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 몫(Angel’s share)이라는 말이 있어요. 위스키 업계에서 쓰는 표현이에요. 위스키를 오크통에 숙성하는 동안 위스키가 증발해 양이 줄어드는데, 이를 천사가 가져가는 몫이라고 낭만적으로 표현한 거죠. 하지만 막상 생산자 입장이 되면 천사의 몫이 아니라 악마의 몫으로 부르고 싶을 거예요. 천사가 가져간 만큼 판매할 수 있는 위스키의 양이 줄어드니까요.
서늘한 기후에서는 보통 1년에 2% 정도가 천사의 몫이에요. 반면, 고온다습한 기후에서는 1년에 10% 이상으로 천사의 몫이 커지죠. 위스키를 10년 숙성한다고 하면, 매해 10%씩 줄어들어 약 35%의 위스키만 남는 거예요. 제품의 65% 정도가 소실된다는 뜻이죠. 그래서 위스키는 주로 스코틀랜드와 같은 서늘한 기후를 가진 곳에서 주조해요. 그런데 고온다습한 기후를 가진 대만에서 위스키를 주조하겠다고 나선 위스키 브랜드가 있어요. 바로 ‘카발란’이에요.
카발란은 대만의 이런 아열대 기후를 제약이 아닌 기회로 봤어요. 정신승리 아니냐고요? 카발란의 역발상적인 접근을 알고 나면 카발란을 마셔보고 싶어질 거예요.
카발란 미리보기
• 반전1. 적합한 기후가 따로 있다? 기후가 불리하면 기술로 극복한다
• 반전2. 음료와 주류는 다르다? 공통분모는 물이다
• 반전3. 다른 매장 속에 숨는다? 두 매장을 동시에 드러낸다
• 차별적 경쟁력은 남이 아니라 나에게서 나온다
위스키는 유럽 이주민의 역사와 함께 해요. 크게 보면 위스키는 아일랜드에서 탄생해 스코틀랜드에서 보편화되었고, 유럽 출신의 이민자들에 의해 미국과 캐나다로 퍼졌거든요. 이렇게 4개 나라에서 생산된 아이리쉬 위스키, 스카치 위스키, 아메리칸 위스키, 캐나디안 위스키는 세계 4대 위스키로 인정받고 있어요. 4대 위스키 생산지들은 모두 위스키를 서서히 숙성시킬 수 있는 서늘한 기후와 위스키 생산에 필요한 원료들을 풍부하게 갖춘 국가들이기도 하죠. 이들에게 위스키는 역사와 환경이 빚어낸 술이에요.
여기에다가 2000년대 이후부터 세계 5대 위스키로 손꼽히며 주요 위스키 생산국으로 떠오른 나라가 있어요. 바로 일본이에요. 스카치 위스키 스타일에 극강의 완성도를 더해 오히려 스카치 위스키를 뛰어넘었다고 인정받을 정도죠. 유럽과 유럽 출신 이민자들에 의해 생겨난 전통적인 위스키 생산 국가들과 달리, 일본은 역사적 개연성이 전혀 없어요. 그런데도 유서깊은 헤리티지를 바탕으로 형성된 위스키 시장에서 위스키 강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죠. 일본은 어떻게 위스키 시장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일본산 위스키의 역사를 쓴 주역은 ‘산토리(Suntory)’의 창업자 도리이 신지로(鳥井信治朗)와 ‘닛카(Nikka)’의 창업자 다케쓰루 마사타카(竹鶴正孝)예요. 원래 고향의 한 양조장에서 일하던 다케쓰루는 1918년, 2년간 스코틀랜드로 위스키를 배우러 유학을 떠나요. 그는 글래스고 대학에서 응용화학을 공부하고, 현지 양조장을 견학하며 증류소의 구조, 제조기법 등을 꼼꼼히 공부했어요. 그가 일본 최초의 위스키 생산을 꿈꾸며 일본으로 돌아오자, 그의 열정을 알아본 사업가 도리이 신지로가 그를 스카우트했죠.
당시 도리이 신지로는 와인 판매로 큰 돈을 벌었는데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일본산 위스키를 제조하고자 했어요. 때마침 적합한 인재를 만난 거예요. 도리이 신지로는 당시 일반 대졸자 연봉의 10배에 달하는 대우로 다케쓰루를 데려왔을 정도로 그에게 공을 들였어요. 그렇게 의기투합한 후 1929년에 도리이와 다케쓰루는 일본 최초의 싱글몰트 위스키 ‘산토리 시로후다’를 만드는 데에 성공해요. 이 때 산토리라는 위스키 브랜드도 탄생했죠.
성공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어요. 이후 정통 스카치 위스키를 만들고 싶어하는 다케쓰루와 일본인 입맛에 맞춘 대중적인 위스키를 생산하고자 했던 도리이는 생각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별하게 돼요. 다케쓰루는 1933년에 산토리에서 나와 이듬해 스코틀랜드처럼 서늘한 기후의 홋카이도 요이치에 증류소를 설립했죠. 이것이 닛카의 시작이에요. 산토리와 닛카는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며 일본 위스키 시장을 키우고, 그 수준을 높여 왔어요. 2010년대에 들어 여러 글로벌 위스키 품평회에서 산토리의 ‘히비키’와 ‘야마자키’, 그리고 닛카의 ‘다케쓰루’ 등이 최고상을 수상하면서 일본이 명실상부한 세계 5대 위스키 생산국으로 인정받기 시작했고요. 이처럼 일본은 역사적인 개연성은 없었지만, 수십 년간의 연구와 기술이 쌓여 주요 위스키 생산국으로 거듭난 것이죠.
그렇다면 앞으로도 세계 5대 위스키 생산국의 아성은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새로운 강자가 또 등장하게 될까요? 아직 6대라고 불리지는 않지만, 뜻밖에도 대만이 위스키 시장에서 빠른 속도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어요. 2005년에 증류소를 처음 설립해 2008년에 첫 위스키를 선보인 대만 최초의 위스키 브랜드, ‘카발란(Kavalan)’ 덕분이죠. 그런데 보통의 경우 위스키 종주국인 스코틀랜드처럼 서늘한 기후가 위스키 생산에 유리하다는 게 업계의 정설인데, 기온이 높고 습한 열대 기후를 가진 대만에서 위스키를 만든다니요. 업력으로 보나, 환경으로 보나 대만이 위스키 강국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건 위스키 업계의 예상치 못한 반전이었어요.
반전1. 적합한 기후가 따로 있다? 기후가 불리하면 기술로 극복한다
위스키 업계에서는 ‘천사의 몫(Angel’s share)’이라는 말을 써요. 위스키를 오크통에 숙성하는 동안 위스키가 증발해 양이 줄어드는데, 이를 천사가 가져가는 몫이라고 낭만적으로 표현한 거죠. 하지만 막상 생산자 입장이 되면 천사의 몫이 아니라 악마의 몫이라고 부르고 싶을 거예요. 천사가 가져간 만큼 판매할 수 있는 위스키의 양이 줄어드니까요.
서늘한 기후를 가진 스코틀랜드에서는 보통 1년에 2% 정도가 천사의 몫인 반면, 대만처럼 고온다습한 아열대 기후에서는 1년에 10% 이상으로 천사의 몫이 커져요. 위스키를 10년 숙성한다고 하면, 매해 10%씩 줄어들어 약 35%의 위스키만 남는 거예요. 제품의 65% 정도가 소실된다는 뜻이죠.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만에서는 위스키의 핵심 원료인 보리도 재배되지 않아요. 업계의 통념으로 보면 대만은 위스키를 생산하기에 여러 모로 불리한 환경이에요.
카발란은 대만의 이런 아열대 기후를 제약이 아닌 기회로 봤어요. 더운 날씨가 천사의 몫을 늘리는 대신, 위스키를 숙성하는 시간을 단축시킨다는 점에 주목한거죠. 이를 테면 스코틀랜드에서 위스키 숙성에 10년이 걸린다면, 대만에서는 4~6년이면 충분해요. 카발란은 대만의 기후를 역이용해 위스키 생산에 걸리는 시간을 절반 이상 단축하고, 오크통의 품질, 블렌딩 기술에 집중해 고급 위스키에서 느낄 수 있는 풍미와 질감을 구현했어요. 위스키 원료 중에서 대만에서 조달할 수 없는 원료들은 해외에서 엄선해 가져오고요. 카발란은 위스키 제조에 적합한 날씨가 있다고 본 게 아니라, 날씨에 적합한 제조 방식이 있다고 판단한 거예요.
위스키는 전통적으로 숙성 기간이 길 수록 깊은 풍미를 내고 더 부드러워지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위스키에 ‘21년’, ‘30년’ 등으로 숙성 기간을 표기하는 경우가 많아요. 보통의 경우 가격도 그에 비례하고요. 하지만 숙성 기간이 아니라 블렌딩 기술과 오크통의 품질로 승부하는 카발란에게는 이런 공식이 적용되지 않아요. 그래서 카발란은 과감하게 숙성 기간을 표기하지 않고 NAS(Non Age Statement), 즉 무연산 위스키를 주조해요. 날씨에 맞는 위스키 제조 방식을 개발한 데에 이어, 제조 방식에 맞는 제품을 만드는 거죠. 게다가 위스키 제조 기술이 발달하면서 업계에서도 숙성 기간은 위스키의 품질을 가늠하는 하나의 요소일 뿐,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고 인정하는 추세에요. 실제로 조니워커 블루, 맥켈란 레어 캐스크 등과 같은 유명 스카치 위스키들도 무연산 위스키임에도 불구하고 좋은 술로 인정받고 있고요.
반전2. 음료와 주류는 다르다? 공통분모는 물이다
그런데 카발란은 어쩌다 위스키를 만들게 된 것일까요? 대만의 고온다습한 날씨를 역이용한 발상을 현실화시켜 카발란을 만든 주인공은 대만의 '킹 카 그룹(King Car Group)'이에요. 1979년에 설립된 킹 카 그룹은 커피, 물, 차, 맥주 등 음료 분야에서 40년 이상의 업력을 갖고 있는 회사죠. 특히 1982년 ‘미스터 브라운(Mr.Brown)’이라는 이름으로 캔커피를 출시하면서 대만 캔음료 시장을 이끌었고, 1998년부터는 같은 이름의 오프라인 카페 매장까지 런칭했어요.
RTD(Ready To Drink) 음료를 중심으로 제품 포트폴리오를 갖고 있던 킹 카 그룹의 창업자 리톈차이(李添財) 회장은 1995년부터 주류 시장에 진출하고자 문을 두드렸어요. 하지만 당시 대만 정부가 주류 사업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번번이 허가를 받지 못했죠. 그러다 2002년에 대만 정부가 독점하고 있던 주류 사업에 대한 규제를 해제하자마자 킹 카 그룹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위스키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어요. 평소 위스키를 즐겨 마시던 그의 숙원 사업이기도 했지만 회사가 보유한 연구 시설과 유통 채널 그리고 공장 위치를 고려한 전략적 의사결정이었죠.
킹 카 그룹은 위스키 사업을 시작하기 훨씬 전인 1996년에 대만 이란현(宜蘭縣)에 공장을 지었어요. 이란현은 깨끗한 수원으로 유명한 곳으로, 킹 카 그룹은 이 곳의 청정 수원을 활용해 ‘그린 타임(Green Time)’이라는 브랜드로 생수, 차, 요구르트 등을 생산해 왔어요. 그리고 그 바로 옆에 카발란 위스키 증류소를 지었죠. 기존 공장에 다져진 인프라를 공유하는 효과는 물론, 그간 다른 음료 제품을 위해 사용하던 이란현의 수원을 위스키에도 사용하기 위해서에요. 위스키의 맛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재료 중 하나가 물이거든요.
리톈차이 회장은 위스키 사업 초기에 내외부 전문가들의 반대에 부딪혔어요. 대만의 자연 환경에 대한 비판적 의견은 기본이고, 커피나 생수를 만들던 브랜드가 위스키를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이 난무했거든요. 하지만 그는 오히려 음료의 공통분모가 되는 청정 수원, 음료 시장에서 구축한 노하우 덕분에 수준급의 위스키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여기에 더해 세계적인 위스키 전문가 故 짐 스완(Jim Swan) 박사를 중심으로 R&D 팀을 구성한다면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다고 봤고요.
결과는? 물론 여러 시행착오와 험난한 과정이 있었겠지만, 결국 R&D팀의 전문 기술과 음료 산업에 대한 킹 카 그룹의 오랜 경험이 시너지를 내 카발란 위스키를 정상급으로 키워냈죠. 카발란 위스키 증류소가 2012년에 영국 위스키 매거진(British Whisky Magazine)에서 최고 증류소 100위 안에 랭킹되는 것을 시작으로, 이후 수년 간 카발란은 WWA(World Whiskies Awards), IWSC(International Wine and Spirit Competition), SFWSC(San Francisco World Spirits Competition) 등 각종 글로벌 주류품평회에서 메달과 최고상을 휩쓸었어요.
ⓒ시티호퍼스
반전3. 다른 매장 속에 숨는다? 두 매장을 동시에 드러낸다
자랑할 만한 수준의 위스키를 만들었으니 판매를 해야죠. 처음에는 카발란도 여느 위스키 브랜드들처럼 주류 전문점, 백화점, 면세점, 마트 등의 유통 채널을 중심으로 위스키를 유통했어요. 여기에다가 타이베이 곳곳에 보틀 숍 형태로 카발란 위스키 숍을 운영했는데, 이 곳에서 카발란을 구매할 수는 있어도 카발란을 맛볼 수는 없었죠. 카발란은 위스키 시장에서 점차 인정받고 매니아층이 생기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카발란 위스키를 접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고자 했어요. 그래서 카발란은 2019년, 타이베이에 첫 번째 ‘카발란 위스키 바’를 오픈했어요. 카발란 위스키 바는 2008년 이후 출시된 대부분의 카발란 위스키를 맛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로, 카발란 팬들이 타이베이를 방문할 충분한 이유가 되기도 해요.
카발란 위스키 바를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 건, 바가 위치한 장소에요. 매장 위치에서도 카발란의 전략적인 면모가 잘 드러나죠. 카발란 위스키 바는 매장 밖에서는 위스키 바가 있는지 알 수가 없어 우연히 발견하거나 들르기 어려워요. ‘벅스킨(Buckskin)’이라는 맥주집 안에 숨어 있기 때문이에요. 벅스킨 매장 안쪽으로 들어가면 ‘카발란 위스키 바’라고 쓰인 작은 간판 밑에 대만 지도 모양의 버튼이 있어요. 이 버튼을 누르면 옆에 있는 오크통 모양을 딴 커다란 벽이 열리면서 카발란 위스키 바로 들어갈 수 있어요. 비밀의 공간이 드러나는 것처럼 입장부터 흥미진진해요.
위스키 바를 맥주집 안에 숨긴 것도 재미있지만, 무릎을 치게 만드는 건 벅스킨의 정체에요. 벅스킨은 2018년에 킹 카 그룹에서 런칭한 맥주 브랜드로, 3개의 식음료 매장을 운영하면서 벅스킨 캔맥주를 출시해 마트나 편의점에 유통하고 있어요. 그런데 대만의 맥주 시장은 대만담배주류공사의 ‘타이완 비어(Taiwan Beer)’가 약 60%의 시장점유율을 차지하고 있고, 나머지는 중국 칭따오(Tsingtao), 네덜란드 하이네켄(Heineken), 일본 기린(Kirin) 등 글로벌 브랜드들이 장악하고 있죠. 이런 상황에서 후발주자인 벅스킨은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는 일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벅스킨을 알리는 데에 카발란 위스키 바를 레버리지한 거죠. 스피크이지 바처럼 카발란 위스키 바를 벅스킨 맥주집 안에 숨긴 건 카발란을 방문한 고객들에게 재미를 주는 동시에 벅스킨을 홍보하는 효과도 내요. 벅스킨 맥주를 마시러 왔다가 카발란 위스키 바를 알게 되는 경우도 물론 있고요. 같은 그룹 내의 두 브랜드가 시너지를 내는 거죠.
비밀의 문이 열리 듯, 은밀한 통로로 카발란 위스키 바에 입장하면 마치 증류소에 방문한 듯 6가지 오크 캐스크가 고객을 반겨요. 이 캐스크 안에는 오크통 특유의 진한 향이 특징인 ‘솔리스트 시리즈(Solist Series)’가 종류별로 들어 있어요. 고객은 이 오크 캐스크에 들어 있는 위스키들을 온탭(On tap)으로 마실 수도 있고요. 오크통에서 바로 따라주니 괜히 더 맛있고 신선한 기분이 들어요. 카발란 위스키 바가 이렇게 오크통으로 고객을 맞이하기로 한 건, 이란현의 카발란 증류소를 타이베이 시내 한복판에 재현하고자 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위스키가 만들어지는 환경도 그대로 옮겨 놨죠. 이란현 양조장에 부는 태평양 바람을 모방한 미풍을 불어 넣기도 하고, 카발란의 수원이 되는 이란현 설산(雪山)의 실루엣을 역광 조명으로 표현하기도 해요. 위스키의 오리진을 매장에서도 느낄 수 있도록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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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발란 위스키 바는 보다 다채로운 매력을 선보이기 위해 10가지 카발란 위스키와 진을 베이스로 한 시그니처 칵테일 메뉴들도 개발했어요. ⓒ시티호퍼스
차별적 경쟁력은 남이 아니라 나에게서 나온다
“해외의 양조장은 아름답지만 ‘그들’의 것이고, 우리도 드디어 ‘우리’의 양조장을 만들었어요.”
불굴의 의지로 카발란을 이끈 리텐차이 회장이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이에요. 종주국이 스코틀랜드인 위스키를 만들지만, 철저하게 대만의 위스키를 만들고 싶었다는 의지를 알 수 있어요. 위스키의 맛은 맥아, 효모, 오크 배럴 등 다양한 요소에 의해 좌우되는데 그 중 중요한 요소에는 물, 땅, 바람 등의 자연 환경도 포함되어 있어요. 이런 자연 환경은 해외에서 수입할 수도, 인공적으로 조절할 수도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위스키를 만든 지역의 특징이 반영될 수밖에 없어요. 카발란 위스키가 서양의 술이면서도, 대만만의 위스키를 만들어 냈다고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해요.
카발란은 제품 개발이나 마케팅에서도 서양 위스키를 따라하기 보다는 대만 위스키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요. 2021년 6월에 출시한 ‘대만 토착종 한정 세트(Taiwanese Native Species Exclusive Edition Set)’는 대만 토착종인 미카도 꿩, 꽃사슴, 삵 등 3종의 동물이 그려진 패키지에 카발란 위스키를 담아 선물 세트로 구성했어요. 물론 일러스트도 대만 예술가 샌디 류(Sandy Liu)가 그렸고요. 이 3가지 동물은 대만을 상징하는 동물이자, 카발란처럼 대만에서 생긴 토착종이에요. 더 흥미로운 건 대만 토착종 세트를 자국에서는 판매하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대신 호주, 독일, 체코, 중국, 뉴질랜드 등 해외 시장을 타깃했어요. 카발란 위스키를 통해 대만을 알리겠다는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죠.
제품 개발이나 마케팅뿐만이 아니에요. 카발란은 이름부터 대만의 헤리티지를 품고 있어요. ‘카발란’이라는 이름도 양조장이 위치한 이란현에서 수백년간 터전을 잡고 살아 온 대만 원주민 ‘카발란족’에서 따왔거든요. 이란현 또한 원래 카발란에서 따와 ‘갈마란(噶瑪蘭)’, ‘합자란(蛤仔難)’ 등으로 부르다 정착된 이름이죠. 더 많은 세계인들이 카발란을 찾고 마실 수록, 대만의 뿌리가 더 멀리 퍼지는 거예요. 서양의 위스키보다 더 나은 위스키가 아니라 대만을 품은 카발란다운 위스키를 만들고자 했기에, 세계 5대 위스키는 아닐지 몰라도 존재감 넘치는 위스키가 된 거 아닐까요?
Reference
• 일본 위스키는 어떻게 세계를 석권했나, 도쿄 한창만 특파원, 한국일보
• "오래 숙성 안해도 깊은 향" 대만 위스키가 보여줬다, 김대영, 중앙일보
• [1910-11] 2019년 해외시장 맞춤조사, aT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