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스니커즈 한 켤레가 수백만 원을 호가해도 그리 놀랍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1억 원에 달하는 스니커즈 ‘골드 르브론 15’는 어떨까요? 여느 대기업 또는 메가 브랜드에서 제작한 신발이 아닙니다. 신발 성형외과 의사로 불리는 슈 서전(Shoe Surgeon), 도미닉 시암브론(Dominic Ciambrone)이 커스텀 제작한 신발입니다. 농구선수 르브론 제임스(LeBron James)의 3만 득점 달성을 축하하는 의미로 만들었다고 하는데요. 이런 신발은 작품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신발의 기능보다 그 안에 담긴 의미와 디자인이 중심이 되기 때문이죠.
농구선수 르브론 제임스의 3만 득점 달성을 기념해 제작한 골드 르브론 15(Gold LeBron 15). 도미닉 시암브론은 스니커즈를 작품으로 바라보고 그 가치를 인정받게 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jayshotit_ 인스타그램
물론 도미닉이 처음부터 신발을 작품으로 바라본 것은 아닙니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 나이키의 ‘에어조던 1 시카고’를 신고 학교에 간 그날, 신발 하나로 이목을 끌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점차 스니커즈 열풍이 불면서, 누구나 신상품을 구하게 되자 더 이상 친구들의 관심을 받지 못한 도미닉은 나만의 신발을 만들자고 결심했습니다. 곧바로 도색 작업 도구인 에어브러시로 커스터마이징을 시작했고, 친구들의 관심은 전보다 훨씬 폭발적이었습니다. 나의 개성을 표현하는 방법이 ‘구매’에서 ‘작업’으로 변한 순간이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도미닉 개인 차원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라 스니커즈 산업의 변천사와 궤를 같이합니다. 스니커즈 시장은 희소성을 기반으로 한 개성의 표현과 아티스트의 작품 사이를 오가며 지칠 줄 모르고 성장 중이고, 한국에도 수많은 스니커즈 거래 플랫폼이 생겨나며 이 흐름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신발 산업에서 100년의 관록을 자랑하는 부산이 스니커즈 시장의 거대한 파도를 놓칠 리 없습니다. 2020년에 오픈한 신발 편집숍 ‘파도블(Padoble)’은 이 변화를 어떻게 해석하고 또 적용하고 있을까요?
#1. 신발 편집숍이 고객과 협업하는 이유
한국 신발 산업은 부산을 중심으로 성장했습니다. 한때 미국에서 한국의 ‘신발 공장’하면 서울보다 부산을 먼저 꼽을 정도였죠. 1990년, 부산의 신발 공장은 1,123개에 달했습니다. 당시 부산 제조업체 개수의 23.6%를 차지했는데요. 2019년 기준으로도 한국의 신발 제조업 사업체 중 44.6%가 부산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그 개수는 172개로 줄어들었습니다. 다수의 사업체가 인건비가 저렴한 해외로 공장을 이전했기 때문입니다. 남아있는 제조업체들은 어디서 답을 찾아야 할까요?
부산시와 신발산업진흥센터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끝에 도달한 결론은 인건비 절감이 아닌 고객의 부가가치에 있었습니다. 부족한 건 신발이 아니라 나의 개성을 표현할, 도구로서의 신발이기 때문이에요. 명품 신발과 한정판 신발은 이런 욕망을 일부 충족시켜줍니다. 하지만 남들과 구분 짓는 것만으로 개개인의 취향과 지향을 보여주기엔 역부족입니다. 신발의 주인이 직접 커스텀한 신발에 비하면요. 커스텀 신발 편집숍 파도블이 탄생한 배경입니다.
파도블 편십숍 구역. 파도블이 큐레이션한 신발 브랜드의 디자인을 감상하고 신어볼 수 있습니다. ©부산시
파도블 커스텀 슈즈 랩. 편집숍에서 구매한 신발 또는 개인 소장 스니커즈를 직접 커스텀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진성훈
©파도블
파도블에 상주하는 커스텀 전문 아티스트는 고객의 커스텀 퀄리티를 높여 만족도를 향상시킬 뿐만 아니라, 전문가의 자문이라는 신뢰도 형성에 기여합니다. ©진성훈
파도블은 매장에서 구매한 신발로 커스텀을 진행할 시 신발 가격의 40% 할인 혜택을 제공합니다. 부가가치 창출의 근원을 커스텀으로 본다면, 이러한 파격적인 가격 정책을 바탕으로 한 편집숍과 커스텀 슈즈 랩의 시너지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파도블
그렇다고 커스텀 신발 가격을 무작정 낮게 떨어뜨린 것이 아닙니다. 파도블은 1:1로 극단적인 커스터마이징을 지향하는 듯하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규모의 경제를 이뤄 가격 경쟁력을 확보했습니다.
파도블에 입점한 신발 브랜드는 모두 부산을 기반으로 비즈니스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신발 제조 공장 역시 부산에 모여있는데요. 파도블은 이 점을 활용해 여러 제조사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공용 신발창 몰드를 개발합니다. 신발창은 신발 제조에 필수적이지만, 브랜드 가치의 핵심을 차지하진 않습니다. 그럼에도 신규 개발 시 최대 1억 원이 소요되어 중소 제조사엔 부담이 되는 비용이고요. 파도블은 입점 브랜드가 두 가지 스타일의 공용 몰드를 사용하도록 하여 제조사의 비용 부담을 줄여줍니다. 그 결과 입점 브랜드의 신발에 가격 경쟁력이 생기면, 고객의 선호도가 높아질 뿐만 아니라 더 많은 브랜드가 파도블에 입점할 유인 동기가 생기니 일석이조인 셈입니다. 게다가 입점 브랜드가 늘어날수록 공용 몰드를 사용하는 비용은 더 낮아지는 장기적 이익까지 노려볼 수 있습니다. 파도블이 오픈 9개월 만에 입점 브랜드 숫자를 20개에서 30개로 늘린 배경에는 이러한 상호 이익의 선순환 구조가 한몫 단단히 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공용 몰드가 제조 측면에서의 규모의 경제라면, 고객 측면에서의 규모의 경제도 있습니다. 바로 단체 신발 판매입니다. 파도블을 설립한 신발산업진흥센터는 공공기관으로서 지역 내 다양한 기업·기관과의 네트워크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다수의 브랜드가 모여 있으니 외부 기관과의 협상력도 높아집니다. 이러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파도블은 입점 브랜드인 ‘콜카’와 롯데 자이언츠 구단과의 협업을 제품을 출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학교, 피트니스 클럽 등에 맞는 단체 신발을 출시해 새로운 판로를 개척했습니다. 커스텀 슈즈 랩이 개인의 개성을 살리는 커스텀이라면, 단체 신발은 소규모 집단의 소속감을 높이는 커스텀인 셈입니다.
신발산업진흥센터의 그룹 스니커즈 프로젝트로 결성된 콜카와 롯데 자이언츠의 협업 스니커즈. 뒷축에 야구공 실밥 형태의 스티치로 상징성을 드러냈습니다. 소속감을 드러내는 그룹 스니커즈를 만든 덕에 야구 선수는 물론이고 팬들에게까지 1,000켤레 한정으로 판매되었습니다. ©롯데 자이언츠
파도블은 커스텀의 주체를 개인에서 단체로 확장하여 새로운 판로를 개척하고 규모를 키웠습니다. ©파도블
빠르게 변화하는 산업 환경에서, 기술의 질적 차이는 제품 테스트 사이클을 누가 더 빠르게 돌리느냐에 의해 결정되기도 하니까요.
#3. 신발 없이 신발 팔기
파도블의 타깃 고객은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사람입니다. 그 정체성은 나만의 개성이기도, 내가 속한 집단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신발의 기능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정체성 표현 수단으로서의 신발이 핵심이라면, 고객이 신발을 신어보는 공간보다는 커스텀하는 공간을 전면에 내세우는 전략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실제로 파도블 매장에서 신발을 진열하고 판매하는 공간의 비중은 50%가 되지 않습니다.
파도블은 진열 공간 규모를 키우는 대신, 어떤 신발이 고객의 정체성 표현에 적합한지 고객 스스로 판단하게 돕는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바로 AR 기반 신발 착용 앱 ‘슈독’입니다. 앱에서 마음에 드는 신발을 골라, 내가 원하는 브랜드, 디자인, 컬러의 신발을 신고 나에게 어울리는지 테스트 할 수 있다면? 굳이 신발을 신어 보기 위해서 매장에 방문할 유인이 줄어듭니다. 슈독에는 3D 뷰 기능이 탑재되어, 마치 신발을 신고 360도 돌려가며 디테일을 확인하는 것과 유사한 경험을 할 수 있기까지 하니까요.
슈독 앱을 사용하면, 매장에 직접 방문하지 않고도 AR 필터로 신발이 나에게 어울리는지 확인하고 구매할 수 있습니다. ©진성훈
파도블은 현실 공간에도 이와 유사한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상상마당 부산의 게스트하우스에 ‘커스텀슈방’을 조성한 것인데요. 커스텀슈방은 그라피티 아티스트 ‘오리지널 펑크(Original Punk)’가 방 전체에 스니커즈 커스텀을 테마로 작품을 그려, 신발보다 문화에 친숙해지도록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파도블 매장에 전시된 커스텀 신발은, 문외한이라면 아예 관심을 두지 않거나 보더라도 감상의 폭이 제한적이기 쉽습니다. 반면 게스트하우스 벽지에 그려진 그라피티는 잠들기 전까지 계속 함께 하는 존재입니다.
커스텀슈방에서는, 커스텀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자연스럽게 그라피티를 감상하며 하루를 보낼 수 있습니다. ©파도블
파도블에서 고객은 신발로 작품을 만드는 아티스트가 됩니다. 머릿속의 구상을 직접 구현하고 완성해나가는 과정은 그 자체로 귀한 선물과 같고요. 그래서 파도블이 입점한 곳이 상상마당이라는 사실은 새삼 의미심장합니다.
신발로 작품을 만드는 것과는 반대로, 작품이 신발을 만든 사례도 있습니다. 영화 <백 투 더 퓨처(1986)>에는 자동으로 신발끈이 묶이는 이른바 자동 끈 신발이 등장합니다. 작중 배경인 2015년에는 자동 끈 신발이 대중화될 것이라는 상상력이 발현된 것입니다. 이에 화답하듯 나이키는 실제로 2015년 자동 끈 신발 시제품을 만들기에 이릅니다. 버튼을 누르면 신발을 발에 맞게 조이거나 느슨하게 만드는 커스텀 기능까지 추가해서요.
미래는 알 수 없고 텅 빈 듯하지만, 누군가의 상상력에 의해 풍요롭게 채워지기도 합니다. 특히 멋진 상상은 사람들을 자극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사람들이 기꺼이 시간과 노력을 쏟게 만듭니다. 나이키는 멋진 상상에 투자해 선도적인 이미지를 구축했고, 파도블은 고객의 상상력에서 비즈니스 기회를 잡았습니다. 미래의 막연함은 상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상하지 않음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Refer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