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규어는 오타쿠들 사이에서도 소문난 지갑도둑이에요. 주로 소장용으로 구매하는데, 공장에서 찍어내는 제품이 아닌지라 공급이 제한적이어서 가격대가 높아요. 그렇다 보니 파는 쪽에선 기회 될 때마다 재고를 확보해두는 것이 상책이에요.
그런데 재고 관리가 쉽지 않고 회전율도 높지 않아, 많은 편집숍들이 특정 제품군만 큐레이션하면서 선택과 집중을 하죠. 그렇다면 다양한 피규어를 한 자리에서 만나보긴 어려운 걸까요? 아키하바라 요지에 자리 잡은 ‘아스톱’은 틀을 깨는 비즈니스 모델로 이 문제를 해결했어요.
이번엔 <퇴사준비생의 도쿄>에서 소개했던 아스톱을 업데이트해 봤어요.
아스톱 미리보기
• 오프라인 매장에 구현한 피규어숍의 롱테일
• #1 아스톱 - 상품이 아니라 공간을 판다
• #2 판매자 - 그들이 사는(Buy) 세상
• #3 고객 - 1000개의 큐브에서 마주친 뜻밖의 발견
• 오프라인 플랫폼의 가능성
잃어버린 20년 동안 일본이 잃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오타쿠의 재발견’이라는 수확이 있었죠. 이전까지는 오타쿠에 대한 시선이 긍정적이지만은 않았어요. 폐인, 루저, 히키코모리 등 사회적 관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B급 문화를 탐닉하는 부류로 비하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오타쿠들의 소비력에 초점을 맞추자 상황이 달라졌어요. 특정 분야에 대한 이들의 광적인 몰입은 아낌없는 소비로 이어지기 때문에 오타쿠들은 어디서든 환영받는 신인류로 거듭났어요. 오타쿠 관련 시장 규모는 4,000억 엔(약 4조원)에 육박하죠. 게다가 오타쿠들의 섬세한 취향에 대응하기 위해 애니메이션, 게임, 엔터테인먼트 등 산업 전반이 진화해요. 까다로운 고객을 대하다 보면 기준이 올라가게 마련이니까요.
오타쿠의 잠재력을 가장 먼저 알아본 건 ‘아키하바라’였어요. 한때 잘나가던 전자상가 아키하바라는, 1990년대 들어 버블 붕괴와 함께 활기를 잃고, 전자제품 할인 매장의 공세에 밀려 스러져가고 있었죠. 이 와중에 하방선을 지켜준 게 오타쿠였어요.
아키하바라는, 게임 출시일이 되면 가게 앞에 조용히 장사진을 이루고 단종된 제품은 몇 곱절의 프리미엄을 얹어서라도 손에 넣고야 마는 그들의 소비 패턴에 주목했어요. 이에 피규어 숍, 망가 카페 등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마이너한 취향의 라인업도 강화했죠. 이렇게 아키하바라는 오타쿠의, 오타쿠에 의한, 오타쿠를 위한 성지로 부활했어요.
돈이 모이는 곳에 혁신이 있습니다. 단단한 팬심이 과감한 시도를 위한 디딤돌이 되어주죠. 아키하바라에는 매일 밤 아이돌 연습생의 공연을 볼 수 있는 AKB48 극장, 손님을 주인님으로 만들어주는 메이드 카페, 개인의 휴대용 콘솔을 가져와 놀 수 있는 게임 집회소, 룸마다 다른 망가로 꾸며놓은 가라오케 등 흥미로운 컨셉의 상점이 즐비해요.
여기에 피규어숍도 빠질 수 없지요. 피규어는 오타쿠들 사이에서도 소문난 지갑도둑이에요. 주로 소장용으로 구매하는데, 공장에서 찍어내는 제품이 아닌지라 공급이 제한적이어서 가격대가 높아요. 그렇다 보니 파는 쪽에선 기회 될 때마다 재고를 확보해두는 것이 상책이에요. 그런데 재고 관리가 쉽지 않고 회전율도 높지 않아, 많은 편집숍들이 특정 제품군만 큐레이션하면서 선택과 집중을 하죠. 그렇다면 다양한 피규어를 한 자리에서 만나보긴 어려운 걸까요? 아키하바라 요지에 자리 잡은 ‘아스톱’은 틀을 깨는 비즈니스 모델로 이 문제를 해결했어요.
오프라인 매장에 구현한 피규어숍의 롱테일
아스톱에 들어서면 일단 그 방대함에 압도됩니다. 바닥부터 머리 위를 넘겨서까지 상하좌우 빽빽이 피규어들이 진열되어 있어요. 건물 한 층의 절반을 통째로 쓰고 있지만, 이 중 동일한 피규어는 거의 찾아볼 수 없어요. 바꿔 말해 원하는 피규어가 있다면 수십 개의 버전에서 고를 수 있죠.
앞서 설명했듯 보통 피규어숍은 선택과 집중을 할 수밖에 없는데, 아스톱은 어떤 덕후가 오든 전천후예요. 우선 트레이딩 피규어(6~8개의 작은 피규어를 랜덤하게 넣은 피규어 박스), 갓샤폰(뽑기 방식의 캡슐 토이), 액션 피규어(관절이 있는 피규어), 스태추 피규어(장식용 피규어) 등 피규어 종류를 총망라해요. 또한 애니메이션, 게임, 만화 잡지, 영화 등 다양한 소스의 캐릭터를 갖추고 있어요. 그뿐 아니라 프라모델, 로봇, 인형, 아이돌 포스터, 심지어 회중시계에 이르기까지 수집 가치가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찾을 수 있고요.
망망대해에서 보물섬을 발견하듯, 아스톱의 방대한 피규어 컬렉션에서 각자의 보물을 찾습니다. ⓒ시티호퍼스
상품보다 더 천차만별인 건 가격이에요. 본래 아키하바라에서는 발품이 진리라지만, 다른 매장과 비교를 하기 위함이지 한 매장 내에서 유사한 제품의 가격 차이가 많이 나지는 않아요. 그런데 아스톱에서는 비슷한 상품이어도 최대 1만엔(약 10만원)가량 차이가 나요. 이쯤 되면 아스톱이 어떻게 이렇게 방대하고 다양한 컬렉션을 확보할 수 있었는지, 중고품 매장에 필수적인 상품 검수 절차는 어떠한지, 가격 결정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집니다.
같은 베어브릭이어도 가격이 천차만별입니다. ⓒ시티호퍼스
#1 아스톱 - 상품이 아니라 공간을 판다
사실 아스톱에서는 이 모든 과정이 필요치 않아요. 아스톱은 상품을 사들여 유통하는 것이 아니라 백화점처럼 입주자를 들여 그들이 직접 판매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에요. 임대의 단위는 큐브. 0.03~0.13㎥ 크기의 큐브가 무려 1,000개나 있어요. 피규어를 팔고 싶은 이들은 큐브 크기와 위치에 따라 800~9,500엔(약 8,000~95,000원)의 월간 이용료를 내고 판매 수수료 15%를 정산하면 돼요. 1,000개 큐브 중 공실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워요.
피규어 사업을 하는 데 있어 아스톱의 모델은 안정적이에요. 만실을 가정하면, 임대료 중간값인 5,150엔으로 계산했을 때 월간 이용료로만 약 5200만원이 확보돼요. 그리고 큐브당 3,000엔어치 피규어가 1개씩만 팔려도 판매 수수료가 약 500만원이에요. 아키하바라 상가 평균 임대료가 평당 1만 5,000엔(약 15만원)이므로, 약 250평을 차지하는 아스톱의 임대 비용을 메꾸고도 남죠.
또한 재고 관리 측면에서도 리스크가 사라져요. 기본적으로 피규어는 니즈가 분산되어 수요 예측이 어려워요. 그래서 다양한 상품 구색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상품이 현금화되지 못한 상태로 꽤 오랫동안 묶여 있죠. 그런데 아스톱은 유통업이 아닌 임대업으로 사업을 정의함으로써 버텨야 하는 기간을 없앤 거예요. 여기에 상품의 소싱-검수-관리 프로세스 관련 인력도 필요가 없어 더욱 가벼워졌고요.
아스톱에는 1000개의 각기 다른 큐브가 존재합니다. ⓒ시티호퍼스
#2 판매자 - 그들이 사는(Buy) 세상
이 1,000명의 큐브 임차인은 그저 큐브 한 칸이라는 공간만 사는 게 아니에요. 큐브에 자신의 세계를 구축할 권리를 사는 거죠. 첫째로, 큐브를 어떻게 채울지는 온전히 이들의 몫이에요. 대형 피규어 하나만 호기롭게 갖다두기도 하고, 30여 개의 피규어를 켜켜이 쌓기도 하며, 하나의 애니메이션에 출현하는 캐릭터로만 채우거나, 피규어 종류별로 줄을 세워 다이나믹한 연출을 하기도 해요.
이들에겐 큐브 하나하나가 자신만의 고유한 세상이자 바깥세상을 향한 제안이에요. 큐브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놓인 것이 없어요. 전체적인 대형과 개별적인 배치를 고민한 흔적이 엿보이죠. 단순히 더 잘 팔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피규어마다 애정이 녹아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에요. 몇 명의 머천다이저(MD)가 손봤다면 어림도 없을 깊이고요.
대형 큐브를 임대해 층별로 다른 캐릭터를 진열하는 등 큐브 하나를 온전히 임차인 마음대로 꾸밀 수 있습니다. ⓒ시티호퍼스
가격 역시 그들이 정해요. 피규어는 중고 거래가 대부분이고, 고가인 데다 공산품이 아니에요. 여기에 오타쿠적 깐깐함까지 더해지면 구매 전 눈으로 상태를 확인하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해요. 그러나 개개인이 오프라인에서 직접 판매할 기회가 많지 않아, 그간 개인 판매자들은 가격 결정권이 거의 없었어요.
어쩔 수 없이 피규어숍이 부르는 값에 넘겨야 하는데, 금이야 옥이야 고이 모셨다 해도 원래 샀던 가격의 반 토막이 되기가 예사예요. 중고 거래 앱 등을 활용하면 가격을 방어할 수는 있겠으나, 결국 잠재 구매자를 만나고 제품을 확인시키는 번거로운 과정을 반복해야 하죠. 한편, 아스톱을 이용하면 월간 이용료를 내더라도 가격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판매분에서 회복할 수 있다는 셈이 가능해져요.
#3 고객 - 1000개의 큐브에서 마주친 뜻밖의 발견
아스톱에서는 손님을 방임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에요. 손님이 최종 구매를 위해 큐브에서 상품을 꺼내달라고 요청하기 전까지는 직원들이 손님의 쇼핑에 거의 관여하지 않아요. 그리고 더 나아가 상품 분류나 색인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손님들이 1,000개의 큐브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길 유도해요. 뚜렷한 방향성 없이 돌아다닐 때 뜻밖의 발견을 할 수 있기 때문이죠. 또한 큐브 하나하나가 개인의 취향을 십분 반영한 편집숍이기에 고객의 취향을 저격할 가능성도 커요.
뜻밖의 발견을 위해 불편함만 남긴 것은 아니에요. 아스톱은 온라인 사이트도 있는데, 오프라인과 다르게 운영돼요. 보유 중인 모든 상품의 카테고리 분류부터 시작해, 캐릭터 이름이나 그 캐릭터가 나온 애니메이션, 게임, 만화 잡지 등의 제목도 색인되어 있어 편리하게 검색할 수 있어요. 검색한 상품의 쇼케이스 넘버까지 알려주고, 검색 결과 기반으로 연관 상품도 보여주죠. 매장 내에서도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며 원하는 상품의 위치를 찾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정도로 온·오프라인 간 연계성이 뛰어나요.
아스톱의 온라인 사이트는 색인화가 잘 되어있어 검색하기 편리합니다. ⓒ아스톱 홈페이지
다만, 온라인으로 구매는 할 수 없어요. 사람들을 오프라인 매장으로 끌고 오기 위한 온라인 쇼룸 역할만 부여한 거예요. 오프라인을 쇼룸으로 이용하는 여타 유통업자의 행보와는 사뭇 달라요. 온라인에서 구매 기능을 없앤 것은 어쩌면 큰 매출을 포기한 것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진짜 가능성은 아스톱만의 독특한 오프라인 매장에서 나온다고 생각했기에 내린 결정이죠. 당장의 온라인 매출보다 오프라인에서의 뜻밖의 발견이 새로운 수집으로 이어지길 기대하는 거예요.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오타쿠의 습성을 잘 이해한 결과로 볼 수 있어요.
오프라인 플랫폼의 가능성
아스톱이 오타쿠에 특화된 비즈니스 모델이라고, 일본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쉬워요. 하지만 렌탈 쇼케이스는 수제품, 중고 가전, 중고 의류 등에도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어요. 개인 단위의 판매자와 구매자가 충분히 존재하고, 오프라인 거래가 필요한 상품이면 되죠.
중심가가 아닌 주택가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어요. 상품 크기가 작으면 심지어 공간도 많이 차지하지 않고요. 이를테면 디자이너들에게 박스를 임대해주어 수제품을 판매하도록 하는 ‘박스라떼’는 빈티지숍 ‘플라워’의 한켠에서만 운영해요. 박스라떼를 찾는 손님이나 빈티지숍을 찾는 손님이나 모두 손때 묻은 나만의 물건을 원하는 사람들이에요. 고객군이 일치해 더 많은 사람을 끌어올 수 있고 객단가를 높이는 데도 서로 도움이 돼요. 이렇듯 거래자와 상품의 특성에 따라 필요한 디테일이 달라질 뿐, 오타쿠를 위한 피규어숍으로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에요.
아스톱 사례가 보여준 가능성은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어요. 아스톱은 쉽게 말해 지마켓, 옥션 같은 오픈마켓 플랫폼을 오프라인으로 옮긴 거예요. 플랫폼이라고 하면 으레 크고 거창한 것부터 떠올리죠. 특히 온라인 플랫폼은 승자독식인 구조예요. 규모가 작으면 살아남기 힘들어요.
반면 오프라인에서는 차지한 공간만큼의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어요. 일단 존재한다면, 그 힘이 작을 순 있지만 없다고 할 수는 없어요. 아스톱이 아키하바라에서 가장 큰 피규어숍은 아니에요. 박스라떼는 5평도 채 되지 않고요. 그럼에도 가능할 수 있었던 건 오프라인 공간이 가지는 힘 덕분이에요. 금싸라기 땅에 크게 자리한 백화점이 아니더라도 백화점 모델을 빌릴 수 있는 이유예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립니다. 지금이야 오타쿠들이 자타공인 최고의 소비집단이지만, 예전에는 천덕꾸러기에 지나지 않았어요. 또한 유통업으로만 생각했던 피규어숍을 임대업으로 탈바꿈한 발상은 종이 한 장 차이에서 나왔죠. 지금 보면 당연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콜럼버스의 달걀’과 같이 틀을 깨는 생각이 필요해요. 나중에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보게 합니다.
Refer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