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아 변화에 지지 않는 것들이 있어요. 일본의 작은 온천마을, 유노히라 온천마을에 위치한 ‘료칸 야마시로야(旅館 山城屋)’가 그래요. 야마시로야는 가족이 경영하는 객실 8개짜리 료칸으로 지은지 50년이 넘었어요. 일반 주택보다는 조금 큰 사이즈이긴 하지만, 여느 일본 온천 마을에 있을 법한 작고 오래된 료칸이죠. 유명 대형 료칸들처럼 현대적 설비를 자랑하거나 트렌디한 분위기의 카페를 겸하고 있지도 않고요. 그런데도 팬데믹 이전에는 연일 외국인 손님들로 가득하고, 객실 가동률이 거의 100%에 이르렀었죠. 언뜻 보면 시대를 역행하는 모습을 가진 채로도 어떻게 야마시로야는 외국인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던 걸까요?
사실 야마시로야가 줄곧 장사가 잘 되었던 것은 아니예요. 유노히라 온천 마을은 20세기 초중반까지는 명성 있는 온천 명소였지만, 근처에 새로운 온천 지역이 발달하고 시대의 트렌드에 맞춰 대응하는 곳들이 생기면서 1980년대부터 점차 쇠락하기 시작했죠. 마을 전체가 쇠퇴하니, 야마시로야도 별 수 없었어요. 겨우 명맥만 이어오던 야마시로야가 다시 일어서기 시작한 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재발견하면서부터예요. 야마시로야의 대표, 니노미야 겐지는 50년의 시간동안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큰 자산이라고 생각했어요. 대신 대규모 료칸이나 현대적인 시설의 료칸이 흉내낼 수 없는, 작고 오래된 료칸만이 갖고 있는 매력을 외국인에게 적극적으로 알리고, 좀 더 세심한 접객을 할 수 있도록 노력했어요. 안락함이 최고의 대접이라는 야마시로야의 기본 이념에 충실했던 거죠.
‘한 바퀴 뒤처진 선두주자’
육상 트랙 경기에 있는 말로, 니노미야 겐지는 야마시로야 료칸을 여기에 빗대어 설명해요. 육상 경기에서 여러 선수가 동시에 출발해 달리다 보면 어느 새 1등 선수가 가장 느린 선수와 1바퀴 가까이 차이가 나 가장 느린 선수의 뒤에서 달리는 경우가 생겨요. 이 때 가장 느린 선수가 마치 선두주자인 것처럼 보인다는 의미예요. 혹은 지금은 뒤처져 있지만 단숨에 선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고요. 야마시로야는 1등 선수는 아니지만, 시대가 한 바퀴 돌아 다시 한 번 과거의 영광을 누리고 있어요.
오래된 흔적에서 희소한 매력으로
시간이 축적한 힘은 비단 오래된 료칸에만 있지 않아요. 1975년 준공한 부산 해운대의 아파트, ‘대림맨숀’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요. 대림맨숀은 여전히 입주민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이면서 동시에 여행객들이 북적이는 곳이에요. 이 곳에는 주거 공간과 상업시설이 공존하기 때문인데요, 흔히 떠올리는 주상복합 아파트처럼 층을 경계로 분리된 형태가 아니라 복도를 공유하는 방식이에요. 재건축이나 리모델링 없이 오래된 아파트의 빈티지한 운치를 그대로 살려 상업 공간을 개발한 결과, 독특한 분위기와 공간 경험으로 집객력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렇다고 오래된 하드웨어에 무작정 새로운 공간을 접붙인다고 해서 고객이 찾아올리는 만무해요. 대림맨숀은 준공한 지 48년이 지났지만 주변부로 밀려나지 않을 조건을 갖추고 있어요. 첫째, 입지예요. 해운대 해수욕장이 걸어서 2분 거리에 있고, 인근에는 호텔과 고급차 전시장이 줄지어 있어 접근성이 뛰어나요. 물론 유동인구 중 대림맨숀을 모르는 사람들은 흘러가 버리겠지만, SNS 등으로 관심이 생긴 잠재고객 중 상당수는 마찰 없이 끌어당길 위치라고 볼 수 있죠. 여행지 리스트에 들어가도, 주말 나들이 동선에 추가하기에도 부담 없으니까요.
자동차 전시매장(좌) 대림맨숀(우) ©네이버지도
©진성훈
거주하는 내 방에서 구매하는 매장으로
대림맨숀은 처음부터 주거시설로 건축된 공간이기에, 일반적인 상업공간을 기대한다면 다른 점을 마주할 수 밖에 없어요. 가령 제품을 보여주기에 최적화된 규모라거나 네모반듯한 평면 설계, 효율적인 동선 등은 대림맨숀에서 찾기 어려운 요소인데요. 이러한 포인트는 아이러니하게도 색다른 고객 경험의 기반이 되어요.
대림맨숀 입구 현판 ©진성훈
대림맨숀에 입점한 매장들은 이렇게 주거공간과 상업시설이 공존하며 자아내는 독특한 분위기를 인테리어에도 적극 활용해요. 가령 103호에 입점한 ‘타르트 훌리건’은 10평 남짓의 작은 규모로 테이크아웃 전문점이에요. 스테인리스 싱크대에 캐릭터 로고가 찍힌 상자를 올려놓는다거나, 가정집에서 쓸 법한 선반에 머그컵, 티셔츠와 같은 MD 상품을 진열해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해요. 또 쇼케이스 옆 삼각형으로 삐쭉 튀어 나온 공간은 베란다처럼 모래를 채우고 창문에 로고 스티커를 붙였고요.
타르트 훌리건 ©진성훈
논픽션 무인 쇼룸 ©진성훈
대림맨숀은 5층 규모의 주상복합 건물이기에 입점할 수 있는 매장 개수가 제한적이에요. 실제로도 평균 5~8개의 매장만이 운영되고 있고요. 이러한 제한은 스몰 브랜드가 입점할 공간을 고를 때, 백화점처럼 많은 매장이 한 곳에 몰려있는 것보다 매력적인 조건일 수 있어요. 백화점에 방문한 고객 중 ‘우리 매장’까지 들어오는 고객의 비율은 낮을 수 밖에 없죠. 모든 매장을 다 방문하는 고객은 없기에, 이미 잘 알려진 브랜드와 경쟁해야 해요. 하지만 대림맨숀의 방문객은 상대적으로 우리 매장에 방문할 확률이 높아요. 규모가 작고, 탐험의 욕구를 자극하도록 설계되었으니까요.
뿐만 아니라 매장의 규모가 작은 점도 스몰 브랜드의 입점을 불러요. 30평을 넘지 않는 매장에 자동차, 가전 제품, 프랜차이즈 사업 등 대형 업체가 들어오긴 어려워요. 디자인 소품과 패션 등 소위 힙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가 입점하기에 더 적합할 거예요. 규모가 작고 오래된 건물인 만큼 임대료가 합리적이라는 점도 감안해야겠고요. 결과적으로 건물의 물리적 형태와 용도가 대림맨숀의 입점 조건을 만들었어요.
©진성훈
실제로 에크루에서는 1~2개월 단위로 새로운 콘셉트로 디자인 소품을 바꾸고, 논픽션은 일러스트레이터 김참새 작가의 전시를 열었어요. 또, 순순 티룸은 상시 오픈하는 대신 커피 로스터리와 협업하는 등 비정기적으로 팝업 스토어를 오픈했고요. 이렇게 새로운 시도가 가볍게, 끊임없이 일어나는 구조야말로 요즘 시대에 브랜드들이 생명력을 갖는 방식이기도 해요. 어쩌면 오래 전에 지어진 대림맨숀이 그 어떤 공간보다 ‘지금의 방식’을 체화한 오프라인 매장이 아닐까요?
낡은 건물에 최후란 없다
대림맨숀은 공간의 목적에 새로운 쓸모를 더해 생명력을 연장했어요. 새로움을 구현하는 방식에서 공간이 기존에 갖고 있던 구조나 세월의 흔적을 지우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재해석해 신선한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고요. 공존과 조화를 선택한거죠. 이것이 대림맨숀만이 가진 분위기의 정체가 아닐까 싶어요. 옛것을 강요하지도, 지금의 시선으로 옛것을 뒤바꿔 버리지도 않은 공간은 고유한 가치를 가지니까요.
이렇듯 부산에는 낡은 건물의 최후가 쇠락이나 철거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들이 많아요. 심지어 대림맨숀과 달리 공간의 원래 목적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아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공간들이 심심치 않게 부활하고 있죠. 고려제강의 폐공장을 개조해 만든 거대 복합문화시설 ‘F1963’, 동네 수영장을 카페로 만들어 주민들의 쉼터가 된 ‘젬스톤’, 40년 넘도록 쌀집, 슈퍼 등을 거친 오래된 벽돌 건물에 들어선 빈티지 편집숍 ‘메이드프롬’ 등 어렵지 않게 그런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어요. 하나같이 시간의 흔적을 지우는 대신, 과거의 흔적 위에 새로운 시간을 쌓아가는 곳들이에요. 쓸모가 없어졌다는 건, 사라져야 할 시간이 아니라 또 다른 쓸모를 찾아야 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 해요.
Refer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