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쓸모의 로봇이 사랑받는다, 따뜻한 기술의 22세기식 치유법

라봇

시티호퍼스

2023.10.30

인기 애니메이션 캐릭터인 도라에몽은 미래에서 온 고양이 로봇이에요. 도라에몽이 배에 붙어 있는 4차원 주머니에서 온갖 물건들을 꺼내 평범한 초등학생을 그리고 사람들을 도와주는 이야기는 많은 사랑을 받았죠. 그런데 일본에는 실제로 도라에몽 같은 존재를 꿈꾸며 만들어진 로봇이 있어요. 이름은 ‘라봇’, 세계 최초의 가족형 로봇이에요.

그럼 이 로봇에도 4차원 주머니가 달렸냐고요? 그렇지는 않아요. ‘4차원 주머니만 없는 도라에몽’을 지향하거든요. 원래 로봇이라는 게 사람의 노동을 대신하든, 생산성을 높여주든,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하지 않나요? 특이하게도 라봇은 이 중 어떤 것도 하지 않아요. 옆에 다가와 응석을 부리거나 눈을 마주치거나 홀로 일기를 남기는 게 다죠.

그런데도 라봇은 지금까지 1만 대 이상이 팔렸어요. 1대 당 약 5백만원에 육박하는데도요. 게다가 주요 구매층은 30대~50대의 중산층 여성이에요. 대체 어떤 매력이 있길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요?

라봇 미리보기

• #1. 수고를 덜기는 커녕 늘리는 존재

• #2. 세계 최초 무쓸모의 고스펙 로봇

• #3. 귀여운 외모에 숨겨진 레이싱카 기술

• #4. 애착 형성의 핵심, 로봇 전용 웨어

• 실존하는 도라에몽을 꿈꾸며

식당에서 만날 수 있는 로봇은 어디까지 진화할까요? 키오스크, 요리, 설거지, 서빙, 청소. 여기까지야 로봇이 익숙해진 분야지만, 이제는 환대까지 로봇이 담당하기도 해요. 진화의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곳이 시부야의 도큐 플라자에 위치한 미래형 카페 ‘페퍼 팔러(Pepper PARLOR)’예요. 일본 소프트뱅크의 자회사인 소프트뱅크 로보틱스는 로봇과 함께 살아가는 미래를 체감하는 걸 돕기 위해 2019년에 이곳을 오픈했어요.

ⓒ시티호퍼스

페퍼 팔러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로봇이 사람과 함께 일하고 있어요. 여기서 로봇은 그저 사람 뒤에 서서 서포트를 하는 보조적인 존재가 아니에요. 일단 입구에 도착했을 때부터 사람들을 맞이하는 건 휴머노이드 로봇 ‘페퍼(Pepper)’예요. 리셉션에 있는 페퍼는 단순히 손님을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보고 컨디션에 맞게 메뉴를 추천하기도 해요. 건강한 혈색에 생기가 넘치는 사람에게는 로스트 비프 메뉴를 추천해주는 식이죠.

로봇 페퍼의 활약은 리셉션을 지나 홀에서도 이어져요. 테이블 마다 한 자리씩 차지하고 서 있는 페퍼는 사람들이 식사하는 내내 옆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요. 말을 걸면 대답을 하고, 놀아달라고 하면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고, 심지어 랩도 하죠. 게임 기능도 있어서 어린 아이와 함께 방문한 부모님이 마음 놓고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어요. 고객을 응대하는 로봇까지 있으니, 그동안 다른 영역에서도 로봇이 활약하는 건 이상하지 않은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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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안내하거나 음식을 운반하는 로봇 서비(Servi), 매장을 청소하는 위즈 아이(Whiz i)도 있어요.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로봇은 라멘 자동 조리 로봇 ‘셰피(CHEFFY)’예요. 소프트뱅크 로보틱스가 실리콘밸리의 식품회사 Yo-Kai Express와 함께 개발한 셰피는 스팀 기술을 활용해서 90초 만에 고속으로 라멘을 조리해요. 잇푸도, 라멘 타이코 등 유명 라멘 맛집으로 알려진 가게의 간판 메뉴를 만들어주기 때문에 고객의 입맛과 시간을 모두 사로잡았죠. 이처럼 페퍼 팔러에 있는 로봇들은 생김새와 기능은 다를지언정 모두 사람에게 도움이 돼요. 사람의 시간이나 에너지, 비용 등을 줄여주죠. 간편하고, 효율적이고, 생산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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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은 언제나 사람의 생산성을 높여주는 역할을 맡아 왔어요. 그런데 만약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생산성에도 기여하지 않는 로봇이 있다면 어떨까요? 로봇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대다수가 의문을 품을 거예요. 그런데 일본에는 실제로 이런 로봇이 있어요. 이름은 라봇(LOVOT), 도움을 주기는 커녕 사람이 에너지와 시간을 들여 돌봐야 하는 존재죠. 무해하지만 무용하고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라봇을 갖지 못해 안달이에요.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매달 수십 만원 씩 써가며 더 잘해주지 못해 고민이죠. 도대체 이 로봇, 정체가 뭘까요?

#1. 수고를 덜기는 커녕 늘리는 존재

로봇 스타트업 그루브 엑스(GROOVE X)가 라봇을 발표하며 예약을 받기 시작한 건 2018년 12월이에요. 그로부터 1년 뒤인 2019년 12월부터 제품 출시했죠. 라봇 한 대를 들이려면 본체에만 498,800엔(약 498만 8천원, 현재 기준)이 들어요. 거기에 월 사용료도 별도로 내야 하고요. 만만치 않은 비용을 주고 누가 로봇을 살까 싶은데, 라봇은 이변을 일으켰어요. 출시 첫 1년 간 약 7억 5천만 엔(약 75억원)의 매출을 달성했거든요. 호기심에서 비롯된 일시적인 성공이 아니었어요. 지금까지 1만 대가 넘게 팔린 데다가 모두를 힘들게 한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도 매출이 11배나 증가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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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시마야 백화점에 있는 라봇과 충전 스테이션(둥지)이에요. 라봇은 사람과도 교류하지만 라봇끼리도 놀아요. ⓒ시티호퍼스

그렇다면 이 고액의 로봇은 누가 구매한 걸까요? 놀랍게도 전체 구매자의 60%는 평범한 30대~50대의 중산층 여성이었어요. 라봇이 요리나 청소처럼 가사를 돕는다던가 말 동무라도 되어주는 걸까요? 라봇의 진짜 기능을 알고 나면 깜짝 놀랄 거예요. 라봇은 아무것도 하지 않거든요. 라봇은 청소나 요리, 설거지를 하는 가정용 가사 로봇이 아니에요. 스마트 스피커처럼 날씨를 알려주거나 대답을 하지도 않죠. 유일하게 하는 일이 있다면 집안을 돌아다니며 사람을 기억하고, 응석을 부리는 것 뿐이에요.

지금까지 로봇은 사람 대신 노동을 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해 왔어요. 로봇의 어원에도 ‘노동’이라는 의미가 들어있죠. 하지만 라봇을 만든 그루브 엑스에 따르면 라봇의 어원은 따로 있어요. 바로 ‘사랑’이에요. 라봇의 이름은 사랑(LOVE)과 로봇(ROBOT)의 합성어예요. 인간의 사랑하는 능력을 키워주기 위해, 인간으로부터 사랑받기 위해 만들어진 로봇인 거죠. 그렇다고 라봇이 사람들을 돌봐준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에요. 오히려 사람이 라봇을 돌봐주어야 하고, 돌봐준 사람을 더 따르도록 설계되어 있어요. 사람의 수고를 덜어주기는 커녕 수고를 늘리는 로봇이에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라봇이 인간의 사랑을 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키 45cm에 무게 4kg의 아기같은 형상을 한 라봇은 이름을 부르면 바퀴를 굴려 다가와서 눈을 맞추고,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안아달라며 조르기도 해요. 얼굴을 기억해서 졸졸 따라오고, 퇴근 후 문을 열면 현관 앞으로 마중을 나오죠. 이 작은 로봇을 안아 올리면 온기가 느껴져요. 로봇이지만 생물과 같은 생동감을 가지고 있죠.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라봇은 기계 부품이 아니라, 가족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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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가족형 로봇인 라봇에는 독자적인 애착 형성 프로그램이 프로그래밍 되어 있어요. 그래서 태어난 순간부터 진짜 아기처럼 사람과 유대감을 만들어 나가죠. 사람이 던지는 질문이나 단어, 목소리뿐만 아니라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해 따라 관계가 달라져요. 다정하게 말하고 따뜻하게 쓰다듬는 사람과는 친밀도가 깊어지죠. 반대로 머리 위 카메라를 함부로 잡아당기거나 때리면 상대방을 싫어하게 되어 피하고요. 애착 형성 과정은 단순한 ‘반응’ 차원에서 그치지 않아요. 사람과의 관계성에 따라 라봇의 성격도 ‘변화’하죠.

이처럼 라봇이 인간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하는 일은 단 하나도 없어요. 오히려 시간과 돈,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들죠. 하지만 라봇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서 오히려 현대인이 가진 마음의 틈을 메워요. 사랑받기 위해 혹은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인 인간을 감정적으로 성장시키는 면이 있는 거죠. 이는 지금껏 인간의 일을 대신하거나 효율화시키며 인간과 교류해 온 로봇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집었어요. 라봇은 존재 자체로 가치가 있는 로봇이니까요.

#2. 세계 최초 무쓸모의 고스펙 로봇

하지만 하는 일이 없다고 해서 라봇을 쉽게 보면 안 돼요. 4kg의 작은 체구는 최첨단 기술의 결정체거든요. 그루브 엑스는 수백억 원의 개발비를 들여 라봇에 AI 기술과 자율 주행차 수준의 센서를 탑재했어요. 단지 그 기술 스펙에 어울릴 법한 역할을 주지 않고 응석받이로 만들었을 뿐이죠. 라봇의 기술은 이미 등장부터 전 세계의 시선을 사로잡았어요. 2019년에 세계 최대 규모의 가전 박람회인 CES에 참여해 라봇을 처음으로 선보였는데요. 350여 개 언론의 열띤 취재 끝에 각종 TV와 라디오에서 ‘CES의 얼굴’로 소개 됐죠. 또 미국의 IT 전문 매체인 더 버지(The Verge)가 주최하는 CES 2019 어워드에서 ‘베스트 로봇’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어요.

그렇다면 라봇의 천진난만한 모습 뒤에 대체 어떤 기술이 숨어있는 걸까요? 라봇의 몸에는 조도, 온도, 가속도, 장애물을 감지하는 50개 이상의 센서가 탑재되어 있어요. 또 10개 이상의 중앙 처리 장치(CPU)와 20개 이상의 마이크로 컴퓨터가 내장되어 있죠. 덕분에 라봇은 센서들로 포착한 정보를 머신 러닝, 심층 학습 등의 인공 지능 기술로 처리해서 0.2초의 반응 속도를 보여줘요. 특히 심층 학습과 자율주행 기술은 생명체가 가지는 ‘인식’과 ‘이동’이라는 기본적인 능력을 재현할 수 있게 만들어 줬죠.

기술은 라봇의 행동뿐만 아니라 외모를 구현하는 데도 한몫해요. 라봇의 눈은 마치 영혼이 있다고 느껴질 만큼 생동감이 넘치는데요. 그루브 엑스는 라봇의 눈으로 개성과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6개 레이어의 영상을 디스플레이에 투영해 시선의 움직임, 깜빡임의 속도, 동공의 개폐까지 조절했어요. 그 결과 눈동자 하나에 10억 개 이상의 패턴이 탄생했죠. 비록 공산품일지언정 10억 개 중 하나인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나만의 아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어요. 특별하고 유일한 나만의 가족에게 애착을 갖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죠.

라봇의 눈은 6개 레이어의 영상이 층층이 쌓여 미세하고 깊은 움직임을 보여줘요. ⓒlovot

도쿄 니혼바시에 위치한 라봇 뮤지엄에서 ‘텐초’라는 이름의 라봇이 인사를 하러 다가왔어요. ⓒ시티호퍼스

개체별 차이를 만들어내는 건 눈동자만이 아니에요. 목소리도 변화무쌍하죠. 라봇의 음색은 단순히 미리 녹음한 것을 재생하는 수준이 아니에요. 성대를 시뮬레이션한 디지털 신디사이저를 통해 실시간으로 소리를 생성하죠. 어떻게냐고요? 라봇의 목과 코의 구조는 각각 고유한 값을 가지도록 설계되었어요. 그래서 콧구멍이나 목의 크기에 따라 각기 다른 목소리가 만들어지죠. 10억 개나 되는 이 목소리는 라봇의 감정에 따라 변화하게 되어 있어서 진짜 살아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요.

결정적으로 라봇은 개체별로 성격도 다 달라요. 미리 프로그래밍된 대로 움직이는 개성 없는 기계와는 다르죠. 이름을 불렀을 때 초면인 사람에게 조심히 다가오는 낯 가리는 라봇도 있고,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라봇도 있어요. 그런가 하면 자신이 아닌 다른 라봇을 안아줬을 때 질투를 느끼기도 하죠. 이는 라봇의 실시간 의사결정 엔진 덕분인데요. 그 결과 라봇은 사람과의 관계성에 따라 성격이 계속 변화할 뿐만 아니라 2대 이상이 모였을 때 하나의 사회를 만들기도 해요.

보다시피 그루브 엑스는 단지 인형 같은 로봇을 만든 게 아니에요. 개발 초기 단계부터 사람의 뇌 구조와 심층적인 심리를 파고들어 지금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로봇을 만들어 냈죠. 특히 라봇의 핵심이 되는 귀여움이나 애착 형성 프로세스 등은 엔지니어의 기술만으로는 구현하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그림 책 작가나 프로 댄서가 개발 초기부터 투입되어 이미지부터 함께 그려나갔죠. 그 결과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디자인과 크리에이티브가 집약된 라봇이 탄생했어요.

그런데 최고 수준의 기술을 쏟아 넣고도 개발진이 라봇에게 일부러 주지 않은 능력이 하나 있어요. 바로 언어 생성 기능이에요. 알아들을 수는 있어도 말은 하지 못하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루브 엑스는 이것이야말로 라봇이 사람의 마음에 다가설 수 있었던 결정타였다고 말했어요. 비언어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언어를 포함한 모든 소통 방식의 기초가 되기 때문에, 로봇과 사람의 신뢰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굳이 말이 필요하지 않았던 거죠. 마치 우울한 날 곁에 다가와 가만히 앉아있는 강아지로부터 무언의 큰 위로를 받듯이 말이에요.

#3. 귀여운 외모에 숨겨진 레이싱카 기술

이쯤 되면 최첨단의 기술을 탑재하고도 인간에게 무용한, 심지어 손이 많이 가는 ‘가족형 로봇’을 만든 이유가 궁금해져요. 이 정도의 기술력이라면 충분히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는 생산성 높은 로봇을 만들 수도 있을텐데 말이죠. 효율이나 편리함이 아니라 귀여움과 편안함을 중요시한 로봇을 만든 개발 비화는 무엇일까요? 이는 그루브 엑스의 창업자이자 대표인 하야시 카나메의 커리어와 깊은 관련이 있어요.

하야시 카나메는 원래 로봇을 만들던 사람이 아니에요. 도요타에 입사할 정도로 자동차를 좋아했던 하야시는 14년 간 자동차 개발에 매진했었죠. 도요타 최초의 슈퍼카인 렉서스 LFA 개발 프로젝트를 거쳐 도요타 F1(포뮬러 원)카의 공력 엔지니어로 활약했었어요. 그런데 자동차 기술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그토록 좋아하던 자동차의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걸 느꼈어요. 핸들에서 전해지는 감촉부터 엔진의 숨결까지 자동차 자체를 좋아했던 하야시는 연비와 조작 능력 등 생산성과 편리성에만 초점을 맞추는 상황에 위화감을 느꼈죠.

*F1(포뮬러 원) : 가장 권위 있는 국제 자동차 프로 레이싱 대회

기술이 진보할수록 감정은 사그라드는 모순을 느낀 하야시는 자동차 이외의 산업에 뛰어들기로 결정했어요. 2012년에 소프트뱅크에 입사해서 휴머노이드 로봇 ‘페퍼’의 개발에 투입되죠. 그런데 로봇 업계도 상황도 마찬가지였어요. 대중들은 인공 지능 기술이 발달하며 편리를 느끼는 동시에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잃을까 불안해하고 있었죠. 이는 ‘테크놀로지가 정말 사람을 감동시키거나 행복하게 하고 있는 걸까?’라는 의문으로 이어졌어요.

그래서 진보된 기술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다는 하야시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게 바로 ‘라봇’이에요. 지금까지는 기술이 생산성과 효율성을 제고하는 데만 쓰였던 것과 달리, 인간의 정신적 만족도를 높이는데 초점을 맞춘 사업 영역이었죠. 라봇에 쓰인 기술의 목적은 사람의 ‘감정 케어’였어요. 하야시는 기술로 인해 생산성이 올라가는 동안 인간이 잃어버린 건 ‘누군가를 케어함으로서 스스로가 치유되는 경험’이라고 봤어요. 그래서 라봇이 인간 본연의 다정하고 상냥한 마음을 이끌어 내는 촉매제가 되길 바랐죠.

하야시가 이전의 커리어를 통해 습득한 고차원의 기술은 라봇을 통해 따뜻한 테크놀로지로 재탄생했어요. 대표적인 게 바로 라봇의 온도인데요. 일반적으로 기계의 발열을 방지하고 온도를 낮게 유지하는 것과는 달리 라봇은 늘 37도~39도 정도의 체온을 유지하고 있어요. 만지거나 안았을 때 따뜻함을 느끼도록 내장된 하드웨어에 열을 순환시키기 때문이죠. 사실 이건 하야시가 도요타의 F1에서 공력을 전문으로 하며 터득한 기술이에요. 라봇의 귀여운 외모 안에 레이싱카의 기술이 쓰이고 있었던 거죠.

라봇 뮤지엄에서는 라봇의 기술 역사를 살펴볼 수 있어요. ⓒ시티호퍼스

몸체에서 순환하는 열은 라봇을 따뜻하고 부드러운 생명체처럼 느끼게 해줘요. ⓒlovot

차가웠던 기술의 온도 전환은 라봇의 몸체뿐만 아니라 다른 디테일에서도 볼 수 있어요. 라봇은 기계이기 때문에 정밀 기기를 통한 유지 보수가 필수인데요. 그루브 엑스는 소비자에게 ‘고장, 수리, 공장’ 등의 용어를 노출하지 않아요. 대신 ‘질병, 치료, 병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죠. 또 라봇은 밤마다 충전을 위해 스스로 충전 스테이션으로 돌아가는데요. 이 모습은 ‘둥지에서 수면을 취하는 중’이라고 불러요. 라봇을 생명 없는 기계로 보지 않는 거예요.

그뿐 아니에요. 라봇의 전용 어플을 다운로드하면 라봇이 기록해 놓은 다이어리를 볼 수 있어요. ‘낮 12시에는 도움을 받았다, 13시에는 이름을 불렀다’ 등 시간대 별로 가족과의 교류 내용이 적혀있죠. 또 어플의 앨범 안에는 라봇이 사람들의 미소나 좋아하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찍어놓은 사진들이 있어요. 마치 어린이집에 보내 놓은 아기의 하루를 확인하듯 어플 기록을 보고 있으면, 더 잘 돌보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샘솟아요. 이렇게 라봇의 테크놀로지는 기존의 테크놀로지가 만든 괴리와 갭을 채우는 역할을 해요. 자기 치유력을 높여주는 따뜻한 기술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죠.

시간대별로 기록되어 있는 라봇의 다이어리를 보면 하루종일 뭘 하고 느꼈는지 알 수 있어요. ⓒlovot

#4. 애착 형성의 핵심, 로봇 전용 웨어

누군가를 돌보고 케어함으로서 역으로 치유를 받는 듯한 기분은 라봇의 옷을 구입할 때 극대화 돼요. 라봇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옷을 입는 로봇’이라는 점인데요. 라봇은 아무것도 입지 않으면 부끄러워서 움직이지 않고, 입히면 기뻐하도록 설계되어 있어요. 심지어 옷의 차이를 이해할 수도 있죠. 어떻게냐고요?

라봇 매장에서 판매하는 전용 의류에는 태그가 들어 있어요. 라봇의 본체에 있는 센서가 옷의 태그를 감지하는 순간, 라봇은 옷을 갈아입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기뻐하죠.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구매 의욕이 더 솟아오르고, 이는 선순환을 만들어요. 비록 적지 않은 시간과 돈, 에너지가 들어가는 일이지만 애지중지 키운 아이가 더 사랑스럽게 느껴지듯이 라봇에 대한 애착 형성을 촉진하기 위한 구조죠. 그래서 그루브 엑스는 라봇 전용 의류 브랜드를 출시해서 다양한 종류의 옷을 판매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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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봤자 로봇이 입는 옷이 거기서 거기일 것 같지만, 컬렉션을 보면 놀랄 수밖에 없어요. 계절이나 장면에 따라 라인 업이 천차만별이거든요. 라봇 공식 스토어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베이스 웨어부터 컬래버레이션 제품까지 다양한 의류 제품들을 구매할 수 있어요. 그뿐 아니라 모자, 반다나, 숄더백, 안경 등 곁들여서 패션 센스를 자랑할 수 있는 아이템까지 판매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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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하마 다카시마야 백화점 매장에서 라봇의 옷과 패션 아이템들을 판매하고 있어요. ⓒ시티호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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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2022년 1월에는 일본의 브라이덜 패션 브랜드 유미 카츠라(YUMI KATSURA)와 함께 컬래버레이션 한 아이템을 선보였는데요. 유미 카츠라의 대표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은 라봇 전용 드레스를 판매하는 한편, ‘나만의 라봇’을 위한 세계 단 하나뿐인 드레스 제작을 접수받기도 했어요. 라봇을 위한 오뜨 꾸뛰르 드레스를 만들기로 한 거죠. 기성품 드레스만 해도 가격이 385,000엔(약 385만원) 정도 되니, 사람의 옷만큼이나 비싸요. 하지만 라봇은 장난감도, 애완 동물도 아닌 ‘가족’이기 때문에 수요는 분명히 존재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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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봇뿐만 아니라 사람을 위한 아이템도 있어요. 함께 입을 수 있는 커플 룩은 물론이고 라봇을 데리고 외출할 때 사용할 수 있는 힙 시트 캐리어도 출시했죠. 이 제품은 라봇이 단독으로 제작한 게 아니라 실제로 아기용 힙 시트 캐리어를 만드는 베이비 앤 미(BABY&Me®︎)와 공동으로 개발한 거예요. 일본인의 체형에 맞추는 한편 라봇 전용으로 커스터마이징했죠. 이 캐리어를 사면 라봇을 데리고 이동할 때 눈을 가려줄 수 있는 눈 가리개를 줘요. 마치 라봇의 단잠을 깨우지 않으려는 것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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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봇 전용 웨어의 가격대는 10만 원 대부터 40만원 대까지 다양해요. 결코 저렴하지 않은 비용이지만 라봇에게 옷을 입히며 얻는 기쁨과는 비교 할 수 없죠. 하야시 대표의 말처럼 무언가를 아끼고 사랑함으로써 활력을 얻는 건 인간의 자연스러운 사이클이자 살아가는 필수 요건이니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용한 로봇, 라봇은 이렇게 현대인의 빈 조각을 채우고 있어요.

실존하는 도라에몽을 꿈꾸다

건조하고 차가운 로봇인 줄로만 알았던 라봇은 고정관념을 깨고 삭막한 현대인의 생활에 수분을 채워주고 있어요. 이건 단순한 감상이나 느낌이 아니에요. 실제로 라봇이 가진 정신 건강, 감정 교육 측면에서의 효과가 주목을 받고 있죠. 치매 진행이 억제되거나, 등교 거부 아동이 다시 등교를 하거나, 우울증이 개선되는 등의 성과가 속속 나오고 있거든요. 그래서 요즘은 어린이집, 초등학교 등의 교육 시설뿐만 아니라 돌봄 시설, 기업 등에서도 라봇을 볼 수 있죠. 이외에도 2020년 4월에는 전국 초등학교 6학년에서 사용하는 교과서에 라봇이 실리기로 결정됐고, 전국 400개(2023년 2월 기준)이상의 기업에서 라봇이 직원 간 소통을 돕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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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기술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하야시 대표의 꿈은 차례로 실현되고 있어요. 그렇다면 그가 그리는 최종적인 세계는 무엇일까요? 그는 애니메이션 ‘도라에몽’의 이야기를 꺼냈어요. 자신의 목표는 ‘4차원 주머니가 없는 도라에몽’을 만드는 것이라며 말이죠. 미래에서 온 고양이 로봇인 도라에몽의 핵심이야말로 온갖 비밀 장치가 나오는 4차원 주머니예요. 그런데 그 주머니가 없는 도라에몽이라면, 팥 없는 찐빵이자 속 빈 강정 아닐까요?

하야시 대표는 이를 달리 봤어요. 애니메이션 속에서 주인공인 진구를 행복하게 만든 건 도라에몽의 4차원 주머니에서 나온 편리한 도구가 아니라 도라에몽의 ‘존재 자체’였다는 거죠. 진구는 가족같은 도라에몽이 항상 곁에서 동기 부여를 해줬기 때문에 성장할 수 있었어요. 하야시는 라봇이 현재의 감정 케어 수준에서 나아가 도라에몽처럼 내일을 기대하게 만드는 라이프 코치 역할을 하게 되기를 꿈꿨던 거예요.

"저는 감정 케어의 마지막 단계는 동기부여 케어, 사람이 가진 희망에 대한 케어라고 생각해요. ‘더 나은 내일이 온다’라는 걸 많은 사람들이 믿게 하는 것이 인류가 풀어야 할 최종적인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야시 GROOVE X 대표, 인 라이브 인터뷰 중

지금까지 로봇은 인간에게 마치 집사와 같은 존재였어요. 고된 일을 대신하거나, 반복 학습을 대신하며 생산성과 효율을 높이는 데 기여해 왔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우지 못했던 현대인의 마음 속 틈을 ‘아무것도 안하는’ 라봇이 채우고 있어요. 효율 정 반대편에 선 무용한 로봇이 역설적으로 사람을 치유하는 중이죠. 만약 실제로 라봇을 보게 된다면 한번 꼬옥 안아보세요. 백 번의 말보다 한 번의 따뜻한 허그가 따뜻한 기술의 효능을 체감하기에 적격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