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품이 아닌 ‘아이디어’를 선발해, 업계의 미래를 가꾼다

고쿠요 디자인 어워드

2024.10.02




모서리가 28개나 되는 지우개, 주방에서 쓰는 랩처럼 종이를 돌돌 말아 풀어 쓰는 노트 등. 상상만으로도 독특하고 기발한 발상의 문구들이에요. 이런 문구, 누가 만들까 싶지만 실제로 상품화가 되어 출시되었어요. 심지어 모서리가 28개나 되는 ‘모서리 지우개’는 출시한 지 1년 만에 100만 개 이상 판매되기도 했어요.


이 문구들은 모두 ‘기능제일주의’ 문구 브랜드, ‘고쿠요(Kokuyo)’의 제품들이에요. 사내 디자인 부서가 있을 테지만, 고쿠요가 이렇게 기발한 제품을 만들 수 있는 비결은 따로 있어요. 바로 매해 문구 디자이너들을 대상으로 상을 수여하는 ‘고쿠요 디자인 어워드’예요. 


고쿠요는 고쿠요 디자인 어워드를 통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모집하고, 일부 수상작들의 제품화를 검토해요. 이 디자인 어워드는 고쿠요에게는 신선한 아이디어를, 신진 디자이너에겐 시장 진출의 기회를 제공해요. 2002년에 시작해 벌써 20회가 넘는 고쿠요 디자인 어워드. 그간 수상했던 작품들도 수백 개가 넘는데요. 그 중 임팩트 있는 수상작들을 모아 소개할게요.


고쿠요 디자인 어워드 미리보기

 #1. 사용 과정에 낭만의 감각을 입히다

 #2. 일하는 사람에게 문구는 무기다

 #3. 관점의 전환으로 세상을 더 풍요롭게

 고쿠요가 젊은 세대의 도전을 응원하는 방법




우리가 흔히 보는 연필과는 다른 이 연필, 도대체 정체가 뭘까요? 바로 ‘사쿠엔피츠(削鉛筆)’예요. 보통 연필처럼 심 부분만 깎아서 쓰는 게 아닌, 손으로 쥐는 부분까지 깎아서 쓰는 연필이에요. 내 손에 맞게, 내 스타일대로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한 연필이에요. 연필 심 부분만 깎는 것도 불편해 연필깎이를 쓰는데, 손으로 쥐는 부분까지 깎도록 디자인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Kokuyo


사쿠엔피츠는 디자이너 덴노 스케의 어릴 적 불편함이 시발점이 되었어요. 덴노 스케는 유난히 손이 커서 기성 연필을 쥐기가 불편했어요. 그는 단지 손이 커서 연필로 글씨를 쓰기 어려웠을 뿐인데, 주변에서 연필을 쥐는 방법이나 글씨체에 대해서 지적 받기도 했죠. 이 때문에 불편함을 느꼈고, 다른 사람들은 그런 감정 없이 본인 손에 맞는 연필을 쥐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들었죠.  


사쿠엔피츠의 이런 의도는 고쿠요 디자인 어워드(Kokuyo Design Award) 2024에서 인정 받아, 가장 우수한 상인 ‘그랑 프리’를 받았어요. 고쿠요 디자인 어워드는 일본의 문구 브랜드 고쿠요가 개최하는 문구 디자인 공모전이에요. 2002년에 처음 시작해 벌써 2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죠. 


고쿠요의 시작은 19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처음부터 문구류를 판매했던 건 아니고, 일본식 회계장부 표지를 만드는 회사로 문을 열었어요. 이후 노트와 메모지같은 문구를 만들다, 1960년대부터는 문구를 수납하는 사무용 가구와 사무 공간까지 디자인하는 회사로 성장했죠. 고쿠요는 전 사업 영역에 걸쳐 ‘제품을 통해 세상을 풍요롭게 한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고객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있어요.


고쿠요는 일본에서도 ‘기능제일주의’ 브랜드로 유명해요. 그만큼 성능 하나는 비견할 만한 브랜드가 없다는 의미죠. 하지만 성능을 우선 시 한다는 브랜드 이미지는 오늘날 경쟁력이 되기가 어려워요. 제품의 성능은 이제 당연한 시대인 데다가, 어딘가 모르게 지루한 느낌도 들고요. 고쿠요가 브랜드 이미지를 다각화하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모으기 위해 시작한 게 바로 고쿠요 디자인 어워드예요.


고쿠요 디자인 어워드는 매년 사회 분위기를 반영해 테마를 발표하고, 이 테마에 맞는 디자인을 직전 연도 7월부터 10월까지 모집해요. 이후 해당 연도 3월에 수상작을 발표하죠. 앞서 소개했던 사쿠엔피츠가 수상했던 2024년도의 테마는 ‘원초적인(Primitive)’이었어요. 기존 연필보다 가공을 덜 거친 원초적인 모습으로 오히려 사용성을 확장한 사쿠엔피츠는 2024년도 테마에 완벽하게 부합했죠.


고쿠요 디자인 어워드에서 수상한 작품들 중 일부는 상품화되기도 해요. 해당 작품을 디자인한 디자이너와 함께 상품화에 필요한 과정들을 거쳐 고쿠요에서 판매하죠. 이 디자인 어워드를 통해 신진 디자이너는 세상과 연결되고, 고쿠요는 브랜드 이미지 쇄신과 더불어 기발한 신제품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어요. 그간 고쿠요 디자인 어워드를 통해 세상에 등장한 획기적인 제품들 중 아이디어가 번쩍이는 수상작들을 소개할게요.



#1. 사용 과정에 낭만의 감각을 입히다


디자인은 ‘심미성’과 ‘기능성’을 모두 추구하는 작업이에요. 시각적 아름다움은 사용자의 ‘감정’에 영향을 주고, 기능적인 편리함은 사용자의 ‘경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죠. 이 두 요소는 대립하거나 양분되지 않아요. 기능을 아름다운 방식으로 강화할 수도 있고, 심미성이 기능적으로 표현될 수도 있죠. 고쿠요 디자인 어워드 수상작 중에 이런 사례들을 몇 가지 소개할게요.


落ち葉を模した色鉛筆 ⓒKokuyo


나뭇잎을 닮은 이 제품,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색연필이에요. 이름도 ‘낙엽을 본뜬 색연필(落ち葉を模した色鉛筆)’로, 고쿠요 디자인 어워드 2023에서 우수상을 받고 제품으로도 만들어진 작품이에요. 


보통 색연필을 꺼내 쓰다 보면 책상이 어수선해져요. 색연필들이 널부러진 책상을 보고 있자면 얼른 정리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고요. 낙엽을 본뜬 색연필의 디자이너, 요시다 미츠타키는 ‘정리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서 영감을 받아 이 색연필을 디자인했어요. 색연필을 사용한 후 무심코 놔 둬도 마치 가을 낙엽이 흩뿌려져 있는 듯한 장면이 연출 되는 거예요.


“제품을 디자인할 때 디자이너는 물건이 ‘사용 중’일 때를 의식합니다. 하지만 실은 사용하지 않는 시간이 더 긴 경우가 많아요. 계단은 사람이 오르내릴 때는 기능을 훌륭히 수행하지만 사용하지 않을 때는 어떨까요? 취침 중이나 낮 시간, 전원이 꺼져 있는 조명기구는 어떨까요? 그것을 저는 사물의 ‘휴식 시간’이라 부릅니다."

- 사토 오오키, <넨도 디자인 이야기>


일본의 디자이너 사토 오오키의 말이에요. 요시다 미츠타키도 사토 오오키처럼 색연필의 ‘휴식 시간’을 고려해 디자인하자, 쉬는 시간에도 치워야 하는 잡동사니가 아닌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제품이 탄생했어요.


게다가 낙엽 모양의 형태는 기능적으로도 장점이 있는데요. 낙엽 모양으로 생긴 덕분에, 뾰족한 면과 넓은 면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에요. 이후 고쿠요는 이 색연필을 상용화했어요. 그 과정에서 고쿠요는 나뭇잎 모양을 일관된 모양으로 만들기 위해 틀을 만들고, 쉽게 부러지지 않도록 원료를 배합하는 데 힘썼어요. 이후 운반할 때나 보관할 때 제품이 망가지지 않도록, 스펀지를 담은 패키지를 만들었고요.


落ち葉を模した色鉛筆 ⓒKokuyo


落ち葉を模した色鉛筆 ⓒKokuyo


한편, ‘아름다운 생활’을 테마로 내건 고쿠요 디자인 어워드 2015에서 수상한 이 캘린더도 시간의 흐름을 아름답게 표현했어요. 이름도 ‘덧없이, 아름답게(儚く、美しく)’로 지었죠. 이 캘린더의 가장 큰 특징이자 비밀은 한 가닥 삐져나온 실이에요. 모든 날짜들이 하나의 실로 연결돼 있어, 실을 당기면 숫자가 하나, 둘 사라지거든요. 그런 식으로 지난날을 지우고 남은 날을 보여주는 달력인 거예요. 


儚く、美しく ⓒKokuyo


덧없이, 아름답게 캘린더로 날짜를 보면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을 단순히 아는 게 아니라 아름답게 체감할 수 있어요. 실을 잡아 당기는 행위로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는 거죠. 실이 많이 뽑혀 있을수록 그만큼 긴 시간이 흘렀다는 뜻이라, 실의 길이로 시간의 흐름을 짐작할 수도 있고요. 이 작품은 아름다운 생활이라는 테마에 딱 맞는 것은 물론, 삐져나온 실 한 가닥을 당기고 싶은 욕구를 자극한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어요.


儚く、美しく ⓒKokuyo


儚く、美しく ⓒKokuyo


“하루가 끝나면 실을 풀고 숫자를 지우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할까요? 생활 속에서, 조용히 매일의 여운을 느끼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 ‘덧없이, 아름답게’ 상품화 과정, 고쿠요 공식 홈페이지


추후 이 캘린더는 상품화되기도 했는데요. 고쿠요는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봉제 기술을 응용해 캘린더에 일괄적으로 구멍을 뚫어 실을 연결했어요. 여러 차례 실험을 거치며 잡아당기면 바로 풀릴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죠. 또한 더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기존과는 비율을 다르게 설정해 벽걸이용 달력으로 재탄생시켰어요.



#2. 일하는 사람에게 문구는 무기다


육아는 장비발, 캠핑도 장비발, 요리도 장비발. 요즘 무엇을 하든 ‘장비발’이 중요하다는 이야기, 많이 들어봤을 거예요. 장비발의 마법은 일에도 적용이 가능해요. 작업의 흐름을 단순화하고, 사용자가 더 직관적으로 제품을 이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제품은 업무의 효율을 높여주죠.


‘고객의 성장을 지원하는 것’도 고쿠요의 철학인 만큼, 고쿠요 디자인 어워드 수상작들 중에서 사용자의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디자인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요. 그중에서는 고쿠요 디자인 어워드가 처음 열렸던 2002년에 ‘가작(佳作)’으로 뽑혀, 아직까지도 전설로 평가 받는다는 ‘모서리 지우개(カド消しゴム)’가 대표적이에요.


カド消しゴム ⓒKokuyo


이 지우개는 왜 이렇게 모서리가 많은 디자인으로 만들었을까요? 지우개를 사용할 때 불편한 점을 떠올려 보세요.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다가 실수할 경우, 주변부는 그대로 두고 딱 실수한 부분만 지우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보통 지우개는 직육면체로 모서리가 8개밖에 없어서, 8번의 기회를 다 쓰고 나면 모서리를 일부러 만들어야 한다는 불편함이 있죠. 뭉툭해진 지우개는 원하는 부분만 지우기가 어려우니까요.


모서리 지우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제품이에요. 모서리를 무려 28개나 장착해 기존 지우개보다 20번의 기회를 더 제공하죠. 모서리 지우개는 단순한 해결책으로 사용자의 불편을 획기적으로 개선했어요. 마치 콜럼버스의 달걀 같은 발상이었죠. 


ⓒKokuyo shop


고쿠요는 모서리 지우개가 고쿠요 디자인 어워드에서 수상한 다음 해인 2003년, 제품화를 시도했어요. 일단 이름부터 ‘카드케시고무(カド消しゴム)’에서 ‘카드케시’로, 부르기 쉽게 바꿨어요. 그리고 모서리가 많은 만큼 찢어질 가능성도 크기에 잘 찢어지지 않는 소재를 골라 제품화했죠. 


カド消し ⓒKokuyo


카드케시는 출시한 지 1년도 안 돼 100만 개 넘게 팔린 히트 상품이 됐어요. 기존 목표치가 40만 개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목표치의 2배를 훌쩍 넘긴 셈이죠. 카드케시는 2003년 굿 디자인 어워드에서 굿 디자인 상(グッドデザイン賞)을 받고, 2005년 뉴욕 현대 미술관(MoMA) 디자인 컬렉션에 선정되며 제품화 이후에도 많은 관심을 받았어요. 


작업 효율을 높인 또 다른 사례로 ‘마키노(Makino)’가 있어요. 노트를 쓰다 보면 종종 공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곤 하잖아요. 한 페이지에 모든 흐름을 정리하고 싶은데, 공간이 부족해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야 하면 맥락이 끊기거나 굳이 넘겨보기 불편하기도 하고요. 


마키노는 그런 노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제품이에요. 책처럼 페이지를 넘겨야 하는 노트가 아니라, 두루마리 휴지처럼 긴 종이를 돌돌 말아 놓은 노트죠. 마키노는 고쿠요 디자인 어워드 2011에서 무언가를 배우기에 좋은 제품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고쿠요상’을 받았어요.   


Makino ⓒKokuyo


마키노는 수상 후 6년이 지난 뒤 제품화가 진행됐어요. 소비자가 조금 더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주방에서 흔히 쓰는 ‘랩(Wrap)’을 컨셉으로 잡았어요. 이름도 ‘종이 랩 노트(ペーパーラップノート)’로 바꿨죠. 내지는 고쿠요의 롱 셀러인 ‘캠퍼스 노트’의 내지를 가져왔고, 종이의 길이는 15m로 노트 약 2권을 이어 붙인 것과 같은 길이로 구성했어요. 이름부터 제품 컨셉, 디테일한 스펙까지 상용화에 맞춰 업그레이드하니, 필기 마니아들의 큰 사랑을 받았죠.


ペーパーラップノート ⓒKokuyo


ペーパーラップノート ⓒKokuyo



#3. 관점의 전환으로 세상을 더 풍요롭게


일본의 디자인 거장, ‘하라 켄야’는 일찍이 디자인을 ‘욕망의 에듀케이션’이라고 했어요. 디자인은 사람들의 욕망에 영향을 미치고, 더 나은 방향으로 그 욕망을 꽃 피우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미예요. 그래야 전반적인 시장의 수준이 올라가고, 시장의 수준이 올라 가면 양질의 마케팅과 제품이 탄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잘 고안된 디자인을 접함으로써 각성이 일어나고 욕망에 변화가 생기며, 그 결과 소비 형태나 자원의 이용 방식, 나아가서는 일상생활의 양상이 변해간다.”

-하라 켄야, <내일의 디자인> 중에서


이처럼 고쿠요 디자인 어워드 수상작들 중에서도 사람들의 관점에 영향을 끼쳐 인식과 행동에 변화를 이끌어 내는 작품들이 있어요. 더 창의적이고, 더 풍부한 세상을 만드는 방향으로요. 먼저 고쿠요 디자인 어워드 2012에서 그랑프리를 받은 작품은 ‘이름 없는 물감(なまえのないえのぐ)’을 소개할게요.  


なまえのないえのぐ ⓒKokuyo


なまえのないえのぐ ⓒKokuyo


이 물감은 이름 그대로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아요. 어떤 색인지는 색의 이름이 아니라 삼원색의 조합을 통해 알 수 있죠. 왜 이런 물감을 만든 걸까요? 이 제품은 색을 부르는 ‘이름’에 대한 문제 의식에서 출발했어요. 우리나라에선 ‘하늘색’으로 통용되는 색을 일본에서는 ‘물색’이라고 불러요. 사실 물은 투명해서, 무엇을 비추느냐에 따라 다른 색으로 보이기 마련이잖아요. 이 제품의 디자이너인 이마이 유스케와 모기 아야미는 어린 시절부터 이런 색 이름에 대한 의구심을 느꼈어요.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피부색은 모두 다른데, 한 가지 색만 ‘살색’이라고 표현한 점도 개선하고 싶었어요. 실제로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있던 살색은 차별 행위라는 논란이 있었던 바 있죠.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살구색’으로, 일본에서는 ‘연주황색’으로 부르고 있어요. 


이에 이름 없는 물감은 색에 대한 고정관념을 없애고, 물감을 고르기 전 머릿속에서 스스로 색을 조합해 상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요. 삼원색들을 조합하면 그 어떤 색도 만들 수 있다는 원리에 착안한 거죠. 이 디자인은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관점을 제안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어요. 


なまえのないえのぐ ⓒKokuyo


なまえのないえのぐ ⓒKokuyo


이번에는 고쿠요 디자인 어워드 2022의 그랑프리 수상작이에요. ‘생각의 흐름(Flow of Thoughts)’이라는 이름의 노트예요. 언뜻 보기에는 낙서장 같이 생겼죠. 노트가 이미 낙서로 가득해 한 페이지당 기껏해야 2~3문장 정도 적을 수 있는 공간만 남아 있어요. 사용자가 모든 공간에 필기할 수 있도록 텅 비워져 있는 기존 노트와 다른 모습이에요.


Flow of Thoughts ⓒKokuyo


이 노트의 디자인에는 숨은 의도가 있어요. 이 작품의 디자이너인 에밀리와 조셉은 이 작품을 ‘맥시멀리즘 세계를 살아가는 미니멀리스트의 노트’라고 소개해요. 바쁘고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단순함과 본질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노트라는 뜻이죠. 즉, 낙서로 가득 찬 공간은 복잡하고 불필요한 생각을 비워내는 공간이며, 2~3문장 정도 적을 수 있는 공간은 꼭 필요한 생각을 적는 공간인 거예요.


보통 사람들은 노트의 공간을 낭비하지 않고 글씨를 빼곡하게 적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잖아요. 이런 사람들의 생각에 따라 노트는 보통 새하얗게 비워져 있고요. 생각의 흐름 노트는 이런 기존의 고정관념을 비틀어, 쓸데없는 생각을 흘려보낼 줄 알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어요. ‘배운 것을 일부러 잊는다’는 뜻의 2022년의 테마, ‘UNLEARNING’에 부합하는 메시지예요.


마지막으로 2023년 고쿠요 디자인 어워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사하라(Sahara)’도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행동을 유도했어요. 사하라는 팔레트인데요, 한 눈에 보기에도 칸막이로 나눠져 있는 기존 팔레트와 다르게 생겼어요. 원래 팔레트는 물감의 색이 서로 섞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칸막이로 나눠져 있는 게 보통이에요. 그리는 사람이 의도한 색을 위해 섞지 않는 이상, 팔레트에 짜 놓은 물감들은 처음에 짠 색깔을 유지하죠. 


Sahara ⓒKokuyo


하지만 사하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의 팔레트예요. 칸막이가 없는 데다 높낮이가 있어서, 높은 곳에 물감을 짜두면 언젠가 낮은 곳으로 흐르기 마련이거든요. 물감이 묽으면 묽을수록 더 빨리 흘러 다른 색과 섞이죠. 오히려 물감끼리 섞이는 것을 유도한 디자인이에요. 사하라의 디자이너, 왕미 니시는 그림 그리는 과정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팔레트라고 설명했어요. 


의도한 그림만 빨리 완성하려고 하다 보면 어느 새 그림 그리는 걸 즐길 수 없게 되잖아요. 그러지 말고 시간이 지날수록 팔레트 색깔이 다양해지는 걸 보면서 느긋하게 그림을 그리고, 새로운 색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사하라를 디자인한 거죠. 이 팔레트를 통해 광활한 창의력을 펼칠 수 있을 거라는 점에서 ‘사하라 사막’에서 이름을 따온 거기도 하고요.  ‘포옹하다(Embrace)’라는 2023년 테마의 관점에서도 의미를 가지죠. 



고쿠요가 젊은 세대의 도전을 응원하는 방법


고쿠요 디자인 어워드에서 많은 수상작들이 상품화되었어요. 덕분에 소비자들의 일상은 개선되었고, 디자이너는 세상에 이름을 알렸으며, 고쿠요는 신제품으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었죠. 그런데 고쿠요는 상품화를 염두에 두기는 커녕, ‘상품화하지 않을’ 작품들을 수상하기도 해요. 이유가 무엇일까요?


고쿠요 디자인 어워드는 2024년부터 프로 디자이너가 아닌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뉴 제너레이션(New Generation)’ 상을 수여하기 시작했어요. 이 상은 상품화를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아이디어’만 보고 수여하는 상이에요. 이런 저런 이유로 상품화하기에는 어렵지만, 아이디어나 착안점에 매력이 있는 작품들을 선정하는 거죠. 뉴 제너레이션 상은 차세대 디자이너가 될 학생들의 다음 도전을 지원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어요.


고쿠요 디자인 어워드 2024에서 뉴 제너레이션 상을 받은 작품은 총 10개인데요. 연필을 얼마나 썼는지 시각적으로 보여줘 동기부여를 해주는 펜슬 홀더, 책의 북마크 끈에서 모티브를 얻어 책갈피 역할을 하는 북 스탠드, 꽃 모양의 수채화 물감 등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시선을 끌어 당겨요.


연필 홀더 ‘56km’ ⓒKokuyo


북 스탠드 ‘시오리(栞)’ ⓒKokuyo


수채화 물감 ‘블룸(Bloom)’ ⓒKokuyo


‘상품화’라는 기준을 떼어 놓고 보니 오히려 아이디어의 범위가 확장되는 것 같아요. 상품화의 관점에서 보면 미완성의 아이디어들이지만, 발상의 관점에서라면 충분히 가치가 있는 작품들이죠. 고쿠요 디자인 어워드는 학생들의 아이디어를 설 익은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 대신, 그 도전을 독려하고 있어요. 가능성을 인정받은 이 학생들은 덕분에 도전하는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 용기는 언젠가 세상에 필요한 디자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지 않을까요?





Reference

고쿠요 공식 웹 사이트

고쿠요 샵 공식 웹 사이트

KOKUYO Design Award 2024, youthop

Jewel Tolbert, Emotional Design: How to Create Products People Will Love, tandem

하라 켄야, <내일의 디자인>,이규원 옮김, 안그라픽스

사토 오오키, <넨도 디자인 이야기>, 정영희 옮김, 미디어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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