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제품이 아니라 제품이 주는 효용을 삽니다. 그래서 제품을 샀을 때 누릴 수 있는 효용을 공감시킬 수 있어야 고객들의 지갑이 열릴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렇다면 제품의 효용을 와닿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상황을 정의하고 부각시키면 됩니다. 결국 제품이 아니라 상황을 팔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판매 방식이 낯설다면 런던 곳곳의 편집숍들에서 만날 수 있는 편집 키트 브랜드인 '멘즈 소사이어티(Men's Society)'를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멘즈 소사이어티 미리보기
• #1. 일상 속 작은 상황을 주목한다
• #2. 내실 있는 작은 제품을 판매한다
• #3. 각이 다른 작은 브랜드로 보완한다
• 작은 상황에서 시작된 큰 비즈니스
드릴을 구매한 사람은 무엇을 산 것일까요?
바보같은 질문처럼 보이지만, 하버드 대학교 경영대학원 명예교수이자 <마케팅 마이오피아> 논문으로 유명한 '시어도어 래빗(Theodore H. Levitt)' 교수의 현명한 설명을 듣고 나면 질문이 다르게 보입니다. 시어도어 래빗 교수는 그의 저서인 <<마케팅 상상력>>에서 광고인 '레오 맥기니바(Leo McGinneva)'의 말을 인용하며 드릴을 구매하는 사람은 드릴이라는 제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드릴로 뚫을 수 있는 구멍에 돈을 지불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이 제품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제품이 가져다 주는 효용을 구매한다는 뜻입니다.
그의 설명처럼 고객들이 효용을 사는 것이라면 제품을 파는 방법도 달라져야 합니다. 일본의 가전제품 회사인 '쟈파넷다카타'가 대표적 예입니다. 이 회사는 사양을 자랑하기 보다는 효용을 제시하며 보이스레코더를 워킹맘이라는 새로운 타깃에게 팔 수 있었습니다. 쟈파넷다카타는 비즈니스맨의 전유물이었던 보이스레코더를 어떻게 워킹맘에게 팔 수 있었을까요? 창업자인 '다카다 아키라'가 TV홈쇼핑에 나와서 제품 소개한 내용을 보면 비결을 알 수 있습니다.
"엄마가 아직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때 아이가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죠? 엄마가 없어 아이는 쓸쓸할 겁니다. 그런데 보이스레코더에 이런 메시지가 녹음되어 있다면 어떨까요? '학교 잘 다녀왔어? 엄마 아직 회사인데 간식 냉장고에 넣어놨으니까 꺼내 먹고, 숙제도 얼른 해놔.' 어떻습니까? 이런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면 아이도 좋아하겠죠? 쓸쓸함도 조금 줄어들 겁니다."
보이스레코드를 아이와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워킹맘들의 주문이 쏟아졌습니다. <<잘 팔리는 한 줄 카피>>에 소개된 보이스레코더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제품의 사양보다 효용을 알려주는 것이 고객들의 지갑을 여는데 더 효과적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례에서 제품의 효용을 부각시키는 요소는 무엇일까요? 워킹맘이라 아이의 하교 시간을 맞출 수 없는 '상황'입니다. 워킹맘들이 이런 상황에 놓였기 때문에 보이스레코드의 효용에 공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고객들이 제품이 아니라 효용을 사는 것이라면, 효용을 결정하는 상황을 정의할 수 있어야 제품의 가치가 높아집니다. 물론 상황을 정의하는 판매 방식은 낯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런던에 있는 곳곳의 편집숍들에서 만날 수 있는 편집 키트 브랜드인 '멘즈 소사이어티(Men's Society)'를 들여다보면 상황을 판매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습니다.
멘즈 소사이어티는 틴케이스에 여러 가지 제품을 담아 키트로 판매합니다. ⓒMen's society
#1. 일상 속 작은 상황을 주목한다
멘즈 소사이어티는 '남성들을 위한 품질 좋은 선물'을 표방합니다. 타인에게 주는 선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선물을 지향하기에 키트 패키지의 디자인이 감각적입니다. 한 손에 잡힐 만한 크기의 매끈한 틴케이스에 클래식하면서도 모던한 느낌으로 키트의 이름을 붙여 놓았습니다. 디자인에 이끌린 시선이 키트의 이름에 닿으면, 잠재적 니즈를 깨닫고 구매 욕구를 느끼게 됩니다.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상황을 키트 이름에 반영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여행용 키트에는 '멀리 가는 여행 키트(Stow away travel kit)', '주말 여행 세면 키트(Weekender wash kit)', '야간 비행 서바이벌 키트(Red eye survival kit)' 등이 있습니다. '여행 키트'를 판매하면서 여행의 상황을 장거리, 단거리, 비행 시간대 등에 따라 세분화해 각 상황에서 발생하는 니즈들을 꼼꼼히 채워줄 제품들로 편집한 것입니다. 멀리 가는 여행 키트에는 물을 부으면 부피가 커지는 1회용 얼굴 수건이 5개가 들어 있고, 야간 비행 키트에는 안대와 호텔 욕조에서 사용할 수 있는 배쓰 오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작은 상황 속 작은 니즈에 집중하자 제품이 긁어 주는 가려운 부위가 좀 더 명확해 집니다.
멀리 여행을 갈 때 필요한 제품들이 담겨 있는 스토우 어웨이 트래블 키트입니다. ⓒMen's society
야간 비행 시 피로감은 덜어주고 상쾌함은 더해 줄 레드 아이 서바이벌 키트입니다. ⓒMen's society
또한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 제품들은 필요성에 대한 즉각적인 인지를 상기시켜 구매 욕구를 자극합니다. '자전거 타는 사람들의 필수 키트(Bike riders essential kit)', '골퍼들의 필수 키트(The golfers essentials kit)', '스키 서바이벌 키트(The ski survival kit)'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스키, 자전거, 골프 등 각 스포츠에 취미가 있는 남성들이라면 한 번쯤 눈길이 갈 키트입니다.
그 뿐 아니라 인생의 단계에서 발생하는 상황에 주목하며 잠재 고객들의 깊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키트도 있습니다. '초보 아빠 서바이벌 키트(New daddy survival kit)'는 아기 돌보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아빠들이라면 솔깃할 만한 제품 이름입니다. 이 키트에는 아기 기저귀를 갈 때 코를 막을 수 있는 코집게와 기저귀 가방, 아기가 잠들었을 때 아빠도 숙면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안대와 귀마개 등이 들어 있습니다. 이처럼 구체적인 일상을 도와 주는 제품은 특정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강력한 제품 구매 동기를 부여하는 동시에, 특정 상황에 놓인 지인에게 센스 있는 선물을 하고 싶은 구매자들의 지갑을 열게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뉴 대디 서바이벌 키트에는 육아에 치여 편히 잠들지 못하는 도와 주는 제품들이 담겨 있어 초보 아빠들의 공감을 삽니다. ⓒMen's society
#2. 내실 있는 작은 제품을 판매한다
멘즈 소사이어티 제품에는 특징 한 가지가 눈에 띕니다. 바로 제품 대부분이 키트라는 점입니다. 제품이 아닌 사용자가 처한 상황에 주목하다 보니,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제품을 모아 한 개의 키트로 만들게 된 것입니다.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1개의 제품으로 충분하지 않고, 다양한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제품들을 소분하고, 부피를 줄여 틴케이스에 담아 키트로 구성하니 원스톱 제품이 됩니다. 키트 사이즈도 가로 15cm, 세로 10cm로 간결한 크기입니다. 간편함과 실용성 모두 갖춘 멘즈 소사이어티의 키트에는 자꾸만 손이 갑니다.
일례로 '페스티벌 서바이벌 키트(The festival survival kit)'에는 방수 망토, 10가지 기능이 있는 멀티툴, 귀마개, 칫솔, 미니 사이즈 치약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대로 된 페스티벌을 즐기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이 알차게 들어 있는 셈입니다. 방수 망토는 비를 대비한 것이고, 귀마개는 숙박이 포함된 페스티벌에서 소음없이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도와 줍니다. 멀티툴에는 병따개, 칼, 드라이버, 자 등 10가지 기능이 탑재되어 있어 페스티벌을 즐기며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사이즈의 틴케이스에 필요한 것만을 필요한 만큼만 담아 구성하니, 완벽한 페스티벌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에게 더할 나위없는 선물이 됩니다.
페스티벌 서바이벌 키트 하나면 페스티벌에서 발생할 수 있는 웬만한 상황에 대처가 가능합니다. 축제의 불편함은 없애고, 즐거움만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제품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Men's society
멘즈 소사이어티의 키트는 3~6개 제품으로 구성되어 있고 가격대는 20~25파운드(약 3~3만8000원) 수준입니다. 저렴한 가격은 아니지만, 구성품의 품질을 고려하면 합리적입니다. 제품의 품질이 키트의 기획을 따라가지 못하면 반쪽짜리가 됩니다. 멘즈 소사이어티는 제품의 질이 성공의 중심이 된다는 신조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판매하는 제품의 90%를 자체 생산하는데, 자체 생산하는 모든 제품은 영국에서 제작됩니다. 나머지 10%는 외부 업체에서 조달하지만 그마저도 영국에서 생산되거나 품질을 인정 받은 해외 브랜드 제품입니다. 제품 품질을 위해 실력 있는 디자이너, 제조업자, 약사 등 전문가들과 적극적으로 협업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일상의 작은 불편들을 해소하는데 품질이 좋지 않아 오히려 일상을 불편하게 만든다면 모순일 것입니다. 품질이 뒷받침 해 주니 컨셉이 더욱 빛납니다.
#3. 각이 다른 작은 브랜드로 보완한다
멘즈 소사이어티는 남성들을 위한 알찬 제품들을 선보이지만, 타깃이나 제품 라인을 확장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일단 멘즈 소사이어티라는 이름부터 '남성들의 사회'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니 여성 고객들을 위한 제품을 만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키트가 중심인 브랜드다보니, 키트 구성보다 제품의 성능에 방점을 두는 제품 라인을 런칭하는 것도 부담입니다. 하지만 여성들도 키트로 해결할 수 있는 일상 속 작은 고충들을 겪고 있고, 여러 제품을 모은 키트보다 뛰어난 제품 하나가 해결할 수 있는 상황도 분명 있습니다. 멘즈 소사이어티가 나서기는 어렵지만 놓치기는 아까운 시장입니다. 그래서 멘즈 소사이어티는 포지셔닝이 뚜렷한 다른 브랜드들을 선보이며 새로운 영역에 도전합니다. 작지만 정체성이 뚜렷한 브랜드들로 저변을 넓히는 멘즈 소사이어티의 지혜가 돋보입니다.
멘즈 소사이어티는 여성들을 위한 브랜드인 '아포테카리 디파트먼트(Apothecary Department)'를 출시합니다. 아포테카리 디파트먼트는 고품질 자연 원료로 만든 영국산 피부 케어 제품들을 중심으로 키트를 구성합니다. 제품 기획부터 바쁜 현대 여성들의 일상을 세심하게 배려합니다. '건강하게 빛나는 피부 키트(Radiant skin kit)'처럼 간편하게 피부 관리를 할 수 있는 키트뿐만 아니라 피부에 닿는 핸드폰 화면을 깨끗이 닦을 수 있는 제품인 '핸드폰 매니아(Phone freak)', 강아지를 산책시킬 때 강아지 발바닥을 닦을 수 있는 물휴지와 자신의 손을 닦을 수 있는 물휴지가 같이 들어 있는 '강아지 산책(Walkies)' 등 여성들이 사소한 일상 속에서도 자신을 가꿀 수 있도록 돕는 제품들이 주를 이룹니다. 멘즈 소사이어티의 핵심 역량인 제품 기획력과 품질을 발판 삼아 여성용 선물 시장까지 진출한 것입니다. 핵심 역량을 활용해 다른 타깃을 위한 새로운 브랜드를 런칭하니, 시장 확장이 어색하지 않습니다.
아포테카리 디파트먼트는 바쁜 현대 여성들에게 필요한 제품들을 기획하거나 그런 제품들을 모아 키트로 만듭니다. ⓒMen's society
멘즈 소사이어티는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보적인 제품력에 집중한 브랜드를 운영하기도 합니다. 멘즈 소사이어티가 만든 '킬러 킥스(Killer kicks)는 쉽게 더러워지는 스니커즈 운동화를 깨끗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제품들을 만드는 브랜드입니다. 킬러 킥스는 누구나 스니커즈를 한 켤레쯤 갖고 있지만 아무도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에 착안했습니다. 최고의 스니커즈 관리 제품을 만들기 위해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과학자들과 협업하여 세척 스프레이, 휴대용 세척 휴지, 보호 스프레이 등 다양한 제품을 개발했습니다. 개발한 상품으로 키트를 구성하기도 하고, 개별 상품으로 판매하기도 합니다. 굳이 키트로 구성하지 않아도, 제품 하나 하나가 경쟁력이 있습니다. 구체적인 문제 상황을 하나의 브랜드 컨셉으로 발전시키고, 기존 브랜드를 보완하는 브랜드로 성장시킨 것입니다.
스니커즈 애호가들을 타깃으로 한 킬러 킥스 제품들입니다. ⓒMen's society
작은 상황에서 시작된 큰 비즈니스
멘즈 소사이어티는 현재는 부부가 된 휴고 미들턴(Hugo Middleton)과 벨라 미들턴(Bella Middleton)이 창립한 회사입니다. 멘즈 소사이어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그들은 천 소재로 된 선물 포장지를 디자인하는 사업을 했습니다.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 국립 초상화 미술관(National Portrait Gallery), 아티장 뒤 쇼콜라(Artisan du Chocolat) 등 예술적 감각이 돋보이는 고객사들과 거래했고, 사치 갤러리(Saatchi Gallery)나 모마(MoMa, Museum of Modern Art) 등에 자신들이 디자인한 선물 포장지를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선물 패키지나 선물 시장에 대한 감각을 꾸준히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사업의 다음 단계를 고민하던 중, 남편 휴고의 생일이 가까워 집니다. 벨라는 휴고에게 줄 선물을 고르다가 품질 좋고 유용한 남자 선물이 마땅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직접 만들어 보자는 생각에 멘즈 소사이어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선물 포장지 디자인을 하면서 2년 동안 쌓아 온 선물에 대한 감각과 열정을 살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 것입니다. 별도의 사무실도 없이 둘이 함께 살던 런던의 방 두 개짜리 집을 사무실 삼아 멘즈 소사이어티를 준비했습니다. 사업 초기, 멘즈 소사이어티는 턱수염 오일을 중심으로 구성한 남성 그루밍 키트로 뜨거운 시장 반응을 얻습니다. 남성 그루밍 키트를 시작으로 제품 라인을 확장하면서 남성들을 위한 매력적인 선물 키트들을 제안해 왔습니다. 자신들이 이미 잘 아는 시장에서 사업을 시작했기 때문에 새로움과 시장성 사이에서 균형을 갖춘 비즈니스를 키워낼 수 있었습니다.
멘즈 소사이어티는 작은 상황을 개선하는 작은 키트로 시작했지만, 그 결과만큼은 작지 않습니다. 2012년에 설립한 멘즈 소사이어티는 벌써 30여 명의 직원을 두고, 수십 억원 규모의 매출을 내고 있습니다. 2017년에는 전년 대비 약 20%의 성장률을 기록할 정도로 성장세가 가파릅니다. 게다가 매출 중 75%가 일본, 두바이, 미국 등지에서 발생할 정도로 글로벌한 회사이기도 합니다. 독립 매장 없이 국내외 백화점, 감도 있는 편집숍 등을 통해 유통하고, 온라인으로 판매하며 전 세계적인 존재감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그녀가 선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기회를 발견하고 상황을 팔며 사업을 키운 것처럼,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불편한 상황을 모른채 넘기지 않는다면 새로운 사업 기회를 발견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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