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용도로 쓸지는, 기획자가 아니라 고객이 결정한다

긴자 식스 옥상 정원

2022.12.12

학창 시절의 국어 시험에는 아이러니함이 있어요. 소설이나 시를 쓴 작가들은 작품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독자의 몫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는데, 정작 시험에서는 출제자의 의도에 맞는 걸 선택해야 하죠. 그것과 다른 해석은 재고의 여지 없이 오답처리 되고요.


교육 시스템을 비판하자는 뜻이 아니에요. 작가도 의도를 가지고 쓴 부분이 분명히 있고, 일반적인 상식과 기준으로 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포인트도 있어요. 학습과 시험을 통해 그걸 배우는 거예요. 그럼에도 해석의 여지가 열려 있으면 어떨까라는 싶은 거죠.


다행히 시험장 밖에서는 정답이 하나만은 아닌 듯해요. 제품, 공간, 서비스 등을 기획자의 의도에 맞게 사용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요. 어떤 용도로 쓸지는 사용하는 사람이 해석한대로 자유롭게 결정하면 돼요. 기획자 입장에서는 뜻밖의 고객 행동을 보고 기획에 참고할 수도 있고요.  


이런 현상은 ‘어포던스 디자인’으로 설명할 수 있어요. 어포던스 디자인이 뭐냐고요?




도쿄의 긴자 거리에는 건물들이 촘촘하게 서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평당 공시지가가 10억원이 넘는 지역이기 때문에 빈땅을 남겨두기가 쉽지 않죠. 주차장도 찾기 어려울 정도니, 정원 같은 공간은 사치에 가깝습니다. 이처럼 긴자와 여유는 서로 어울리기 어려운 단어였는데, 유통업계 변화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던 ‘긴자 식스’가 고정관념을 깼습니다.



ⓒ시티호퍼스


긴자 식스는 백화점입니다. 2017년에 오픈했는데, 당시 유통업계의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백화점의 초격전지인 도쿄 긴자 지역에 오랜만에 새로 등장하는 백화점이었기 때문이죠. 특히 온라인, 모바일 쇼핑으로 백화점 등 오프라인 비즈니스가 위기를 겪고 있는 상황이라 관심이 더 컸었습니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긴자 식스는 백화점에 매장을 입점시키는 기준을 세웠습니다. 크게는 3가지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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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점은 ‘이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매장입니다. 그래야 온라인, 모바일 시대에 오프라인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을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 기준은 이후 도쿄에 오픈하는 상업 시설들의 암묵적인 공식이 되었죠. 그뿐 아니라 긴자 식스는 고객들의 체류 시간을 늘리기 위해 공간 구성에 신경을 썼습니다. 중앙 천장을 비롯해 곳곳에 예술 작품을 설치해 갤러리에 온 듯한 기분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했죠.   


화룡점정은 옥상입니다. 긴자 식스는 보통의 건물과 달리 옥상을 개방합니다. 이곳에 올라가면 긴자 거리에서 보기 어려운 풍경이 펼쳐집니다. 도심 빌딩을 배경으로 나무와 풀, 그리고 꽃이 조화롭게 자리잡고 있죠. 옥상에다가 녹색 정원을 꾸며 놓은 것입니다. 일부 공간에 꾸며 구색을 맞추는 정도가 아니라, 옥상 전체를 정원처럼 구성했습니다. 긴자 식스는 두 블록을 합쳐서 건물을 지었기 때문에 규모도 큽니다. 게다가 건물 테두리를 따라 산책로도 조성되어 있어, 정원을 거닐며 긴자 주변 지역을 360도로 조망할 수 있고요.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선 긴자 지역에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을 선물한 셈입니다.



ⓒ시티호퍼스


산책로를 걷다 보면 흥미로운 현상이 눈에 띕니다. 산책로의 외측은 전망과 안전을 동시에 확보하기 위해 담벼락이 아니라 유리벽으로 되어 있는데, 유리벽을 지지하기 위해 설치해 놓은 구조물을 벤치 삼아 곳곳에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입니다. 지지대이기 때문에 벤치처럼 생기지도 않았고, 심지어 산책로 안쪽에 벤치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구조물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거나, 풍경을 감상하거나, 책을 읽는 등의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앉는 행위를 유도하는 지지대를 보면서 ‘어포던스(Affordance)’ 디자인이 떠올랐습니다. 어포던스 디자인은 행동을 이끌어 내는 디자인을 말하는데, 무인양품의 디자인 고문인 ‘후카사와 나오토’의 설명을 참고하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여자 친구와 단둘이 드라이브를 하고 있을 때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자동판매기 앞으로 다가갔다고 하자.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종이컵에 한 잔의 커피가 담겨 나온다. 이 컵을 손에 든다면 지갑에서 다음 동전을 꺼내어 자동판매기에 투입할 수 없다. 종이컵을 어딘가에 두어야 한다. 그런데 바로 옆에 컵을 올려 두면 딱 좋을 만한 높이의 승용차 지붕이 있다. 모양새는 나쁠지 모르지만 어쩔 수 없이 컵을 일단 승용차 지붕에 놓고 다음 커피를 위하여 동전을 넣는다. 이 경우 지붕은 분명 탁자로 설계된 것은 아니지만 그 알맞은 높이와 평평한 판은 커피를 둔다는 행위를 ‘이끌어 내고’ 있다. 그 결과로서 지붕 위에 커피를 둔다는 행위가 발생한다. 이와 같이 어떤 행위와 연결 지을 수 있는 다양한 환경과 상황을 종합적이고 객관적으로 관찰해 나가는 태도가 ‘어포던스’이다.”

-《디자인의 디자인》 중




ⓒ시티호퍼스


후카사와 나오토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자동차 지붕은 컵받침대를 목적으로 디자인되지 않았지만 상황에 따라서 컵받침대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긴자 식스 옥상 정원의 유리벽을 지지하는 구조물도 벤치로 디자인되지는 않았지만, 전망을 바라보는 최적의 위치인 동시에 걸터 앉을 수 있을 만큼의 높이에 설치되어 있어 앉는 행위를 유도하는 것이죠.


궁금해서 저도 앉아봤습니다. 벤치를 목적으로 했다면 시도하지 않았을 낮은 높이와 유리벽과의 적당한 간격이 주는 안락함이 있었습니다. 유리벽을 지지하는 구조물이 벤치로 사용되는 것처럼, 때로는 의도하지 않아도 의도되는 결과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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