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간엔 일시정지 버튼이 있나요?

밑미홈

2022.05.19

이제 극장의 시대는 저무는 걸까요? 영화 업계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넷플릭스 등 스트리밍 서비스가 가파르게 성장하며 극장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어서죠. 영화 산업의 근본을 뒤흔드는 문제인 만큼 영화인들의 축제인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도 이 고민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나 봅니다. ‘기생충’으로 2020년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후보 심포지엄에 참석한 봉준호 감독에게 사회자가 이렇게 물은 걸 보면요. 


"스트리밍 서비스와 극장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뾰족한 질문입니다. 봉준호 감독은 이미 ‘옥자’를 통해 넷플릭스와 극장에서 동시개봉한 이력이 있기 때문이죠. 이에 봉준호 감독은 마치 질문을 예상이라도 한 듯 망설임 없이 답을 내놓았습니다. 


"영화관은 유일하게 보는 사람이 스탑버튼(일시정지)를 누를 수 없는 공간입니다. 감독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2시간에 달하는 한 덩어리의 리듬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장소는 영화관이 유일하죠." 


봉준호 감독의 답변에 객석에서는 박수가 터져나왔습니다. 모두의 경험을 소환해 공감을 불러일으킨 답변이자, 극장의 본질을 꿰뚫은 통찰이었으니까요. 그의 말대로라면 극장은 영화를 파는 곳이 아니라, ‘영화를 끝까지 집중해서 볼 수 있는 경험을 파는 곳’입니다. 스크린의 크기가 크고, 다른 관객들과 함께 볼 수 있는 등의 특징은 극장의 매력도를 높이는 부차적인 요소일 뿐 영화관의 본질은 아닌 거죠. 


이처럼 영화를 볼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영화를 몰입해서 보는 ‘시간’에 초점을 맞추면 극장이 존재할 이유는 여전합니다. 결국 위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업의 '본질'을 정의하고 '무엇을 팔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죠.


극장은 아니지만 봉준호 감독의 통찰과 맥을 같이 하는 공간이 성수동에 있습니다. 바로 ‘밑미홈’입니다. 이곳의 2층은 점심과 저녁의 담당 셰프가 다른 식당, 3층은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상담실, 리추얼 관련 제품을 판매하는 편집샵, 리추얼을 경험해 볼 수 있는 방, 4층은 요가를 할 수 있는 스튜디오, 5층은 멍 때릴 수 있는 옥상으로 구성되어 있죠.


2층부터 5층까지 층마다 다른 컨셉의 밑미홈 ⓒ김이서


겉으로 보기엔 이 공간을 한마디로 정리하기가 어렵습니다. 여러 공간이 혼재되어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곳을 관통하는 공통분모는 분명합니다.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머무르는 동안의 ‘시간’에 초점을 맞춘다는 거죠. 



공간이 아니라 시간을 팝니다

밑미홈에서는 음식, 제품, 요가 클래스, 심리상담 등 여러가지를 판매합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진짜로 파는 것은 ‘시간’입니다. 그것도 ‘나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을 팝니다. 내가 스스로 시간을 내서 나를 만나는데, 나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을 구매한다는 말이 낯설게 들릴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시간을 내지 않으면 나를 만나는 시간을 갖는 건 요원한 일입니다. 회사 일에 치여, 사회적 관계에 엮여, SNS의 푸시에 밀려 자기만의 시간이 온데간데 없어지기 때문이죠. 이렇게 시간에 쫓기고 에너지가 빨려 나갑니다.


이 때 필요한 게 ‘리추얼’입니다. 어떤 행위를 의식적으로 반복하면서 나 스스로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거죠. 그래서 밑미홈 3층에 있는 ‘시간을 파는 상점’에서는 리추얼에 필요한 제품들을 판매합니다. 형태적으로는 제품이지만 이에 대한 설명을 보면 밑미홈에서 팔고 싶은 건 제품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예를 들어 잎차에는 ‘차를 마시며 여유를 즐기는 시간’, 연필에는 ‘내 맘 속 이야기를 꾹꾹 눌러 써보는 시간’이라고 적어 두는 식입니다. 드릴을 사는 사람이 드릴이라는 제품이 아니라 드릴로 뚫을 수 있는 구멍에 돈을 지불하듯이, 밑미홈의 제품 설명도 제품 그 자체가 아니라 제품이 가져다주는 효용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리고 그 효용은 마치 깔때기를 댄 듯 ‘시간’으로 모이죠. 


또한 3층에 있는 ‘리추얼의 방’에선 리추얼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꾸며 놓았습니다. 리추얼이 낯선 사람들을 위해서 샘플을 보여주는 셈이죠. 밑미의 리추얼 메이커이자 인플루언서들이 실제로 각자의 시간을 어떤 리추얼을 하면서 보내는지를 엿볼 수 있게 구성했습니다. 언뜻 보기엔 검소하게 정돈된 방처럼 느껴지지만, 그 공간에 놓인 소재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리추얼 메이커의 시간이 그려집니다. 동시에 ‘나의 리추얼은 무엇인지’, ‘나에겐 나의 시간이 있는지’ 등 스스로의 시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죠.


온라인에서 판매중인 리추얼 프로그램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공간 ⓒ김이서


그뿐 아닙니다. 이 곳에서는 말 그대로 시간이라는 아이템을 팝니다. 시간을 사면 어떻게 되냐고요? 물론 시간이 길어지거나 수명이 늘어나는 등의 마법이 일어나는 건 아닙니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질문이 담긴 질문카드를 주죠. 여기에다가 밑미홈의 하이라이트인 5층의 ‘심심한 옥상’을 사용할 수 있는 쿠폰도 함께요. 나에 대해 생각할 거리와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함께 제공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파는 상점에서 판매 중인 시간 ⓒ김이서



시간을 파는 상점의 전체 풍경 ⓒ김이서


‘심심한 옥상’은 성수동이 내려다보이는 밑미홈의 5층 옥상입니다. 이 곳에서는 편한 의자에 앉아 햇볕을 쬐거나, 음료를 마시거나, 책을 읽거나, 질문카드에 답하며 자기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3층의 ‘시간을 파는 상점’에서 구입한 시간이 5층의 ‘심심한 옥상’으로 입장할 수 있는 티켓인 셈이죠. 바로 이 점이 밑미홈을 특별하게 만듭니다. 여느 카페의 야외 테라스와 같은 옥상의 공간을 내 시간을 구입해 나에게 선물한다는 컨셉을 입혀 새롭게 만들었기 때문이죠. 시간을 산다는 컨셉과 질문카드 같은 장치 덕분에 나를 만나는 시간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가 쉬워집니다.


시간을 파는 상점에서 ‘시간'을 구입하면 이용할 수 있는 심심한 옥상 ⓒ김이서


멍때리기 좋은 여유로운 공간 ⓒ김이서


읽을 수 있는 책과 노트, 펜이 구비되어 있는 심심한 옥상 ⓒ김이서



시간을 고립시켜 몰입을 만든다

시공간은 서로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공간에 따라 시간도 달라지죠. 밑미홈은 이 점을 영민하게 활용했습니다. 밑미홈이 들어선 공간은 서울숲 옆의 5층 짜리 평범하고 아담한 건물입니다. 이전엔 주거용으로 쓰이던 곳이라 면적대비 벽이 많고 심지어 복도를 돌아 들어가야 하는 작은 방들도 있어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여건은 아닙니다. 하지만 밑미홈은 옛것을 부수고 탁 트인 공간을 만드는 대신 단점으로 보이는 구조를 그대로 활용해 원래 밑미홈으로 지어진 것과 같은 공간으로 재탄생시켰습니다. 어떻게 했냐고요?


모든 공간을 기획의도에 따라 과감하게 분절해버렸습니다. 공간이 단절될수록 각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에 몰입할 수 있어서죠.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킨 셈입니다. 또한 공간 배치에서도 몰입하는 시간의 특성을 고려했습니다. 밑미홈에서는 계단을 오를 수록, 복도를 돌아들어갈 수록 더욱 프라이빗한 프로그램을 만날 수 있는데, 이는 현관보다는 거실이, 거실보다는 침실이 더욱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심리를 활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곳에서는 공간에 따라 시간이 서로 다른 밀도와 속도로 흐릅니다.


공간의 분절을 영민하게 활용한 밑미홈 ⓒ김이서


계단을 따라 올라가서 처음 마주하는 2층에는 ‘위로하는 부엌’이 있습니다. 엄마들이 이름을 내걸고 만든 음식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죠. 어쩌면 집밥같은 음식을 내놓는 이 부엌도 또 다른 형태의 리추얼 방일지 모릅니다. 엄마들이 그동안 집에서 가족을 위해 밥을 지었다면, 여기서는 자기 자신의 꿈을 위해 의식적이면서도 규칙적으로 밥을 짓기 때문이죠. 건강한 식단으로 손님들의 끼니라는 시간을 영양가 있게 만들어주는 건 물론이고요.


위로하는 부엌 식탁에 놓여진 질문카드 ⓒ김이서


다시 계단을 따라 3층으로 올라가면 ‘리추얼의 방’과 ‘시간을 파는 상점’ 그리고 ‘토닥토닥 상담방’이 나옵니다. 이 층은 분절된 공간을 가장 잘 활용한 층이죠. 입구 오른쪽과 그 옆에는 앞서 설명한 리추얼의 방과 시간을 파는 상점이 있는데, 얼핏 보면 이게 다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을 파는 상점 옆으로 난 좁은 복도를 따라 깔려진 자갈을 밟고 들어가면 작은 요새들이 나옵니다. 외벽과 복도, 그리고 벽으로 다시 막힌 이 공간들은 ‘토닥토닥 상담방’입니다. 밑미홈은 답답하게 자칫 느껴질 수 있는 이 공간을 가장 연약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포근한 상담 공간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심리상담은 내 안의 가장 어린 아이를 꺼내놓는 공간이라는 것을 세심히 배려한 설계입니다.


좁은 자갈길을 걸어 들어가야 찾을 수 있는 요새같은 토닥토닥 상담방 ⓒ김이서




마치 숨겨둔 것처럼 언뜻 보면 잘 보이지 않는 토닥토닥 상담방 입구 ⓒ김이서


그리고 4층에는 ‘들숨날숨 스튜디오’가 있습니다. 이 곳에서는 요가와 명상 클래스를 진행합니다. 원래의 공간을 그대로 활용한채 나무 바닥을 깔아 대청마루 같은 느낌을 살렸죠. 5층 옥상에는 ‘심심한 옥상’이 있습니다. 탁 트인 하늘이 더 많이 보이는 이 곳은 밑미홈이 위치한 서울숲을 닮았습니다. 서울숲이 도시 안에서 도시와 단절되는 공간이듯, 심심한 옥상도 일상으로부터 일시정지를 누르고 들어온 공간이라 그렇습니다. 이 곳에선 의도적으로 와이파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에어플레인 모드를 권유하기도 하죠. 지금, 여기의 나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요.




벽과 기둥을 그대로 활용한 들숨날숨 스튜디오 ⓒ김이서



나의 시간에서 우리의 시간으로

사실 밑미홈은 오프라인에만 존재하는 공간이 아닙니다. 밑미홈을 만든 밑미팀은 이 곳을 오픈하기 전 부터 온라인에서 리추얼 프로그램, 상담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단단한 커뮤니티를 쌓아왔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리추얼, 상담 등과 커뮤니티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입니다. 리추얼과 상담 모두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며, 혼자서도 할 수 있기 때문이죠. 굳이 커뮤니티를 형성해서 함께 할 필요가 없습니다.



밑미 온라인 리추얼 소개 페이지 ⓒ밑미


실제로 밑미가 운영하는 온라인 리추얼을 살펴보면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아침에 차를 내려 30분간 마시기', '하루 한 곡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들으며 글쓰기', '하루 한가지 새로운 도전하기'처럼요. 하지만 나를 위한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사람들은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리추얼에 참여합니다. 혼자 가면 빨리 갈 수 있고,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어서죠. 밑미는 서비스 론칭 후 ‘1000명의 이용자, 100명의 팬을 6개월 안에 만드는 걸 목표로 했는데, 이미 이 목표를 훌쩍 뛰어 넘은 걸 보면 커뮤니티에 대한 잠재적 니즈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온라인에서도 운영이 가능하다는 걸 확인했을 텐데, 밑미는 어째서 오프라인 공간으로 진출한 걸까요?


"대면의 요소가 있어야 비대면의 요소가 더욱 강력해지죠."


밑미의 손하빈 대표 설명입니다. 밑미는 단순히 리추얼 관련한 제품이나 심리상담 등의 서비스를 팔기 위해 만든 브랜드가 아닙니다. 연대감과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커뮤니티를 추구하죠. 그래서 비용 효율의 측면에서라면 오프라인 공간을 고려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커뮤니티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위해서라면 멤버들이 모이고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인 밑미홈이 베이스캠프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 거죠. 그렇기 때문에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구분짓기보다 나를 발견하고 싶은 '나'들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우리'가 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밑미가 커뮤니티라면 밑미홈에서 마주치는 타인은 타인이 아닙니다. 온라인 리추얼에서 이미 만났던 멤버일 수도 있고 앞으로 만나게 될 멤버일 수도 있으니까요. 꼭 그렇지 않더라도 ‘자아성장'이라는 키워드를 고민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말하지 않아도 혹은 서로 만나지 못해도 연대감이 형성됩니다. 밑미홈에서 일하는 사람, 그리고 밑미홈에 방문하는 사람 모두가 독립된 자아로 존재하면서도 느슨하게 이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입니다.



나를 만나는 시간이 필요한 이유


'진짜 나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연결되는 건강하고 행복한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



ⓒ밑미


밑미의 미션입니다. 밑미가 이런 미션을 갖게 된 배경엔 창업자들의 경험이 깔려 있습니다. 그들은 회사를 다니면서 번아웃을 겪게 되었죠. 그러나 번아웃을 해결할 방법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리고 사회적 분위기를 감지하면서 이내 번아웃이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에서 사업 기회를 발견하고 나를 건강하게 만드는, 그래서 결국 세상도 더 건강하게 만드는 서비스인 밑미를 론칭하거죠. 


번아웃이 생겼을 때, 지친 나를 달래는 가장 쉬운 방법은 휴식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번아웃을 이르게 한 일이나 관계에서 벗어나면 어느 정도 회복이 되죠. 하지만 휴식을 취하는 일은 번아웃을 해결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에 그치지 말고 깊숙한 곳에 있는 나를 마주할 수 있어야 번아웃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고 해결할 수 있습니다. 밑미는 온라인 서비스와 오프라인 공간을 통해 이 충분조건을 채워주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펼쳐나가는 거죠. 그래서 밑미의 철학이 구현된 밑미홈을 둘러보고 나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스스로에게 “Nice to meet me”라고 인사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지도 모릅니다.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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