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이 유려하다면 제품이 돋보입니다. 하지만 눈에 띄는 디자인은 포장 역할 중 일부입니다. 제품이 전하려는 메시지를 담을 수 있어야 비로소 포장이 완성됩니다. ‘넘버슈가’와 ‘페브’가 모범적 사례인 이유입니다.

넘버슈가, 페브 미리보기

• #1 마음을 담은 제품

• #2 메시지를 품은 패키지

• #3 제품을 위한 매장

• 기술보다 중요한 건 고민

후카사와 나오토가 디자인한 CD 플레이어입니다. ⓒ후카사와 나오토 홈페이지

후카사와 나오토의 디자인은 고차원적입니다. 그의 디자인이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어도 사람들은 제품에 디자인이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디자인에 대한 그의 관점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도 있습니다. 우산꽂이를 만들기 위해 그는 통 형태의 제품을 디자인하지 않았습니다. 현관의 벽면 근처에 일정 크기의 홈을 파서 우산꽂이를 완성했습니다. 현관의 홈은 우산을 세워두고 싶은 사람들에게 넌지시 이곳이 우산꽂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디자인한 제품들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사람들의 무의식을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다면 디자인은 사람들의 행동을 유도할 수 있습니다.

도쿄에는 이러한 디자인의 힘을 알고 있는 캐러멜 가게와 콩과자 가게가 있습니다. 10가지 맛의 캐러멜에 1번부터 10번까지의 숫자를 붙여 판매하는 ‘넘버슈가’와 콩과자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페브’입니다. 그들이 디자인을 통해 전하는 메시지는 캐러멜과 콩과자만큼이나 달콤합니다.

#1 마음을 담은 제품

일본 규슈에는 우리나라의 호두과자와 닮은 ‘쇼로만쥬’를 6대째 판매하고 있는 ‘오하라 시니세’라는 가게가 있습니다. 든든하게 들어 있는 부드러운 팥소와 카스텔라의 쫄깃한 식감을 가진 얇은 피가 오하라 시니세 쇼로만쥬의 특징입니다. 오하라 시니세는 싸구려 막과자가 아닌 최고급 요리를 만든다는 마음가짐으로 쇼로만쥬를 빚습니다. 쇼로만쥬에 담긴 마음은 제품을 만드는 최상급의 재료와 균일한 수준의 탁월한 품질로 드러납니다. 오하라 시니세만큼 업력이 길지 않지만 넘버슈가와 페브도 제품에 담은 진심만은 깊습니다. 넘버슈가와 페브가 5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에 도쿄를 대표하는 디저트 가게로 도약할 수 있었던 근간에는 좋은 원료를 사용한 우수한 품질의 제품이 있습니다.

넘버슈가의 오너는 예전부터 다양한 과자를 만들어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것이 취미였습니다. 선물을 받을 때 행복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좋아 넘버슈가를 시작했고, 사람들이 일상에서 행복을 느끼기를 바라는 마음을 캐러멜에 담습니다. 넘버슈가의 캐러멜은 주인 부부의 본가가 운영하는 목장에서 나오는 신선한 원유로 만듭니다. 캐러멜에 들어가는 모든 재료는 무향료, 무착색료, 무산미료, 무방부제를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온도에 민감한 캐러멜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매장에서 수작업으로 만들며, 대량생산은 하지 않습니다. 최상의 원료와 수작업에 대한 고집으로 늘 최고의 캐러멜을 만들어냅니다. 넘버슈가의 격을 높이는 건 캐러멜에 담긴 정성입니다.

넘버슈가는 오픈 키친 형태의 작업실을 통해 고객들에게 제품 제조 과정을 투명하게 보여줍니다. ⓒ시티호퍼스

‘페브(Fève)’는 프랑스어로 ‘콩’과 ‘행복’을 동시에 뜻합니다. 페브는 콩의 효능과 본연의 맛을 살리면서 동시에 현대적인 맛을 내는 콩과자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콩 외에도 땅콩, 캐슈너트, 건과일 등 건강한 재료를 조합한 제품들을 개발합니다. 페브의 모든 공정은 하얀 마스크와 모자를 쓴 직원들이 수작업으로 진행합니다. 파티시에들은 고품질의 과자를 생산하기 위해 온도계를 들고 공정마다 점검하며, 재료배합의 온도와 타이밍을 조절합니다. 건강한 재료와 전문적인 파티시에의 감각으로 만드는 페브의 콩과자는 남녀노소 모두를 아우르는 맛을 냅니다. 제품에 담긴 진심이 고객을 행복하게 하는 콩과자를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2 메시지를 품은 패키지

최근 도쿄에서는 ‘민트 붕어빵’이 유행입니다. 팥색 앙금이 들어가는 기존의 붕어빵과 달리 민트색 앙금을 넣어 판매합니다. 여심을 저격하는 비주얼로 벌써 한국의 SNS에서도 인기입니다. 이 밖에도 도쿄에는 비주얼로 승부수를 띄우는 수많은 디저트 가게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유독 넘버슈가와 페브가 꾸준한 인기를 누리는 건, 다른 디저트 가게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디자인에 ‘메시지’를 담기 때문입니다. 넘버슈가와 페브는 ‘정성스레 만든 제품을 다른 사람과 나누자’는 메시지를 담아 제품 패키지를 디자인했습니다. 제품의 패키지 자체가 감각적인 포장 역할을 하기 때문에 고객들은 자연스럽게 ‘선물’ 용도로 제품을 구입합니다. 패키지 디자인을 통해 제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표현하고, 제품의 용도를 확장한 것입니다.

넘버슈가가 판매하는 12개입, 24개입, 36개입 캐러멜 패키지는 리본으로 마무리한 종이 상자입니다. 고급스러운 새틴 리본을 두른 하얀 상자를 보면 자연스럽게 ‘선물’이 떠오릅니다. 마음을 전할 때 주는 장미 한 송이가 그려져 있는 8개입 패키지도 ‘선물’을 의도한 디자인입니다. 상자를 열어보면 하얀 종이에 캐러멜이 하나하나 싸여 있습니다. 마치 집에서 손으로 직접 포장한 듯한 모습입니다. 캐러멜을 감싼 포장지까지 디테일하게 신경 써 받는 사람에게 수제 캐러멜의 정성을 고스란히 전달합니다. 센스가 돋보이는 넘버슈가의 패키지가 보다 많은 사람의 하루에 행복을 더합니다.

상품 포장뿐만 아니라 캐러멜 낱개 포장도 손으로 직접 만든 정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시티호퍼스

페브는 ‘자색 고구마 가루를 입힌 콩과 말린 감칩’, ‘카카오 가루를 입힌 캐슈너트와 말린 바나나칩’과 같이 여러 재료를 조합한 과자를 판매합니다. 제품 패키지에는 주재료를 묘사한 일러스트, 계절성을 살린 일러스트, 일본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일러스트를 입힙니다. 전통적인 컬러로 현대적인 일러스트를 그려낸 감각적인 패키지 덕분에 선물용으로 인기가 좋습니다. 특히 결혼, 출산, 졸업 등 주요 이벤트 선물용으로 구입할 때에는 종이띠에 원하는 메시지를 새겨주기도 합니다. 선물은 내용물만큼이나 포장이 중요하다는 특성을 간파한 것입니다. 페브의 제품 패키지는 버리는 껍데기가 아니라 ‘마음을 전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포장지입니다.

전통적인 모티브와 현대적인 감각의 조화가 돋보이는 페브의 제품 패키지는 그 자체만으로도 세련된 선물이 됩니다. ⓒ시티호퍼스

#3 제품을 위한 매장

헌책방 골목으로 유명한 도쿄의 진보초에는 고급 종이를 전문으로 생산하는 ‘타케오’의 쇼룸인 ‘미혼초 혼텐’이 있습니다. 미혼초 혼텐의 매장은 타케오가 생산하는 2700여 가지의 고급 종이들을 선보입니다. 순백의 매장 가운데에 색상 그러데이션에 따라 종이 샘플을 배열하고, 벽을 서랍으로 활용하여 재고를 보관합니다. 매장 하나에 2700여 가지의 종이가 진열되어 있음에도 어떤 매장보다 단정하고 제품에 대한 집중도가 높습니다. 이처럼 매장은 제품을 위한 공간인 만큼 제품을 돋보이게 해야 합니다. 즉, 매장이 제품을 위한 또 하나의 패키지인 셈입니다. 제품 패키지의 고수인 넘버슈가와 페브 역시 매장 구성에서도 그 실력을 발휘합니다.

넘버슈가는 제품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비움의 미학보다 채움의 미학을 선택했습니다. 넘버슈가가 채움의 미학을 선택한 이유는 판매하는 제품의 디자인이 다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넘버슈가의 매장 중앙에는 선물 상자 패키지들이 풍성하게 쌓여 있고, 가장자리에는 낱개로 판매되는 캐러멜들이 맛별로 모여 있습니다. 상품의 재고를 보이지 않는 곳에 두는 대신 판매하는 모든 제품을 고객에게 보여주는 쪽을 택했습니다. 각기 다른 디자인의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으면 제품이 눈에 띄지 않지만, 같은 디자인의 상품이 대량으로 모여 있으면 제품에 대한 집중도가 높아지는 효과를 노린 것입니다. 그래서 판매하는 모든 제품을 진열해놓아도 여전히 각각의 제품에 눈길이 집중됩니다.

넘버슈가 매장 중앙에 선물 상자를 쌓아 두어 고객들의 이목을 집중시킵니다. ⓒ시티호퍼스

반면 페브는 보여줄 것만 보여주는 매장입니다. 고객이 보고 싶어 하는 건 2가지, 제품의 외형과 제품의 속재료입니다. 페브는 각기 다른 디자인의 30가지가 넘는 제품을 판매하기 때문에 매장을 제품으로 가득 채우면 제품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집니다. 제품의 집적을 통해 시각적 효과를 내는 대신, 흰 벽이 주는 여백의 미를 살려 매장을 구성했습니다. 하얀 벽에 설치되어 있는 1개의 나무선반 위에는 30여 가지 제품이 일렬로 나열되어 있습니다. 진열된 제품 위에는 각 제품의 내용물이 담긴 투명하고 긴 시험관을 배치했습니다. 시험관에 담긴 내용물들은 각자의 고운 색깔을 뽐내듯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통일된 진열과 색감의 조화를 통해 다양한 제품에 대한 집중도를 높인 페브의 지혜입니다.

기술보다 중요한 건 고민

“문제를 해결하는 힘은 새로운 정보를 얻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데서 온다.”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로 꼽히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입니다. 문제 해결 여부는 얼마나 오랫동안 고민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인 디자인도 새로운 정보의 습득보다는 고민의 결과로 만들어집니다. 넘버슈가와 페브는 ‘메시지 전달’이라는 목적에 대해 고민했고, 그 목적을 디자인으로 풀어냈습니다.

넘버슈가와 페브의 디자인은 디자이너가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넘버슈가의 선물 상자 패키지, 캐러멜 낱개 포장 용지, 모던 앤티크 스타일의 매장 인테리어 모두 주인 부부의 아이디어였습니다. 페브의 제품 패키지와 매장 디자인 또한 페브의 오너 쓰지구치의 고민에서 나왔습니다. 디자인을 하기 위해 디자인적인 사고방식을 연습할 필요는 있지만, 꼭 디자이너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디자인의 힘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있으며, 디자인의 시작은 진정성 있는 고민에 있습니다. 감각적인 디자인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깊은 고민의 결과로 탄생한 디자인이 살아남습니다. 넘버슈가와 페브가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입니다.

Reference

• 디자인의 디자인(하라 켄야 지음, 민병걸 옮김, 안그라픽스)

• 넘버슈가 공식 홈페이지

• 페브 공식 홈페이지

• 美味しくって身体に優しい新感覚の豆スイーツ「fève(フェーヴ)」, 키나리노

• スイーツだけどサプリメント感覚で 気軽に食べて欲しい！, 루미네 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