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 가방에 브로치를 달아 중고로 팔면 누가 사갈까요? 오리지널과 많이 달라진 모습에 사려는 사람도 많지 않을 테고, 가격도 높게 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새 제품과 얼마나 비슷한가’가 중고 가격의 판단 기준이니까요. 그런데 이 기준을 거스르는 브랜드가 있습니다. 가방에 와펜, 스트랩 등 장식을 덧붙여 판매하는 ‘히스토리 바이 딜런(History by Dylan)’입니다.
물론 맥락 없이 꾸미는 것은 아닙니다. 가방 하나 하나마다 테마를 가지고 있죠. '로맨틱 아워(Romantic Hour)', ‘사랑스러운 젊음(Lovely Youth)’ 등 의미에 부합하도록 각기 다른 시대의 빈티지아이템을 조합해 덧붙입니다. 특히 각별한 의미가 담긴 가방이라면 소품도 그 의미에 맞게 선정합니다. 가령 파리로 이사가는 20년 지기 친구에게 선물하는 가방이라면, 1920년대 파리에서 만들어진 엠블럼을 사용하는 식으로요.
‘The queen from Paris’라는 테마로 재탄생한 샤넬 가방입니다. ‘파리에서 성공하길 바랄게’라는 말과 함께 선물해준다면, 매일 들고다니고 싶을 것 같습니다. 기성 제품에 시간과 이야기를 기워낸 바느질이 돋보입니다. ©히스토리 바이 딜런
‘Collect, Collage, Create (CCC, 수집하고 콜라주해서 새로운 걸 창조한다)'
히스토리 바이 딜런이 지향하는 브랜드의 방향성입니다. 제품을 직접 만들지 않고도, 빈티지가 가진 스토리의 가치를 자산화한 사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빈티지가 재미있는 점은 스토리 외에도 발굴해낼 가치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부산에는 스토리가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빈티지 시장을 개척한 브랜드가 있습니다. 그 비결을 히스토리 바이 딜런 식으로 요약하면 ‘Acquire, Repair, Trust (ART)’로, 매입하고 복원해서 신뢰를 창조하는 ‘빈티지아이 콜렉터스 클럽’의 이야기입니다.
#1. 빈티지 시장의 미개척지
자동차는 구매하자마자 감가상각이 일어납니다. 스마트폰도 개봉하는 순간 가치가 떨어지고요. 게다가 시간이 갈수록 중고 가격은 성실하게 내려갑니다. 제품에 흠집이 생기고, 기술이 발전하고, 신제품이 출시되는 등 다양한 이유로요. 하지만 이런 감가 상각을 이겨내는 무기가 있습니다.
마치 마법처럼 ‘빈티지’라는 이름이 붙으면 시간은 가치의 방향을 위로 역전시킵니다. 문제는 ‘빈티지’라는 단어가 남용되면서 의미가 모호해졌고 작동하는 방식도 아리송하다는 점입니다. 사전을 보면 좀 더 명확해집니다. 빈티지란, ‘포도를 수확하고 와인을 만든 해’를 말합니다. 특정 년도의 기온과 강수량, 일조량이 포도의 맛과 와인의 품질을 결정하기에 빈티지는 중요한 기준입니다. 그저 오래되어서 좋은 것이 아니라, 복제할 수 없는 제품에 높은 가치가 매겨진 결과가 곧 빈티지인 셈입니다.
오래된 제품이 가치를 지니려면 만들어진 시기의 고유한 흔적이 필요합니다. ©빈티지아이 콜렉터스 클럽
빈티지아이 콜렉터스 클럽의 내부.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지팡이 가게 ‘올리벤더스’를 모티프로 디자인해 고풍스러운 멋이 살아있습니다. ©빈티지아이 콜렉터스 클럽
빈티지아이 콜렉터스 클럽은 상대적으로 주목이 덜하지만, 매력적인 시장을 발굴했습니다. 바로 빈티지 시계입니다. 스마트워치가 보편화될 만큼 기술이 발달한 21세기지만 빈티지 시계는 디지털과 경쟁하지 않습니다. 아날로그 시계 브랜드가 시계의 가치 판단 기준을 ‘시간 알림의 정확도’에서 ‘사치품’으로 옮겨 놓은 덕분입니다. 덕분에 아날로그 시계 시장을 선택한 빈티지아이 콜렉터스 클럽은 유행에 휩쓸리지 않으면서도 구매력 있는 고객을 확보했습니다.
롤렉스 오이스터 퍼페츄얼 봄베이입니다. 롤렉스는 세월이 지나도 가치가 변치 않는 빈티지 시계의 대명사입니다. ©빈티지아이 콜렉터스 클럽
물론 매입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아날로그 시계 브랜드가 가치 판단의 중심을 옮겨 왔 듯, 빈티지아이 콜렉터스 클럽은 빈티지 시장의 경쟁력을 옮겨왔거든요.
#2. 기준을 바꾸다: 제조에서 복원으로
빈티지아이 콜렉터스 클럽의 고객 80%는 서울에서 방문합니다. 서울의 많은 시계 전문점을 마다하고 부산까지 방문하게 하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어디에도 없는 시계를 판매하기 때문일까요? 반쪽짜리 대답입니다. 차별점은 유통이 아니라 수리에 있습니다. 빈티지 시계의 제조년도는 가깝게 잡으면 1990년대 초반에서, 오래된 것은 1940년대까지 내려갑니다. 그런데 기계식 시계는 대략 4년이 지나면 톱니바퀴 안에 주입된 윤활유가 떨어지는 것은 물론, 부품끼리 맞물리면서 생긴 새까만 분진이 부속품 사이에 끼어 오류를 발생시키기도 합니다. 수리 주기가 4년임을 감안했을 때, 빈티지 시계 사업에서 수리는 단순히 유지 보수의 차원이 아니라 핵심 변수로 작동합니다.
1980년대에 제조된 까르띠에 탱크 루이스입니다. 빈티지 시계는 매년 점검해야 하고 4년을 주기로 수리해야 할 만큼 관리하기 까다로운 기계지만, 40년이 지나도 가치를 유지합니다. ©빈티지아이 콜렉터스 클럽
시계를 직접 제조하지 않았음에도 판매한 시계에 일련번호까지 제공하며 무상 수리할 만큼 자신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의 원천은 전문 인력, 체계적인 복원 과정, 오리지널 부품 사용에 있습니다.
첫째, 전문인력입니다. 한국인의 시계 수리 기술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수준입니다. ‘시계 생산은 스위스에서, 수리는 한국에서’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요. 빈티지아이 콜렉터스 클럽은 시계 수리 엔지니어만 4명을 고용해 인하우스 리페어 센터를 갖추었습니다. 비즈니스의 핵심을, 세계적인 핵심 인력이 담당하는 튼튼한 구조인 셈입니다.
둘째, 체계적인 복원 과정입니다. 시계를 분해한 후 각 부품을 초음파로 세착하고 점검하는 오버홀부터 시작해, 자외선으로 인해 변형된 다이얼*과 핸즈**의 도금을 벗겨낸 뒤 복원하고, 전문 장비를 사용해 시계의 정확도를 확인하는 기능 테스트까지 거친 다음에야 판매가 이루어집니다.
* 다이얼: 시계의 정보를 나타내는 판. 컴퓨터의 스크린과 같은 역할을 한다.
** 핸즈: 시계 바늘. 시침, 분침, 초침을 통칭하여 부른다.
빈티지아이 콜렉터스 클럽의 복원 공정은 부품 전체를 확인하는 오버홀부터 기능 테스트까지 크게 분류해도 7단계나 됩니다. 그 자체로 믿음직한 것은 물론이고, 시계를 대하는 태도마저 엿보입니다. ©빈티지아이 콜렉터스 클럽
셋째, 오리지널 부품 수급입니다. 단종된 전자제품이나 자동차 수리가 어려운 것처럼 시계도 마찬가지로 오래된 모델일수록 부품을 구하기 까다롭습니다. 빈티지아이 콜렉터스 클럽의 송인준 대표는 세계 각국에서 빈티지 시계를 매입하고, 17년간 사업을 영위하며 구축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오리지널 부품을 수급합니다.
빈티지 시장이든 중고거래 시장이든 가장 큰 리스크는 사기, 가장 비싼 자원은 신뢰입니다. 당근마켓이 중고거래 시장에서 성공한 이유도 동네 기반으로 작동하면서 평판 측정을 위한 ‘매너온도’ 기능을 확보하여 신뢰를 얻은 덕분이죠.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여러 방면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빈티지아이 콜렉터스 클럽 역시 소규모 오프라인 상점이 신뢰를 얻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그중 일관성, 꾸준함은 가장 쌓기 어렵지만 그만큼 효과적입니다. 빈티지 시계를 전문으로 다루는 가게가 17년간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믿음을 줍니다. 오랫동안 사업을 이어온 가게는 시장의 검증을 받았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업력이 10년이 넘었다면 단기적인 이익보다 신뢰 기반의 비즈니스를 운영할 확률이 높습니다.
특히나 빈티지 시계처럼 그 대상이 제품 이해도가 높은 마니아 고객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오래된 가게라면 혹시 제품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다시 방문해서 해결할 여지가 있을 겁니다. 적어도 일주일 후에 찾아갔더니 증발했더라는 식의 황당한 결말은 없겠죠. 오래된 업력은 매장으로 발걸음을 향하게 합니다.
매장을 직접 찾아가보면 입지도 의미심장합니다. 빈티지를 표방하는 곳답게 부산의 옛 중심지였던 중구 중앙동에 자리잡은 것입니다. 인테리어 역시 원목의 빈티지 가구와 조명을 사용해 일관성을 유지합니다. 만약 북적이는 상권에 자리해 모던한 디자인으로 내부를 채웠다면 고개를 갸웃거렸겠지만, 업태에 걸맞는 입지와 내부 인테리어가 브랜드 이미지에 날을 세워줍니다.
빈티지아이 콜렉터스 클럽 매장 전경입니다. 원도심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빈티지 가구가, 공간이 지닌 정서를 고취시킵니다. ©빈티지아이 콜렉터스 클럽
투명한 정보 제공은 비대면으로도 이뤄집니다.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제품마다 정성들여 써 놓은 아티클 형식의 소개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시계에 얽인 일화, 디자인 특징은 물론이고 잘 어울리는 상황과 성향까지 추천해주기도 합니다. 물론 짧은 글로 시계의 가치를 모두 전달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하여, 1:1 컨설팅은 온라인에서도 진행됩니다. 형식적인 CS 창구가 아닙니다. ‘많은 이야기를 드리고 싶은데, 한정된 공간이라 말을 줄여 쓸 수밖에 없어 아쉽네요.’라고 상세 설명란에 써 두었듯, 시계의 가치를 충분히 전달하고 그로 인해 좋은 주인을 만나길 바라는 마음이 전달됩니다. ‘1:1 문의’ 대신 ‘1:1 Consult’라고 표기한 것은 이러한 의지의 반영입니다.
모든 제품에 3~4단락 분량의 소개글을 작성한 정성을 보면 빈티지 시계에 대한 판매자의 이해도와 애정을 동시에 느낄 수 있습니다. 브랜드의 명성이나 특정 제품의 인지도에 기대지 않고 하나하나 고심해서 쓴 글귀는 신뢰감을 높일 수밖에 없습니다. ©빈티지아이 콜렉터스 클럽
열렬한 팬이 있는 시장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빈티지 시계 역시 시간이 지나도 누군가에겐 더없이 소중한 친구처럼 여겨지겠지요. 하지만 시장 규모가 계속 유지될지, 빈티지아이 콜렉터스 클럽이 오래도록 살아남을지는 또다른 문제입니다. 오래된 것을 더 오래쓰도록 만드는 가게의 미래는 어떨까요?
잠시 시간을 거슬러 1964년의 미국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달 탐사가 지상 과제였던 당시의 나사(NASA)는 우주에서도 정확하게 작동하는 크로노그래프* 시계가 필요했습니다. 역사적인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 세계 각지의 시계 브랜드에 의뢰했지만, 단 4개의 브랜드만이 시계를 보내왔습니다. 그리고 그중 진공 상태와 극한의 온도 실험, 충격 테스트 등을 통과한 시계는 오메가(OMEGA)의 스피드 마스터가 유일했습니다.
* 크로노그래프: 시계의 스톱워치 기능 또는 스톱워치 기능을 탑재한 시계
그 비결은 1957년부터 오메가가 미션으로 내건 견고한 크로노그래프 제작에 있었습니다. 튼튼한 베젤과 방수 기능은 물론, 시계로 속도를 기록하는 ‘타키미터 스케일’까지 세계 최초로 도입했습니다. 그 결과 스피드 마스터는 ‘모든 유인탐사선에 적합한 타임피스’라는 나사의 공인을 얻었고, 인류 최초의 달 착륙부터 시작해 2021년 제프 베이조스의 우주여행까지, 미래를 탐험하는 순간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큰 무대에서 검증된 기술과 이를 통해 획득한 상징성은 누구도 뺏을 수 없는 자산입니다. 물론 공식적인 검증을 받는 것도 기회가 주어져야 합니다. 만약 오메가의 기술 개발 노력이 달 탐사 시기보다 늦었다면 어땠을까요? 빈티지아이 콜렉터스 클럽은 기약 없는 외부의 검증을 기다리기보다, 무상 워런티라는 자체 기준으로 검증의 장을 마련했습니다. 서울의 고객을 끌어들인 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인 셈입니다.
상징성 또한 스스로 획득합니다. 모든 부품을 오리지널로 교체하고, 새 것처럼 연마한 결과는 빈티지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합니다. 홈페이지 소개란에 쓰인 ‘원형(Originality)으로의 복원’이라는 문구는 오메가의 스피드 마스터가 지닌 상징과 짝을 이룹니다. 과거로 돌아가는 순간에 함께 하는 공간. 이 상징의 가치는 시간이 지나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듯합니다.
Refer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