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47현에서 발견한 제품의 본질

d47

2022.05.15

“오랜 시간 이어져 온 것들 안에는 살아가면서 중요하게 여겨야 할 기본이 담겨 있습니다.” ‘d47’이 제안하는 ‘롱 라이프 디자인’의 핵심입니다. 철학이 담긴 아름다움보다 더 가치 있는 멋은 없습니다.



d47 미리보기

• 문제는 해결하라고 있는 법

 #1 철학으로 구심력 세우기

 #2 협력으로 원심력 만들기

 #3 실천으로 점프력 키우기

 영리와 비영리 사이에서 영리하게






“무슨 말을 할지보다 어떻게 말할지가 중요합니다. 어떻게 말할지보다 누가 말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윈스턴 처칠이 남긴 말입니다. 어느 영역에서건 중요한 메시지는 기억의 범위를 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는지에 따라 메시지의 전달력이 달라집니다. 표현을 달리하여 메시지에 생기를 돌게 하는 것도 의미 있지만, 깊이를 더하는 건 더 중요합니다.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증명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재주입니다. 처칠이 “누가 말하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일본 이자카야 업계의 전설로 불리는 우노 다카시도 조언에 깊이가 있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그가 《장사의 신》이라는 책을 통해 풀어낸 메시지는 경영학 개론에서 다루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경험담을 근거로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누구도 할 수 없는 이야기로 만듭니다.


그중에는 경영학에서 말하는 정석과 다른 통찰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던져야 할 질문에 대한 생각이 대표적입니다. 그는 장사를 시작할 때 ‘어떤 손님을 타깃으로 했을 때 장사가 잘될까?’라는 물음보다 ‘어떤 손님을 타깃으로 했을 때 즐거울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고 합니다. 시장의 크기가 아니라 스스로가 선호하는 타깃을 대상으로 시작해야 그들과 교류하며 오래도록 장사를 해나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업의 출발점이 다르면 사업의 성공 방정식에도 차이가 생깁니다. 그렇게 우노 다카시는 수많은 이자카야 운영자 중에서 전설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돈을 추구하는 것이 사업의 출발점이 아닌 사례는 또 있습니다. ‘D&Department 프로젝트’의 나가오카 겐메이입니다. 그는 중고 상품 판매로 시작해 전국적 관심을 받는 프로젝트를 만들어냈습니다. 우노 다카시와 차이가 있다면 사업가로서의 즐거움이 아니라 디자이너로서 가지고 있던 디자인에 대한 문제의식을 해결하고자 사업을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해결하라고 있는 법

D&Department 프로젝트는 일본 47현의 오래가는 디자인 제품을 모아 판매하는 중고 매장입니다. 형태적으로만 보면 여느 중고 판매점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를 시작한 계기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d47 디자인 트래블 스토어에서 일본 47현에서 선별한 디자인 제품들을 판매합니다. ⓒ시티호퍼스


1998년 즈음, 도쿄에는 중고 판매점이 급증했습니다. 경기 불황의 여파 등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나가오카 겐메이는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현상을 해석했습니다. 그는 판매를 유도하기 위해 신상품의 주기가 빨라진다는 점을 핵심 원인으로 생각했습니다. 최신형을 구입하기 위해 이전 모델을 중고로 판매한다는 것입니다. 새로 나온 제품이라 디자인이 더 세련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유행하는 제품이어서 구매하는 것을 문제로 봤습니다.


그는 새로운 제품의 디자인이 더 나은 것이 아니라 시간이 증명한 디자인, 생명력이 긴 디자인이 바람직한 디자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수십 년 이상 지난 생활용품과 잡화를 구해서 정가에 판매하는 D&Department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제품 본연의 기능에 대해 고민하고, 그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디자인한 제품이 디자인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D&Department 프로젝트는 중고 판매의 수요와 트렌드만 좇았다면 탄생할 수 없었던 가게입니다. 시장 논리에 따랐다면 가격 민감도가 높은 중고 매매의 특성상 수십 년 전에 만들어진 중고 제품을 할인가가 아닌 정가에 사는 고객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가오카 겐메이에게 현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롱 라이프 디자인(Long life design)’을 새로운 소비문화로 뿌리내리려는 의도와 의지가 있었기에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1 철학으로 구심력 세우기

철학을 비즈니스로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추상적인 내용을 구체화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시행착오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설명으로 표현할 수 있는 단계에 올라서면 철학의 영향력이 더 커집니다.


나가오카 겐메이도 문제의식과 철학을 가지고 프로젝트를 시작했지만, 가게 위치를 찾는 것부터 난항을 겪었습니다. 원래의 계획은 장인들이 만든 디자인 제품을 입지가 좋은 장소에서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기준으로 번화가에 괜찮은 장소를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건물주가 카페는 안 된다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그는 제약 조건 때문에 입지에 대해 다시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찾기 쉬운 장소와 카페 불가능이라는 2가지 요소였습니다. 그가 디자인 업계의 문제점이라고 말한 것과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찾기 쉬운 장소’는 대량생산과, ‘카페 불가능’은 전문 업계임을 내세우며 일반인은 상대하지 않겠다는 오만과 겹쳤습니다. 그래서 ‘번화가와 떨어져 있지만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만이 찾아올 수 있는 곳’으로 입지 선정 기준을 바꿨습니다.


제품 선정 기준도 마찬가지입니다. 철학을 구현하며 매장을 차별화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철학을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매장을 늘리기 위해서는 감에만 의존하는 것에서 탈피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제품 선정 기준을 구체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실체 없이 이름만 알려지는 것을 경계한 것입니다. 5가지의 제품 선정 기준과 롱 라이프 디자인 10개조 등이 철학을 명문화한 결과입니다.



d47이 추구하는 롱 라이프 디자인에 대한 철학을 매장 입구에서 소개합니다. ⓒ시티호퍼스


하지만 철학을 가지고 사업을 시작한다고 해도 모든 것을 사전에 정해놓을 수는 없습니다. 이론과 달리 다양한 변수가 있기 때문에 사업을 펼쳐나가며 현실에 맞게 조정해야 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철학을 행동 원칙으로 명문화할수록, 진정성이 전해지고 추진력도 생깁니다.



#2 협력으로 원심력 만들기

D&Department 프로젝트의 철학에 사람들은 기대 이상으로 반응했습니다. 가게가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프랜차이즈 요청도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나가오카 겐메이는 거절했습니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 만든 가게도 아니고, 제공할 수 있는 노하우가 축적되어 있지도 않은 상황이었기에 재현 불가능한 가게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의 철학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선 일본의 주요 6개 도시 정도에는 가게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2000년에 D&Department 프로젝트 첫 매장을 내고 2년 만에 오사카에 2호점을 오픈했습니다. 하지만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직영점을 추가로 세우기엔 자금이 부족했습니다. 그때부터 외부의 제휴 요청에 대해 다시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운영 원칙과 투자 원칙을 세우고, 그동안의 프랜차이즈 형태와 다르게 설계해 협업이 가능한 형태로 만들었습니다.


운영 원칙은 3가지입니다. 본부가 선택한 롱 라이프 디자인 상품을 판매하는 것, 해당 지역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일과 물건을 판매하는 것, 먹고 마실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교류의 장이 되는 것. 중심이 되는 철학과 지역의 색깔을 균형감 있게 풀어내겠다는 뜻입니다. 또한 지역점의 가게 이름은 ‘D&Department 프로젝트 + 지역명 by 투자회사명’으로 짓기로 했습니다. 철학에 공감한 투자자를 명시해 알리는 것입니다. 투자자를 개인이 아니라 회사로 선정하고 명시하는 또 다른 이유는 D&Department 프로젝트로 큰 수익을 내기 어렵기 때문에 투자자들이 이 프로젝트를 전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부대사업으로 접근하길 원해서입니다.



상품뿐만 아니라 D&Department의 철학에 부합하는 공간을 발굴하여 추천합니다. ⓒ시티호퍼스


3호점인 홋카이도점은 ‘3KG’라는 회사와 제휴하여 연 첫 번째 매장입니다. 외부 제휴를 통해서도 철학을 공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매장이기도 합니다. 3개의 매장을 오픈하며 나가오카 겐메이는 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됩니다. 애초에 D&Department 프로젝트는 6개 지점 정도를 만드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47현으로 확장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일본의 각 지역에서 오랜 시간 동안 이어져 내려온 물건과 정신을 계승하고 재창조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디자인의 저변을 넓히겠다는 것입니다.



#3 실천으로 점프력 키우기

D&Department 프로젝트를 47현으로 확대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결정적 계기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지방 도시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는데, 공허함이 느껴졌습니다. 단상에서 아무리 화두와 메시지를 던져도, 강연이 끝나면 제자리였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해나가는 계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이야깃거리에 그치고 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하는 문제를 실제로 해결하기 위해서 D&Department 프로젝트를 47현으로 확장해야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원대한 비전이지만 할 수 있는 일부터 차근차근 해나갑니다. 우선 외부 업체들과 제휴하여 각 지역에 지점을 지속적으로 늘립니다. 매년 꾸준히 매장을 열어 2016년에는 10개 지역으로 확장했습니다. 목표의 5분의 1 이상을 달성한 셈입니다.


또한 지역의 매력을 종합적으로 개발하기 위해 2009년부터 <d 디자인 트래블>이라는 디자인 관점의 여행 잡지를 발간했습니다. 47현의 롱 라이프 디자인을 소개하는 것을 목표로 매년 3곳씩 취재하여 각각 한 권의 책자로 만듭니다. 광고를 최대한 늘리려는 보통의 잡지와 달리 <d 디자인 트래블>은 철학에 공감하는 지역의 광고주를 섭외하고, 그 광고주가 제작비의 반을 책임집니다. 광고주에 휘둘리지 않고 오래도록 남을 잡지를 만들려는 의도입니다.



각 현의 롱 라이프 디자인을 소개하는 잡지 <d 디자인 트래블>을 발행합니다. ⓒ시티호퍼스


그뿐 아니라 47현으로 저변을 확장하려는 비전을 홍보하기 위해 시부야 히카리에 쇼핑몰에 ‘d47’을 만들었습니다. 도쿄의 요지에 자신이 꿈꾸는 미래상의 축소판을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47현의 롱 라이프 디자인을 ‘d47 박물관’에 전시하고, ‘d47 디자인 트래블 스토어’에서 판매하며, 실제 지방 식재료를 사용한 식사와 디저트를 ‘d47 쇼쿠도’에서 제공합니다. 일본 47현에서 발견한 제품의 본질을 체험할 수 있는, 시공간을 초월한 장소인 셈입니다.



ⓒ시티호퍼스



지역의 식재료로 만든 식사와 가공식품을 판매하는 d47 쇼쿠도입니다. ⓒ시티호퍼스



영리와 비영리 사이에서 영리하게


“오랜 시간 이어져 온 것들 안에는 살아가면서 중요하게 여겨야 할 기본이 담겨 있습니다.”


D&Department 프로젝트가 제안하는 롱 라이프 디자인의 핵심입니다. 나가오카 겐메이는 유행과 트렌드만 추구하는 현 세태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롱 라이프 디자인을 제안하며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부자이기 때문에 돈 버는 것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철학을 바탕으로 문제를 직접 해결해보기 위해 발 벗고 나섰던 것입니다. 최소한의 대출로 가게를 구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철학에 맞는 제품을 선정해 판매하는 것까지 고생길을 자처하며 사업을 키웠습니다.


문제의식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성을 추구하고 있고, 사업을 통해 가능성을 증명하자 여기저기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비영리 기업처럼 보이는 D&Department 프로젝트가 지역적 확장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제휴의 원칙도 철학을 흩트리지 않도록 설계하여 비영리 기업처럼 보이면서도 영리를 추구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들었습니다. 영리한 접근이라 볼 수 있습니다.


D&Department 프로젝트. 이름에 굳이 프로젝트라는 단어를 넣은 이유는 아직 실험 중이니 과정을 중시해달라는 바람에서입니다. D&Department 프로젝트는 철학과 협력, 그리고 실천을 바탕으로 일본 47현 제품의 본질을 찾겠다는 비전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하나씩 증명해나가고 있습니다. 나가오카 겐메이가 꿈을 실현할 수 있을지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일이지만, 그가 이름에 프로젝트라는 단어를 붙였듯이 그의 실험은 현재 진행 중입니다.






Reference

• 디앤디파트먼트에서 배운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전하는 가게 만드는 법

• 디자이너 생각위를 걷다(나가오카 겐메이 지음, 이정환 옮김, 안그라픽스)

• 디자이너 함께하며 걷다(나가오카 겐메이 지음, 이정환 옮김, 안그라픽스)

• 디자인 하지 않는 디자이너(나가오카 겐메이 지음, 남진희 옮김, 아트북스)

• 장사의 신(우노 다카시 지음, 김문정 옮김, 쌤앤파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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