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

이토야

2023.02.06

브랜드도 진화합니다. 이번 도쿄 위크에서는 2017년에 출간한 <퇴사준비생의 도쿄>에서 소개했던 매장, 공간, 브랜드, 기업 등의 그동안의 변화를 업데이트 해봅니다. 오늘 업데이트 할 브랜드는 도쿄 긴자 거리에 위치한 문구점 ’이토야‘입니다. 


이토야는 디지털 시대의 한복판에서, 그리고 명품 거리의 한복판에서 아날로그 제품인 문구류를 판매하면서 살아남고 있어요. 겨우겨우 살아남는 정도가 아니에요. 명품 브랜드들 사이에서 12층짜리 건물을 통째로 쓰고 있고, 이 빌딩으로 모자라 빌딩 뒤에 6층짜리 별관도 운영하죠.


코로나19 팬데믹의 타격에 이토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일부 층의 구성이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그모습 그대로 그자리를 지키고 있어요. 2015년에 매장을 리뉴얼할 때 3년 이상 고민의 과정을 거쳐 본원적 경쟁력을 갖췄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100년 넘게 존재감을 잃지 않는 이토야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이토야 미리보기

 어색한 위치에 우뚝 솟은 당당한 매장

 #1. 객단가를 높이는 고급화

 #2. 흉내 내기 어려운 전문화

 #3. 어디에도 없는 맞춤화

 시간의 무게를 견딜 줄 아는 이토야




필름회사 전성시대가 있었어요. 미국의 코닥, 독일의 아그파, 일본 후지필름의 시장 지배력은 막강했죠. 하지만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디지털 카메라 시대가 열리자 필름회사들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무너졌어요. 살아남은 건 일본의 후지필름. 하지만 필름 사업을 부활시킨 건 아니에요.


우선 필름 사업을 대폭 축소했어요. 대신 신사업인 화장품을 포함한 헬스케어 사업으로 탈출구를 찾았어요. 후지필름은 2007년에 안티에이징 화장품 브랜드인 ‘아스타리프트’를 출시해 1년 만에 100만 개를 판매하고, 세계 뷰티 어워즈 6관왕을 수상하는 등 신사업을 통해 부활에 성공했죠. 현재는 매출의 40% 이상이 헬스케어 분야에서 발생할 정도예요.


필름을 만들던 회사에서 화장품을 출시한 것이 낯설어 보일지 몰라요. 하지만 필름과 화장품 사이에는 콜라겐, 나노테크놀로지, 광 컨트롤, 항산화 기술 등 4가지 공통분모가 있어요. 먼저 필름에 숨어있는 기술적 특성을 살펴 볼게요. 사진의 50% 이상은 콜라겐으로 이루어져 있어 콜라겐을 잘 다뤄야 해요. 또한 얇은 필름에 나노 입자를 흡수시켜야 하죠. 그리고 사진을 찍을 때 들어오는 빛을 정보로 전환시킬 수 있는 기술도 필요하고요. 그뿐 아니라 사진의 변색을 방지하도록 항산화 역량이 있어야 해요.


그런데 후지필름이 80년간 갈고 닦아온 이 기술을 화장품에도 접목시킬 수 있어요. 필름과 화장품 사이의 공통분모를 하나씩 찾아볼게요. 사람의 70% 정도가 콜라겐으로 이루어져 있어 콜라겐을 다루는 기술은 도움이 돼요. 다음은 화장품 성분이 피부 깊숙이 침투해야 하니 나노테크놀로지가 필요하죠. 또 피부 노화를 방지하는 데 항산화 기술을 활용할 수 있고요. 마지막으로 광 컨트롤 기술로 화장품을 발랐을 때 피부 표면에 반사되는 빛을 조절해 더 아름답게 보이게 할 수 있어요.


후지필름은 사진을 만드는 기술을 인수분해해 핵심역량을 정의했어요. 그리고는 이를 활용할 만한 사업을 찾아 화장품 시장에 진출하며 회생할 수 있었어요. 이처럼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변신할 수 있어야 해요. 하지만 아날로그라는 이유로 기존 사업을 버리고 새로운 사업을 찾는 것만이 방법일까요? 100년이 넘은 문구점 ‘이토야’는 기존 사업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시간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색한 위치에 우뚝 솟은 당당한 매장

이토야는 긴자에 위치한 문구점이에요. 그런데 매장에 들어서기 전에 주변을 둘러볼게요. 양쪽 옆에는 티파니와 불가리가, 맞은편에는 까르띠에와 샤넬 등이 포진해 있어요. 그도 그럴 것이 긴자는 임대료가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비싼 땅이에요. 일본에서는 가장 비싼 상권이고요. 그래서 긴자 거리는 주로 비싼 임대료를 감당할 수 있는 명품 매장들로 채워져 있죠.


명품 매장 말고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긴자 거리에 문구점 이토야가 자리 잡고 있어요. 100년 전부터 긴자에서 시작했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이야기할지 몰라요. 하지만 선조의 선견지명으로만 바라보기도 어려워요. 긴자 거리에 입성하고 싶은 여러 명품 브랜드들의 입점 제안을 거절하면서 동시에 문구점으로서 유의미한 비즈니스 성과를 만들어내야 하니까요. 이렇게 한 세기를 견뎌온 이토야의 모습은 위풍당당해요.



ⓒ시티호퍼스


우선 이토야는 12층 건물을 통째로 사용하고 있어 명품 매장들과 견줄 만큼 눈에 띄어요. 게다가 12층짜리 공간으로 부족해 뒤편에 6층짜리 별관까지 운영하고 있죠. 12층짜리 건물은 ‘G.이토야’예요. ‘머물고 싶은 매장’을 컨셉으로 하여 2015년에 리뉴얼했어요. 그리고 6층짜리 별관은 ‘K.이토야’죠. ‘어른들의 비밀 아지트’를 컨셉으로 2012년에 오픈했어요.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제품을 판매하는 매장으로 정면승부를 한 거예요.



이토야는 12층 건물과 6층 건물 전체를 본관과 별관으로 사용합니다.ⓒ시티호퍼스


이처럼 오래전부터 그곳에 자리 잡아서가 아니라, 시대에 맞게 경쟁력을 갖추며 시간을 이기는 이토야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1. 객단가를 높이는 고급화

이토야 매장에 들어서면 백화점에 온 듯한 착각이 들어요.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분위기는 물론이고, 공간 구성도 백화점과 유사하거든요. 층별로 판매하는 제품군이 구분되어 있고 꼭대기 층에는 고객이 쉴 수 있는 공간인 카페와 레스토랑이 있어요. 또한 지하에는 전시회나 세미나 등을 여는 문화공간이 있죠. 단순히 문구류를 사러 오는 곳이 아니라 머물고 싶은 경험의 공간으로 만든 거예요.



백화점처럼 층별로 카테고리를 구분하여 매장을 운영합니다. ⓒ시티호퍼스


일본에서 가장 비싼 땅에 고급스러운 내부 시설까지 갖췄다면 긴자의 이토야는 손해를 감수하는 플래그십 매장일까요? 이토야의 현황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추론해볼 수 있어요. 이토야는 일본 전역에 플래그십 2곳, 일반 매장 11곳, 공항에 위치한 컨셉 스토어 2곳, 컬래버레이션 형태의 매장 3곳 등을 운영하고 있는데요. 다른 매장에서 돈을 벌기 위한 홍보용 매장으로 생각하기엔 전체 매장 수도 적고, 대부분의 매장이 플래그십 매장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임대료가 비싼 핵심 상권에 위치해 있어요. 모든 매장이 수익을 내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구조죠.



ⓒ시티호퍼스


이토야가 수익을 내기 위해 선택한 건 고급화예요. 이토야에는 노트류와 필기구류 등 없는 카테고리가 없지만, 카테고리 내에서 모든 제품을 취급하지는 않아요. 개성 있거나 심미적이거나 희소성이 높은 제품들을 중심으로 매장을 구성했어요. 그래서 단가가 낮은 제품군이라도 몇천 원대가 아니라 몇만 원대에 달하고, 비싼 제품군은 수십만 원대의 제품이 가득해요.


예를 들어 볼게요. 검정색 연필과 펜 20자루 남짓이 든 박스가 진열되어 있는데, 개당 400만원이 넘어요. 칼 라거펠트와 컬래버레이션해서 2,500개만 한정 제작해 만든 제품이기 때문이에요. K.이토야에서는 지구본을 판매하는데, 여기엔 3,000만 원이 넘는 지구본도 있어요. 럭셔리 제품을 판매하는 명품 매장이 부럽지 않은 제품 포트폴리오예요.



칼 라거펠트와 파버카스텔의 컬래버레이션 제품인 한정판 색연필 KARL BOX입니다. ⓒ시티호퍼스



#2. 흉내 내기 어려운 전문화

단순히 고급 브랜드만 취급한다고해서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기업이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이토야는 전문성을 갖춘 매장을 추구하죠. 전문성을 추구하기 위해 제품 카테고리 내 다양한 제품을 판매하는 것은 기본이에요. 만년필은 2,000종류 이상, 노트도 2,000종류 이상, 화구도 1,600여 종류를 취급해요. 전 세계 각국에서 고급스러운 제품들을 소싱해온 건 물론이고요. 전문적인 제품을 직접 눈으로 보고 고른다면 이토야 말고의 대안을 찾기 어려울 만한 제품 구색이죠.


특히 종이류는 더 세분화했어요. 종이는 다 똑같을 것 같지만 이토야에서는 종이 코너를 2개 층에 걸쳐서 운영해요. ‘컬러’를 테마로 한 G.이토야 7층에서는 종이 전문점 타케오와 컬래버레이션해서 색깔, 질감, 목적 등에 맞춘 종이를 전시하고 판매해요. 참고로 타케오는 100년 이상 고급 종이를 개발하고 생산해왔으며, ‘타케오 프라이즈’ 등을 통해 종이 문화와 종이 디자인의 발전을 선도하는 업체예요. 8층은 포장지와 공예 종이 중심으로 구성했고요.



타케오와 제휴하여 1000종류 이상의 종이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시티호퍼스



ⓒ시티호퍼스


이토야는 종류의 숫자만큼이나 종류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요. 그래서 제품을 전문가의 눈높이에 맞춰서 전시하죠. 대표적인 예가 화구예요. 유화물감의 경우 같은 색상이라도 제조회사별로 안료의 품질이 다르기 때문에 실제로 그림에 사용했을 때의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요. 이런 이유로 전문가용 유화물감 제품의 질감 및 색감 등을 비교할 수 있도록 제조하는 회사별로 제품 시현 결과를 표현해 보여줘요. 전문가의, 전문가에 의한, 전문가를 위한 제품 판매인 거예요.



판매하는 물감의 색상과 질감을 알 수 있도록 실제 물감을 발라 보여줍니다. ⓒ시티호퍼스



#3. 어디에도 없는 맞춤화

아날로그 제품은 감수성의 영역이에요. 유행이라 누구나 하나쯤 갖고 있는 제품도 의미있지만, 아무나 갖고 있지 않은 제품일수록 가치가 높아져요. 이토야가 맞춤화 서비스에 주목한 이유예요. 이토야에서는 스스로의 감수성을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도, 감수성은 갖고 싶지만 취향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람도 희소성이라는 아날로그의 가치를 누릴 수 있어요.


스스로의 감수성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자기만의 스타일로 제품을 맞출 수 있어요. G.이토야에는 ‘노트 꾸뛰르(Note couture)’가 있어 원하는 크기, 디자인, 질감의 종이를 선택하여 노트를 만들 수 있어요. 그리고 3층의 ‘펜 케어(Pen care)’에서는 만년필 등의 필기류를 선호에 맞춰 튜닝할 수 있으며, K.이토야 지하 1층에서는 자신의 소중한 추억에 어울리는 맞춤형 액자도 제작할 수 있죠.



이토야에서는 노트 제작, 펜 케어 서비스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시티호퍼스


또한 취향을 갖고 싶거나 전문적인 조언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컨시어지 서비스를 제공해요. G.이토야 3층의 만년필 코너에서는 전문가가 상주해 2,000여 종의 만년필 중 고객의 니즈에 맞는 제품을 상담해주고, 7층에는 ‘페이퍼 컨시어지(Paper concierge)’가 있어 고객이 원하는 용도와 상황에 맞춰 적절한 색감과 질감의 종이를 제안해요. 8층에는 ‘래핑 스타일리스트(Wrapping stylist)’가 대상과 목적에 따라 선물의 가치를 높이는 포장을 디자인해주고요. 이와 같은 맞춤화는 디지털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아날로그의 보루예요.



페이퍼 컨시어지에서는 고객의 취향이나 구매 목적에 따라 맞춤 상담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시티호퍼스



시간의 무게를 견딜 줄 아는 이토야


“전구가 발명됐지만 양초는 사라지지 않았다. 양초는 예술의 영역으로 이동해 낭만적인 물건으로 용도가 달라졌다.”


《문구의 모험》의 저자 제임스 워드의 설명이에요. 그의 말처럼 신기술의 제품이 구세대의 제품을 완전히 도태시키는 것은 아니에요. 새로운 환경에서 자기만의 가치를 찾아 변화에 적응한다면 세월의 무게를 견뎌낼 수 있죠.


디지털 시대의 한복판에서, 그리고 명품 거리의 한복판에서 아날로그 제품인 문구류를 판매하는 이토야. 이 건물의 11층에는 ‘팜(Farm)’이 있어요. 흙을 사용하지 않고 채소를 수경재배해 12층에 있는 카페이자 레스토랑인 ‘스타일로(Stylo)’의 식재료로 활용하죠. 미래를 지향하는 도시 농장의 개념을 도입한 거예요. 손님들은 11층에서 창을 통해 야채가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 이토야의 마음이 숨어 있어요.



수경재배 방식으로 채소를 기르는 11층 ‘Farm’의 모습입니다. ⓒ시티호퍼스


미래지향적인 농장을 바라볼 수 있는 창의 틀은, 이토야를 리뉴얼하기 전에 긴자 거리를 수십 년 동안 바라보며 이토야를 지켜왔던 창틀을 재사용해 만든 거예요. 미래를 추구하면서도, 과거를 계승하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죠. 이처럼 미래와 과거에서 균형감각을 찾으며 현재를 살아가는 이토야에겐 시간을 이겨낼 자격이 있지 않을까요.




Reference

지금부터 재테크는, 엔화로 갈아탄다, 8.0(에이트 포인트), 한동엽

 창업 100년이 넘는 문방구 전문점 「긴자・이토야」에서 할 수 있는 6가지, 마차 매거진

 이토야 공식 홈페이지

 이토야 Floor guide

 [日本 ‘100년 기업’을 가다]〈13〉문방구 업체 ‘이토야’, 동아일보

 [인사이트] 연필회사 망한다고?…300만원 세트도 매진, 중앙일보

 이토야 파버카스텔 아카데미 가이드

 이토야 래핑 스타일리스트 가이드

나머지 스토리가 궁금하신가요?

시티호퍼스 멤버십을 시작하고
모든 콘텐츠를 자유롭게 읽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