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공간을 감각 있게 넓히는 지혜

B by B

2022.05.15

‘B by B’는 벨기에 미슐랭 스타 셰프가 만든 초콜릿 가게입니다. 해외 첫 매장을 도쿄에 냈고, 이를 ‘넨도’가 디자인했습니다. 30여 종의 초콜릿 바 매대와 카페를 구성해야 했는데 공간이 좁습니다. 넨도는 어떤 아이디어를 냈을까요?



B by B 미리보기

• 작은 ‘!’를 큰 ‘!’로

 문제 해결을 연구하는 넨도 디자인

 공간과 공간감은 크기가 다르다

 감도가 아닌 문제 인식의 차이






“일상의 불편을 그냥 넘기지 않을 것.”


먼지봉투 없는 진공청소기, 날개 없는 선풍기 등으로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영국의 ‘다이슨’ 대표 제임스 다이슨의 말입니다. 산업 디자이너이자 엔지니어로서 미적 감각이 뛰어난 제품들을 쏟아내고 있지만, 그는 제품의 아름다움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일상의 불편에 무게중심을 두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디자인을 활용하는 것을 더 중요시합니다.


“문제를 다른 방법으로 풀어가기 때문에 디자인적 사고가 필요하다.”


미국의 디자인 전문 에이전시 ‘IDEO’의 수장 팀 브라운의 생각입니다. IDEO는 ‘디자인 씽킹’이라는 화두를 내세우며 문제 해결을 위해서 디자인적인 사고가 필요하다고 설명합니다. 디자인 에이전시로서 단순히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디자인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IDEO는 <비즈니스위크>가 뽑은 ‘가장 혁신적인 기업 25’에 선정되었을 뿐 아니라, 나머지 24개의 기업 역시 IDEO가 혁신 자문을 했을 정도입니다.


영국과 미국을 대표하는 두 디자이너의 말처럼 디자인은 형태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 그 이상입니다. 디자인은 심미성을 전제로 하는, 문제 해결을 위한 도구라는 뜻입니다. 디자인에 관한 이러한 관점은 영국과 미국 같은 서구 사회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일본에도 문제 해결을 위한 디자인을 표방하며 주목받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디자인 에이전시 ‘넨도 디자인’이 있습니다.



작은 ‘!’를 큰 ‘!’로

넨도 디자인은 사토 오오키가 설립한 디자인 에이전시입니다. ‘작은 !를 느낄 수 있게 만드는 것’을 콘셉트로 도쿄, 밀라노, 싱가포르를 거점으로 건축, 인테리어, 프로덕트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디자인 작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콘셉트는 소소한 듯하지만 넨도 디자인의 성과는 큰 ‘!’를 느낄 수 있게 합니다.


2006년에는 <뉴스위크>가 선정한 ‘세계가 존경하는 일본인 100명’에 사토 오오키가 뽑혔고, 2007년에는 ‘세계가 주목하는 일본 중소기업 100’에 넨도 디자인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2012년에 영국의 ‘월페이퍼 매거진 디자인 어워드’와 ‘엘르 데코 인터내셔널 디자인 어워드’를 비롯해 세계적인 디자인상을 여러 차례 받았으며, 2015년에는 프랑스의 ‘메종 에 오브제(Maison et Objet)’에서 ‘올해의 디자이너 상’을 받았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은 미국의 뉴욕현대미술관(MoMA), 영국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뮤지엄, 프랑스의 퐁피두 센터 등 세계 주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정도면 디자인 업계의 구루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토 오오키는 젊은 디자이너 중 한 명입니다. 그는 1977년생으로 스물다섯의 나이인 2002년에 넨도 디자인을 설립했습니다. 2006년에 <뉴스위크>에서 주목을 받기까지 불과 4년이라는 시간밖에 걸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가 운영하는 넨도 디자인은 무엇이 어떻게 다르길래 디자인 업계의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걸까요?



문제 해결을 연구하는 넨도 디자인


“디자이너가 하는 일은 기발한 형태를 만드는 것도, 무언가를 멋있게 보이도록 하는 것도 아니다. 디자인이란 문제 해결을 위해 새로운 길을 찾는 작업이다.”


넨도 디자인을 이끌고 있는 사토 오오키의 말입니다. 그는 400건이 넘는 프로젝트를 통해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증명했습니다. 그중에서 일상생활과 가까우면서도 문제 해결력이 돋보이는 사례들을 살펴보면 넨도 디자인의 감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라임-포켓’이 대표적입니다. 라임-포켓은 진 베이스의 칵테일을 마실 때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디자인한 제품입니다. 진 베이스의 칵테일은 보통 마시기 전에 라임즙을 짜서 넣기 때문에 손이 끈적끈적해지고 짜고 난 라임 껍질로 테이블이 지저분해집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리콘 소재의 라임 케이스를 만들어 칵테일 잔에 꽂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즙을 짠 후 그대로 테이블에 올려둘 수 있어 손가락과 테이블이 더러워질 일이 없습니다. 게다가 하늘색의 라임-포켓은 무색투명한 진 계열 칵테일에 시각적 효과를 높여주는 역할도 합니다. 누구나 진 계열 칵테일을 마시면서 느꼈던 불편에서 문제의식을 발견하고 디자인적으로 해결한 것입니다.



‘라임-포켓’은 디자인으로 문제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봄베이 사파이어’를 상징하는 푸른색을 선택해 브랜드 이미지도 강화합니다. ⓒ넨도 디자인 홈페이지


‘엘레컴’의 의뢰를 받아 디자인한 무선 마우스 ‘오포펫(Oppopet)’도 아이디어가 남다릅니다. 보통 USB 리시버는 무선 마우스 안에 숨겨둡니다. 하지만 마우스 아래 수납하려면 본체 사이즈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넨도 디자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USB 리시버를 동물 꼬리 모양으로 만들어 노출형으로 만들었습니다. 무선 마우스를 사용하지 않을 때는 마우스가 동물처럼 보이고, 마우스를 쓸 때는 꼬리 모양의 리시버를 노트북에 꽂기 때문에 마우스가 심플한 모습으로 변합니다. 디자인으로 문제를 해결한 또 다른 사례입니다.



돌고래의 꼬리를 모티브로한 USB 리시버입니다. ‘오포펫’은 돌고래, 여우, 돼지, 원숭이 등 다양한 동물들의 꼬리를 활용한 디자인을 선보입니다. ⓒ넨도 디자인 홈페이지


제품 디자인 말고도 넨도 디자인은 공간 인테리어를 디자인하는 프로젝트들도 다양하게 수행했습니다. 스페인의 신발 브랜드 캠퍼, 이탈리아 구두 브랜드인 토즈, 그리고 미국의 패션 브랜드인 띠어리 등의 매장을 디자인했습니다. 각 브랜드의 철학과 콘셉트에 맞춘 공간 디자인으로 인정받으며, 글로벌 기업들로부터 끊임없이 프로젝트 의뢰를 받았습니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프로젝트가 ‘B by B’의 매장 디자인입니다.



공간과 공간감은 크기가 다르다

B by B는 벨기에의 미슐랭 스타 셰프가 만든 초콜릿 가게입니다. B by B가 2014년에 해외 진출을 결정하고 첫 번째로 선택한 도시가 도쿄입니다. B by B는 도쿄에 첫 매장을 내면서 매장 디자인을 넨도 디자인에 맡겼습니다. 단순히 매장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이었다면 넨도 디자인이 나서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도쿄의 핵심 상권인 긴자 지역에 디자인하려는 B by B 매장엔 몇 가지 제약조건이 있었습니다.


좁고 긴 형태의 매장에 초콜릿 판매 공간과 카페를 동시에 구성해야 했고, 30여 종의 초콜릿을 진열해야 했습니다. 좁은 공간을 감각 있게 넓히는 지혜가 필요했습니다. 넨도 디자인은 우선 효율적이면서도 감각 있는 공간 구분을 위해 두 공간을 흑백으로 대비시켰습니다. 카페를 매장 안쪽에 배치하고 카페 내부를 검은색으로 구성해 초콜릿 판매 공간에서 봤을 때 카페 내부가 잘 안 보이도록 설계했습니다. 카페 내부에서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초콜릿 판매 공간이 바로 옆에 있지만 멀리 있는 다른 공간처럼 느껴집니다. 색 대비를 통해 고객들이 각각의 공간에서 각각의 목적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매장 입구에서 바라본 B by B 내부 모습입니다. ⓒ시티호퍼스



카페 내부에서 바라본 B by B 매장입니다. 흑백의 대비를 이용해 좁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구분했습니다.  ⓒ넨도 디자인 홈페이지


또한 초콜릿 판매 공간은 B by B의 초콜릿을 먹는 방식, 포장, 그리고 매장의 구성 간에 유기적인 느낌이 들도록 디자인했습니다. 큰 포장에서 작은 포장 단위로 박스를 열며 초콜릿을 꺼내는 과정을 인테리어의 모티브로 삼은 것입니다. 게다가 협소한 공간에서도 30여 종의 초콜릿을 눈에 띄게 진열하기 위해 3단의 투명 매대를 활용했습니다. 공간 효율성을 높일 뿐만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서입니다.



B by B의 초콜릿 매대입니다. 투명한 매대로 좁은 공간의 답답함을 해소하고 미래지향적인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시티호퍼스


공간과 공간감은 다릅니다. 공간 구성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좁은 공간도 넓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넨도 디자인의 아이디어가 눈에 띄는 이유입니다.



감도가 아닌 문제 인식의 차이

다이슨의 제임스 다이슨, IDEO의 팀 브라운, 넨도 디자인의 사토 오오키. 영국, 미국, 일본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들은 디자인을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 바라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디자인을 디자이너만이 아니라 문제 해결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이 관심을 가져야 할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디자인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이 보편화될수록 일상의 문제가 개선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자인 선진국일수록 일상의 불편함을 줄이고자 하는 디자인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본도 예외가 아닙니다. 일본 도쿄는 땅값이 비싸서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매장과 같은 상업시설에서 화장실은 편의를 위해 필요하긴 하지만 영업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건 아니기 때문에 최소화하려고 합니다. 그럼에도 화장실의 필수 구성 요소인 변기와 세면대를 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화장실 크기를 최소화하며 갖출 건 다 갖추기 위해 변기를 새롭게 디자인했습니다. 변기 물을 내리면 양변기 안에 다시 물이 채워지는데, 그 과정을 노출해 세면대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도쿄에서는 세면대의 기능을 함께 갖추고 있는 변기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티호퍼스


카페와 같은 영업시설도 공간을 효율적으로 구성하기 위해 고민합니다. 아카사카에 있는 ‘도토루 커피’에서는 벽면 바 형태의 1인 좌석을 사선 형태로 디자인했습니다. 삼각형에서 빗변의 길이가 밑변과 높이보다 길다는 점에서 착안한 디자인입니다. 1인 좌석을 일자로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사선으로 배치하면 좌석별로 충분한 공간을 제공하면서도 더 많은 좌석을 만들 수 있습니다.



1인 좌석을 사선으로 배치하여 더 많은 좌석 수와 더 넓은 좌석당 면적을 확보하였습니다. ⓒ시티호퍼스


도쿄의 새로운 랜드마크인 스카이트리 내에 있는 ‘나나스 그린티’ 카페에서도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디자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카페에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좌석 구성을 하려고 하는데, 좌석별로 개별 룸을 만들자니 카페 내부가 답답해지고 칸막이를 설치하면 공간 효율도가 떨어지는 단점이 생깁니다. 그래서 망사로 된 하얀 천을 좌석 곳곳에 늘어뜨려놓았습니다. 좌석별로 독립적인 느낌을 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열려 있는 공간감을 만든 것입니다. 물론 디자인적으로 매장의 분위기도 살립니다.



하얀 망사 천을 활용해 독립적이면서도 탁 트인 느낌을 살린 ‘나나스 크린티’의 내부입니다. ⓒ시티호퍼스


도쿄를 여행하며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디자인은 아름다움에 대한 감도가 달라서 나오는 결과물이 아닙니다. 일상생활에서 발견한 불편함을 해결하려는 문제 인식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디자인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첫 단계는 문제가 있다는 걸 인식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미국 드라마 〈뉴스룸〉의 주인공 윌 매커보이가 한 말처럼 문제를 인식해야 문제 해결을 통한 발전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디자인에 관심을 가질수록 세상이 더 아름다워지는 이유입니다.






Reference

• 넨도 디자인 이야기(사토 오오키/가와카미 노리코 지음, 정영희 옮김, 미디어샘)

• 문제해결연구소(사토 오오키 지음, 정영희 옮김, 한스미디어)

• 넨도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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