텀블러는 친환경 아이템이에요. 인기도 나날이 높아지고 있어요. 더 많은 사람들이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드는데 동참하고 있으니까요. 이런 의도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텀블러 사용이 많아지는 건 긍정적인 일이에요.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텀블러가 환경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적어도 카페에서는요. 고객은 일회용 컵을 사용하지 않아도, 바리스타가 사용할 수 있거든요.
문제 해결이 또 다른 문제를 낳는 사연은 이래요. 고객이 카페에 가져온 각기 다른 사이즈의 텀블러는 커피 머신의 사이즈에 맞지 않을 때가 많아요. 게다가 용량이 제각각이라 바리스타가 음료를 만들 때 정량 맞추기도 쉽지 않죠. 그럼 결국 일회용 컵에 음료를 제조한 다음 텀블러에 옮겨 담는 불상사가 벌어져요. 발생한 일회용품의 총량엔 변함이 없게 되는 거고요.
멜버른의 로컬 카페 주인 ‘아비가일’은 이 문제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어요. 그러고는 카페의 워크 플로우에 적합한 세계 최초의 바리스타 표준 리유저블 컵, ‘킵컵(KeepCup)’을 만들었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접근 덕분에 킵컵은 전세계 75개국에서 누적 1,000만 개의 판매량을 달성했어요. 카페의 워크 플로우부터 전 세계의 순환 경제까지, 건강한 흐름을 주도하게 된 킵컵의 이야기. 만나볼까요?
킵컵 미리보기
• #1. 문제를 낳는 해결에서 ‘더 나은 문제 해결’로
• #2. 강요하는 물건이 아니라 ‘갖고 싶은 물건’으로
• #3. 선형적인 기업활동에서 ‘선순환의 경제활동’으로
• 가시밭길을 넘어서기 위한 무기, 진정성
아사히 맥주는 2021년 ’모구 컵(Mogu Cup)’을 출시했어요. ‘모구’는 일본어로 우물우물 씹는 모양을 가리켜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컵을 먹을 수 있죠. 모구 컵의 쓰임새는 다양해요. 맥주 컵으로도, 안주를 담는 그릇으로도 사용할 수 있어요. 감자 전분을 강한 압력과 고온에서 구워 만들어 내구성이 강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술 안주가 되기도 해요. 맥주를 담아 마시며 컵을 먹으면 술과 안주를 동시에 즐길 수 있거든요. 맛도 플레인, 새우, 초콜릿, 견과류 등 다양하니 먹지 않을 이유가 없죠. 플라스틱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컵까지 안주로 만드는 시대가 된 거예요.
ⓒasahi
하늘 위의 식당 역할도 겸하는 항공사도 이 물결에 동참하고 있어요. 에어뉴질랜드는 지속 가능한 환경을 위해 기내와 지상에서 식용 커피잔을 시범 도입했어요. 원래도 매년 자연 분해되는 친환경 컵으로 800만 잔 이상의 커피를 제공하고 있었지만, 이번엔 어떤 폐기물도 나오지 않는 것을 목표로 했죠. 그래서 자국 기업인 트와이스(twiice)의 쿠키컵을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이 컵은 음료뿐만 아니라 디저트 서빙 시에도 사용해서 비행에서 만들어내는 쓰레기의 양은 대폭 줄어들었어요. 연간 기준 1,500만 개의 컵 폐기물이 절감됐죠.
ⓒairnewzealand
이처럼 전 세계의 기업들은 국가와 업종을 가리지 않고 환경을 위해 노력 중이에요. UN 환경 프로그램에 따르면 사람들은 매년 2,500억개 이상의 플라스틱 안감의 종이컵을 사용해요. 그중 단 1%만이 재활용 되죠. 만약 지금 이 속도대로라면 영원히 환경 오염을 따라잡을 수 없어요. 그래서 환경 문제에 있어서는 어느 한 기업이나 국가의 거대한 도약보다는 다같이 나아간 한 걸음이 더 의미있어요. 소수의 혁신보다는 다수의 성실한 참여가 더 귀하게 여겨지죠.
기업에서 추동력을 가지고 공동의 무브먼트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해요. 가격, 편의성, 고객 경험 등의 측면에서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하면 일회성의 시도로 끝날 수 있죠. 특히 식생활과 관련된 경우 제품이 음식의 맛과 향에 끼치는 영향을 최소화해야 해요. 고객들은 환경에 대한 당위성 때문이 아니라 음식을 보고 구매를 결정하니까요.
아쉽게도 시중에 나온 식용 컵은 이 장벽을 해결해야 하는 단계에 있어요. 일반적으로 먹을 수 있는 컵은 와플 기반의 제품이거나 밀가루, 천연 바닐라, 코코넛 오일 등을 사용하기 때문에 컵의 맛이 내용물의 풍미를 해칠 수 있어요. 당연히 컵 자체에도 칼로리가 있고요.
비용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어요. 앞서 소개해드린 아사히 맥주의 모구 컵은 50ml 사이즈가 10개입 기준 1150엔(약 11,000원)이에요. 불가리아 식용 컵 제조 스타트업 Cupffee에 따르면 식용 컵 200개를 팩으로 구입할 때는 최소 45센트가 드는 반면, 종이컵의 가격은 평균적으로 18센트 수준이에요. 게다가 식용 컵은 열과 습기에 취약하기 때문에 운반 시에도 추가적인 비용이 발생하죠. 유통 기한도 있고요. 여러 요소를 따져보면 아직은 식용 컵이 정착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에요. 취지가 좋은 데 반해 아직은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있으니까요.
결국 더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급진적인 기술 혁신보다 생활 속의 실천이 필요해요. 환경이 생활의 일부로 자리 잡으면 그때 혁신을 도입해도 늦지 않죠. 그래서 호주 멜버른의 한 카페 사장은 이상적인 솔루션보다 현실적인 대책 마련에 집중했어요. 당장 매일 행동할 수 있도록요. 이렇게 테이크아웃 컵 시장에 뛰어든 작은 커피 가게 사장은 결국 본인이 만든 킵컵(KeepCup)을 리유저블 컵(Reusable Cup)의 대명사로 만들어요.
ⓒThe Design Files
하지만 제시한 솔루션이 현실적이었다고 해서 실현 과정까지 평범했던 것은 아니에요. 멜버른의 로컬 카페에서 판매하던 컵을 전 세계 75개국에서 판매하기까지 킵컵의 모든 전략은 예상을 빗나갔으니까요. 역발상으로 쟁취한 한 걸음의 진전, 지금부터 만나볼게요.
#1. 문제를 낳는 해결에서 ‘더 나은 문제 해결’로
1990년대 후반은 호주에서 스페셜티 커피가 급격한 인기를 얻던 시절이에요. 호주는 ‘플랫화이트의 본고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시민들의 커피 사랑이 대단했어요. 아침 출근길에 동네의 카페에서 테이크 아웃한 커피는 바쁜 도시인의 상징이자 자부심이었죠. 하지만 사랑도 지나치면 독이 될 수 있어요. 매일 셀 수 없을 정도의 일회용 컵이 도시 전역에서 버려지고 있었거든요. 멜버른에서 블루백(Bluebag)이라는 작은 카페를 운영하던 아비가일(Abigail Forsyth)은 매일 버려지는 엄청난 양의 일회용 컵을 보고 문제라는 생각을 했어요.
ⓒKeepCup
아비가일은 십년 간 카페를 운영해왔기 때문에 상황이 얼마나 나쁜지 알 수 있었어요. 일회용 컵 때문에 버려지는 종이의 양도 엄청났지만, 보통 이런 컵은 내부에 폴리에틸렌 코팅 처리를 해서 재활용도 쉽지 않았죠. 그래서 처음에는 일회용 컵을 대체할 컵을 찾기 시작했어요. 당시 대안이 될 만한 건 미국의 필터 커피용 텀블러뿐이었죠.
안타깝게도 이 유일한 대체제는 현장에서 사용하기에 어려움이 많았어요. 사이즈가 너무 커서 커피 머신에 쏙 들어맞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뚜껑도 돌려서 닫는 방식이라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바리스타는 우선 정량에 맞춰 커피를 제조하고 고객의 텀블러에 이를 옮겨 담아야 했어요. 결국 일회용 컵을 써야 한다는 뜻이었죠. 얼핏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보여도 일회용품 사용의 총량은 여전했어요. 바리스타의 불편함은 오히려 증가했고요.
아비가일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부분이 아닌 전체를 봐야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핵심은 ‘고객이 컵을 가져왔다’는 사실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컵을 가져왔는가’였죠. 결국 바리스타가 고객이 가져온 컵에 곧바로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커피를 제조할 수 있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시중에는 커피 머신 사이즈에 들어갈 만한 제품이 전무했어요. 그래서 아비가일은 결단을 내려요. 직접 리유저블 컵을 만들기로요. 세계 최초의 바리스타 표준 커피 컵 ‘킵컵(KeepCup)’은 이렇게 탄생했어요.
하지만 아비가일이 직접 작업한 디자인을 가지고 제조업체를 찾아갔을 때 맞닥뜨린 반응은 충격적이었어요. 이건 ‘세상 멍청한 아이디어’라는 말을 들었거든요. 이 제조업체는 훗날 아비가일이 이 리유저블 컵을 1,000만 개 이상 판매하게 될 거라는 걸 몰라봤던 거예요. 그녀가 디자인한 리유저블 컵에 어떤 특별함이 숨겨져 있었는지도요.
아비가일이 디자인한 컵은 커피를 마시는 사람과 커피를 만드는 사람 모두에게 새로운 옵션을 제시했어요. 대체 어떤 컵이었냐고요? 먼저 킵컵은 기존의 테이크아웃용 컵과 동일한 규격을 채택했어요. 커피 머신 아래에 쏙 들어가는 사이즈 덕분에 바리스타가 곧바로 킵컵에 음료를 제조할 수 있었죠. 에스프레소용 120ml 크기부터 대용량 아이스 커피, 스무디용 474ml 크기까지 음료별로 표준 사이즈를 정해서 제작했어요. 따로 옮겨담지 않아도 되니 커피의 크레마는 그대로 유지됐고, 뚜껑도 살짝 눌러닫는 방식이라 바리스타의 워크플로우에 딱 맞았죠.
게다가 이 컵 안에는 용량이 적혀 있어서 바리스타가 커피를 만들 때 음료의 정량을 맞추기 쉬웠어요. 플랫 화이트처럼 우유 베이스의 커피 음료가 많은 호주 카페에 적합했죠. 만약 고객이 리유저블 컵을 가져왔다고 해도 컵의 사이즈가 다 다른데다가 용량까지 적혀있지 않으면 바리스타가 감으로 커피를 만들었겠죠. 그러면 재료 양에 조금씩 차이가 생겨서 맛이 미세하게 달라지고요. 바리스타를 배려하는 킵컵의 디자인 덕분에 고객이 몰리는 아침 시간대에도 바리스타의 생산 라인은 원활하게 작동했어요.
또한 소재로는 폴리프로필렌을 사용했어요. 폴리프로필렌은 의료 분야에서는 수술 봉합용 실로 쓰이기도 하는데요. 120도 온도에서도 변형 없이 유지돼요. 끓는 물이 아니라면 문제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거죠. 그뿐 아니라 환경 호르몬의 일종인 비스페놀A를 사용하지 않으니 사용자의 건강에도 좋았고요.
한 마디로 킵컵은 카페를 아는 컵이었어요. 카페라는 공간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컵을 단순히 액체를 담는 용기가 아니라 업무 사이클의 핵심으로 볼 수 있었죠. 아비가일은 바리스타가 킵컵에 만족한다면 판매는 자연히 따라올 거라고 판단했어요. 그들이 바로 커피를 만드는 사람이자 고객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나는 사람이니까요.
킵컵의 성장이 바리스타의 피드백에 달려있다고 본 아비가일은 고객이 아니라 바리스타를 기준으로 제품을 만들어서 시스템의 최적화를 추구했어요. 킵컵을 판매할 장소로는 이전에 아무도 활용한 적이 없었던 유통 네트워크를 떠올렸죠. 바로 로컬 카페예요.
아비가일은 오랜 시간 카페를 운영해왔기 때문에 커피숍의 낮은 마진과 높은 임대료 수준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로컬 카페를 유통 채널로 채택하면 카페에 새로운 수익원을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생각했죠. 고객들은 매일 아침 동네 카페에 갈 때마다 킵컵을 만났어요. 아비가일에게 로컬 카페는 킵컵이 사용되는 현장이자 같이 성장하고 싶은 동료, 킵컵이 전시되는 쇼룸이었죠. 킵컵이라는 아이디어부터 그녀가 운영하던 카페에서 탄생했으니 둘은 운명 공동체나 다름없어요. 로컬 커뮤니티의 지지는 자연스럽게 따라왔어요.
#2. 강요하는 물건이 아니라 ‘갖고 싶은 물건’으로
하지만 취지만으로 2009년에 런칭한 이후 지금까지 1,000만 개나 되는 컵을 판매할 수 있을까요? 킵컵이 탄생한 이유이자 킵컵이 지향하는 목표는 지속 가능성이지만 이를 대중에게 강요할 순 없어요. 물론 지속 가능성이 일회용 제품 사용을 멈춰야 하는 논리적인 이유가 될 수는 있겠죠. 하지만 사람들은 논리만으로 물건을 구매하지 않아요. 오히려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디자인이나 편의성 같은 요인이죠. 아비가일은 킵컵의 성공에 가장 결정적이었던 건 ‘문제를 디자인적으로 해결한 것’이었다고 말해요.
ⓒKeepCup
이처럼 갖고 싶은 물건으로 만들어서 메시지를 퍼뜨리는 건 아비가일이 사업 초기부터 고수하던 전략이었어요. 특히 킵컵의 프로토타입을 만든 후 2009년에 멜버른 디자인 페어에 참가했을 때, 이 생각은 더 확고해졌어요. 이 날, 공식적으로 첫 출시한 장소에서 6시간 만에 1,000개의 킵컵을 팔았는데, 어떤 색상의 컵을 살지 45분이나 고민하는 남성 고객을 보면서 디자인의 중요성을 절감했죠. 아비가일은 사람들의 행동 변화는 논리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저 그 상품을 써보고 싶을 때 따라온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 교훈 덕에 킵컵은 우선 ‘갖고 싶은 물건’이 되겠다는 노선을 선택했죠.
킵컵의 디자인은 미학과 기능성 측면에서 가지치기를 해나갔어요. 먼저 디자인의 아름다움을 살펴볼까요? 혹자는 아비가일에게 어떻게 컵 하나로 사업을 키워갈 수 있냐고 물었지만 킵컵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어요. 고객이 선택할 수 있는 컬러 베리에이션이 다양하거든요. 컵이라는 하나의 제품군 안에서도 다양한 색상을 통해 자신의 스타일을 표현할 수 있죠.
ⓒKeepCup
여기에다가 홈페이지에는 Design Your Own이라는 메뉴가 있어서 나만의 킵컵을 제작 주문할 수도 있어요. 유리나 플라스틱 등 본체의 소재, 컵의 사이즈, 뚜껑이나 밴드의 색깔 등을 하나 하나 직접 고를 수 있죠. 킵컵의 오리지널 모델만 해도 만들 수 있는 조합이 약 22,000개나 되니 원하는 스타일을 찾지 못할 일은 없어요. 상상 가능한 모든 옵션이 준비해 두고 고객에게 디자이너의 역할을 맡긴 거예요.
그뿐 아니라 컬러 조합을 기반으로 컬렉션을 만들어 발표하기도 해요. 예를 들어 ‘해안가 컬렉션(Coastal Collection)’은 바다, 태양, 하얀 모래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제품이에요. 색상으로 주제를 표현하고 시기적 트렌드를 제품에 반영하는 모습에서는 새 시즌을 맞아 컬렉션을 발표하는 패션 회사의 프로다움도 느껴져요.
ⓒKeepCup
또한 킵컵이 하나의 패션 아이템이 되기도 해요. 음료 테이크아웃용으로 사용되는 제품 특성 상 사람들은 킵컵을 가방 속에 넣어 다니기보다 손에 들고 다녀요. 마치 테이크아웃 종이컵처럼요. 고객이 킵컵을 들고 걸어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 마케팅이 되죠. 사람들은 걸어다니는 ‘손 안의 브랜드’를 보며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킵컵에 대한 정보를 찾다 보면 자연스레 킵컵을 만든 계기나 컵에 담긴 메세지를 알 수 있죠. 생각을 퍼뜨리기 전에 물건부터 갖고 싶게 만들어야 한다는 아비가일의 가설이 유효한 거예요.
ⓒKeepCup
디자인 미학에 중점을 두었다고 해서 기능성을 등한시하는 실수도 하지 않았어요. 리유저블 컵의 모델을 사이즈, 소재별로 지속적으로 개발해온 킵컵은 모듈식 텀블러 헬릭스(Helix)로 화룡점정을 찍었어요. 헬릭스는 모듈식 텀블러라는 단어 뜻 그대로 조립과 형태 전환이 가능한 텀블러예요.
아비가일은 리유저블 컵을 대중화시키기 위해서는 ‘킵컵 하나면 충분하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는 아침에는 커피 테이크아웃용으로, 오후에는 키를 키워 물병으로 쓸 수 있는 2-in-1 스타일의 컵 투 보틀(Cup to bottle) 모델의 탄생으로 이어졌죠. 모듈식 텀블러 하나면 물병을 따로 들고 다닐 필요가 없는 거예요. 이러면 일회용 물병 사용도 줄일 수 있고요.
아름다움과 기능성, 두 마리 토끼를 잡은 킵컵의 매력이 통했는지 다른 기업에서도 킵컵을 눈여겨보기 시작했어요. 블루보틀 커피(Blue Bottle Coffe), 더 반(The Barn) 등 내로라하는 커피 브랜드와의 컬래버레이션은 킵컵의 고객군을 확장하는 계기가 됐죠. 또한 2019년에는 영화 ‘스타워즈’의 개봉에 맞춰 스타워즈 버전 킵컵도 출시했어요. 영화 속 등장인물인 레이, 츄바카, 다스베이더 등이 킵컵으로 재탄생했죠. 컵 밴드에는 캐릭터의 상징이 디자인으로 삽입됐고요.
제품 전면에 킵컵의 로고 대신 협업 브랜드의 로고나 캐릭터가 들어가도, 사람들은 컵 중앙에 띠처럼 둘러진 슬리브 밴드 디자인만 보고도 킵컵의 제품임을 알아챌 수 있었어요. 아비가일에게 더 이상 판매하는 상품군의 종류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어느샌가 킵컵이 리유저블 컵의 대명사가 되어가고 있었으니까요.
ⓒKeepCup
ⓒKeepCup
ⓒKeepCup
‘디자인 미학이 행동 변화를 주도한다’고 생각한 아비가일의 전략은 디자인상 수상으로 이어졌어요. 굿 디자인 어워드, ANZ Transform Awards 등에서 디자인의 우수성을 인정받죠. 아비가일이 킵컵을 만들겠다고 마음 먹고 제일 먼저 찾아갔던 디자이너가 이 소식을 듣는다면 아마 깜짝 놀라겠죠. 도움을 요청했을 때 ‘듣던 중 가장 멍청한 아이디어’라고 말했거든요.
#3. 선형적인 기업활동에서 ‘선순환의 경제활동’으로
디자인을 제품의 출발점으로 삼았을 뿐 지속 가능성을 중시하는 킵컵의 본질은 그대로예요. 킵컵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순환 경제(Circular Economy)죠. 처음 제품을 만드는 과정부터, 고객이 제품을 사용하는 순간, 사용 종료 후의 처리까지 모든 과정이 선순환되길 바라는 거예요. 세계 각국의 순환 경제 활성화는 최근 들어 본격화됐지만 킵컵은 창업 초기부터 단계별로 순환 경제 시스템을 구축했어요.
먼저 킵컵의 제품 생산 과정부터 살펴볼게요. 킵컵은 로컬 제조를 고수해요. 무려 75개 국에서 상품을 판매하는 기업에서 지키기는 어려운 원칙이에요. 이런 경우 보통 원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고 인건비가 저렴한 곳에서 대량 생산하죠. 그런데 킵컵은 멜버른과 런던에서 킵컵을 생산하고 조립해요. 로컬 커뮤니티를 최대로 활용하고 환경에 끼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죠. 킵컵은 순환 경제와 플라스틱 재사용 측면에서 로컬 제조가 필수라고 생각했어요. 제조 비용을 생각하면 중국이나 다른 국가를 선택하는 게 맞았지만 먼 국가에서 완성된 제품을 배송할 때 발생할 수밖에 없는 환경 오염을 피하고 싶었죠.
제조 과정뿐만 아니라 소재를 선택에 있어서도 환경을 생각했어요. 킵컵의 모든 포장 패키지는 FSC* 인증 판지로 제작될 뿐 아니라 100% 재활용한 종이를 사용해요. 인쇄 작업도 식물성 잉크로 멜버른, 런던, LA 등 현지에서 진행하고요. 킵컵은 명분만 좋은 그린 워싱은 지양했어요. 제품 생산 각 단계에서 실제로 탄소 발자국이 줄어들 수 있는 방식을 지향했죠.
*FSC 인증 : 지속 가능한 산림 경영과 산림 자원 보호를 위해 산림관리협의회(Forest Stewardship Council)에서 구축한 인증 시스템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산림에서 생상된 목재 제품이라는 것을 증명해요.
일반 일회용 종이컵의 슬리브를 담당하는 킵컵의 밴드는 코르크를 재활용한 거예요. 커피를 테이크아웃 할 때 일회용 종이컵과 함께 가장 많이 낭비되는 게 바로 슬리브인데요. 킵컵은 포르투갈에서 다 쓰고 버려진 와인 코르크를 수입해서 밴드 형태로 만들어 슬리브 없이도 컵을 잡는데 무리가 없게 만들었어요. 결국 킵컵은 엄격한 사회적, 환경적 기준을 넘어야만 통과할 수 있는 비콥(B Corp) 인증도 받게 됐어요.
환경에 이토록 진심인 회사라면 본진이나 마찬가지인 본사와 생산기지도 뭔가 다르지 않을까요? 킵컵은 지속 가능한 제품뿐만 아니라 지속 가능한 본사도 만들었어요. 사업이 성장하며 더 큰 규모의 사무실이 필요해지자 킵컵의 가치를 반영한 아름다운 공간을 탄생시켰죠.
ⓒKeepCup
환경 인증을 받은 호주의 본사 및 창고는 지속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을 뿐만 아니라 에너지 효율을 위해 2000제곱 미터의 단열재가 건물을 감싸고 있어요. 태양광 발전으로 76KW의 태양열을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잉여 전력은 다시 되돌려 보내죠. 용수로는 20,000리터의 빗물 탱크를 사용하고요. 뿐만 아니라 건물에서 사용하는 가구들은 재사용 및 재활용 가구이고, 안뜰에는 180여 종의 자생 식물이 있는 실내 정원이 있어요.
ⓒKeepCup
ⓒKeepCup
순환 경제는 고객들이 킵컵을 사용하는 순간에도 작동해요. 대다수의 기업은 지속적인 수익 확보를 위해 고객이 주기적으로 제품을 구매하도록 유도해요. 그런데 킵컵은 정반대의 길로 걸어가요. 오히려 제품의 수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노력하거든요. 모듈식 교체 부품을 조립해서 컵을 만들기 때문에 구성 요소를 개별로 교체할 수 있어요. 킵컵을 구매한 뒤 사용하다가 제품 일부가 망가지더라도 그 부분만 구입해서 계속 쓸 수 있는 거예요.
또한 아비가일은 소비자가 킵컵을 집에 두고 왔다고 해서 새로운 리유저블 컵을 사는 것을 원치 않아요. 오히려 리유저블 컵을 챙겨 다니는 습관이 형성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강조하죠. 그래서 킵컵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킵컵을 챙겨 다닐 수 있도록 그들의 행동의 효과를 체감하게 해요. 홈페이지에 임팩트 계산기를 만들어 두고 킵컵을 사용하면 나타나는 변화를 숫자로 환산시켜 보여주는 거예요. 일주일에 마시는 평균 커피 소비량을 기입하면 킵컵 사용이 가져온 환경 변화를 주 단위, 월 단위, 연 단위로 보여줘요.
예를 들어 일주일에 평균 7잔의 커피를 킵컵으로 마시는 사람은 1년에 약 350잔의 일회용 컵과 12.9kg의 이산화탄소, 1.16kg의 플라스틱 사용을 방지할 수 있어요. 총 331mj의 에너지와 7.88kg의 목재도 아낄 수 있죠. 개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사업주 입장, 카페 오너의 입장에서 킵컵을 사용하면 나타나는 변화도 숫자로 알려줘요. 이전까지는 행동의 효과를 체감하지 못했던 사람도 이 숫자를 보는 순간 책임감을 갖게 되죠. ‘나 하나쯤이야’라는 생각이 ‘나 하나만으로도’라는 생각으로 바뀌고요.
ⓒKeepCup
제조 과정부터 사용 과정까지 환경을 생각하는 킵컵의 행보는 매출이 발생한 후에도 이어져요. 지금까지 75개국에서 1,000만 개 이상의 리유저블 컵을 판매한 킵컵은 2019년에 파타고니아의 창업자 이본 쉬나드가 공동 설립한 ‘1% for the Planet’에 가입했어요. 그렇게 연 매출의 1%를 ‘지구세’로 환경단체에 기부하죠. 또한 바다를 보존하고 지키기 위해 국제 비영리 해양 보호 단체인 Sea Shepherd와도 협업해요. Sea Shepherd 킵컵이라는 라이선스 제품을 만들어서 수익의 30%를 기부하고 있죠. 선형적인 기업활동이 아닌 선순환의 경제활동을 하나의 프레임워크로 만든 셈이에요.
가시밭길을 넘어서기 위한 무기, 진정성
멜버른의 한 로컬 카페에서 시작된 킵컵과 리유저블 컵 무브먼트는 전 세계로 뻗어나갔어요. 동네에서 카페를 운영하던 주인이 이룬 커다란 쾌거죠. 하지만 선한 의도를 가진 킵컵이라고 해서 꽃길만 걸어왔을까요? 코로나19 팬데믹이 발생했을 때 킵컵은 중대한 위기에 직면했어요.
당시 매출의 원천이었던 카페 대부분이 운영을 중단했어요. 게다가 지금껏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카페들이 리유저블 컵 자체를 거부했죠. 리유저블 컵의 위생 상태로 인해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우려했던 거예요. 킵컵의 비즈니스가 심각한 타격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었어요. 게다가 어렵사리 전파한 리유저블 컵 문화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모두가 일회용 컵을 선호가게 됐죠.
안타까운 상황이었지만 아비가일은 킵컵에 대한 확신을 잃지 않았어요. 처음 사업을 시작했을 때 받았던 법률 조언에 따르면 킵컵의 위생 상태는 규정 상 문제가 없었어요. 일회용 컵이라고 해서 무조건 살균된 상품이라고 보기도 어려웠죠. 그래서 아비가일은 이 시기를 오히려 새로운 프로젝트를 착수할 수 있는 시기로 삼았어요. 홈페이지에 도매 구입이 가능한 프로세스를 구축하고, 새로운 신제품 출시를 준비했죠. 또 리유저블 컵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사람들을 위해 재사용 운동을 실시했고요.
이처럼 킵컵은 제품에 대한 확신과 환경에 대한 신념을 무기로 이 위기를 헤쳐나가요. 그 결과 개인, 기업, 카페에 이전에 없던 새로운 옵션을 제공하며 테이크아웃 컵의 대명사임을 더 깊게 각인시켰죠. 지금이야 반열에 올랐지만, 사업 초창기에 누군가 아비가일에게 ‘이건 그냥 또 하나의 컵일 뿐이야.’ 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물론 컵은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물건이라 개념적으로 새롭거나 신선한 제품은 아니에요. 하지만 아비가일은 이렇게 답변해요.
“독창성은 참신함이 아니에요. 진정성이죠.”
- 아비가일, Smart Company 인터뷰 중
진정성 하나로 킵컵은 세계 최초의 바리스타 표준 컵, 리유저블 컵의 대명사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어요. 1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성장세는 여전하죠. 약 80억 개의 일회용품이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것을 막으며 업계의 지형을 바꿔버린 킵컵의 비즈니스에서 뭔가 배우고 싶다면 이 사실을 잊지 마세요. 킵컵의 한 수는 ‘진정성’이었다는 것을요.
Reference
• 食べられるコップ「もぐカップ」本格展開!オンラインショップで3月10日(水)から販売開始!利用者からの声に応えて 新フレーバー<ナッツ>を開発!, アサヒビール株式会社, PR 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