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성과 상업성이 충돌했어요. 일본 최초의 집합 주택 중 하나인 아오야마 아파트 재건축 사안을 두고서죠. 양측의 의견을 모은 건 건축가 안도 다다오였어요. 역사적 상징성을 무턱대로 보존할 수도, 그렇다고 무시하고 개발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그는 복합주택의 유산을 완전히 허물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상업 공간으로 기능할 랜드마크를 짓고자 고민했죠. 그 결과 4가지 원칙을 세웠어요. 역사성을 일부 보존하면서 공공성과 수익성의 균형을 유지하겠다는 방향성을 명확히 한 거예요.
첫째, 복합시설 내 일정 규모의 주거 공간을 확보할 것.
둘째, 전면의 가로수를 고려해 건물 높이를 제한할 것.
셋째, 오모테산도 거리와 이어진 퍼블릭 스페이스를 중심에 둘 것.
넷째, 아오야마 아파트 한 동, 또는 두 동을 있는 그대로 보존할 것.
그렇게 등장한 ‘오모테산도 힐즈’는 이러한 방향성이 거의 대부분 그대로 구현됐어요. 그렇다면 안도 다다오는 오모테산도 힐즈를 설계하면서, 이 어려운 약속을 어떤 방법으로 지킨 걸까요?
오모테산도 힐즈 미리보기
• 랜드마크를 대체한 랜드마크
• 오프라인 공간의 10년 뒤를 내다본 ‘미디어십’
• 나이보다 10년 젊게 사는 어른들을 위한 공간
• 개발 이익만큼이나 달콤한 ‘보존 이익’
진퇴양난이었어요. 역사적 상징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과 재개발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립했죠. 도쿄 오모테산도 지역에 있는 ‘도준카이 아오야마 아파트(이하 아오야마 아파트)의 상황이었어요. 입주민들은 물론이고, 인근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오야마 아파트를 하나의 풍경으로 받아들일 만큼 지역의 랜드마크였어요.
역사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엔 근거가 있었어요. 그냥 유명한 건물이 아니라 역사적 의미가 있었으니까요. 아오야마 아파트는 1926년에 지어졌는데, 일본 최초의 집합주택 중 하나였어요. 게다가 단순히 화제의 중심에 있던 최초였어요. 당시 기준으로 대학교수, 공무원, 군인 등 신분이 보장된 사람들만 입주 가능한 고급 아파트로 소문이 났었죠. 그리고 안전 설계가 잘 된 아오야마 아파트는 2차 세계대전과 지진 등에서도 살아남아 ’도시의 방화벽‘이라는 상징성까지 얻었고요.
오랜 시간 억지로 자리를 지키기만 한 것도 아니에요. 1960년대 이후 오모테산도가 패션 중심지로 성장함에 따라 아오야마 아파트 역시 부티크나 갤러리, 개성 있는 상점 등을 더하면서 리노베이션 했거든요.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온 살아있는 역사였어요. 1999년에는 일본의 근대건축 20선에 선정되기까지 했죠.
반면 실용적 관점에서 보면 재개발을 하자는 주장에도 일리 있었어요. 지어진지 80여년이 지났으니 시설이 노후화되어 불편한 점이 한두개가 아니었거든요. 게다가 오모테산도 지역의 인기가 높아져 부동산적 가치도 올라갔으니 재건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시간이 갈수록 커졌죠. 결국 실용과 자본의 논리에 무게중심이 실리며 재개발 계획이 발표되었는데, 각계각층에서 아오야마 아파트의 역사적 가치와 상징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반발이 일어난 거예요.
랜드마크를 대체한 랜드마크
양측의 의견을 모은 건 건축가 안도 다다오였어요. 역사적 상징성을 무턱대로 보존할 수도, 그렇다고 무시하고 개발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그는 복합주택의 유산을 완전히 허물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상업 공간으로 기능할 랜드마크를 짓고자 고민했죠. 그 결과 4가지 원칙을 세웠어요. 역사성을 일부 보존하면서 공공성과 상업성의 균형을 유지하겠다는 방향성을 명확히 했죠.
첫째, 복합시설 내 일정 규모의 주거 공간을 확보할 것.
둘째, 전면의 가로수를 고려해 건물 높이를 제한할 것.
셋째, 오모테산도 거리와 이어진 퍼블릭 스페이스를 중심에 둘 것.
넷째, 아오야마 아파트 한 동, 또는 두 동을 있는 그대로 보존할 것.
실제로 오모테산도 힐즈는 이러한 방향성이 거의 대부분 그대로 구현됐어요. 하나씩 살펴볼까요? 첫 번째, 오모테산도 힐즈를 주상 복합공간으로 지어 지상 4~6층은 주거 공간으로 마련했어요. 여기까지야 시설을 복합하면 되는 거니 크게 어렵지 않았지만 두 번째 목표를 달성하는 건 난이도가 있었어요. 비싼 땅에 재개발을 하는데 건물의 높이를 가로수 높이인 23m만큼으로 제한하면 용적률 등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해 수익성이 떨어질 수 있거든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하를 파서 건물의 높이를 확보했어요. 지상은 6층, 지하도 6층으로 총 12층의 건물로 설계했지만 약속한대로 건물이 가로수보다 높아지지 않도록 했어요.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어요. 지상에 건물을 올릴 때보다 지하를 팔 때 공사비가 더 드는데, 공사비야 그렇다 쳐도 지하 공간의 답답함은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2가지 방법으로 지하에 위치한 상업 시설의 답답함을 없앴어요. 하나는 실내 중앙을 뚫어서 비워두었어요. 이렇게 하면 지하 3층에서도 지상 3층을 볼 수 있는 등 전층에서 서로 다른 층이 보여 지하층에 있어도 지하로 내려왔다는 느낌이 무뎌지죠. 또 다른 하나는 천장에다가 좁고 길게 조명을 설치해 빛이 투과한 듯한 분위기를 연출했어요. 건물이 외부와도 연결된 듯한 효과가 생겨 답답함을 줄일 수 있는 거예요.
스파이럴 슬로프를 따라 배치된 매장 ⓒOmotesando Hills
세 번째 약속도 구현하기가 만만치 않은데요. 안도 다다오는 이를 지혜롭게 해결했어요. 건물 입구에다가 실내와 건물 외부에 걸쳐 아트리움(Atrium, 건물 내부에 존재하는 광장)을 배치해 오모테산도 거리와의 접점을 만들었죠. 여기에다가 건물 내부를 경사진 복도인 ‘스파이럴 슬로프’로 구성했어요. 그래서 걷다보면 자연스럽게 층간 이동을 할 수 있죠. 그런데 이 슬로프로 세번째 약속을 제대로 지켰어요. 경사로의 각도를 실제 오모테산도의 언덕 경사인 3도와 동일하게 설계했거든요. 마치 오모테산도 거리를 걷는듯한 느낌을 실내에서도 주는 거죠. 그래서 스파이럴 슬로프가 정식 명칭이지만 주민들에게 ‘제 2의 오모테산도’라는 애칭으로 불려요.
오모테산도 힐즈 본관 입구 ⓒOmotesando Hills
그렇다면 네 번째 약속은 어떻게 반영했을까요? 아오야마 아파트 한 동을 복원해 새 생명을 불어넣었어요. 본관과 연결된 도준관(Dojun Wing)이라는 이름으로 살려낸 거예요. 외관은 물론 내부의 계단이나 현관문 등을 보존해 누구나 아오야마 아파트임을 알아보게 하면서요. 지금은 주거시설이 아니라 갤러리나 카페 등 상업 시설로 쓰이지만, 외관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간판의 위치를 테라스 아래로 조정하는 등 도시의 유산을 향한 존중이 곳곳에서 드러나죠.
1926년 완공된 도준카이 아오야마 아파트 ⓒMoribuilding
아오야마 아파트를 복원한 도준관. 상업시설로 탈바꿈했지만 외관을 해치지 않기 위해 매장 간판을 테라스 아래에 달고, 오모테산도 힐즈 로고를 측면에 달았다. ⓒOmotesando Hills
오프라인 공간의 10년 뒤를 내다본 ‘미디어십’
탄생하기까지 진통을 겪었던 오모테산도 힐즈의 건물은 과거를 향해 있어요. 건물을 디자인할 때는 역사적 상징성에 무게중심을 두었지만, 지하 3층부터 지상 3층까지 이어진 상업 시설의 기획은 미래를 향해 있어요. 건물은 2005년에 준공되었는데요, 이 때 이미 건물을 하나의 ‘미디어’로 바라봤어요. 당시에는 온라인 비즈니스가 지금처럼 보편화된 시기도 아니었고, 오프라인 매장의 매출이 잘 나올 때였는데도 말이죠. 핵심은 건물을 미디어십(Media ship)으로 바라보는 거예요. 마치 미디어가 콘텐츠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광고를 하는 것처럼요.
본관 지하 3층부터 지상 3층까지 연결된 스파이럴 슬로프 ⓒOmotesando Hills
이 미디어십의 중심에 스파이럴 슬로프가 있어요. 건축적뿐만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신의 한 수 인거예요. 스파이럴 슬로프를 오모테산도 거리와 연결해 제 2의 오모테산도 거리로 만드니 꼭 물건을 살 목적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져요. 산책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양옆에 들어선 매장이 노출되죠. 또한 중앙이 뚫려 있으니 사방, 그리고 상하 어디에서건 다른 매장이 보여요. 입점된 매장의 노출 효과가 높은 거예요. 오프라인 매장의 특성상 구매로 바로 이어질 수도 있고요.
건물을 미디어로 바라봤으니 광고도 빠질 수가 없어요. 스파이럴 슬로프에는 매 층마다 같은 자리에 광고판인 ‘비주얼 보드’가 있어요. 경사로를 지나다 보면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시인성 높은 곳에 6개의 광고판을 놓은 거예요. 여기에다가 중앙이 뚫여 있으니 재미있는 광고 기획이 가능해져요. 광고에 서사를 부여하고 매 층마다 비주얼을 달리해, 4컷 만화처럼 층을 올라갈 때마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식이에요.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보도록 하는 효과가 생기죠.
스파이럴 슬로프를 따라 배치된 6개의 비주얼 보드 ⓒOmotesando Hills
실내뿐만 아니라 건물 외부에도 광고를 위한 공간이 있어요. 오모테산도 힐즈는 도로를 따라 250m 늘어서 있어요. 오모테산도 거리가 1km 정도이니 거리의 1/4을 차지하는 셈이에요. 이렇게 긴 외벽을 따라 배너 광고를 깃발처럼 걸어 놓았어요. 60개나요. 4m에 하나씩 걸려 있는 거죠. 연달아 걸린 배너를 통해 반복적으로 시각적 메시지를 전할 수 있어 광고 효과가 높아요.
외벽을 따라 길게 늘어선 60개의 광고 배너 ⓒOmotesando Hills
여기에다가 프로모션 할 수 있는 이벤트 공간을 마련해 놓았어요. 스파이럴 슬로프를 따라 지하 3층으로 내려가면 170평 규모의 대형 이벤트 공간인 스페이스 오(Space O)가 있는데요. 이곳에서는 패션쇼, 전시회, 발렌타인데이 기념 행사 등 대규모 오프라인 이벤트가 벌어지죠. 이처럼 미디어십을 추구하는 오모테산도 힐즈는 패션, 문화를 선도하는 지역의 상징적 공간으로서, 가장 앞선 트렌드를 선보이는 정보의 발산지로 공간을 재정의했죠.
170평 규모의 대형 이벤트 공간 스페이스 오 ⓒOmotesando Hills
나이보다 10년 젊게 사는 어른들을 위한 공간
오모테산도 힐즈의 상업 시설이 미디어를 추구한다는 건 알겠어요. 그렇다면 타깃의 정의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떤 사람들을 불러모을지가 정해져야 입점 매장이나 광고주가 이 미디어를 활용할지를 판단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오모테산도에는 유동인구가 넘쳐요. 육교 위에서 오모테산도 거리를 내려다보면 사람이 강물처럼 흘러가는 걸로 보일 정도죠. 하지만 광고 효과를 높이기 위해선 이 유동인구 중에 어떤 사람들을 타깃할지를 구체화해야 하죠. 그래서 오모테산도 힐즈는 고객 프로파일을 이렇게 정의했어요.
‘패션 감도가 높고, 도시적인 삶을 지향하는 30~40대, 하지만 자신의 나이보다 10살 젊은 마인드를 지닌 어른들’
단순히 유행에 민감한 젊은 층이 아니에요. 구매력이 충분하면서도 젊은 감각을 추구하는 어른이라고 못 박은 거죠. 이런 사람들을 불러모으기 위해 새로운 트렌드, 새로운 브랜드를 가장 먼저 소개하는 역할도 많이 해요. 2007년에는 애플의 아이팟 출시 광고가 오모테산도 힐즈의 전면 배너부터 스파이럴 슬로프 등을 뒤덮었고요. 2022년에는 일본 최초의 ‘발렌티노 뷰티’ 매장을 입점시켰어요. 또, 패션 기업 도쿄 베이스(Tokyo Base)에서는 고객 맞춤형 서비스를 실험하기 위해 ‘더 도쿄’를 출시하며 첫 매장으로 오모테산도 힐즈를 골랐어요.
iPod ‘Get in touch with life’ 캠페인 광고 배너 ⓒOmotesando Hills
일본 최초의 발렌타노 뷰티 매장 ⓒOmotesando Hills
또한 이러한 매장들이 입점하면 그에 걸맞은 고객이 몰림으로써 오모테산도 힐즈에 선순환을 불러와요. 실제로 구경할 거리가 많은 곳이라는 이미지가 각인되면서 타 지역에서도 찾아오는 건 물론, 외국 관광객도 오모테산도에 가면 한 번쯤 들르는 여행 코스가 되었어요. 구글맵 리뷰를 보면 ‘도쿄 필수 코스다’와 같은 칭찬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어요.
이처럼 오모테산도 힐즈는 오모테산도에서 가장 트렌디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했어요. 오모테산도 힐즈는 아오야마 아파트의 역사까지 합치면 100여년이나 되었는데 말이죠. 게다가 2006년에 오픈을 할 때 오프라인 공간을 매장이 아니라 미디어로 바라보면서 오프라인 공간의 10년 뒤를 내다봤어요. 심지어 미래지향적이기까지 한 거예요. 동시에 10년 젊게 사는 어른들을 타깃하면서 공간의 분위기도 10년 젊게 만들었죠. 그래서 오모테산도 힐즈에서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섞여 있는 오묘한 오늘을 보낼 수 있어요.
개발 이익만큼이나 달콤한 ‘보존 이익’
다시 진퇴양난의 상황으로 돌아가 볼게요. 아오야마 아파트 입주자들은 재개발로 인해 거주지를 떠나야만 했을까요? 그렇지 않아요. 원 입주민들은 오모테산도 힐즈의 4~6층 주택에 거주하면서, 아래 상점들로부터 임대료를 받고 있어요. 건물의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입주민까지 성공적으로 보존한 셈이에요. 하지만 일본 전국의 도준카이 아파트 16곳 중(아오야마 아파트의 공식 명칭은 도준카이 아오야마 아파트임) 주거지로 보존된 건 아오야마 한 곳뿐이에요. 워낙 부지가 넓고 유동인구가 많으니 보존을 해도 개발 이익이 충분했기 때문이죠.
부동산 개발 회사 관점에서 보면, 역사성과 수익성 사이에서 씨름하던 때에는 아오야마 아파트가 계륵같은 존재였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의 오모테산도 힐즈를 머릿속에 그릴 수 있었다면 다른 개발사들도 보존에 적극적이었을지 몰라요. 오모테산도 힐즈는 아오야마 아파트를 보존하고, 주변 경관과의 조화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면서 개발 이익은 물론이고 ‘보존 이익’도 누리게 되었으니까요. 역사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갖춘 건물이라는 아이러니가 오모테산도 힐즈를 다른 공간들과 차별화시킨 거예요.
도시의 유산이 지니는 가치는 상징적, 관념적인 영역에만 머물지 않아요. 오히려 브랜딩을 위한 소재로 제격이죠. 켜켜이 쌓아온 지역다움을 품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고 지켜지길 원한다는 건 머릿속에 ‘좋은 것’이라는 공통된 인식이 있다는 거고요. 이처럼 도시의 유산은 발목을 잡는 게 아니라 날개를 달아주는 요소일지 몰라요. 물론 과거로서의 의미를 품고 있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겠지만요.
Reference
• Protocooperation, 오모테산도 힐즈 - 도쥰카이 아오야마 아파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