이타 바사게이의 팀을 스폰서쉽하면서 F.C.R.B 아래에 풋살 라인업인 ‘F.C.R.B-FIVE’도 운영하기 시작했어요. 축구 덕후가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스폰서가 된다는 꿈같은 스토리죠.
그런데 더 꿈같은 일이 벌어졌어요. 이번엔 키요나가에게 J리그가 리그 스폰서를 부탁했어요. 한 팀이 아니라 리그 전체의 스폰서가 되는 거였어요. 그렇게 F.C.R.B의 패션에는 J리그에 속한 모든 팀의 로고가 들어가게 되면서 일본 축구팬들에게 다시 한 번 이름을 각인시켰죠. 여기서 끝이 아니에요. J리그와 계속해서 관계를 이어오던 키요나가는 2022년에 J리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됐어요.
F.C.R.B를 시작했던 때, 키요나가는 자신이 이렇게 될 줄 알았을까요? 그가 사랑하는 것들을 적절히 조합하고, 자신만의 철학을 고객에게 전달하는 데에 집중한 결과예요. 그는 2022년에 패션계 은퇴를 선언했지만 F.C.R.B의 정체성은 계속해서 지켜지고 있어요. 다음 시즌, F.C.R.B는 축구 팬들을 위해 또 어떤 아이디어를 들고 나타날까요?
Referenc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