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브루어스 컵(World Brewers Cup)’
전 세계의 바리스타들이 수작업으로 커피를 내리는 기술을 다투는 대회예요. 스페셜티 커피 협회가 2011년부터 주최하기 시작한 대회죠. 2022년까지 총 11번의 대회가 열렸으니, 우승자도 11명이 탄생했어요. 그런데 이중 절반 이상인 6명의 공통점이 있어요. 바로 ‘하리오’에서 만든 V60 드리퍼를 사용한 거죠.
그렇다면 하리오는 커피 용품 전문 브랜드일까요? 커피 용품에 전문성이 있으니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하리오의 핵심 경쟁력은 커피가 아니라 ‘유리’에 있어요. 내열 유리 전문 회사로, 실험실용 기구를 만드는 것으로 사업을 시작했죠. 그리고는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 변화에 따라 새로운 사업 영역을 개척하면서 100년 넘게 사업을 이어가는 중이에요. 커피 드리퍼인 V60는 그중 하나이고요.
시대의 라이프스타일 변화에 따라 유리로 할 수 있는 사업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100년 넘게 지칠 줄 모르는, 유리왕의 모험을 함께 떠나볼까요?
하리오 미리보기
• #1. 문제에 초점을 맞추면 시그니처가 보인다
• #2. 전문가에 초점을 맞추면 대중이 보인다
• #3. 변화에 초점을 맞추면 기회가 보인다
• 유리를 깨고 나온 유리의 왕
유리로 만든 바이올린이 있어요. 장식품이냐고요? 일본 바이올리니스트 이쿠코 카와이(Ikuko Kawai)가 실제로 이 유리 바이올린으로 연주를 해 화제가 됐어요. 유리 바이올린은 목재로 된 기존의 바이올린과는 공명이 달라 독특한 톤을 가지고 있죠. 바이올린뿐만 아니에요. 2003년에 세계 최초로 유리 바이올린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첼로, 기타, 코토(琴) 등 7가지 악기를 유리로 만들었어요. 이런 유리 악기는 대체 누가, 왜 만든 걸까요?
ⓒHario
세계 최초의 유리 악기를 만든 회사는 일본의 ‘하리오(Hario)’예요. 하리오는 1921년부터 내열유리를 만들어 온 회사로, 일본에서 유일하게 국내에 내열 유리 공장을 가진 제조사죠. 하리오라는 이름도 일본어로 ‘유리의 왕’이라는 뜻이고요.
하리오의 유리 바이올린은 일본 이바라키 현의 코가(Koga) 공장에서 정교한 기술을 가진 유리 장인들이 만들었어요. 유리로 균일한 곡선을 만들고 정교한 조각을 하기 위해 프로토타입 단계에서만 20개의 바이올린을 제작했죠. 여러 번의 실패 끝에 2개의 성공작이 나올 수 있었어요. 내열 유리가 가진 잠재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유리 악기를 만든 거죠.
ⓒHario
그런데 하리오라는 이름, 어딘가 익숙하지 않나요? 일반 소비자들에게 하리오는 내열 유리보다 커피 드리퍼 등 커피 관련 용품으로 더 유명해요. 물론 하리오가 처음부터 커피 용품을 만든 것은 아니에요. 하리오의 전신인 ‘히로무 시바타 웍스(Hiromu Shibata Works)’가 처음 설립된 1920년대에는 일본에 커피 문화가 발달되지 않았거든요. 히로무 시바타 웍스는 내열 유리로 실험실용 기구를 만드는 것으로 사업을 시작했어요.
이후 사업을 성장시켜 나가면서 내열 유리 제조 기술을 중심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거나 변경했어요. 그 과정에서 유리제 식기 시장에 진출하며 하리오라는 회사를 분사시켰고요. 지금은 테이블 글라스웨어, 그 중에서도 드리퍼가 가장 유명하지만, 하리오는 여전히 미래를 준비하며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어요.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유리의 왕좌를 지켜온 데에는 이유가 있죠.
#1. 문제에 초점을 맞추면 시그니처가 보인다
하리오가 처음으로 커피 용품을 개발한 건 1948년이에요. 아직 하리오가 분사되기 전이라 히로무 이름으로 ‘사이폰 타입50(Syphon Type-50)’을 출시했어요. 하리오는 사이폰 타입50을 시작으로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커피 용품을 생산했죠.
ⓒHario
그 중 하리오를 세계적인 커피 용품 브랜드로 이름을 알린 대표 제품은 ‘V60’. V60는 드리퍼로, 커피를 추출할 때 사용하는 기구예요. V60은 드리퍼 형태, 내부, 추출구까지 모든 디자인 요소가 커피 맛을 위해 세심하게 고안됐죠. 특히 커피 가루를 너무 오래 침출시키면 쓴 맛과 같은 불쾌한 맛이 지나치게 추출되는 점을 개선하는 데에 초점을 뒀어요. 드리퍼에서 커피를 내리는 물의 흐름을 최적화하려 했던 거예요.
ⓒHario
그렇게 원뿔형 모양의 드리퍼를 선보였어요. V60 개발 당시에 대부분의 드리퍼가 사다리꼴 모양인 것과는 다른 시도였죠. V60라는 이름도 드리퍼의 모양과 원뿔의 꼭지각이 60도인 데에서 유래했고요. 원뿔 모양의 경우 바닥이 평평한 사다리꼴에 비해 커피 가루의 층이 수직으로 더 두꺼워져요. 이러한 방식으로 뜨거운 물을 중앙으로 흐르도록 해 커피 가루의 풍미를 충분히 추출할 수 있죠.
더불어 더 원활한 물빠짐을 위해 드리퍼 안쪽에 나선형 리브(Rib)를 돌출시켜 종이로 된 커피 필터와 드리퍼 벽 사이에 공기가 통하는 통로를 만들었어요. 덕분에 뜨거운 물이 커피 가루에 너무 오래 머물지 않고 더 빠르게 빠질 수 있어요. 이 과정에서 커피의 잡맛을 유발하는 타닌 등이 적게 추출되어 더 부드럽고 깔끔한 맛의 커피가 만들어지는 거고요.
ⓒHario
2007년, V60는 디자인적 가치를 인정 받아 일본 최고 디자인 어워드인 ‘굿 디자인 어워드(Good Design Award)’에서 수상하기도 했어요. 디자인 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소비자들 사이에서도 하리오의 V60는 깔끔한 커피를 내리기에 최적화된 드리퍼로 유명세를 탔어요.
이후 하리오는 소재, 기능 등을 달리해 ‘V60 커피 서버’, ‘V60 드립 디캔터’, ‘V60 드립인’ 등 V60를 중심으로 한 신제품들을 출시했어요. 그 결과 하리오하면 V60, V60하면 하리오가 되어 V60는 하리오의 아이코닉한 제품이 되었죠.
#2. 전문가에 초점을 맞추면 대중이 보인다
하리오 V60는 미세한 커피 맛을 다뤄요. 처음 V60를 개발하게 된 배경도 당시 대세였던 침출식 커피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였어요. 커피 가루를 일정 시간 이상으로 침출하게 되면 좋지 않은 맛이 발현되거든요. 커피를 내리는 시간에 따라 커피 맛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커피를 내리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더 선호하는 커피의 맛을 낼 수 있도록 고민한 결과가 V60 드리퍼예요.
이런 미세한 맛의 차이를 구현하고 싶은 건 누구일까요? 물론 커피에 조예가 깊은 일반인들도 V60를 선호했지만, V60의 명성은 전문 바리스타들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어요. 특히 2010년에 세계 바리스타 챔피언십(World Barista Championship, 이하 WBC)에서 마이클 필립스(Michael Phillips)가 하리오 V60로 우승하면서 시장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죠.
마침 이듬해인 2011년에 스페셜티 커피 협회(Specialty Coffee Association)가 ‘월드 브루어스 컵(World Brewers Cup, 이하 WBrC)’을 처음으로 개최했어요. 이 대회는 전 세계의 바리스타들이 수작업으로 커피를 내리는 기술을 다투는 대회예요. 첫 개최 이후 2022년까지 11명의 우승자가 탄생했는데, 이중 절반 이상인 6명이 하리오 V60로 우승을 했어요. 이정도면 도구로서의 경쟁력이 있다고 볼 수 있죠.
V60를 사용한 바리스타가 우승을 하면, 대회 이후 우승자의 이름을 딴 레시피가 공개돼요. ‘Matt Winton V60 Recipe’, ‘Chad Wang V60 Recipe’ 등 우승자의 이름과 함께 V60도 덩달아 명성을 얻죠. V60는 바리스타가 사용하는 드리퍼라는 인식과 함께요.
하리오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WBC, WBrC에서 우승한 바리스타들과 함께 ‘월드 바리스타 컬래버레이션’ 라인을 개발해요. 그 중에서도 2016년 WBrC 우승자인 테츠 카츠야(Tetsu Kasuya)와는 카츠야의 이름을 딴 ‘카츠야 모델 시리즈’를 출시했어요. 이 시리즈에는 드리퍼, 미니 드립 주전자, 커핑 보울 등이 포함되어 있어요.
카츠야 모델 시리즈는 초보자들도 더 쉽게 맛있는 커피를 내릴 수 있도록 고안되었어요. ⓒHario
카츠야 모델 시리즈의 대표 격인 ‘V60 드리퍼 카츠야 모델’은 카츠야가 개발한 ‘4:6 방식’에 적합하도록 기존 V60에서 리브 디자인을 수정했어요. 4:6 방식이란 물을 4:6 비율로 나누어 40%의 물로 커피의 맛을 내고, 나머지 60%로 커피의 농도를 조절하는 방법이에요. 이렇게 디자인을 달리하면 어떤 차이가 생기냐고요?
V60 드리퍼 카츠야 모델은 기존 V60 드리퍼와 리브 디자인이 달라요. ⓒHario
보통 커피 입자가 고울 수록 필터의 구멍을 막아 물의 내려가는 속도가 느려요. 그래서 입자가 고우면 진한 커피를 만드는 데 유리하죠. 그런데 V60 드리퍼 카츠야 모델은 리브 디자인으로 물의 속도를 늦춰 굵은 커피 가루로도 진한 커피를 내릴 수 있도록 했어요. 입자가 굵은 커피는 깔끔한 맛의 커피를 만들기가 더 쉽거든요. 즉, 깔끔한 커피 맛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커피를 진하게 내려 누구나 쉽게 맛있는 커피를 원하는 농도로 즐길 수 있도록 한 거예요.
#3. 변화에 초점을 맞추면 기회가 보인다
V60를 중심으로 커피 용품 시장에서 승승장구하던 하리오는 모험을 멈추지 않아요. 커피 시장이 부상하는 변화를 읽고 커피 용품 시장에 진출한 것처럼, 미래의 변화에 대비하는 거죠. 그간 하리오의 행적을 보면 최근 10년 간의 변화가, 그리고 앞으로의 10년이 기대돼요.
하리오는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열 유리 제조 기술을 기반으로 사업 영역을 다각화해 왔어요. 1950년대에는 커피 용품을, 1960년대에는 마이크로 TV에 들어가는 브라운관과 조리 기구를, 1980년대에는 자동차 조명 렌즈를 생산하기 시작했죠. 시대의 흐름은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를 가져 오고,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는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동반해요. 하리오는 핵심 역량을 기반으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거고요.
2013년, 하리오는 수제 주얼리 브랜드인 ‘하리오 램프워크 팩토리(Hario Lampwork Factory)’를 런칭했어요. 하리오의 장인들이 일본에 있는 7곳의 공방에서 귀걸이, 반지, 목걸이 등의 주얼리를 수제로 만드는 거예요. 하리오의 유리 기술을 현대적인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활용한 사업 영역이죠. 투명하고 매끈한 내열 유리가 주얼리로 재탄생하니 고유의 깨끗함이 돋보여요.
ⓒ시티호퍼스
ⓒ시티호퍼스
하리오 램프워크 팩토리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2가지. 하나는 리페어 서비스에 적극적이라는 점이에요. 만약에 주얼리가 손상되면 언제든 수리해서 쓸 수 있어요. 수선이 가능한 영역을 나누고, 각 서비스를 정찰제로 상품화해 리페어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을 높였죠. 친환경 컨셉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더라도, 서비스의 방향 자체가 친환경적인 셈이에요.
ⓒHario
또다른 하나는 제품 라인이에요. 일본의 여배우 타카하시 히토미(Hitomi Takahashi)와 협업해 디자인한 ‘Better Together’ 콜렉션은 시바견, 골든 리트리버 등의 강아지 모양의 주얼리 시리즈예요. 유려하면서도 정교한 디자인으로 동물 애호가나 애견인들의 마음을 자극하고, 자연과 함께 하는 세상을 지향하는 브랜드라는 걸 넌지시 전달하죠.
ⓒHario
현재 도쿄에는 4개의 하리오 램프워크 팩토리 매장이 있어요. 그 중 니혼바시에 위치한 ‘하리오 카페 & 램프워크 팩토리’ 지점은 하리오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품고 있어요. 1층에는 하리오 램프워크 팩토리의 매장이 있고, 2층에는 하리오의 커피 용품을 사용해 스페셜티 커피를 맛볼 수 있는 카페가 있거든요. 향긋한 커피 한 잔을 누리며 유리알처럼 반짝이는 주얼리들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이에요.
ⓒ시티호퍼스
ⓒ시티호퍼스
유리를 깨고 나온 유리의 왕
하리오는 내열 유리 제조 기술을 기반으로 ‘어떤 제품’을 만드느냐에 변주를 주며 사업을 키웠어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내열 유리뿐만 아니라 다양한 소재에 대한 노하우 또한 축적하고 있죠. V60의 경우에도 처음부터 내열 유리로 리브를 구현하기 어려워 세라믹과 플라스틱으로 만든 버전을 먼저 출시했었어요. 그로부터 5년 후 내열 유리로 만든 V60가 개발된 거고요.
하리오는 새로운 소재를 탐구하면서 ‘아리타야키(Arita-Yaki)’ 도자기와 손을 잡았어요. 아리타야키는 도자기의 고장 아리타(Arita) 현에서 시작한 무려 4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브랜드로, ‘모노즈쿠리(ものづくり)*’의 현신이라고 평가 받아요. 아리타 현에서 아리타야키의 도자기로 만든 세라믹 V60에는 기능적 아름다움과 더불어 모노즈쿠리 정신이 깃들어 있어요.
*‘혼신의 힘을 쏟아 최고의 제품을 만든다’는 일본식 장인 정신
‘하리오의 모노즈쿠리 = 기능적 아름다움 + 사용자 관점에서의 디자인 컨셉 + 하리오의 품질 정책’
하리오의 글로벌 웹사이트에서 세라믹 V60을 소개하며 나오는 말이에요. 하리오는 단순히 제품 생산에 새로운 소재를 활용하는 것을 넘어 오랜 역사의 정신까지 불어 넣는 거예요.
ⓒHario
세라믹 소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인 덕분에 하리오는 이제 세라믹을 중심으로 한 제품들을 출시하기도 해요. 그 방향성이 새로운 라이프스타일과 맞닿아 있는 건 물론이고요. 반려 동물과 함께 사는 인구가 점점 늘어나고, 반려 동물 시장이 커지면서 세라믹으로 강아지, 고양이 밥그릇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반려 동물이 먹기 편한 각도와 높이 등을 고려해 세심하게 디자인하는 것은 기본이에요.
어디 반려 동물 인구 뿐일까요. 하리오는 캠핑족들이 늘어나는 트렌드에도 주목했어요. 그들은 야외에서도 수준 높은 커피 라이프를 즐기고 싶어했죠. 그래서 하리오는 이번에 캠핑족들을 위한 커피 및 요리 도구 브랜드, ‘지브랑(Zebrang)’을 런칭하며 메탈 소재로 만든 제품들을 선보였어요. 지브랑이라는 이름도 메탈 소재의 제품들이 부딪힐 때 나는 소리에서 따온 이름이에요. 메탈은 내열 유리나 세라믹보다 가볍고 내구성이 뛰어나며, 열 전도율이 좋아 뜨거운 물로 드리퍼를 데울 필요도 없어요. 야외에서 사용하기 적합한 소재죠.
ⓒZebrang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에서 출발하니 핵심 소재인 내열 유리를 고집할 필요도, 주력 제품인 커피 용품을 고집할 필요도 사라졌어요. 하리오의 가치는 특정 제품이나 소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틀을 깨고 앞으로 나아가는 태도에 있는 것이니까요.
Reference
• World Brewers Cup, Wikipedia
• Karolina Kumstove, THE STORY AND DEVELOPMENT OF HARIO V60, European Coffee Tr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