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 있는 도쿄역은 일본의 중심이에요. 오래 전부터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번화가였고, 금융, 언론 등 주요 업체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의 도쿄역 앞 건물은 31m(약 6층 높이) 이상으로 짓지 못했어요. 왜냐고요?
일본은 지진이 많은 나라예요. 그래서 내진 설계를 해야하는데, 당시의 건축 기술로는 31m 정도 높이로 건물을 지어야 지진으로부터 최소한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물론 지금은 초고층 빌딩도 지을 수 있을 만큼 건축 공법이 발전했어요. 그래서 31m라는 높이가 무색해졌죠. 시간이 흐르고 지역 개발이 거듭되면서 실제로 도쿄역 주변의 건물들은 위풍당당하게 바뀌었어요.
그렇다면 과거의 풍경은 이제 더이상 볼 수 없는 걸까요? 그렇지 않아요. 도쿄역 주변을 재개발하면서 과거의 흔적을 숨은그림처럼 남겨 두었죠. 어디에 어떻게 쌓아두었는지 찾아 볼까요?
ⓒ시티호퍼스
도쿄역을 끼고 있다고 버틸 재간이 있는 것은 아니었어요.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는 데다, 그에 따라 부도심이 부상하니 마루노우치 지역의 경쟁력은 점점 무뎌졌죠. 도쿄역 앞에 위치한 이점이야 여전했지만, 더이상 그것만으로 승부하기는 어려웠어요. 시대의 변화에 따라가기 위한 변신이 필요했던 거예요. 그래서 마루노우치 지역을 재개발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이 지역을 일본의 중심이 아니라 세계의 중심으로 발전시키려는 비전을 세웠죠.
마루노우치 지역을 글로벌 비즈니스의 최전선으로 만들기 위해 정부도 전폭적인 지원을 했어요. 각종 건축 규제를 대폭 완화하고, 건물이 사용하지 않은 용적률을 다른 건물에 팔 수 있는 권리인 ‘공중권’도 허용했어요. 용적률에 따라 건물을 지을 수 있는 높이가 법적으로 정해져 있는데, 최대치까지 사용하지 않은 건물의 남은 높이를 매입해 건물을 정해진 용적률보다 더 높게 지을 수 있게 된 거예요. 특히 3층 높이의 도쿄역이 사용하지 않은 용적률이 많았기에 주변 건물들이 공중권을 적극적으로 사들일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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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권 덕분에 마루노우치 주변의 빌딩들은 위풍당당해졌어요. 그런데 그 빌딩들을 보다보면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어요. 건물은 제각각인데, 하나같이 6층 정도의 높이에 해당하는 지점을 자로 잰듯 구분해 두었죠. 저층부와 고층부 구분없이 빌딩을 짓는 것이 더 효율적일텐데, 어떤 이유에서 건물을 나누어 놓은 것일까요?
2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째는 과거를 보존하기 위함이에요. 오래된 과거이긴 하지만, 예전에는 건물의 높이를 31m로 제한했어요. 그 때의 건축 기술로는 6층 정도 높이로 건물을 지어야 지진으로부터 최소한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물론 지금은 초고층 빌딩도 지을 수 있을 만큼 건축 공법이 발전해 31m라는 높이가 무색해졌어요. 하지만 과거의 건물들이 가지고 있던 의미와 형태를 직간접적으로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저층부를 남겨두고 그 위에 고층부를 올린 거예요.
둘째는 휴먼 스케일을 반영하기 위함이에요. 휴먼 스케일은 사람의 체격을 기준으로 하는 척도로 사람의 자세, 동작, 감각에 입각한 단위예요. 사람은 지나치게 거대한 공간에 있으면 불안해하는데, 휴먼 스케일로 설계를 하면 그런 감정을 줄일 수 있죠.
마루노우치 지역은 공중권 거래로 더 거대해진 만큼 사람을 압도하는 곳이 될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고층부와 저층부를 구분하고 고층부를 저층부보다 좁은 면적으로 올려, 거리를 걷는 사람이 보기엔 저층부만 인지할 수있도록 설계했어요. 가까이에선 6층 정도의 건물처럼 보이니 위압감이 줄어드는 거예요. 과거를 보존하면서도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까지 배려하는 지혜가 돋보이죠.
휴먼 스케일을 고려해서 지은 도쿄역 앞의 건물 중에서도 눈에 띄는 건물이 있어요. ‘JP 타워’예요. 도쿄 중앙 우체국이 있던 자리에 리모델링을 하면서 우체국 건물의 외관을 그대로 둔 채로 고층부와 저층부를 이질적으로 지었기에 더 주목도가 높죠.
JP 타워를 더 돋보이게 하는 건, 저층부에 들어선 복합 상업시설 ‘킷테(KITTE)’예요. 공간의 뼈대뿐만 아니라 우체국의 역할과 의미까지 계승하여 킷테를 구성했어요. 한 통의 편지가 사람 사이를 연결하듯이, ‘연결’을 테마로 사람과 사람, 거리와 거리, 시대와 시대를 연결하는 공간으로 만든 거예요. 또한 우표를 뜻하는 킷테라는 이름도 우체국을 연상시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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킷테 들어서면 기분이 트여요. 기둥 하나 없이 6층이 통째로 뚫려 있기 때문이에요. 원래 중앙 우체국으로 사용할 당시에는 이 공간에 기둥이 촘촘히 세워져 있었어요. 그 때에는 기둥 없이 6층 건물을 짓는 일은 상상할 수 없었죠. 하지만 이제는 기둥 없이도 건물을 지탱할 수 있어, 기둥 대신 공간감으로 건물을 채운 거예요. 이 탁트인 공간에 또하나의 현대적인 과거 혹은 과거다운 현재가 숨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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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을 없애서 공간감을 연출했으나, 과거를 지우진 않았어요. 바닥에 팔각형 모양으로 생긴 틀을 만들어 기둥이 있던 자리에 흔적을 남겨둔 거예요. 여기까지야 상상 가능한 방식일 수 있지만 기둥이 있던 자리에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면 생각이 바뀌어요. 천장에 금속 소재로 만든 선이 과거를 품어내듯, 기둥 모양을 따라 예술 작품처럼 늘어져 있기 때문이죠. 과거의 장소성을 보존하면서도, 컨템퍼러리적인 장식으로 승화시키는 세련된 방식이에요.
시간을 이기는 공간 만큼이나 시간을 이어가는 공간도 매력적이에요. 건물 안팎으로 현대적인 과거 혹은 과거다운 현재가 숨어 있는 마루노우치 지역이 인상적인 이유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