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베이에는 ‘대만에서 가장 패셔너블한 보존 식품 브랜드’가 있어요. 푸드 디자이너 슬로우 첸이 만든 ‘루우(LOUU)’죠. 대만의 기성세대에게 통조림, 병조림 등의 보존 식품은 태풍 등의 자연재해나 전쟁 등의 인재를 떠올리게 하는 비상식량이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보존 식품이 이런 수식어를 갖게 된 걸까요?
그 비밀은 루우의 뚜껑을 열어보면 알 수 있어요. 루우 안에는 대만에서만 맛볼 수 있는 풍미와 문화, 심지어 계절이 들어있거든요. 식품 자체의 레벨도 높아요. ‘계수나무 전복 간장 절임’, ‘매콤한 토마토 콩피’, ‘화이트 비네거 아스파라거스 절임’ 등 루우의 병조림 하나면 근사한 요리가 뚝딱이죠.
그런데 루우가 보여주는 보존 식품의 잠재력은 이게 끝이 아니에요. 루우의 창업자인 슬로우 첸은 보존 식품을 통해서 대만의 식품 판매 공급망까지 새롭게 디자인하거든요. 그 어떤 어글리 푸드도 그녀의 손끝만 거치면 새로운 요리가 돼요. 비상식량인 줄로만 알았던 보존 식품의 반전 매력, 지금부터 만나볼까요?
루우 미리보기
• 대만의 풍미와 문화를 봉인하다
• 동네의 카탈로그가 된 식료품점
• 건축에서 음식으로, 디자이너의 사고법
• 브랜드에는 유통기한도, 소비기한도 없다
침대 위에서 밤늦도록 퀭한 눈으로 휴대폰을 스크롤 하거나, 맵고 기름진 음식으로 스트레스를 풀다가 위장병에 걸린 사람들. 수십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현대인의 모습이에요. 이런 현상은 사회와 기술이 발달하면서 함께 나타난 일종의 ‘문명병’이라고도 할 수 있죠. 만약 문명병에 걸려버린 사람들을 고대의 명의가 치료한다면 과연 어떤 처방을 내릴까요? 실제로는 결코 경험할 수 없을 상상을 실제로 구현해낸 곳이 있어요. 이곳에서는 500년도 더 된 시절의 명의의 처방을 받아볼 수 있죠.
ⓒSlow Food Design
명의의 오래된 치료법과 철학을 따르는 의약품을 판매하는 전통 의원이냐고요? 이곳은 의원이 아니라 술을 파는 바(bar)예요. 대만의 ‘심플 라이프 페스티벌’에서 처음 선보인 이 팝업 바는 중국의 전통 의학을 모티브로 술을 만들어 팔죠. 보통 술은 병의 치료제보다는 원인으로 여겨져요. 그런데 어쩌다 이런 독특한 컨셉의 ‘중국 전통 의학 바’가 생겨난 걸까요?
이 팝업 바에서 제공하는 술은 평범한 술이 아니라 문명병을 치료할 수 있는 ‘치유 칵테일’이었어요. 직원들은 실제 병원에서 볼 법한 하얀색 가운을 걸친 채 술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건넸죠. 칵테일의 종류는 총 4가지였어요. 이 칵테일들은 잠들기 전에 의미 없이 휴대폰을 스크롤 하다 생겨버린 신경 피로, 격렬한 뇌 사용으로 발생하는 불면증, 자극적인 식단에서 비롯된 불면증, 호르몬으로 인한 기분 장애라는 증세를 치료하는 역할을 맡았죠.
ⓒSlow Food Design
ⓒSlow Food Design
이 참신한 팝업 바를 기획한 것은 ‘슬로 푸드 디자인(Slow Food Design)’과 Bar TCRC예요. 사람들이 머리가 아프면 의사를 찾아가지만, 마음이 아프면 술을 마신다는 점에 착안해서 술이라는 소재로 현대인들의 마음을 달래주고자 했죠. 칵테일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스낵은 신체 기능 조절에 관한 효능이 있는 중국의 전통 성분을 베이스로 만들었어요. 이렇게 중국의 전통 의학은 현대적인 치유 레시피로 재탄생했죠.
칵테일의 성분뿐만 아니라 전통 의원의 기능과 역할에서도 모티브를 얻었어요. 과거 의원에서는 사람들의 신체적 문제만 치료한 게 아니라 마음도 치료했거든요. 편두통, 두통과 같은 흔한 질병은 심리 상태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았고, 사람들도 의원에서 약을 조제하는 동안 사사로운 일에 대해 털어놓곤 했죠. 팝업의 기획자들은 현대인들이 술집에 가서 바텐더와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시는 것 또한 마찬가지라고 봤어요. 바에서 보내는 시간은 유흥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마음을 치유하는 과정이기도 하니까요. 알고 보면 병원과 바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안타깝게도 대만에서 중국 전통 의약품을 다루는 가게들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어요. 그래서 슬로 푸드 디자인과 Bar TCRC은 중국 전통 의학이 맞이하고 있는 현실을 수면 위로 끌어냈어요. 현대 사회의 문제와 엮어 유머스럽게 말이죠. 슬로 푸드 디자인의 창업자 첸샤오만(陳小曼)은 이렇게 음식을 도구로 삼아 대중과 커뮤니케이션하는 ‘푸드 디자이너’인데요. ‘슬로우 첸’이라고 불리는 그녀가 요즘 주 커뮤니케잉션 수단으로 삼은 소재가 있어요. 바로 ‘보존 식품’이에요. 보존 식품 브랜드 ‘루우(LOUU)’를 만들어서 기발하고 참신하게 대만 사회에 화두를 던지고 있죠. 루우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지금부터 들어볼게요.
ⓒ시티호퍼스
대만의 풍미와 문화를 봉인하다
‘대만에서 가장 패셔너블한 보존 식품’
슬로우 첸이 만든 보존식품 브랜드 ‘루우’에 대한 세간의 평가예요. 그런데 좀 이상하죠. 대만의 기성세대에게 보존 식품의 연관 검색어는 ‘전쟁’과 ‘태풍’이거든요. 통조림이나 캔은 주로 전쟁이나 태풍 등의 재해를 대비해 비축해두는 비상식량으로 소비되어왔기 때문인데요. 어떻게 이 비상식량이 패셔너블해질 수 있었던 걸까요?
ⓒ시티호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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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결은 푸드 디자이너인 슬로우 첸의 시각과 관점에 있어요. 사물을 있는 그대로만 인식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슬로우 첸은 항상 이면에 있는 가능성과 숨은 의미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통조림, 캔 등의 보존 식품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였죠. 그녀가 푸드 디자이너로서 주목한 것은 지금까지 보존 식품이 소비되어 온 배경과 맥락이 아니었어요. 보존 식품 안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죠.
계기는 슬로우 첸의 오랜 해외 생활에서 비롯됐어요. 이탈리아, 스페인에서 유학과 근무를 했던 슬로우 첸은 종종 대만으로 귀국할 때 기념품으로 통조림을 사 왔거든요. 통조림 안에는 현지에서만 맛볼 수 있는 식재료나 현지식 양념 등이 담겨져 있어서 언제든 꺼내 먹기 좋았죠. 슬로우 첸은 통조림에서 한 나라의 문화나 관습을 보존하는 기념품으로서의 가능성을 봤어요. 그리고 대만에는 왜 풍토나 풍습을 담은 보존 식품이 부족한지 의문을 품게 됐죠.
그뿐 아니에요. 대만에서는 집 근처에서 다양하고 신선한 식재료를 구하기가 어려웠어요. 맛있는 해산물이 많은데도 도시의 슈퍼마켓이나 시장에서는 이를 구경하기조차 어려웠죠. 슬로우 첸은 만약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앞으로 악순환이 심해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식재료를 편하게 구하기 어려워지면 다양한 요리법이 발달하지 않게 되고, 구매자의 수가 점점 줄어들면 슈퍼마켓에서도 상품 비축량을 줄이게 되죠. 결국 상품 선택의 폭이 좁아지면 앞으로 대만 요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나 상상력이 반감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어요.
슬로우 첸은 고민 끝에 자신이 직접 이 공급망의 연결고리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보존 식품 브랜드 루우를 만들어 대만의 맛을 봉인하기 시작하죠. 2년 넘게 대만의 산과 바다를 돌아다니며 장인을 만나고, 전통적인 절임 기술을 적용한 식품들을 작은 유리병 속에 담았어요.
예를 한번 들어볼게요. 루우의 제품 중 ‘불꽃 정어리 콩피(Confit firework sardines with tochi)’는 대만 진산(金山) 일대에서 잡은 정어리뿐만 아니라 전통 어획 문화까지 담고 있어요. 진산에서는 밤이 된 후 배의 불빛을 미끼 삼아 물고기를 유인하는데, 이때 은색 물고기가 튀어 오르는 모습은 마치 불꽃처럼 반짝거려요. 이렇게 잡은 정어리는 보관이 쉽지 않아 주로 현지인에게 팔리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이 슈퍼마켓이나 식당에서 사 먹기는 어렵죠. 루우는 사라져가는 전통 어획 법을 보존하고 맛을 알리기 위해 이 정어리를 겨자씨유에 절여 하나의 요리로 만들었어요. 이처럼 루우의 보존 식품 하나 하나가 대만의 문화와 풍미를 봉인하고 있죠.
ⓒLOUU
루우는 대만의 계절에 맞춘 제품을 만드는데도 적극적이에요. 봄과 여름에는 ‘매실 연근 절임’, ‘기름에 절인 산초와 죽순’, ‘아카시아 크림’ 등의 신제품을 출시하며 보존 식품을 계절과 절기를 기록하는 수단으로 활용했죠. 보존 식품의 유통기한이 3년까지 늘어나는 점을 감안하면 소비자는 3년 전 봄의 맛까지 즐길 수 있는 거예요. 보존 식품에 대한 사람들의 선입견이 깨질 수밖에 없죠.
루우가 보여주는 보존 식품의 잠재력은 이게 끝이 아니에요. 루우가 선택하는 원재료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어요. 현지 생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폐기 수순을 밟게 되는 규격 외 상품들을 사용한다는 거죠. 이는 슬로우 첸이 NG 상품에서도 진짜 가치를 알아봤기 때문이에요. 이른바 ‘어글리 푸드(Ugly food)’라 불리는 식재료는 어딘가 부서지거나 썩은 상품이 아니에요. 단지 모양이나 규격이 표준에서 벗어났을 뿐이죠. 대만에는 이와 같은 어글리 푸드의 비중이 약 30% 내외에 달하는데요. 지금까지는 식품 판매 공급망에서 배제되며 자연스럽게 음식물 쓰레기가 되어 왔어요.
하지만 슬로우 첸은 식재료의 진가를 모양이 아닌 맛에서 찾았고, 이를 요리 메뉴로 격상시켰어요. 동시에 보존 식품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기름을 혼합유가 아니라 카놀라유로 바꿔서 제품의 퀄리티까지 업그레이드했고요. 이렇게 하면 병 속에 든 음식을 다 먹고 남은 기름을 요리 양념으로도 쓸 수 있죠. 그 결과 지금껏 NG로 간주되던 식재료들이 새로운 요리(New Gourmet)로 재탄생할 수 있었어요.
동네의 카탈로그가 된 식료품점
슬로우 첸은 보존 식품을 ‘기록과 전달의 매개체’로 만들었어요. 덕분에 사람들은 대만에도 다양한 식재료가 있다는 것과, 좋은 음식은 고급 레스토랑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죠. 단지 외형 때문에 버려지던 식재료들은 쓸모를 되찾았고요. 푸드 디자인을 통해 업계의 한계를 극복하는 동시에 시장의 메커니즘을 바꾼 것인데요. 슬로우 첸은 그다음 행보로 오프라인 컨셉 스토어를 오픈했어요. 루우가 대만에서 가장 패셔너블한 보존식품이라면, 이번에는 동네에서 가장 트렌디한 식료품점이 되기로 하죠.
그렇다면 늘 남다른 관점으로 세상에 화두를 던져온 슬로우 첸이 만든 식료품점은 일반 슈퍼마켓 및 편의점과 무엇이 다를까요? 차별점은 ‘네이버 바이 루우(Neighbour by LOUU, 이하 네이버)’라는 가게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어요. 어딜 가든 똑같은 형태와 구색인 체인형 마트와는 달리, 실제 이웃들의 생활 모습과 동네의 특색을 보여주고자 했거든요.
ⓒ시티호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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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로 슬로우 첸은 ‘동네의 카탈로그’가 되는 식료품점을 만들고자 했어요. 선반에 유럽식이나 미국식 조미료가 많으면 외부에서 새로 유입된 주민이 많다는 걸 알 수 있듯이, 가게에 있는 상품의 종류와 양을 통해 근처에 누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공간을 꿈꿨던 거죠. 또 식료품점을 식재료만 파는 곳이 아니라 동네를 반영하는 커뮤니티로 만들고자 했어요. 그래서 매장에는 루우의 제품은 물론 다른 브랜드의 통조림이나 병조림, 식재료, 와인, 도서 등이 큐레이션 되어 있죠.
그럼 직접 매장을 둘러볼까요? 들어서자마자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아크릴에 인쇄되어 있는 문구들이에요. 어릴 적부터 책 읽기를 즐겨온 슬로우 첸은 ‘감각’과 ‘독서’를 매장을 꾸미는 주요 기준으로 삼았어요. 그래서 버지니아 울프, C.S. 루이스, 조지 버나드 쇼 등의 명언들을 통해 음식에 관한 신념을 대신 전달하고 있죠. ‘잘 먹지 않으면 잘 생각할 수도, 사랑할 수도, 잘 수도 없다’, ‘음식에 관한 사랑만큼 진실한 사랑은 없다’처럼 말이에요.
ⓒ시티호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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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 아니에요. 이곳에 진열된 식료품들 곁에는 항상 책과 잡지 등의 출판물들이 함께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이건 타이베이에서 서점과 카페를 운영하며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폰 딩(Pon ding)’의 손길을 거친 거예요. 이처럼 네이버는 매장에서 식재료와 관련이 있는 책들을 판매하며 음식 관련 이야기도 함께 전달하고자 했어요. ‘책은 머리를 위한 음식(Food for brain)’이라는 철학이 돋보이죠.
ⓒ시티호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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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우가 대만의 자연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브랜드인 만큼, 매장에서는 지속 가능성을 위한 노력들도 엿볼 수 있어요. 매장에서 제공되는 재사용 백은 ‘APP(A Plastic Project)’의 제품인데요. 이 가방은 커피 체인점에서 발생하는 커피 찌꺼기와 재활용 플라스틱 입자를 재활용한 거예요. 은은한 커피향이 날 뿐만 아니라 안에 담은 음식 냄새를 차단해 주죠. 매장에 비치된 의자는 대만 브랜드 ‘ESAILA’가 사무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압정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제품으로, 천연 소재인 코르크로 만들어졌고요. 그 밖에도 재활용 울 소재 리울(Re-wool) 원단으로 만든 덴마크 ‘Kvadrat’의 커튼 등 매장 곳곳에서 루우의 신념을 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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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네이버 매장에서는 루우와 비슷한 신념과 취향을 가진 다른 브랜드의 제품들도 쉽게 만나볼 수 있는데요. 네이버가 다루는 상품들은 음식, 책, 식기, 가구뿐만이 아니에요. 중요한 핵심 제품이자 IP 중 하나는 바로 ‘동네 이웃의 생활’이죠. 네이버는 가까이에 있는 이웃의 삶과 요리법 등 생활 풍경 자체를 보존하기 위해 직접 출판물을 제작했어요. 이웃들의 부엌은 어떤 모습인지,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양념을 사용하는지 등 세세한 생활 속 장면들을 담아 창간호를 발행했죠. 루우가 대만의 자연과 풍토를 보존한다면, 네이버는 도시 속 이웃의 삶을 기록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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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 첸은 오프라인 공간의 진짜 가치는 ‘커뮤니티’이자 ‘심리적 공동체’에 있다고 봤어요. 요즘은 온라인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물건을 구매할 수 있지만, 사람들의 감정이 오고 가며 직접 연결되는 과정은 오프라인 공간에서만 발생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앞으로도 네이버를 채널로 삼아 동네의 특색과 라이프스타일을 보존하고 키워나갈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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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에서 음식으로, 디자이너의 사고법
슬로우 첸은 보존식품 브랜드 루우와 컨셉 스토어 네이버를 통해 식료품 업계의 정형을 깨나가고 있어요. 누군가는 이런 변화로 세상을 얼마나 바꿀 수 있겠냐고 할 수도 있지만 슬로우 첸의 생각은 달라요. 만약 루우에서 10,000개의 제품을 판매한다면 10,000 가정의 식단을 바꾸는 것이라 다름없다고 여기거든요. 이때 단순히 사람들의 입맛뿐만 아니라 음식과 관련한 감수성에도 영향을 끼치는 만큼, 루우는 세상의 일부를 바꾸고 있다고 확신하죠.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어요. 푸드 디자인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커다란 포부를 가진 슬로우 첸은 원래 건축 디자인 업계에 몸담고 있었거든요. 대학에서 건축 디자인 학과를 전공한 뒤, 졸업 후에도 건축 사무소에서 일을 했죠. 건축과 음식은 소재부터 큰 접점이 없어 보이는데요. 어떻게 서로 다른 두 분야를 오가게 된 걸까요?
평소에도 음식에 관심이 많았던 슬로우 첸은 졸업 후 건축 사무소에서 일하면서도 음식 촬영 스튜디오를 함께 운영했었어요. 건축과 푸드 스타일링이라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느라 하루 18시간을 일해야 했지만, 음식의 미학적인 면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열정은 더욱 커졌죠. 스물여섯이 될 즈음에는 직접 음식 사진 잡지 ‘너티(Nutty)’를 발행하기도 했어요. 이 경험은 훗날 네이버의 창간호를 발행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했죠.
주로 카메라 렌즈를 사이에 둔 채 음식을 다뤄온 슬로우 첸은 서른이 되자 유럽에 건너가 푸드 디자인 석사 과정에 뛰어들기로 했어요. 이탈리아의 ‘폴리테크니코 디 밀라노 칼리지(Politecnico di Milano College)’에서 세계박람회를 계기로 푸드 디자인 석사 학위 프로그램을 개설하자 참여하기로 한 거죠. 전공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 슬로우 첸의 선택이 낯설게 보일 수 있어요.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슬로우 첸은 건축과 음식을 다르게 보지 않았어요. 차이는커녕 오히려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걸 발견했죠.
우선 건축물도, 음식을 담은 유리병과 도자기도 결국 내용물을 담고 있는 하나의 ‘용기(Container)’였어요. 이 용기 안에는 모두 생명이 들어있고, 완성까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공통점도 있었죠. 컨셉에 걸맞는 모델을 개발하고, 테스트를 반복해서 최종적으로 완제품을 만드는 과정은 동일한데 단지 재료가 철근 콘크리트에서 식품으로 달라졌을 뿐인 거예요. 결국 스케일의 차이가 있을 뿐 건축과 음식 사이에는 공통점이 훨씬 많았죠.
"4개월간 인턴 생활을 하면서 음식과 건축이 같은 뿌리에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나중에 조사를 해보니 대부분의 푸드 디자이너들이 건축이나 공간에 대한 배경지식을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둘 간의 디자인 사고법은 사실 굉장히 비슷해요."
-슬로우 첸, 마리끌레르 인터뷰 중
곧이어 슬로우 첸은 지금까지의 자신의 경력을 ‘디자이너’일 뿐이라며 명쾌하게 정리했어요. 외부 시선으로는 건축, 사진, 잡지, 음식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는 N잡러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슬로우 첸은 한결같이 똑같은 일을 해왔던 거죠. 음식을 위해 건축의 길을 결코 포기한 것이 아니라, 건축에서 배운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을 음식 디자인에 적용시켜 가면서 말이에요.
“저는 디자이너라고 말하고 싶어요. 디자인은 저의 능력이고 음식은 제가 선택하는 매체예요. 제 손에 있는 도구가 과거의 건축물이든 오늘날의 음식이든 상관없이, 디자인적 사고와 맥락은 저에게 매우 비슷하죠.”
-슬로우 첸, 마리끌레르 인터뷰 중
브랜드에는 유통기한도, 소비기한도 없다
루우에서 지금까지 출시된 제품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어요. 루우가 보존 식품 안에 담고자 하는 것은 현지의 식자재뿐만 아니라 식자재가 나고 자라는 대만의 공간적, 시간적 맥락도 포함된다는 거죠. 슬로우 첸은 앞으로도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것까지 병 속에 넣어 기록하고 보존해 나갈 계획인데요. 그렇다면 슬로우 첸에게 보존 식품은 어떤 존재일까요?
슬로우 첸은 브랜드를 창립한 순간부터 보존 식품을 ‘병 속에 든 편지’라고 비유했어요. 누군가 루우의 제품을 사서 병을 개봉하게 되면, 그제야 자신이 병 속에 넣어둔 편지가 펼쳐져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고 믿었죠. 하지만 결국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일단 누군가 병을 열어보아야 해요. 그래서 슬로우 첸은 무엇보다 ‘음식이 맛있어야 한다’는 우선순위를 절대 잊지 않죠.
한 가지가 더 있어요. 슬로우 첸은 루우가 아이와 추억을 만들고 싶어 하는 부모님은 물론, 다양한 사람들에게 영감의 소재가 되기를 원해요. 냄새나 소리가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는 ‘프루스트 효과’처럼, 루우의 제품이 사람들에게 추억의 촉발제가 되기를 바라는 거죠. 루우에서 독특한 맛의 버터를 출시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비롯된 거예요. 한 세대가 경험했던 공통된 맛을 버터 형태로 개발해서 누구나 어린 시절을 추억할 수 있도록 했으니까요.
ⓒLOUU
물론 루우의 보존 식품들도 결국 하나의 음식이기 때문에, 누군가 먹고 나버리면 사라질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루우가 병 속에 대만의 풍토와 이웃의 삶, 어린 시절의 추억을 계속해서 봉인하는 한, 사람들은 루우를 계속 기억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유통기한도, 소비기한도 없이 말이에요. 그것이야말로 음식을 넘어 기억까지 디자인하는 푸드 디자이너 슬로우 첸의 진짜 계획일지도 몰라요.
Reference
• 昭編, 【自媒體時代】陳小曼 食物與設計激盪的創意, Marie Claire
• 江佩君, 極簡內在風格外觀,保存食新品牌「LOUU」封存對台灣風土的愛, 500輯
• 沈佩臻, 醜食美味不減,LOUU納入格外品為原料:蘆筍、甜椒保存食上市,中秋赭月禮盒完美款待五感, 500輯
• 沈佩臻, LOUU概念店Neighbour登場!攜手ADC Studio、L'épicerie Croix等合作,打造最潮鄰里雜貨店, 500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