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최초의 잡지 도서관이 롱런하는 비결

보벤

2023.05.22

좋아하는 잡지가 있나요? 그렇다면 그 잡지의 모든 과월호를 갖고 계신가요? 


전자에는 고개를 끄덕여도, 후자에는 고개를 가로 젓는 분들이 많을 거예요. 관심사에 대한 최신 트렌드와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어 매력적이지만, 모든 호를 구비하고 보관하는 것은 부담이 되는 일이에요. 잡지를 꾸준히 구독하는 사람들에게도 빛바랜 과월호들은 애물단지가 되는 경우가 많죠. 


타이베이에는 잡지 애호가들의 이런 애환을 달래주는 잡지 도서관이 있어요. 바로 '보벤(Boven)'이에요. 게다가 보벤은 공익적 목적으로 운영되는 보통의 도서관들과 달리 유의미한 수익을 내고 있죠. 그렇다면 보벤이 운영하는 잡지 도서관은 무엇이 어떻게 다른 걸까요?


보벤 미리보기

 콘텐츠의 원칙: 공유로 방대하게

 공간의 원칙: 쾌적하고 편안하게

 수익의 원칙: 멤버십으로 꾸준하게

 명성을 떨치기 위해 이름값을 하는 잡지 도서관




내로라하는 명품 브랜드 입점해 있는 최고급 백화점의 한 층에 도서관이 들어선다면 어떨까요? 이질적인만큼 이상적인 이런 조합은 아시아 최초의 디자인 도서관이자 지적 즐거움의 원천인 '태국 크리에이티브 디자인 센터(Thailand Creative and Design Center, 이하 TCDC)'의 초기 모습이에요.


TCDC는 2005년 처음 설립 당시, 방콕 최고의 부촌에 위치한 '엠포리움(Emporium)' 백화점의 6층에 자리를 잡았어요. 이곳에서는 절판된 출판물을 포함해 7만여 점의 미술, 건축, 패션, 사진, 영화 등 디자인과 관련된 다양한 분야의 자료를 빌려볼 수 있었어요. 영감을 주는 정보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는 데 막대한 시간을 쏟던 디자이너들에게는 천국같은 공간이 탄생한 거예요.


10여년이 지난 2016년에 TCDC는 백화점을 떠나 방콕의 방락(Bang Rak)이라는 지역으로 거처를 옮겼어요. 물리적 범위를 넓혀 하나의 지역을 '창조 지구(Creative District)'로 만들려는 더 큰 뜻을 품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기존의 도서관 기능은 물론, 코워킹 스페이스까지 제공해 보다 포괄적인 크리에이티브 허브로서의 역할을 자처해요.



ⓒ시티호퍼스


TCDC를 방문한 디자이너들은 이 곳에서 ‘영감’을 얻고, ‘몰입’을 할 수 있으며, 세상과 ‘연결’돼요. 디자이너들이 아이디어에 참고할 만한 수만 권의 출판물, 멀티 미디어, 각종 소재 등 방대한 자료들을 보유하고 있어서죠. 그리고 영감을 얻은 디자이너들이 몰입해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코워킹 스페이스와 3D 프린터 등을 갖춘 ‘메이커 스페이스(Maker Space)’도 있고요. 더불어 TCDC는 디자이너들의 아이디어가 경제적 가치로 이어질 수 있도록 기업과 연결을 도와주기도 해요.



ⓒ시티호퍼스



ⓒ시티호퍼스



ⓒ시티호퍼스


그런데 TCDC를 방문해 영감을 얻는 건, 디자이너들뿐만이 아니에요. 예를 들어 시티호퍼스도 방콕의 TCDC를 방문하고 영감을 받아 ‘[태국의 모든 크리에이티브는 여기로 모인다 - TCDC](https://cityhoppers.co/content/story/tcdc)’라는 스토리를 발행했어요. 또한 타이베이에는 백화점 6층에 위치해 있던 TCDC에서 사업적 영감을 얻어 오픈한 도서관이 있죠. 2015년, 대만 최초의 잡지 전용 도서관이기도 한 ‘보벤(Boven)’이에요.



ⓒ시티호퍼스


보벤의 공동창업자들은 '디자인'이라는 분야의 전방위적인 지식과 정보를 한 장소에서 공유하는 TCDC에 깊은 감명을 받았어요. 그래서 그들도 자신들의 오랜 관심사이자, 5년 넘게 모아온 잡지를 기반으로 잡지 도서관을 기획했어요. 전 세계의 다양한 잡지들을 마음껏 제한없이 빌려볼 수 있도록 말이죠. 그리고 이곳에 보벤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시간과 돈을 아끼면서 정보도 얻고, 더 의미있는 것들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어요.


하지만 TCDC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어요. TCDC는 정부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수익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보벤은 그렇지 않았어요. 그래서 수익을 내는 사업장으로서 비즈니스 모델을 견고하게 만들기 위한 고민이 필요했죠. 그 고민의 과정을 하나씩 따라가 볼게요.



콘텐츠의 원칙: 공유로 방대하게

2022년 대만의 단행본 시장 규모는 약 388억 위안(1조7천억원) 규모예요. 이에 반해 잡지 시장 규모는 약 124억 위안(5,580억원)으로 단행본 시장의 1/3 수준에 그치죠. 절대적인 시장 규모와 수요를 고려하면 잡지보다는 단행본에 무게중심을 두는 게 당연한 일일지 몰라요. 하지만 보벤은 과감하게 잡지 전문 도서관이 되기를 택했어요. 규모는 작지만 잡지만이 다룰 수 있는 정보가 있고, 그 정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상대적으로 작은 시장을 선택한 대신 보벤은 그 안에서의 다양성을 극대화했어요. 보벤은 예술, 패션, 디자인, 건축, 라이프스타일 등 영역을 막론한 잡지들을 취급하고 있어요. 게다가 최신호뿐만 아니라 과월호까지 최대한 완결성 있는 콜렉션을 구비해 잡지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하죠. 또한 대만은 물론이고 일본, 영국, 미국 등 전 세계 각지에서 공수한 6만 권 이상의 잡지들도 보유하고 있고요.



ⓒ시티호퍼스


보벤의 방대한 콜렉션은 '공유'를 통해 유지돼요. 보벤은 1년에 2번 정도, 재고 관리를 위해 일부 잡지를 판매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잡지를 상시 판매하지는 않아요. 모든 과월호를 누락없이 보유하기 위해서예요. 판매를 하게 되면 잡지가 팔렸을 때, 잡지의 특성상 과월호의 재고를 보충하기 어려울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하죠.



ⓒ시티호퍼스


또한 공유에도 원칙이 있어요. 일부 고객에 한해 제한된 권 수의 잡지를 대여해주는 것을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잡지는 보벤 안에서만 볼 수 있어요. 영업 시간 시작부터 마감 시간까지 잡지를 마음껏 읽어도 누구 하나 눈치주는 사람이 없어요. 오히려 입장 시 마감 시간은 저녁 9시라고 설명해 주며 오랫 동안 머무는 것을 권장해요. 중간에 나가서 식사를 하고 올 수도 있고요. 이용하는 동안 출입 횟수에 제한이 없거든요.


이러한 보벤에는 매월 300권 이상의 정기간행물들이 추가돼요. 매월 늘어나는 잡지의 양 때문에 원하는 잡지를 빠르게 찾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에요. 게다가 어떤 잡지들이 새로 추가되었는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알기 어렵죠. 그래서 보벤은 고객들을 위해 맞춤형 추천 서비스를 제공해요. 어떤 잡지 혹은 정보를 찾는지 이야기하면 보벤의 직원이 관련한 잡지를 큐레이션해줘요. 



ⓒ시티호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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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보유한 잡지들을 데이터로 관리하고 추천할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보벤은 아날로그적인 방법으로 고객과의 접점을 만들어 디지털이 소화하기 힘든 고객의 세밀한 취향까지도 반영해요. 보벤에 입고되는 모든 잡지들을 직접 고르고, 내용을 소화하는 창업자와 직원들의 열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에요.



공간의 원칙: 쾌적하고 편안하게

한적한 골목길의 지하 1층에서 잡지 도서관을 운영하던 보벤은 2018년, 같은 건물 1층에 같은 이름의 카페를 오픈해요. 잡지 도서관에서 운영하는 카페답게 보벤이 큐레이션한 잡지가 늘 준비되어 있어요. 매장 입구가 있는 한 쪽 벽면은 통유리로 되어 있어 탁 트인 개방감을 확보하고, 테이블도 듬성듬성 배치해 여유있는 공간감도 연출했어요.



ⓒ시티호퍼스



ⓒ시티호퍼스


지하에 위치한 잡지 도서관 공간도 마찬가지로 여유롭게 구성했어요. 공간은 이용자의 사고나 행동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에요. 어떤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는지에 따라 시간의 가치가 결정되기도 하고요. 보벤도 공간과 사람 간의 유기적 관계를 이해하고, 천천히 읽는 행위의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는 잡지 도서관을 지향해요.


보벤은 매장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언제든 여유롭고 쾌적하게 공간을 누릴 수 있도록 고민해요. 그래서 좌석 수는 약 30석이지만, 입장 인원을 최대 20명으로 제한했어요. 그리고 이용 인원이 20명에 가까워지면 입장객들에게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괜찮냐고 물어보기까지 해요. 최대한의 인원 대신 최소한의 여유를 선택한 거죠.


또한 마치 누군가의 집에 방문한 것처럼 신발을 벗고 가정용 슬리퍼를 신어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요. 덕분에 집처럼 편안한 분위기가 연출되죠. 그리고 기존 도서관의 딱딱하고 건조한 가구들이 아니라, 스타일리쉬하면서도 아늑한 가구들이 손님을 맞이해요. 소파와 푹신한 요기보(Yogibo)의 바디 필로우가 좌석을 대신하죠.



ⓒ시티호퍼스



ⓒ시티호퍼스



ⓒ시티호퍼스


그뿐 아니라 라운지 공간 너머로 롱 데스크 좌석도 있어요. 소파보다는 책상 의자에 익숙하거나 잡지와 함께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에요. 두 공간은 불투명한 스크린으로 분리되어 있어요. 답답하지 않으면서도 공간의 용도를 분리하려는 목적이에요. 읽는 공간과 일하는 공간을 분리하여 고객들의 다양한 니즈를 반영한 거예요.



ⓒ시티호퍼스


게다가 보벤에서는 쾌적한 공간을 위해 음료 외 음식 반입을 금지해요. 물은 보벤에서 제공되고, 그 외의 음료는 보벤이 도서관 위층에서 운영하는 카페에서 주문할 수 있어요. 이 작지만 중요한 요소들이 더해져 지하에 위치한 보벤 공간을 쾌적하면서도 편안하게 만들었어요.



수익의 원칙: 멤버십으로 꾸준하게

보벤은 잡지를 판매하지 않는 것은 물론, 보벤 도서관 안에서 식음료를 판매하지도 않아요. 게다가 이용시간, 이용 가능한 잡지의 수에도 제한이 없고요. 그렇다고 읽는 잡지의 권당 가격을 매겨 이용료를 받지도 않아요. 잡지의 특성상 단행본과 달리 일부만 보거나 가볍게 훑는 것만으로도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고객의 입장에서 책이나 비디오처럼 보는 개수 당 요금을 내기에는 망설여지는 매체인 거죠. 그렇다면 보벤의 수익은 어디에서 나는 것일까요?


보벤은 대여해주는 콘텐츠 개수가 아닌 공간과 서비스에 가격을 매겨 멤버십을 운영해요. 멤버십 제도는 크게 개인 멤버십과 법인 멤버십으로 나뉘어요. 개인 멤버십은 1년에 1,500위안(약 6만7천원)만 내면 보벤을 시간, 횟수 제한없이 이용할 수 있어요. 분기별로 9천위안(약 40만원)을 내는 법인 멤버십은 최대 15명의 직원까지 멤버로 등록할 수 있으며, 한 번에 4명의 임직원이 보벤을 이용할 수 있죠. 모든 멤버십 회원은 150위안(약 7천원)만 더 내면 동반자 1명을 데려올 수도 있고요.


2022년부터는 기존 멤버십 제도에 더해 ‘매거진 피플 클럽’이라는 멤버십을 추가했어요. 매거진 피플 클럽은 잡지 구독 멤버십으로, 매월 10권의 잡지를 대여 및 집까지 배송해주는 서비스예요. 원하는 잡지를 고를 수도 있고, 보벤의 큐레이션을 따를 수도 있어요. 매거진 피플 클럽은 분기별 3,500위안(약 16만원) 또는 연간 1만위안(약 45만원)을 내고 가입할 수 있어요. 물론 기존 멤버십 회원처럼 보벤을 이용하고, 회원 혜택을 받아볼 수도 있고요.


선뜻 멤버십 가입이 망설여진다면 1일 이용권을 이용할 수도 있어요. 1일권은 300위안(약 1만3천원)으로, 1년에 5회 이상만 방문하면 멤버십에 가입하는 것이 더 유리해 멤버십 가입 유인을 높여요. 특히 보벤에서의 일회성 경험이 만족스럽다면 유료 멤버십으로 전환할 확률이 높죠.


2022년 기준 보벤의 개인 멤버십은 2천명 이상, 법인 멤버십은 약 100개 정도예요. 멤버 수가 유지되고, 모두 연간 멤버십이라는 가정 하에 멤버십만으로 400만위안, 한화 약 1억8천만원의 연매출이 발생해요. 무엇보다 멤버십을 기반으로 한 매출이기에 안정적이라는 장점이 있어요.


게다가 보벤의 비즈니스 모델은 비용 측면에서도 유리해요. 방문 목적이 분명하고 멤버 전용 공간의 성격이 강한 보벤의 매장은 목이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눈에 잘 띄거나 유동 인구가 많은 자리에 위치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상대적으로 임대료가 저렴한 지하 1층에 위치해 있어요. 많은 고객들을 응대하거나 음식을 조리하는 등의 역할이 불필요하기 때문에 상주하는 직원도 1명으로 충분해요.


약 40평 규모의 지하 1층인 점을 감안하여 월 임대료를 400만원, 1명의 인건비를 300만원으로 가정하면 연간 고정비는 약 8천4백만원으로 추정할 수 있어요. 매월 300권의 잡지가 입고되고, 1권당 평균 도매가를 보수적으로 1만원이라고 가정했을 때, 잡지 조달 비용은 연간 3천만원 정도예요. 멤버십 매출에서 임대료, 인건비, 잡지 조달비용을 제외하면 연간 6,600만원의 수익이 나는 셈이에요.



ⓒ시티호퍼스


여기에 더해 1일 이용권, 매거진 피플 클럽, 1층의 카페, 유료 이벤트 등에서 발생하는 수익까지 합하면 더 높은 수준의 이익을 기대할 수 있어요. 하나의 매장에서 발생하는 수익을 감안하면 충분히 유의미한 수준이에요.



명성을 떨치기 위해 이름값을 하는 잡지 도서관

'보벤'은 네덜란드어로 '위에'라는 뜻을 가진 단어예요. 한 걸음씩 목표하는 바를 향해 위로 나아간다는 의미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죠. 보벤은 대만 전역으로 보벤을 확대하고, 대만이라는 나라를 세계에서 가장 큰 잡지 도서관으로 만드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어요. 그 첫 걸음으로 타이베이에서부터 더 많은 사람들이 잡지를 볼 수 있도록 작은 시도들을 하고 있고요. 방향성이 뚜렷한 보벤의 점진적인 행보를 보면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보벤은 읽을 거리가 필요한 고객사에 잡지를 큐레이션하여 유료로 대여해줘요. 보벤으로부터 잡지를 빌리는 그 사업장이 하나의 소형 잡지 도서관이 되는 셈이에요. 사업장 입장에서는 잡지를 고르는 시간, 잡지를 매번 구매하는 비용, 재고 부담 등이 줄어 들고요. 게다가 손님들이 보지 않거나 관심이 없는 잡지를 비치해 두는 것보다는 보벤으로부터 사업장을 방문하는 고객들이 좋아할 만한 잡지를 추천받는 것이 더 효과적이에요.


더 나아가 '미니 보벤(Mini Boven)'이라는 이름으로 카페, 레스토랑, 코워킹 스페이스 등과 함께 협업하여 보벤의 라이트 버전을 꾸미기도 해요. 주로 방문하는 고객군과 매장의 성격에 맞춰 큐레이션하는 잡지의 분야를 달리 하고요. 자신이 가진 핵심역량으로 바라던 미래와의 거리를 좁혀가는 중이에요. 이와 같은 시도로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보벤의 청사진이 현실이 될 미래가 오지 않을까요.




Reference

 보벤 공식 웹사이트

 Boven Magazine Library, Neocha

 閱讀設計,設計閱讀——「Boven 雜誌圖書館」創辦人周筵川+彭緯豪專訪, MOT Times

 2022년 대만 문화콘텐츠 산업 정보, 코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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