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도쿄 롯폰기에 희한한 서점이 등장했어요. ‘분키츠’라는 서점인데요. 이곳에는 입장료를 내야만 들어갈 수 있어요. 당시 입장료는 1,500엔(약 1만 5천원, 현재는 1,650엔). 입장 후에 책을 사면 입장료만큼 할인해주는 것도 아니에요. 입장료는 말 그대로 서점에 들어가기 위해 내는 돈이죠. 그냥 들를 수 있는 서점도 널렸는데, 사람들이 이런 서점에 가냐고요?
분키츠의 기획 의도를 알면, 이곳에 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요. 분키츠는 “책을 선택하는 시간이야말로 사치가 있는 시간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입장료를 설정했다.”고 설명해요. 온라인에서 원하는 책을 바로 살 수 있는 시대지만 책을 고르는 시간과 서점에 머무는 것 자체에도 체험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마치 뮤지엄이나 미술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요. 그래서 입장료도 전시회 등과 유사한 가격대로 책정했고요.
경영진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지표는 체류시간의 길이. 회전율이 높아야 매출이 올라갈 수 있으나 방문자들이 얼마나 쾌적하게 시간을 보내고 책과 만날 수 있는가를 더 중요하게 보는 거예요. 취지야 알겠는데, 과연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에 분키츠의 이러한 실험은 성공적일까요? 분키츠의 지표와 행보를 보면 유의미한 답을 찾은 듯해요.
오늘의 스토리는 글로벌 트렌드 유료 구독 서비스, ‘데일리트렌드’에 실린 콘텐츠예요. 라이프스타일 업계의 트렌드 족보와 같은 데일리 트렌드와 함께 분키츠로 떠나 보아요!
분키츠 미리보기
• 책이 팔리지 않는다면 ‘책과 우연히 만나는 시간’을 판다
• 실험삼아 내놓은 두 모델 - 하코네혼바코 & 분키츠
• 구매전환율 40%를 찍었는데, 객단가는?
• 분키츠가 2호점을 낸 의외의 장소
• 브랜드 이름이 아니라 ‘큐레이션’을 파는 프랜차이즈 모델
보통 오프라인 스토어라면 들어와서 뭔가를 구매해야 하는 곳이지요? 물건을 사건, 밥을 사먹건, 음료를 사마시건, 일단 손님이 들어와 뭔가를 구매해줘야 비즈니스가 성립되는 공간이에요.
가게에 들어온 뒤 '구매전환'이 그렇게 잘 일어나는 건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의 스토어들은 더 많은 '트래픽', 즉, 더 많은 손님들이 들어와주길 바란답니다. 다다익선이라고, 일단은 많이 들어와야 구매전환도 커지는 법이니까요. 그런데 2018년, 전혀 다른 실험에 돌입한 한 서점이 있었어요. 주인공은 일본 도쿄의 분키츠(文喫).
"우리 매장 들어오시려면 일단 입장료부터 내셔야 하거든요? 1만 5천 원 정도요. 그것도 세금 별도."
당시 이 매장이 어찌나 화제였던지 한국에서도 너도나도 리포트가 되었던 사례예요. 이 실험이 전개된 지 어언 4년이 넘어가요. 그렇다면 분키츠가 선보인 이 방식은 지금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을까요?
의외로 분키츠는 이 실험을 통해 여러 새로운 기회들을 발견한 듯해요. 오늘은 이 얘기를 좀 해볼까 해요. 분키츠 이야기는 오늘날 오프라인 리테일을 영위하는 기업이라면 한번쯤 귀 기울여야 할 이야기예요. 과연 손님들에게 입장료 같은 걸 받아버려도 될 것인가! 지금부터 분키츠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책이 팔리지 않는다면 ‘책과 우연히 만나는 시간’을 판다
니판(Nippan 일본출판판매 주식회사 日本出版販売株式会社)이란 도서 유통 기업이 2018년 12월 분키츠란 서점 모델을 처음 선보였던 곳은 도쿄 중에서도 '롯본기'였어요. 분키츠 롯본기 점은 롯본기 덴츠 빌딩 1층에 자리하고 있답니다. 전철역 도보 1분의 역세권. 금싸라기죠!
ⓒ시티호퍼스
처음 이 분키츠의 실험이 시작되었을 때, 1,500엔(약 1만 5천원)을 내고 하루 종일 분키츠 서점 내에 머무를 수 있다는 건 마치 '만화방 종일권' 같은 개념으로 받아들여졌어요. 고객 입장에선 1,500엔을 내고 들어오면 분키츠 서점에 구비된 3만 권의 책들을 마음껏 볼 수 있고, 잘 마련된 책상에 앉아 일도 할 수 있고, 사람도 만날 수 있고, 커피와 음료도 마음껏 즐길 수 있었으니까요.
ⓒ시티호퍼스
ⓒ시티호퍼스
ⓒ시티호퍼스
ⓒ시티호퍼스
ⓒ시티호퍼스
얼핏 이 발상은 '서점을 유료 도서관으로 전환하는 건가?' 싶기도 한데요. 니판은 그런 방식을 선호할 순 없는 기업이었어요.
왜냐하면 도서관은 아무리 유료라도 일반 기업이 하기엔 돈이 남지 않는 사업이에요. 학교나 지자체가 자기네 부동산 깔고 해보겠다면 이해가 되지만, 니판 같은 출판 배급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가 롯본기 땅 깔고 앉아서 해볼 사업은 아니랄까요?
하지만 니판은 뭐라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어요. 지난 20년간 일본 내에서의 도서 판매량은 거의 반토막이 났거든요. 1996년에 10,931억 엔(약 10조 9천억원)의 판매량을 자랑하던 일본의 도서 판매는 2020년에는 6,661억 엔(약 6조 6,600억원)까지 40% 가량 떨어집니다. 기존의 니판 비즈니스로는 이 추세를 따라 기업 매출도 줄어드는 건 시간 문제였죠.
Source: 2022年版 出版指標 年報
니판은 이때, '책을 1차적으로 구매하는 시대가 지났다면, 2차적으로 팔아보리'라는 신박한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그렇게 탄생한 신박한 비즈니스 모델 중 하나가 우리가 알고 있는 분키츠, 또 다른 하나가 우리가 잘 모르는 '책 호텔', '하코네혼바코(箱根本箱)'예요.
실험삼아 내놓은 두 모델 - 하코네혼바코 & 분키츠
책을 2차적으로 판다는 건요. 1차로는 딴 걸 팔고, 거기 묻어가면서 책을 또 스무스하게 얹어서 팔아보겠단 전략이에요.
'3만 권의 책이 구비된 쾌적한 공간에 대한 종일권을 사시고, 느긋하게 책을 읽으시다가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시면 또 사시죠'란 꿩먹알먹을 시전하고 싶었던 게 분키츠 서점이라면요. 하코네혼바코는 '1만 2천 권의 책이 구비된 호텔에서 숙박하시면서 책 보며 쉬시다가, 마음에 드는 책 있으면 또 구매하시죠' 라는 모델이죠.
이 모델은 분키츠가 태어나기 몇 달 전인 2018년 8월에 먼저 태어났어요. 가나가와현에 있는 하코네 온천 인근에 위치한 이 호텔의 숙박료는 무려 3~5만 엔(30~50만원)!
ⓒ하코네혼바코
ⓒ하코네혼바코
ⓒ하코네혼바코
ⓒ하코네혼바코
ⓒ하코네혼바코
이 호텔은 오픈 후부터 지금까지 제법 인기리에 운영되고 있어요. 근데 왜 분키츠만큼 유명하지 않냐구요? 그건 객실이 18실밖에 없어서예요. 분키츠는 롯본기 한복판에 떡하니 들어선 덕에 늦둥이인데도 엄청난 화제몰이를 할 수 있었던 반면, 하코네혼바코는 그럴 수 없었던 거죠.
구매전환율 40%를 찍었는데, 객단가는?
분키츠가 오픈한 지 이제 어언 4년이 넘었는데요. 과연 이 모델은 돈이 되는 비즈니스일까요? 아마 ‘이 매장 자체가 돈이 되는 지는 모르겠지만, 이 모델로 돈을 버는 방법은 알아냈습니다.’ 정도가 현재 분키츠가 도달해 있는 지점인 지도요.
닛케이MJ에 따르면, 현재 분키츠 롯폰기 지점은 내점객의 40%가 책을 구매하고, 구입단가는 통상 서점의 3배에 달하는 3000엔(약 3만원) 정도라고 해요. 즉,1650엔(과거 1500엔에서 올랐어요)의 돈을 내고 입장한 고객의 40%가 또 3000엔 정도를 지불한다는 거예요. 대단하지요?
물론 이건 "'입장료 받는 서점'이란 걸 지어놓았더니 저절로 저렇게 되었습니다." 하는 상황은 아니에요. 분키츠는 판매율을 높이기 위해 정말 갖은 노력을 다했어요. 롯본기 한복판에서 만화방 장사를 할 수는 없다 아닙니까.
대표적으로는 오픈한 지 얼마 안되어 '센쇼(選書)', 즉 직원들이 책을 골라주는 서비스를 마련했어요. 분키츠를 예약하기 전에 읽고 싶은 책 같은 걸 '센쇼 히어링 시트(選書ヒアリングシート)'라는 양식에다 적어내면, 분키츠 직원들이 '요런 책 함 읽어보세요.' 하고 엄선을 해준다네요.
이 센쇼 서비스는 그 자체로도 유료인데요. 가격이 얼만지 아세요? 1회 이용시 5500엔. 다행히 입장료는 포함이에요. 그러니까 이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책을 사기 전에 약 55,000원을 센쇼해 달라고 선지출을 하는 거지요! 고객 후기들을 보니까 만족도가 되게 높더라구요. 한번에 5~7권을 추천해 주는데, 왜 이 책을 추천하는지 한 권 한 권 코멘트를 남겨주는 감동이 있대요.
닛케이 기자가 이걸 직접 해봤어요. 양식을 적어내고 분키츠에 방문했더니 점장이 마중 나오면서 '뭔가 자극을 요구하고 있는 것 같네요.' 하더랍니다. 그러더니 하드보일드계 소설과 '세계에서 가장 구수한 음식(世界一くさい食べもの)' 같은 미묘한 셀렉션을 추천해 줬대요. 기자가 말하길, '왠지 손을 놓을 수 없어 '죽기 전에 맛보고 싶은 1001 식품'까지 총 4권을 구매해버렸습니다.' 추천이 마음에 들었던 거죠.
이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은 일반 고객보다 재방문률이 3~40% 높아요. 또한 분키츠는 이 센쇼 서비스를 확대해 '배송 센쇼'라는 서비스도 함께 운영하고 있어요.
일종의 '분키츠를 집에서도 체험하세요' 라는 프리미엄 모델인데, 가격이 얼마게요? 22,000엔부터 44,000엔! 한국돈으로 최대 약 44만 원을 내면, 분키츠 쪽에서 24만 2천 원 정도어치의 책을 엄선해서 보내준다고 해요. 심지어 반품이 안되는데도요.
분키츠 배송센쇼 서비스 ⓒ분키츠
분키츠가 2호점을 낸 의외의 장소
현재 이런 분키츠의 성과가 실제로 롯본기란 입지에 비해서는 얼마나 유의미한 것일까요?
이를 판단하기 위해선 더 많은 자료가 필요해 보여요. 하지만 적어도 니판은 이 매장을 실험실 용도로는 톡톡히 활용하고 있는 듯요. 말 그대로 '파일럿', 즉, 추가적 기회를 발견하는 살아있는 실험장인 거죠. 왜냐면, 2021년 3월 31일, 니판은 분키츠 2호점을 후쿠오카 텐진에 열었는데요. 2호점부터는 1호점이랑 달리 벌써 수익성의 가닥을 잡은 듯한 모습이거든요.
분키츠 2호점이 어디에 들어가 있게요? 바로 백화점! 2호점은 텐진의 오래된 백화점 이와타야 미츠코시 본점 안에 문을 열었답니다. 자, 이렇게 되면 교통의 요지에 들어가면서도 부동산 입지 비용이 롯폰기처럼 잔인하지 않을 수 있지요?
그리고 신기한 것이요. 분키츠 롯본기 점은 음식 반입이 불가거든요. 근데 후쿠오카점에선 아예 대놓고 분키츠가 볶음밥과 버거를 팔고 있어요. 이렇게 말이죠.
ⓒ분키츠
이 2호점은 또 아동존과 카페존을 따로 마련하고 있는데요. 아무래도 백화점에 아이를 대동하고 오는 엄마들이 많고, 이들을 겨냥하는 분키츠 모델이다보니 엄마랑 아기랑 먹을 간단한 점심류를 함께 파는 거지요. 아래가 2호점 아동책방 코너예요.
ⓒ분키츠
브랜드 이름이 아니라 ‘큐레이션’을 파는 프랜차이즈 모델
이 남의 땅에서 장사하는 꿀맛을 본 뒤, 2022년 초 니판은 '히라쿠(ひとつ)'라고 하는 자회사를 설립했어요. 이 히라쿠가 하는 일은 하코네혼바코나 분키츠처럼 책의 2차 판매를 전담하는 곳이랍니다.
바로 이 히라쿠에서 올해부터 분키츠를 일본 전국으로 확산시키겠단 전략을 세우고 있는데요. 실제로 분키츠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면, 분키츠는 지금 별도 메뉴를 따로 두어 이와타야 백화점 같은 '법인' 파트너들을 찾고 있어요. "우리에게 땅을 대준다거나 우리랑 함께 도서관을 만들 기업 어디 없나요?"라고 제안하는 식이에요.
분키츠는 이 모델을 '공창 라이브러리'라고 부르는데요. "꼭 분키츠라는 말을 안써도 돼요. 여러분 회사 이름 쓰고 싶으시면 쓰셔요."라는, 나쁘게 말하면 줏대 없고, 좋게 말하면 유연한 협력 전략을 취하고 있어요.
사실 니판은 굳이 막 자기네 브랜딩 같은 걸 앞세울 필요가 없는 기업이거든요. '책을 납품' 하는 게 본업이다보니 내 유통도 있긴 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남의 유통에 책을 넣으며 살아온 세월을 가지고 있죠. 그러니 ‘니 꺼 내 꺼가 뭣이 중헌디?’라는 자세를 취할 수 있는 거예요.
누가 단체로 라이브러리를 개설해주면 니판은 책을 그냥 큰 물량으로 떼어 팔 수 있는 기회가 되거든요. 실제로 Uniqlo의 사내 도서관도 니판이 만들었고. 또 고쿠요 문구의 The Campus 매장 안에도 라이브러리가 있는데 이 또한 니판이 만든 거랍니다.
지금 니판은 '백화점도 내게 오시오. 사원용 도서관 만들 기업이랑, 북카페 만들 기업도 내게 오시오.'라며 더 많은 기업 파트너를 찾고 있어요. 이제 분키츠란 카드가 있으니 파트너를 찾기 훨씬 유리해지지 않았을까 하면서요. 흥미롭지요?
분키츠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영감은 선명해요. 정리하면서 마무리 할게요.
첫째, 뭐가 잘 안 팔릴 땐 그걸 막 더 팔려고 밀어붙이지 말고 2차 판매할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
둘째, 첫 번째 파일럿에서 수익을 못 봤어도 가능성을 발견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
셋째, 가능성을 발견했으면 재빨리 조건을 바꾸어 두 번째 파일럿을 실행해 보라는 것.
넷째, 다 나 혼자 하려고 할 게 아니라 수요를 잘 꿰어 맞추면 협업을 통해 생각보다 꿀 사업을 할 수 있다는 것.
Refer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