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조는 흰색이에요. 이름에서부터 ‘백’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죠. 그렇다면 검은 백조가 등장할 수 있을까요? 가능성이 매우 낮기는 하지만 검은색으로 꾸미거나 오일을 뒤집어쓴 백조가 아니라 실제로 검은 백조가 존재해요. 이를 모티브로 월가의 현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블랙스완》이라는 책을 썼어요. 희박한 확률이지만 우리의 인생에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사건들에 대해 대비를 해야 한다는 거죠.
대표적인 사례로 드는 것 중에 하나가 미국에서 일어난 9.11 테러예요. 누가 고층 빌딩에 의도적으로 비행기를 충돌시킬 거라 상상이나 했겠어요.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졌고, 전 세계는 정신적,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충격을 받았죠. 이 대목에서 그는 이런 가정을 하면서 의문을 던져요. 9.11 테러가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비행기 탑승 수속을 대폭 강화해 불편하고 시간이 걸리는 과정을 만들었다고 하면 반응이 어땠을까라는 거죠.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대한 과도한 대비로 불만이 생길지 모른다는 가정이 깔려 있는 의문이에요. 그리고는 또 다른 예를 들면서 사회적 시스템의 역설적인 문제를 지적해요. 이번에는 전쟁을 예로 드는데, 그의 통찰을 한 번 들어볼까요?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
vs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막은 장군
둘 중 누가 더 영웅일까요? 영웅으로 칭송받는 쪽은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일 거예요. 평화를 유지하는 일이 인류를 위해 더 의미 있을지라도, 사람들은 전쟁을 막은 장군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갖지 않죠. 사후 대응보다 사전 예방이 더 중요한데, 현실은 사전 예방을 유도할만한 보상이 없는 셈이에요. 월가의 현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가《블랙 스완》에서 언급한 아이러니죠.
그의 설명처럼 사전 예방은 중요해요.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을 막는 걸 장려해야 마땅하죠. 그러나 예방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해도 막을 수 없는 일이 있어요. 자연 재해예요. 사람이 하는 일이야 사전에 만전을 기하면 사고가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자연 재해를 예방할 방법은 사실상 없어요. 자연 재해 앞에서 사람이 사전에 할 수 있는 최선은 예방이 아니라 ‘대비’예요. 자연 재해를 막을 수 없으니, 자연 재해가 일어났을 때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조치하는 일이 필요하죠.
ⓒ시티호퍼스
일본은 지리적 특성상 지진 발생 위험이 높아요. 그래서 자연 재해에 대한 사전 대비를 중요시 여기죠. 1981년부터 건축물을 지을 때 의무적으로 내진 설계를 하도록 법으로 규정했어요. 그 이전에 지어진 건물의 경우에는 내진 설계 건물로 리모델링 할 수 있도록 정부에서 지원을 하고 있죠. 그 결과 2013년에 80% 이상의 내진화율을 기록했으며, 현재는 90% 이상까지 끌어 올렸어요.
그뿐 아니에요. 내진 설계처럼 하드웨어적인 사전 대비에 그치지 않고 소프트웨어적인 사전 대비에도 신경을 써요. 건물의 창문거리를 걷다 보면 건물 창문에 표시되어 있는 역삼각형 모양의 빨간색 화살표를 볼 수 있는데요. 이는 지진 등의 재해 발생시 소방관들이 건물 내부로 진입하고 사람들을 대피시킬 수 있는 통로라는 표시예요. 탈출구 표시를 해둔 유리창은 강화 유리가 아니라 깨기 쉬운 일반 유리를 사용해야 하며, 해당 창문 아래에는 탈출에 방해되는 물건을 적치할 수 없어요.
재해 발생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내진 설계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조치와 탈출구 표시처럼 눈에 띄는 조치를 동시다발적으로 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 정도로는 부족했는지 지하철역에서도 또 다른 사전 대비를 하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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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취재를 위해 들를 곳이 있어 닛포리역에 갔을 때, 지하철역을 나서며 무심코 주변 안내도를 봤다가 남다른 분위기에 시선이 멈췄어요. 지도 좌측 편에 절이 유난히 많아 보였기 때문이죠. 자세히 들여다보니 한집 건너 하나가 아니라 온 동네가 절이었어요.
일본은 크리스마스가 공휴일이 아닐 정도로 기독교 신자 비율이 낮아요. 기독교 신자 비율로 보자면 1~2% 정도예요. 반면 불교 신자 비율은 70%가량으로 훨씬 높죠. 자연스럽게 절이 많을 수밖에요. 그럼에도 도심의 한 동네에 절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풍경은 새로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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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동네라는 생각을 하면서 주변 안내도를 지나치려는 순간, 우측 하단의 피난 대피소가 눈에 들어왔어요. 피난 대피소의 아이콘 옆에 한글로 ‘피난 대피소’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죠. 자연 재해 등이 발생했을 때 대피할 수 있는 장소가 따로 있다는 것도 특징적이었지만, 더 인상적이었던 건 표기 방식이에요.
일반적인 장소명은 일어와 영어로만 표기해 두는데, 다른 곳과 달리 피난 대피소에는 더 많은 사람이 장소 설명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글과 간자체까지 병기해 둔 거예요. 위급 상황 발생시 일어와 영어를 읽을 수 없는 관광객까지도 배려한 조치죠.
실제로 지진 등의 재난이 발생했을 때 주변 안내도가 멀쩡히 붙어 있을지는 알 수 없어요. 붙어 있다하더라도 사람들이 저 지도를 들여다 볼 겨를이 없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적어도 자연 재해로부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사람이 할 수 있는 사전 대비에 최선을 다하는 건 분명해 보였어요.
지진에도 강도가 있듯이 사전 대비에도 강도가 있다면, 높은 등급의 사전 대비라는 생각이 들었죠. 물론 사전 대비를 철저하게 했다 해도 자연 재해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