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도 진화합니다. 이번 도쿄 위크에서는 <퇴사준비생의 도쿄>에서 소개했던 매장, 공간, 브랜드, 기업 등의 그동안의 변화를 업데이트 해봅니다. 첫 번째로 업데이트 할 브랜드는 맞춤 시계 전문점 ‘놋토’입니다. 놋토는 스마트폰 때문에 시계를 차는 사람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새로운 기회를 봤어요. 시계를 시간을 확인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패션’으로 정의한 거죠.
제품에 대한 정의가 바뀌자, 새로운 시장 기회가 생기고 성장의 방향도 달라집니다. 이제 스마트폰뿐만 아니라 스마트 워치도 기존 시계 브랜드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그동안 놋토는 어떤 시도를 하면서 성장했을까요?
놋토 미리보기
• 모두가 바라던 시계의 시작
• 패션의 조건 #1. 프리미엄과 적당한 가격을 동시에
• 패션의 조건 #2. 스타일에 따라 다양한 조합이 가능하게
• 패션의 조건 #3. 다양한 제품과 호환하며 경계를 넘나들게
• 손목 위를 떠나 시계가 찾아간 곳
두루마리 휴지를 다 쓰고 남은 휴지심을 어떻게 하시나요? 보통의 경우 버리기 마련이죠. 휴지가 말려 있지 않은 휴지심은 그 쓸모를 잃은 거니까요. 이상한 질문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그런데 일본의 어느 중고 거래 앱에서 누군가가 휴지심을 판매 상품으로 올렸어요.
장난으로 올린 게 아니에요. 나름대로 신경쓴 듯 30개를 한 세트로 해서 500엔(약 5천원)에 구성해서 내놓았거든요. 휴지심 한 세트를 팔면 10롤의 휴지를 살 수 있을 정도의 가격대죠. 아무리 중고 거래 플랫폼에서 무엇이건 팔 수 있다해도 쓰레기를 모아서 내놓은들 팔릴까요?
그냥 휴지심 30개를 모아 놓았다면 외면 받았을 게 분명해요. 하지만 두루마리 휴지의 용도를 바꿔서 판매하니 금세 팔리는 상품이 됐어요. 특히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 등 타이밍이 맞으면 팔리는 속도가 더 빨라지고요. 비결이 뭘까요? 그는 상품 페이지에 이렇게 적어 두었어요.
‘아이들의 만들기 숙제 재료로 가져가세요.’
이처럼 용도를 바꾸면 쓸모를 잃은 제품도 인기 상품이 될 수 있어요. 마찬가지로 페트병, 우유팩 등도 중고 거래로 팔 수 있죠. 물론 버릴 것의 용도를 바꿔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경우는 극적인 사례예요. 그럼에도 용도를 바꿔 팔리는 제품으로 만든다는 본질은 어느 영역에나 적용 가능해요.
도쿄에서 시작한 시계 전문점 ‘놋토(Knot)’도 이같은 접근을 했어요. 손목 시계를 시간을 확인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손목 위의 패션으로 바라보면서 손목 시계의 가능성을 재발견했죠.
모두가 바라던 시계의 시작
놋토의 대표 엔도는 15년 동안 수입 시계 대리점을 운영했어요. 루미녹스(Luminox)를 시작으로, 베링(BERING), 스카겐(SKAGEN) 등의 유럽 브랜드 시계를 일본에 들여와 판매했죠. 그러던 2012년, 비즈니스에 뜻밖의 타격을 받는 소식을 접해요. 미국의 시계 브랜드 파슬(Fossil)이 스카겐을 인수하면서 일본 내 유통 채널을 직영점 체제로 전환한 거예요. 그래서 대리점들은 스카겐을 판매할 수 없게 됐죠.
이 사건을 계기로 엔도는 독자 브랜드를 세우기로 결심해요. 본사의 정책에 따라 영향을 받는 비즈니스는 지속가능하지 않으니까요. 새로운 브랜드를 기획하면서 그는 손목 시계 시장의 변화를 관찰했어요. 스마트폰이 보편화되면서 시계는 시간을 확인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기능을 슬며시 잃어가고 있었죠. 그는 이런 현상이 가속화할 거라 판단하고 시계를 ‘패션’으로 재정의하고자 했어요. 의료기술과 렌즈의 발달로 안경을 도구가 아닌 패션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처럼, 시계의 역할도 유사하게 변할 거라 본 거죠.
그러나 일본의 평범한 중산층이 패션을 위해 마치 옷을 사듯 시계를 살 수는 없었어요. 명품 시계는 수십만엔을 호가하니 하나를 갖기도 힘든 게 현실이었죠. 그렇다고 저렴한 브랜드의 시계를 사지니 디자인도, 성능도 만족스럽지 못했고요. 그래서 세련된 디자인이면서 퀄리티가 좋은 시계를 합리적인 가격에 사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로망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엔도는 이런 잠재 고객층을 타깃했어요. 그리고는 ‘Made in Japan’ 시계를 1만엔대(10만원대)의 가격에 제공하는 브랜드를 기획했죠. 이 컨셉을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인 ‘마쿠아케(Makuake)’에 띄웠어요. 반응은 폭발적이었어요. 컨셉만으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아 목표액의 5배인 500만엔(약 5천만원)을 모금했거든요. 내친 김에 오프라인 매장을 내기로 해요. 그래서 기치조지에 매장을 내기 위해 2차 펀딩을 진행했죠.
두 번째 펀딩에서는 ‘영구회원(Eternal members)’ 자격을 핵심 리워드로 내세웠어요. 영구회원에게는 평생 할인 혜택을 제공하고, 한정판 시계에 몇 번째 투자자인지를 각인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내용이에요. 이번에는 1차 펀딩의 2배가 넘는 1,181만엔(약 1억 2천만원)을 모금했죠. 동시에 20~30대 고객에게 놋토의 탄생을 알리면서, 영구회원으로 대표되는 충성고객을 확보할 수 있었어요. 그렇다면 놋토는 도대체 무엇이 다르길래 이처럼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걸까요?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영구 회원이 된 고객들에게 제공한 한정판 시계의 뒷면입니다. ⓒ마쿠아케
패션의 조건 #1. 프리미엄과 적당한 가격을 동시에
‘누구도 본 적 없는 것’을 바꿔 말하면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어요. ‘누구도 원치 않았던 것’이거나 ‘원하지만 현실로 구현할 수 없었던 것’으로요. 놋토는 후자로 봤죠. 그래서 놋토는 모두의 바람을 현실로 바꾸기 위해 시계의 가성비에 집중했어요. 명품 시계의 품질에 버금가는 ‘프리미엄’ 시계를, 착한 가격인 ‘1만엔대’에 판매하는 브랜드를 지향한 거예요.
프리미엄 시계를 제작하기 위해 일본 전역의 장인들을 섭외했어요. 놋토는 ‘All made in Japan’을 내걸고 ‘무수부 프로젝트(MUSUBU Project)’를 시작했는데요. 품질이 우수한 일본산 소재와 부품만을 사용하면서 손목 시계의 퀄리티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거예요.
무수부 프로젝트는 Knot 시계를 통해 일본 각지의 장인정신을 세계에 알리는 프로젝트입니다. ⓒ시티호퍼스
일본의 2대 태너리인 토치 가죽과 히메지 가죽, 교토의 직물 장인인 쇼엔 쿠미히모, 일본의 하이 비트 무브먼트의 자존심인 시티즌, 세계 최고 수준의 정밀 금속 가공 기술을 자랑하는 하야시 세이키, 현존하는 몇 안 되는 전통 시계 제조 공장인 셀렉트라 등 장인들과 계약을 맺고 고품질의 소재와 부품을 납품받아요. 이렇게 소재 선정에서 가공에 이르기까지 장인들과의 협업을 통해 세계 시장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품질의 제품을 개발하죠.
일본 각지의 장인들이 생산하는 Knot의 시계는 프리미엄 시계로서의 자부심을 지켜내고 있습니다. ⓒKnot
놋토는 품질과 직결되는 소재, 부품, 디자인에 대해서는 타협하지 않았어요. 어쩌면 프리미엄 시계를 제작하려면 당연히 추구해야 할 과정이죠. 하지만 퀄리티를 높이려다가 가격까지 올라가면 명품 시계와 다를 바가 없어져요. 그래서 장인들과 협업하면서 품질과 디자인에 타협하지 않는 한편, 비용을 낮추기 위해 유통 마진과 제반 비용을 최소화했어요.
중간 유통 과정을 최소화한 유통 체계를 기반으로 합리적 가격의 시계를 판매합니다. ⓒ시티호퍼스
우선 일본 시계 업계 최초로 SPA 비즈니스 모델을 도입했어요. 제품의 기획에서 판매에 이르는 전 과정을 직접 운영하는 거예요. 그리고 모든 부품의 조달과 제조를 국내에서 하죠. 이런 생산 및 유통 구조라면 무역회사, 제조 하청업체, 유통회사를 거칠 필요가 없어 마진을 혁신적으로 줄일 수 있어요. 게다가 긴자, 시부야, 신주쿠 등 중심 상권이 아니라 도쿄 외곽에 있는 기치조지, 그것도 역세권에서 떨어진 골목에 첫 매장을 오픈한 것도 임대료를 줄이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고요.
놋토 기치조지 매장입니다. ⓒKnot
여기까지 해도 기존의 시계 브랜드와는 차별적 경쟁력을 가져요. 손목 시계를 패션으로 접근하려는 시도이기도 하죠. 하지만 손목 위의 패션으로서 놋토의 진짜 매력은 따로 있어요. 바로 시계의 ‘맞춤화’죠.
패션의 조건 #2. 스타일에 따라 다양한 조합이 가능하게
모두가 가졌기 때문에 갖고 싶은 시대는 지났어요. 명품 브랜드의 시그니처 가방이나 향수도 인기가 많아지면 싫증이 날 수 있죠. 특정 제품에 대한 소비가 증가하면 그 제품의 수요가 줄어드는 ‘스놉 효과(Snob effect)’가 생겨서예요. 마찬가지로 모두가 바라던 시계라도 다수가 갖게 되면 인기를 잃게 돼요.
여기서 놋토의 맞춤화가 빛을 발해요. 놋토는 시계를 완제품으로 판매하지 않아요. 시계 본체와 스트랩을 따로 판매해 고객이 자신의 취향대로 조합해 시계를 완성할 수 있도록 했죠. 고객들이 서로 같은 시계를 가질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드는 거예요. 놋토가 인기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자 놋토 시계가 패션이 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Knot는 시계 본체의 모양, 색깔, 기능 등에 변형을 주어 본체만 약 50가지의 옵션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시티호퍼스
그럼 시계 본체와 스트랩을 고르면 매장 직원이 조립해주냐고요? 그렇지 않아요. 조합한다는 건 제멋대로 해야 제맛인데, 그런 방식이라면 시계 본체와 스트랩을 여러개 사더라도 시계 본체와 스트랩을 교체할 때 번거로울 테니까요. 그래서 놋토는 시계를 통해 개성을 표현하고 싶어하는 고객들의 니즈와 스트랩 교체가 어려웠던 기존 시계에 대한 문제를 해결했어요. ‘이지 레버(Easy lever)’를 통해서요.
이지 레버는 이름이 의미하듯 고객이 직접 손쉽게 스트랩을 교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시티호퍼스
고객은 놋토의 모든 스트랩에 장착되어 있는 이지 레버 덕분에 특별한 공구가 없어도 혹은 조립에 대한 전문성이 없어도 집에서 쉽게 스트랩을 갈아 끼울 수 있어요. 스트랩을 교체하기 위해 시계 매장을 방문해야 했던 기존의 불편함을 해소해 맞춤 시계의 편의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거예요.
이렇게 하니 고객들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시계 본체, 스트랩, 버클 등을 부담없이 선택할 수 있어요. 2023년 1월 기준으로 시계 본체는 128개, 스트랩은 192개의 디자인이 있으니, 이 두 가지 조합만으로도 25,000여개의 시계를 만들 수 있어요. 여기에다가 이름, 기념일, 메시지 등을 각인해주는 서비스를 이용하면 더욱 특별한 시계를 가질 수도 있죠. 이처럼 다양성과 용이성을 동시에 갖춘 맞춤 옵션을 통해 오늘의 패션에 맞는 나만의 시계가 가능해진 거예요.
고객의 취향을 한 번 더 존중하고, 구매욕을 한 번 더 자극하기 위해 놋토는 매장도 ‘맞춤’으로 구성했어요. 보통의 시계 매장은 유리로 된 공간 안에 시계를 진열하는 쇼케이스형 디스플레이를 갖고 있어요. 제품을 깔끔하게 보여주고, 제품을 보호하는 데 적합하기 때문이죠.
고객들은 유리 덮개가 없는 개방형 디스플레이 덕분에 Knot 시계의 다양한 조합을 점원의 도움 없이 직접 체험해 볼 수 있습니다. ⓒKnot
반면 놋토 매장은 개방형 디스플레이를 선택했어요. 모든 제품은 유리판이 없는 선반 위에 일렬로 놓여 있죠. 매장을 방문한 고객들이 보다 편리하게 다양한 옵션을 시험 삼아 착용해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에요. 제품을 보호하는 것보다 고객의 취향을 더 우선시한다는 뜻이죠.
패션의 조건 #3. 다양한 제품과 호환하며 경계를 넘나들게
놋토가 시계를 시간을 확인하는 도구가 아니라 패션으로 접근한 건 스마트폰 때문이에요. 그런데 아이폰을 비롯해 스마트폰 브랜드들이 한 술 더 떠서 시계까지 직접 만들기 시작했어요. 놋토를 런칭한 초기에 애플워치 등이 출시되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시계 시장에서의 존재감이 점점 커진 거예요. 기능과 패션을 동시에 내세우면서요.
우선 기능성이 탁월해요. 디지털 방식으로 시간이 정확한 건 기본이고, 웬만한 스마트폰 기능을 다 담고 있죠. 또한 건강 체크까지 할 수 있어 기능적으로는 나무랄 데가 없어요. 그뿐 아니라 스트랩을 자석 탈부착 방식으로 디자인해 쉽게 갈아낄 수 있게 만들었어요. 놋토처럼 패션으로도 접근이 가능하다는 뜻이죠.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을 제외하면 완벽에 가까워 보이는데, 그렇다면 이제 놋토는 설자리를 잃게 될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디지털이 아니라 아날로그적인 시계 본체를 선호하는 고객층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놋토는 더 지혜로운 생존의 비법을 찾았어요. 바로 공존이에요. 손목 위의 패션을 추구하기 위해 시계 본체를 꼭 놋토에서 제작할 필요는 없거든요. 시계 본체는 애플워치 등을 사용하더라도 놋토에서 디자인한 스트랩을 사용한다면 여전히 놋토는 컨셉을 유지하면서 매출을 올릴 수 있어요. 그래서 놋토는 2022년 6월에 스트랩 전문 브랜드 ‘놋토 더 스트랩(Knot THE STRAP)’을 런칭했죠.
ⓒKnot
방법은 간단해요. 놋토의 스트랩에 달린 이지 레버에다가 애플워치 등과 호환할 수 있는 어댑터를 끼우면 끝. 무수부 프로젝트 일환으로 일본 전역의 장인들과 협업해 디자인한 스트랩이기도 하고, 종류도 훨씬 다양하니 경쟁력이 있어요. 이처럼 놋토는 커스터마이징 범위를 확장하면서 경쟁하는 대신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어요. 새로운 시장이 열린 건 물론이고요.
손목 위를 떠나 시계가 찾아간 곳
스트랩은 애플워치 등과 공존하면서 존재감을 키웠어요. 그렇다면 시계 본체가 시장을 확장할 수 있는 방법도 있을까요? 여기서 놋토는 또 한 번 지혜를 발휘해요. 시계가 있어야 할 자리를 손목 위로만 한정하지 않고, 벽시계를 런칭한 거예요. 2019년 11월에 벽시계를 출시했으니, 시계 본체가 스트랩보다 앞서서 설자리를 넓힌 거죠.
ⓒKnot
벽시계의 핵심은 두 가지. 하나는 손목 시계처럼 얇고 심플한 디자인을 추구해요. 벽시계의 두께를 줄이니 벽에 걸려 있는 시계의 테가 달라져요. 또 다른 하나는 놋토의 시그니처인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해요. 문자판과 프레임을 각각 선택할 수 있는데요. 문자판은 시계의 숫자를 표현하는 방식과 색상에 따라 총 9가지를 선택할 수 있고, 프레임은 7가지 중에서 고를 수 있어 총 63가지의 조합이 가능하죠.
ⓒKnot
물론 벽시계는 손목 위의 패션을 추구한다는 컨셉에서는 벗어나는 제품이에요. 하지만 놋토의 시그니처적인 특성을 유지하면서 아날로그 시계의 설자리를 늘린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설득력 있는 제품 라인 확장이에요. 이처럼 외부 경쟁 환경과 고객의 행동 변화를 의연하게 읽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놋토의 도전을 보면 놋토의 시계가 앞으로도 잘 돌아가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