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전 세계 패션업계를 놀라게 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루이비통이 스트리트 브랜드 오프 화이트의 수장인 버질 아블로(Virgil Abloh)를 루이비통 남성복 아트 디렉터로 발탁한 것이죠. 스트리트 웨어 기반의 흑인 디자이너를 등용한 건 1854년에 루이비통이 설립된 이래 처음입니다. 루이비통은 왜 버질 아블로를 선택했을까요?
버질 아블로는 "100년 이상 된 브랜드를 12살 아이에게 전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내가 그 일에 전문이다."라고 힘있게 말합니다. 하이 패션과 스트리트 패션을 이종 교배하고, 패션, 건축, 가구, 음악의 경계를 허물면서 말입니다. 고전적인 럭셔리에서 벗어나 현대적으로 체질 개선하려는 250살 루이비통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선택입니다. 이제 버질 아블로는 일종의 '문화 현상'으로 불릴 정도니까요.
40달러짜리 폴로 셔츠에 프린트만 더해 550달러에 판매한 그의 첫 번째 브랜드 '파이렉스 비전'(좌). 상표만 붙었을 뿐인데 가격이 치솟는 럭셔리 브랜드를 비판하는 메시지를 담았습니다. 오프화이트(우)에서 그 기치를 이어갑니다. ⓒ오프 화이트
나이키와 협업한 오프 화이트의 더 텐 시리즈. 주황색 케이블 타이와 헬베티카 폰트가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버질 아블로는 건축학도의 면모를 살려 주황색 케이블 타이, 사선 줄무늬, 화살표 등 건설 현장에서나 볼 법한 디자인을 시그니처로 삼는 등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듭니다. ⓒ나이키
2018년 최고의 쇼로 평가되는 루이비통 2019 S/S. 흑인 래퍼를 모델로 세우고, 팝 뮤직을 틀고, 학생들을 게스트로 초대했습니다. ⓒGETTY IMAGES
김재원 대표가 운영하는 성수동의 카페 겸 편집숍 '오르에르'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김재원 대표는 하나에 꽂히면 끝을 보고야마는 수집광으로 유명해요. 관심 있는 분야별로 가지고 싶은 물건의 나라, 연도, 히스토리, 작가, 사진, 가격 등을 엑셀에 정리하고 가장 인상 깊은 하나의 물건을 사 모으는 게 일상입니다. 꽃무늬, 지우개, 커틀러리, 심지어 돌멩이까지 수집 대상도 가지가지. 그렇게 돈과 시간을 아낌없이 쏟아넣고 나니 그만의 취향과 감각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경지에 이릅니다.
ⓒ오르에르
공간의 조각을 모으다
오르에르의 앞 ⓒ시티호퍼스
오르에르의 뒤 ⓒ시티호퍼스
애초에 이곳을 눈여겨봤다는 것 자체가 탁월한 감각의 영역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감각적인 접근'이라고 느끼는 지점을 좀 더 파헤쳐보면요. 공간의 조각을 모아 이곳에만 존재하는 공간을 만들어냈다는 점이 가장 차별적인 부분이에요. 단일 공간일 때보다 조각이 여러개일수록 훨씬 고유함이 커지는 거죠. 어떤 조각을 합치느냐에 따라서 고유함이 곱하기로 증가하니까요. 단지 카페, 편집숍, 문구점 등으로 구성을 다양하게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같은 구성이더라도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고 지역성이 뚜렷한 공간을 재활용해 더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가시적인 차이 덕분에 감각이 예민하지 않은 사람도, 디테일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지 않아도, 오르에르의 남다름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한 개층만을 활용해 운영에 제한이 있던 자그마치 ⓒ자그마치
이는 상호명에도 잘 담겨있습니다. 오르에르는 디자이너(designer), 에디터(editor)처럼 무엇을 하는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 ‘or’과 ‘er’을 합쳐 지은 이름입니다. 그리고, 쓰고, 만드는 등 서로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였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경험의 밀도를 높이다
왼편의 입구는 바로 뒷 정원으로 이어집니다. ⓒ명조 브런치
독립된 원룸 구조를 살리고 꽃과 식물 벽지로 꾸며 아늑한 1층 후면부입니다. ⓒ시티호퍼스
ⓒ시티호퍼스
2층 후면부의 포인트 오브 뷰는 오르에르에서의 총 경험 밀도를 높이는 일등 공신입니다. 문구류의 부피가 작다보니 작은 공간 안에 많은 제품을 집적해둘 수 있는 점이 큰 몫을 해요. 아마 단위 면적당 매출도 가장 높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구 덕후라면 멀리서도 찾아와 구경하다가 카페나 아카이브에 들르고, 문구류의 넓은 범용성 덕분에 다른 공간을 찾은 손님들도 포인트 오브 뷰에 들르는 등 시너지를 내기도 좋습니다.
ⓒ시티호퍼스
영화 <팬텀 스레드>에서 영감을 받아 정한 핵심 컬러인 검은색과 베이지색이 제품에의 몰입감을 높입니다. 고가의 앤틱 가구를 모조리 검은색으로 칠해버리고, 검은색 대형 조명을 어렵사리 공수할 정도로 디테일에 진심입니다. ⓒ오르에르
앉아서 필사를 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시티호퍼스
시필지에는 필사할 문장이 적혀져 있습니다. ⓒ시티호퍼스
주기적으로 바뀌는 3층 후면부의 게스트 아카이브. 빈티지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선향이 공간 전체를 여유롭게 만듭니다. ⓒ시티호퍼스
산호나 돌처럼 무용해보이는 것들도 아름다움의 가치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오브제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시티호퍼스
후면부가 양옥집의 따뜻한 톤이라면 전면부는 차가운 톤의 마감이라 대비됩니다. ⓒ오르에르
텍스트로 설계도를 짜다
바로 텍스트로 기획의 설계도를 짜는 것입니다. 비주얼을 잡기 이전에 글로 명확히 표현하는 것이죠. 철학, 스토리, 방향성이 텍스트로 단단하게 뿌리를 내려야 디테일하게 가지치기를 했을 때 미묘하게 달라지는 지점이 없습니다. 그래야 김재원 대표 개인에의 의존도를 낮출 수 있고 협업할 여지가 생겨나요. 취향과 감각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고 해석하기 나름일 수 있어요. 혼자 하는 취미라면 그래도 되지만 같이 하는 비즈니스라면 텍스트 설계도가 좋은 가이드가 되겠죠.
텍스트로 짠 설계도를 살짝 엿볼까요? 포인트 오브 뷰의 슬로건은 '예술가적 마인드를 위한 큐레이션 숍(A curated store for the artistic mind)'입니다. 보통 문구라고 하면 책상 위에 놓이는 제품들만 생각하는데요. 포인트 오브 뷰는 문구를 '책상의 풍경을 만드는 모든 것'으로 정의합니다. 그래서 작업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필요와 기능성에 방점을 두기보다는, 책상에 앉은 사람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진화한 도구'를 큐레이션합니다. 그래서 책상 앞에 앉았을 때 전면에 보이는 오브제도 충분히 문구가 될 수 있는 것이죠.
포인트 오브 뷰는 책상의 전면부에 보이는 오브제도 문구로 정의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문구점에는 없는 제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시티호퍼스
감각적인 단어를 골라 압축적으로 쓰여진 큐레이션 카드 ⓒ시티호퍼스
이런 탄탄한 설계 덕분에 오르에르를 벗어나서도 고유함을 잃지 않습니다. 포인트 오브 뷰가 이를 가장 먼저 증명했는데요. 킨포크 도산에 팝업 코너를 내고, 더현대서울에 정식 입점하는 등 서울 전역으로 뻗어가고 있습니다. 개인의 감각 자본이 비즈니스적인 확장성을 가질 수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꾸준하게 비균일할 것
그동안 많은 비즈니스가 개인에의 의존도를 낮추고 시스템으로 대체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습니다. 규모를 키우고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 일환으로 오르에르에서 발견한 인사이트가 자칫 개인의 취향과 감각이 더 이상 필요 없어지는 비즈니스를 지향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사실은 반대입니다. 희소한 감각 자본이 좀 더 제대로 힘을 발휘하기 위함입니다.
공간의 조각을 모으고, 경험의 밀도를 높이고, 텍스트로 설계도를 짜는 일련의 과정은 개인이 고민 없이 감각 자본을 쌓도록 돕습니다. '큰 돈도 안 되는 걸 어디에 쓰나'하는 생각 안 들게 말이죠. 개인의 비균일성을 꾸준하게 이어갈 수 있는 장치입니다. 우리 모두 감각 자본의 시대에 비즈니스 하는 법에 대해서는 아직 경험치가 많지 않기에 힌트를 얻을 일부일 뿐입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시대에 맞춰 시스템이 발전했듯, 감각 자본의 시대에 맞는 장치도 앞으로 더 개발되지 않을까요?
김재원 대표가 해온 일들을 보면 몸이 몇 개인가 싶습니다. 관심사가 방대하고 깊이까지 있는데, 그 와중에 늘 새롭게 디깅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일이 많은 이에게 자그마치 2호점을 내는 것을 거부하고 오르에르를 연 것은 당연한 수순. 대한민국에서 감도 높기로 손꼽히는 개인이 그간 해 온 일들에 메이지 않고 앞으로 해 나갈 일에 집중할 수 있다면 훨씬 더 재밌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김재원 대표가 비즈니스를 해 온 방식은, 어쩌면 자기 안의 수많은 오르와 에르를 위해 꼭 맞는 도구를 찾아주기 위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