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크기를 늘리는 가장 쉬운 방법, 동네를 집으로 만든다

후암연립

2024.05.02

서울역에서 걸어서 15분.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번갈아 나오는 이 남산 자락 골목길을 걷다 보면, ‘후암동’이란 동네가 나와요. 연예인 노홍철이 운영하는 ‘홍철책빵’, 쌀국수가 맛있는 ‘누들숍’ 등 작고 유명한 가게들이 옹기종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죠.


그런 와중에 독특한 공간이 눈에 띄어요. 통유리로 되어 있는 공간 내부는 주방 가재들로 가득하죠. 집은 아닌 것 같고, 식당도 아닌 것 같은데. 뭐 하는 곳일까요? 벽에는 ‘후암주방’이라고 적혀 있어요. 알고 보니 이 곳은 시간별로 예약해 사용할 수 있는 공유 스페이스예요. 후암주방뿐 아니라 후암거실, 후암서재처럼 다양한 공간이 테마별로 존재하죠.


어쩌다 이 공유 공간들이 터줏대감처럼 후암동을 지키게 됐을까요? 마치 ‘후암동’ 자체를 홍보하는 듯한 이 공간들. 누가, 왜 만들었는지 궁금했어요. 그래서 8년 째 후암동에 터를 잡고 있는 이준형 도시공감 협동조합 건축사사무소 소장을 찾아갔어요.


후암연립 미리보기

 #1. 집 안의 추억과 경험을 집 밖으로 꺼내오다

 #2. 잡지 속 거실이 아닌 현실의 거실을 만들다

 #3. 오래된 집을 기록해, 집의 의미를 되새기다

 소장님, 사장님, 대표님… 우리 동네 건축가가 가진 이름들



후암동이라는 동네를 아시나요? ‘두텁바위’라는 뜻을 가진 이 동네는, 서울의 중심인 남산 자락에 있어요. 서울역에서 걸어서 15분, 버스로 10분을 들어가면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많은 구비구비 골목길이 나타나죠. 동네 분위기는 이래요. 후암재래시장의 상인들이 나와서 바닥에 물을 뿌리고. 늦잠 잔 주민은 동네 슈퍼에서 우유를 사서 나오죠.


그야말로 ‘사람 사는 냄새’가 나요. 그게 뭐냐고요? 후암동에서 공유 스페이스 ‘후암연립’을 운영 중인 이준형 도시공감 협동조합 건축사사무소 소장은 말해요.


“사람 사는 동네 같다는 게 도대체 뭘까? 가만히 생각해봤어요. 이 동네는 건축적으로 오래된 집과 새로 지은 새 집, 거대한 대저택, 신혼부부들이 사는 빌라, 건축가가 지은 단독주택이 모두 모여 있어요. 그 말은 한국의 근대사부터 현대까지 모든 시대를 어우르는 동시에 노인층부터 아이들까지 모든 세대까지 어우른다는 말이죠. 결국, 한 동네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야 사람 사는 냄새가 나요.”

-이준형 소장


보통, 한 동네에는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살기 마련이에요. 예를 들어 판교나 성남 같은 신도시는 한 시대에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아파트 단지이기 때문에, 주택 가격도 비슷하고 모여 사는 사람들도 비슷하죠. 


반면 후암동은 역사적·지리적으로 다양한 계층이 모여 살게 된 배경이 있어요. 후암동은 조선시대 개항 이후, 남대문역과 가깝기 때문에 가장 빠르게 발전된 동네 중 하나죠. 일제시대에는 일본인 거주지로 개발됐어요. 일본인 상인, 돈이 많은 조선인들이 모였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미군 기지가 생기며 외국인, 군인, 교수, 기업인 등이 일본인들의 빈자리를 메웠고요.


동시에 현대의 후암동은 발전이 느린 동네이기도 해요. 앞으로는 서울역, 뒤로는 남산, 옆으로는 미군 기지가 후암동을 둘러싸고 있어서, 갇혀 있는 느낌이 들어요. 그렇다고 성수동처럼 자본의 힘으로 개발되기에는 넓은 면적의 건물이 없고요. 


이런 배경이 축적되어 후암동은 지금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아요. 남산을 풍광으로 한 대저택에 거주하는 부유층, 도심에서 직장을 다니는 직장인들, 아주 옛날부터 이 곳에서 자리 잡고 있는 노년층. 그래서 후암동엔 항상 주민들이 있어요. 방학이면 거리가 한산해지는 대학가, 주말이면 유동인구가 급감하는 오피스 단지와는 다르죠. 평일 낮에는 젊은 엄마가 아이와 함께 동네 산책을 하고, 저녁이 되면 퇴근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장을 봐요. 이게 바로 사람 사는 냄새란 거예요.


ⓒ서울역사아카이브


ⓒ서울역사아카이브


ⓒ서울역사아카이브


ⓒ후암연립



#1. 집 안의 추억과 경험을 집 밖으로 꺼내오다


후암동의 매력을 일찌감치 느꼈던 건축가가 있어요. 바로 2016년부터 후암동에 자리를 잡고, 후암동을 알리고 있는 이준형 소장이에요. 이준형 소장은 건축 석사를 마치고 큰 규모의 설계사무소에서 3년간 일했어요. 그리고 2014년, 자신만의 길을 찾기 위해 퇴사했죠. 그러면서 설립한 게 도시공감 협동조합 건축사사무소예요.


사무소를 차릴 때만 해도 후암동으로 가겠다, 공유 공간 사업을 하겠다, 같은 큰 뜻은 없었죠. 그저 남들처럼 생활비를 벌기 위해 들어오는 의뢰들을 해결하며 지냈어요. 그러다 2016년, 사무실을 내기 위해 서울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발견한 동네가 후암동이었죠.


“어쩌다가 지인이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 한 장을 봤어요. 후암동이라는 곳이더군요. 무작정 버스 타고 가봤죠. 첫 인상은 그냥 사람 사는 동네 같고 좋다, 이 정도가 다였어요. 남산이 보이고, 정겹다. 오래된 건물도 많네?”

-이준형 소장


그런데 이 소장은 알 수 없는 호감에 이끌려 후암동에 사무실까지 차리게 됐죠. 자연스레 후암동으로 이사를 왔고요. 그게 벌써 8년 째입니다. 


ⓒ시티호퍼스


연고 없는 후암동이었지만, 도심이 아닌 작은 동네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있었어요. 이 소장의 오랜 꿈은 ‘보통의 건축’을 하는, 일상 속 건축가가 되는 거였거든요. 그래서 전공 시절에도 1인 가구가 많은 신림동 같은 동 단위의 연구를 계속 해왔었죠.


“’사’ 자 들어가는 직업 중에 일반인이 가장 만나기 힘든 직업이 건축사예요. 의사야 수도 없이 만나고, 변호사도 사소한 분쟁이 생기면 생각보다 자주 만날 수 있죠. 그런데 건축가, 건축사라는 직업은 웬만하면 만날 일이 거의 없어요. DDP처럼 유명한 건축가가 만들었다는 건물도, 지방 사는 사람은 안 가 본 경우가 더 많죠.


우리는 일상의 공간, 동네에 있는 평범한 집에서 살고 있는데, 건축가는 너무 소수를 위한 직업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렇다면 나는 바늘 구멍을 뚫고 거대한 클라이언트와 함께하는 위대한 건축가가 되기보다,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동네 속 건축가가 되자고 다짐했죠.”

-이준형 소장


후암동에 자리를 잡고 1년 쯤 지나자, 드디어 꿈을 위해 고민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이준형 소장은 오랜 꿈이었던 동네를 위한 건축을 어떻게 구현시킬까 고민했죠.


그때 눈에 들어온 사업이 대안 주택이었어요. 2017년 당시, 사회주택, 협동조합형 주택 등 아파트가 아닌 대안적인 주거 형태들이 등장하던 시기였죠. 주거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이 소장 역시 대안 주택에 관심이 갔지만, 자신이 없었어요. 집을 만드는 일이니 최소 20~30년은 책임을 져야 하는 사업이었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무얼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이 소장의 머릿속에 다시 한 번 ‘동네’라는 키워드가 떠올랐어요. 새로운 집을 만들 수 없다면, 집을 동네 밖으로 꺼내온다면 어떨까? 아예 동네 자체가 집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어떨까?


“사실 집이라는 공간은 경제적, 사회적으로 한계가 있어요. 친구들을 초대하고 싶지만 작은 집에서 요리할 공간이 없을 수도 있죠. 그러면 집은 그대로 두더라도 집 밖에 또 다른 집, 친구들을 초대할 수 있는 또 다른 공간이 있으면 어떨까요? 동네에 있는 공유 주방에서 친구들과 밥을 해먹고, 집에는 TV가 없더라도 동네에 있는 공유 거실에서 친구들과 영화를 보고. 즉, 집 밖으로 나온 우리 동네 공유 공간인 거죠.”

-이준형 소장


당시에는 공유 스페이스라는 카테고리가 생소했던 때였습니다. 이 일이 수익이 날지 안 날지도 모른 채 시작했죠. 그렇게 2017년 3월, 3평짜리 월세 30만원 공간을 구해서 ‘후암주방’을 만들었어요. 직원들끼리 “월세만 벌면 성공”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7~8월부터 2년 가량 하루 두 팀, 한 달 내내 예약이 꽉 찼습니다.


2017년 오픈 당시 후암주방 시즌1. 지금은 후암제빵실로 쓰이고 있다. ⓒ후암연립


2017년 오픈 당시 후암주방 시즌1. 지금은 후암제빵실로 쓰이고 있다. ⓒ후암연립


2021년 재오픈한 후암주방 시즌2 ⓒ후암연립


2021년 재오픈한 후암주방 시즌2 ⓒ후암연립


2021년 재오픈한 후암주방 시즌2 ⓒ후암연립


“시기도 잘 맞았어요. 당시 백종원 선생님 같은 요리사들의 콘텐츠가 막 뜨기 시작할 때였거든요. 요리 콘텐츠를 따라해보고 싶지만, 집에 적당한 공간이 없던 20대들이 공유 주방을 찾기 시작했던 거예요.”

-이준형 소장


공유 주방이 성공적으로 운영되자, 이 소장은 다음 공간들을 차례차례 만들기 시작했어요. 책을 읽고 작업할 수 있는 후암서재, 대형 TV와 스피커로 영화를 볼 수 있는 후암거실, 프라이빗하게 목욕을 할 수 있는 1인 공간 후암별채 두 곳, 기존의 후암주방 공간을 옮기면서 만든 베이킹 공간 후암제빵실, 작은 갤러리로 운영되는 후암노트. 이 모든 공간을 하나로 묶어주는 카페 ‘우리다’까지 총 7개 공간이 모여 ‘후암연립’이 되었죠.


후암서재 ⓒ후암연립


후암거실 ⓒ후암연립


후암별채 ⓒ후암연립


후암노트 ⓒ후암연립


후암주방 제빵실 ⓒ후암연립


카페 우리다 ⓒ후암연립



#2. 잡지 속 거실이 아닌 현실의 거실을 만들다


후암연립이 공간을 만들 때는 두 가지 기준이 있어요. 


첫째, 집에서 일어나는 추억과 경험을 기반으로 할 것. 

둘째, 잡지 속 공간이 아닌 진짜 편안한 현실의 공간을 만들 것. 


가령, 후암연립의 각 공간별 컨셉은 이준형 소장의 집에 대한 추억으로 시작됐어요. 이 소장이 요리를 좋아해 첫 공간이 후암주방이었고, 그 다음으로는 독서를 좋아해 두 번째 공간이 후암서재였죠.


분명 전략적인 접근이 아닌데, 고객들에게 통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티호퍼스는 그 이유를 ‘공간형 큐레이션’이라고 봤어요. 크고 작은 편집샵들이 취향껏 브랜드를 모아 소개하듯, 후암연립은 아예 공간을 큐레이션하면서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해요.


사실, 거대한 TV가 있는 거실, 책들을 쌓아 놓은 서재 같은 공간은 집에 항상 있어야 하는 꼭 필요한 공간은 아니잖아요. 그런 공간을 경험해보라고 제안하면서 고객이 효율성보다 감성에 반응해 재방문 하도록 만들죠. 실제로 후암서재의 경우 재방문율이 30%에 달한다고 해요. 단골 고객은 지금껏 주말마다 100번 넘게 찾기도 했대요.


“후암연립의 컨셉이 ‘집 밖으로 나온 공유 공간’이니, 집에 반드시 있는 공간보다 ‘플러스’가 되는 공간이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가령, 집에 방이 남을 때는 꼭 공부방이나 컴퓨터 방을 만들잖아요. 제 유년시절 집에 대한 추억을 떠올려 보면 그 공부방에 대한 기억이 많이 남아요. 아버지는 항상 퇴근하시면 서류 가방에 일거리를 싸들고 오셔서 잔업을 하셨죠. 저 역시 방학 때면 아버지 옆에 앉아 숙제를 했어요. 집이 좁다면 그런 방을 따로 두기 힘들지만, 우리 동네에 공부방이 있다면 이런 경험과 추억을 다시금 쌓아볼 수 있는 거죠.”

-이준형 소장 


ⓒ후암연립


ⓒ후암연립


이게 가능한 이유는, 후암연립의 모든 공간이 후암동이라는 같은 동네에 있기 때문이에요. 후암동이 하나의 거대한 집이 된 것처럼, 하나의 거대한 쇼룸으로 만들었죠.


“저희 고객의 80%는 네이버에 직접 검색해서 예약하는 분들이세요. 플랫폼에서 어쩌다 발견한 게 아니라, 직접 후암연립이란 곳을 알고 오시는 거죠. 저희가 하는 홍보라고는 이렇게 미디어와 인터뷰를 하는 것밖에 없어요. 대신, ‘꾸준히 한다’는 게 저희의 강점이죠. 2017년부터 지금껏 후암동에 하나씩 자리 잡고 있는 공간, 정도의 인식이 생긴 것 같아요. 그래서 후암주방에 왔다가 다음에는 후암거실에 가보자고 하는 고객들이 많아요.”

-이준형 소장 


그렇다고 후암연립의 공간이 엄청 독특한 인테리어라거나, 실험적인 모습인 건 아녜요. 오히려 이준형 소장은 “잡지 속 집이 아닌 현실 속 집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죠.


“저희는 카페나 음식점처럼 2~3시간 머무르는 공간이 아니에요. 누군가와 함께 와서 그 공간에서 일어나는 행위, 그 경험을 하러 오는 곳이거든요. 놀이를 하면서 책 보는 거, TV 보는 거, 그 행위 자체가 주 목적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건 공간이 그 행위를 하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는 거예요. 머무는 내내 불편함이 없어야 하죠. 사진이 잘 찍히는 것보다 그 안에서의 경험을 온전하게 만들어주자. 그게 저희의 공간 철학이에요.”

-이준형 소장


후암연립의 각 공간에는 딱 필요한 가재만 존재해요. 3평짜리 후암 제빵실에는 커다란 오븐, 각종 베이킹 용품과 테이블이, 후암거실에는 ‘ㄷ’자 형태 쇼파, 좌석과 대형 스크린, 5.1채널 스피커만이 자리를 차지하죠. 1인용 리프레쉬 공간인 후암별채에서는 온전히 목욕에 집중할 수 있도록 TV 등 다른 방해 요소를 일부러 넣지 않았어요.


후암 제빵실 ⓒ후암연립


후암거실 ⓒ후암연립


후암별채 ⓒ후암연립


욕실 브랜드 ‘이누스’와 협업한 후암별채 이누스 ⓒ시티호퍼스


이들을 배치하는 것도 아름답기보다 편리하기를 택했어요. 예를 들어 후암주방의 모든 장이 오픈형이에요. 문이 닫혀서 가재들이 안 보이는 게 사진 찍기에는 깔끔하고 좋아요. 하지만 처음 방문한 사람도 어떤 가재가 어디에 있는지 한눈에 확인할 수 있도록, 모든 수납공간을 오픈한 거죠.


그래서 후암연립의 공간은 딱 우리가 머릿속에 떠올리는 모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머릿속에 ‘주방’ 하면 떠오르는 모습, ‘거실’ 하면 떠오르는 모습을 현실로 구현할 뿐이죠. 그런데, 건축가로서 예술적인 새로운 공간을 만들지 못하는 것이 아쉽진 않을까요?


“저희 공간이 보수적이긴 해요. 특별할 것도 없고요. 그런데, 그게 오히려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이에요. 개인적으로는 건축이 과연 예술일까 고민이 들고요. 보기에는 예뻐도, 쓰기 불편하면 소용이 없잖아요. 어쨌든 평범한 삶에서 실제로 쓰이는, 평범한 것들을 만들고 싶었어요.”

-이준형 소장


ⓒ후암연립


ⓒ시티호퍼스



#3. 오래된 집을 기록해, 집의 의미를 되새기다


사실 후암연립이 ‘프로젝트 후암’이라는 이름으로 2016년부터 가장 먼저 시도했던 일은 공간을 만드는 게 아니었어요. 대신, 공간을 기록부터 했죠. 후암동에 지어진 지 20년 이상 된 오래된 주택의 외부 입면도와 내부 평면도를 만들어왔어요. 그렇게 아카이빙 된 주택만 30개가 넘죠.


이 프로젝트의 이름은 ‘후암가록’이에요. 말 그대로, 집을 기록한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집은 중요한 건축물도 아니고 그냥 우리가 늘상 보고 있는 존재잖아요. 집을 왜 기록해야 할까요? 그 의미가 궁금했어요.


“동네와 인생은 똑같아요. 사람은 살면서 아프기도 하고, 그러다가 괜찮아지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이게 인생이잖아요. 동네도 마찬가지거든요. 만들어지고, 새 집도 생기고,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 재개발이 될 수도 있어요. 그 수많은 변화 속에서 사라질 수도 있는 집들을 누군가가 기록한다는 자체가 큰 의미예요.”

-이준형 소장


ⓒ후암연립


한 마디로, 후암가록은 후암동 집들의 자서전을 만들어주는 일이었어요. 뿐만 아니라, 후암가록을 진행해오면서 이준형 소장이 느낀 점은 ‘형태의 기록뿐 아니라 가정의 대화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거였죠.


“아파트나 오피스텔은 인터넷에 검색만 해도 도면이 떠요. 그런데 오래된 다가구 주택이나 단독 주택은 도면도를 알기 힘들죠. 어떤 신청자 분은 저희가 도면을 그려드렸더니, ‘이 집에서 오래 살았지만 처음으로 우리 딸들과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대화를 나눴다’고 하시더라고요. 가족들끼리 오순도순 모여서 ‘네 방이 여기 이렇게 있네’ 하면서요.”

-이준형 소장


후암가록은 후암동 주민들의 자발적인 신청하면, 무료로 진행돼요. 신청이 들어오면 신청자를 인터뷰하고, 집의 실측을 조사하고, 도면도와 명패 등을 제작하죠. 이 일을 위해서는 신청자가 자기 집의 이름을 새로 지어야 해요. ‘나무가 있는 집’, ‘세 자녀가 사는 집’ 이런 식으로요. 자연스레 신청자는 내 인생에 집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다시 되새겨보게 되죠.


ⓒ후암연립


“멋진 건축가들이 지은 건물들은 대부분 이름이 있어요. ‘~당’ 이런 집들 아시죠? 그런 것도 좋지만, 이 집에 실제로 살고 있는 보통의 사람이 자기 집의 이름을 지어보는 거죠. 그러면 집이 또 달라 보일 거거든요. 더 애정이 생기고, 집이란 뭔지 고민해보게 되고요.”

-이준형 소장


그렇다면 집이란 뭘까요? 후암연립의 모든 공간에는 방명록이 있는데요. 그 방명록을 펼쳐보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집의 의미를 더 뚜렷하게 알 수 있어요. 


“혼자 청소 하러 갔다가 방명록을 펼쳐보면, 눈물을 쏙 뺄 정도로 진실된 이야기들이 적혀 있어요. 어디 가서 쉽게 말할 수 없는, 어느 기업이 얼마의 돈을 줘도 살 수 없는 진실된 내면의 이야기들이죠. 어떤 젊은 남편은 출산한 지 얼마 안 된 아내를 위해서 반나절만이라도 쉬고 오라고 후암별채를 예약해줘요.


집이라는 건, 온전히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가족이 생기고, 책임이 생기면 그게 쉽지 않죠. 그래서 후암연립의 공간들이 집의 대안이 되는 거고, 이 곳에서 오히려 더 내밀한 속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거예요.”

-이준형 소장


ⓒ후암연립



소장님, 사장님, 대표님… 우리 동네 건축가가 가진 이름들


공간 대여업은 상한선이 정해져 있는 사업이에요. 풀 부킹(booking)으로 들어오는 수입이 최대치이니까요. 매달 50~60%의 예약률을 달성하고 있는 후암연립의 공간 대여 월매출은 1,200만원 선이에요. 인원 추가 등으로 부가적인 수익이 있다고 해도 갑자기 1,500~1,700만원으로 매출이 오르지는 않죠.


한계가 있는 사업을 운영하는 일. 사업가로서 쉽지 않아 보여요. 하지만 이준형 소장은 “돈을 벌려면 2호점, 3호점을 냈을 거”라고 말하죠. 아쉬워도 포기해야 하는 게 있다고요.


“돈이 중요했으면 저기 송파 쪽에 하나 내고 마포 쪽에 하나 내고 했겠죠. 실제로 다른 지역에서 같이 해보자는 연락도 오고요. 저희는 그런 분들께 컨설팅은 해드려도, 운영을 늘리지는 않아요. 저희가 하는 일은 ‘의미 사업’이에요. 수익보다 동네에서의 역할을 계속 찾아가는 게 중요하죠.”

-이준형 소장


실제로 후암연립은 도시공감 협동조합 건축사무소에서 큰 매출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아요. 후암연립의 비중이 30%라면, 나머지 70%는 일반적인 건축 의뢰에서 나오죠. 그럼에도 이준형 소장은 건축가로서의 존재 의미를 후암연립에서 찾아요. 먼 훗날, ‘우리 동네에 그런 건축가가 한 명 있었지’ 하고 기억되는 게 최종 목표예요. 마지막으로 그의 꿈을 들어볼까요?


“동네 분들이 저를 부르는 이름이 참 많아요. 저기 떡볶이 먹으러 가면 ‘후암주방 사장님’ 하고 부르시고요. 소장님, 사장님, 대표님, 아이들에게는 그냥 어떤 아저씨 등등. 다 개의치 않아요. 어느 순간부터 후암동에서 오래 본 건축가니까, 저에게 집 리모델링 맡겨주시는 주민 분들의 의뢰도 많아지고 있어요. 그냥 그렇게 생활 속에 있는 건축가로 남는 게 제 꿈이에요.”

-이준형 소장


ⓒ시티호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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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

서울역사아카이브 홈페이지

후암연립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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