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때 묻은 헌책을 정가보다 100배 비싸게 파는 방법

피터 해링턴

2023.05.31

‘6만 6,500파운드(약 1억 원)’


‘피터 해링턴’ 매장의 한쪽 코너에 세워둔 유리 진열장 안에 있는 9권의 헌책 가격을 더한 값이에요. 1권 당 평균 1,000만 원이 넘는 셈이죠. 특별히 비싼 책만 모아둔 것이긴 하지만, 피터 해링턴에서 판매하는 모든 헌책들은 기본적으로 비싸요. 눈길을 돌려 어느 책장을 보아도 눈에 들어오는 영역에 있는 헌책들의 가격을 더해보면 1,000만 원을 가볍게 넘어요. 정가보다 싼 책은 한 권도 없죠. 


피터 해링턴이 저명한 저자의 초판본이나 사인본, 그리고 희소성 있는 헌책들만 선별해서 팔기 때문에 가능한 가격 설정이에요. 이렇게나 비싼 헌책을 누가 사나 싶지만 피터 해링턴은 2021년 기준으로 3,200만 파운드(약 480억 원)의 매출을 올렸어요. 2015년 매출이 2,000만 파운드(약 300억 원)이었으니 연평균 8.15%씩 성장한 셈이에요.


피터 해링턴에서 벌어지는 비현실적인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를 가능하게 하는 피터 해링턴의 영리한 전략을 하나씩 살펴볼게요.


피터 해링턴 미리보기

 새책을 파는 듯한 헌책방

 #1. 새책에는 없는 헌책의 가치

 #2. 새책처럼 만든 헌책의 값어치

 #3. 헌책 없이 헌책을 파는 기지

 예술 작품도 파는 헌책방




누구도 책에 관심이 없는 마을에서 헌책방을 연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망할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헌책방을 히트시킨 능력자가 있어요. 심지어 쇠락해가던 마을까지 살려냈죠. 탄광촌인 헤이온와이(Hay-on-Wye)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던 리처드 부스(Richard Booth) 이야기예요.


리처드 부스는 옥스포드 대학(University of Oxford)을 졸업한 후, 1962년에 선망받던 런던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앞날이 깜깜한 고향으로 돌아왔어요. 1950년대를 기점으로 석탄 수요가 줄어들면서 폐광촌이 된 마을을 헌책으로 살려보겠다는 뜻을 품은 거예요. 누구나 수군댈 만큼 무모한 도전이었어요. 하지만 그는 보란듯이 헌책의 무한한 가능성을 증명했어요. 1,500여 명의 주민이 사는 마을에 이제는 40여 개의 헌책방이 들어섰고, 헌책을 사기 위해 전 세계에서 매년 50만 명 이상의 관광객들이 찾아오거든요.


주민들의 입방아를 이긴 건 애서가들의 입소문이었어요.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소방서 건물을 헐값에 사서 헌책방으로 만들고 책을 수집하기 시작했어요. 헌책을 찾아 동분서주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네트워크가 생겼고, 헤이온와이에 가면 희귀본을 구할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죠. 입소문의 힘을 확인한 건 우연이었지만, 그는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발 없는 말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입소문이 날 만한 이야깃거리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어요.


소방서를 헌책방으로 변신시킨 데 이어 1971년에는 마을의 상징인 헤이 성을 매입해 헌책방으로 꾸몄어요. 성을 서점으로 바꾸는 것도 흥미로운 시도지만, 그는 더 화제가 될 만한 아이디어를 선보였죠. 헤이 성의 돌담을 따라 책장을 설치하고 ‘정직 서점(Honesty Bookshop)’을 연 거예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정직 서점에는 직원이 없어요. 심지어 가격표도 붙어 있지 않아요. 고객들이 헌책을 집어들고 알아서 가격을 매겨 요금함에 넣는 방식으로 운영하는 서점이에요. 컨셉 자체도 신선하고, 돌성을 배경으로 한 서점 사진도 낭만적이어서 헤이온와이가 본격적인 유명세를 얻는 계기가 됐어요.


또한 1977년의 만우절에는 헤이온와이 왕국의 독립을 선포하는 이벤트를 열었어요. 만우절 행사이지만 꽤나 진지하게 접근했어요. 그가 왕관을 쓰고 직접 서적왕 즉위식을 거행하는 것은 기본이고, 왕국의 독자적인 화폐와 여권 등도 발행했거든요. 상상력을 말로만 풀어낸 게 아니라 현실에 구현해낸 덕분에 애서가들의 관심을 끌었죠.


그가 뿌린 화젯거리로 헤이온와이가 책마을로 자리를 잡아가자 이번에는 마을 전체가 이야깃거리를 생산했어요. 헤이온와이는 1988년부터 매년 5월경 10여 일 간 ‘헤이 페스티벌(Hay Festival)’을 주최해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마을로 불러 모으기 시작한 거예요. 축제 기간 동안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 방송인 등이 참석해 축체를 빛내요. 책읽기 행사뿐만 아니라 음악, 전시, 거리 퍼포먼스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펼쳐지고요. 이 기간 동안 10만 명 이상의 관광객들이 마을을 찾아요. 매년 입소문을 확산해내는 이 축제 덕분에 헤이온와이는 애서가들이라면 한 번쯤 가보고 싶은 성지로 자리매김하죠.


책을 사랑하는 시티호퍼스이라면 런던을 여행하는 김에 헤이온와이를 둘러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 수도 있어요. 하지만 문제는 마을의 위치예요. 런던의 패딩턴(Paddington) 역에서 웨일스의 헤리포드(Hereford) 역까지는 기차를 타고 3시간 정도 가야 하며, 역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1시간가량 들어가야 해요. 당일치기로 다녀오기엔 무리인 일정이죠. 그렇다고 헌책을 향한 애정을 내려놓을 필요는 없어요. 런던에는 또 다른 형태로 낭만을 채워줄 ‘피터 해링턴(Peter Harrington)’이 있으니까요.



©시티호퍼스



새책을 파는 듯한 헌책방

헌책방의 풍경은 헌책과 닮아 있어요. 유럽의 헌책방들은 빛바랜 책처럼 어딘지 모르게 낡아 있고, 잉크냄새 대신 책내음이 그득하죠. 또한 목차가 찢어진 헌책마냥 서가에는 책들이 순서를 모르고 더미로 쌓여 있거나 빼곡하게 꽂혀 있어요. 시간을 잃은 듯한 분위기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보통의 서점에서 살 수 없는 책들을 발견하는 재미에 애서가들은 헌책방을 가요. 표기된 책가격보다 싸게 구매하는 건 덤이고요.


피터 해링턴에서도 헌책을 팔아요. 하지만 보통의 헌책방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에요. 우선 간판부터 차이가 있어요. 리젠트 스트리트(Regent street)의 명품 브랜드 매장에서 볼 법한 거대한 깃발로 옆간판을 달았어요. 매장 문을 열고 들어가도 차이가 느껴지는 건 마찬가지예요. 


새책이라곤 새로 나온 헌책을 소개하는 책자 정도밖에 없지만 매장 안은 새책을 파는 서점처럼 보여요. 책을 추천하듯 책표지를 보여주는 디스플레이 방식을 택하기도 하고, 책을 빼곡하게 꽂아 놓기보다 차곡하게 꽂아 놓아 정돈된 느낌을 주죠. 심지어 누가 책을 집어가더라도 눈감아줄 것만 같은 여느 헌책방의 분위기와 달리 지하층이나 위층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가방을 맡겨야 해요.



피터 해링턴 첼시점 매장 전경입니다. 명품 브랜드 매장에서 볼 법한 거대한 깃발로 옆간판을 달았습니다. ©시티호퍼스


단순히 공간 연출만 바꾼 것이 아니에요. 헌책을 들여다보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더 큰 차이가 있어요.



#1. 새책에는 없는 헌책의 가치


‘6만 6,500파운드(약 1억 원)’


피터 해링턴 매장의 한쪽 코너에 세워둔 유리 진열장 안에 있는 9권의 헌책 가격을 더한 값이에요. 1권 당 평균 1,000만 원이 넘는 셈이죠. 대표적인 책 몇 권만 살펴보면 미국의 대공황기를 대서사시로 풀어낸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의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가 6,000파운드(약 900만 원, 현재 1만 8,750파운드), 펠릭스 잘텐(Felix Salten)의 원작 소설을 월트 디즈니(Walt Disney)가 만화로 만들어 제작한 《밤비(Bambi)》가 8,750파운드(약 1,313만 원, 현재 품절), 탄광 지대의 실업 문제를 다룬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The Road to Wigan Pier)》이 1만 5,000파운드(약 2,250만원, 현재 품절)예요.



유리 진열장 안에 있는 헌책 가격을 더하면 6만 6,500파운드(약 1억 원)로 책값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격대가 높습니다. ©시티호퍼스


특별히 비싼 책만 모아둔 것이긴 하지만, 피터 해링턴에서 판매하는 모든 헌책들은 기본적으로 비싸요. 눈길을 돌려 어느 책장을 보아도 눈에 들어오는 영역에 있는 헌책들의 가격을 더해보면 1,000만 원을 가볍게 넘어요. 정가보다 싼 책은 한 권도 없죠. 피터 해링턴이 저명한 저자의 초판본이나 사인본, 그리고 희소성 있는 헌책들만 선별해서 팔기 때문에 가능한 가격 설정이에요. 이렇게나 비싼 헌책을 누가 사나 싶지만 피터 해링턴은 2021년 기준으로 3,200만 파운드(약 480억 원)의 매출을 올렸어요. 2015년 매출이 2,000만 파운드(약 300억 원)이었으니 연평균 8.15%씩 성장한 셈이에요. 


피터 해링턴에서 벌어지는 비현실적인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헌 물건의 속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해요.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헌 물건의 가치가 결정되지만, 그중에서도 중요한 2가지 요소는 ‘시간’과 ‘사람‘이에요.


누군가 사용하던 물건이 중고 시장에 나온 지 얼마 안 되면 신제품과 경쟁해요. 가격을 낮춰야만 선택받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거예요. 그러던 헌 물건이 세월을 버텨내면 가치가 올라가기 시작하죠. 더 이상 생산될 수 없기에 희소성을 가지며, 물건이 사용되던 시대를 등에 업기에 차별성이 생겨요. 그래서 앤티크 혹은 빈티지 제품들은 과거에 누군가가 쓰던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보통의 중고 제품 가격과는 차이가 나요. 


또한 헌 물건은 누구의 손때가 묻었느냐가 중요해요. 보통 사람이 물건에 사인을 하면 낙서로 여겨지고, 제품의 가치가 떨어져요. 반면에 저명 인사가 사인을 하면 증서를 붙인 셈이 되고, 가치가 올라가죠. 특히 사용자로서의 사인이 아니라 만든이로서의 서명이라면 가치는 더 커지고요.


피터 해링턴은 헌 물건의 속성을 이해하고 책에 적용시켰어요. 그래서 시간이 흘러 희귀해진 헌책이거나 작가가 직접 서명한 헌책들을 수집해 정가보다 비싸게, 그것도 책의 가격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 가격에 판매할 수 있는 거예요.



#2. 새책처럼 만든 헌책의 값어치

헌책 중에서도 가치가 있는 책들에 주목해 높은 가격에 판매하는 것은 영리한 접근이에요. 하지만 사업의 지속성이나 성장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어요. 헌책을 수집하는 수요층이 있다고 해도 소장 가치가 있는 헌책들을 확보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에요. 어렵사리 구했다 하더라도 문제가 또 있어요. 오래된 책들은 책표지가 심하게 훼손되어 있거나 페이지가 쉽게 뜯어지는 등 읽기에도, 보관하기에도 불편해요. 가치 있는 헌책들의 값어치를 떨어뜨리는 요소예요.


그래서 피터 해링턴은 헌책의 커버를 양장본으로 리커버하여 새책처럼 만들어 판매해요. 유명 작가의 초판본이거나 저자 서명이 있는 책이지만 너덜너덜하여 위태롭던 헌책들도 양장본으로 리커버를 하면 고급스런 책으로 거듭나죠. 또한 가죽 등 고급 재질로 리커버를 하기 때문에 책 자체의 소장 가치가 높아져 비교적 최근 작가의 헌책들도 콜렉션에 포함시킬 수 있어요. 특히 양장본이 빛을 발하는 건 전집일 경우예요. 여러 권의 책을 가죽 양장본으로 만들어 책장에 꽂아두면 인테리어로도 그만이거든요. 피터 해링턴 매장에서 지적인 분위기가 흐르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지하 층에서는 서가를 품격있게 만드는 양장본 전집 및 양장본 리커버 책의 위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시티호퍼스


양장본 전집의 위엄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은 지하층이에요. 이 곳의 책장은 문학 분야의 리커버 양장본들로 채워져 있는데, 서가를 품격있게 만드는 책들이 소장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해요. 하지만 가격표를 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어요.


J.K. 롤링(J.K. Rowling)의 《해리 포터(Harry Potter)》 시리즈 일곱 편의 초판을 모아 양장본으로 리커버한 전집은 1만 8,000파운드(약 2,700만 원),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 등 5권으로 구성된 제인 오스틴(Jane Austen) 전집은 4,500파운드(약 675만 원), 《톰 소여의 모험(The Adventures of Tom Sawyer)》, 《허클베리핀의 모험(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 등이 포함된 24권 분량의 마크 트웨인(Mark Twain) 전집은 1만 5,000파운드(약 2,250만 원), 《동물 농장》, 《1984》 등이 담긴 8권의 조지 오웰 전집은 6,000파운드(약 900만 원)예요. 이외에도 에밀 졸라(Emile Zola),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등의 전집들이 평범한 책장을 비범하게 만들죠.



J.K. 롤링의 《해리 포터》 시리즈 일곱 편의 초판을 모아 양장본으로 리커버한 전집을 1만 8,000파운드(약 2,700만 원)에 판매합니다. ©시티호퍼스



오스카 와일드와 에밀 졸라의 전집입니다. 오스카 와일드 전집은 3,000파운드(약 450만 원)입니다. ©시티호퍼스


전집이 부담스러워 낱권으로 판매하는 책들을 봐도 선뜻 지갑을 열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예요. 셜록 홈즈(Sherlock Holmes)를 탄생시킨 코난 도일(Conan Doyle)의 《공포의 계곡(The Valley of Fear)》을 975파운드(약 146만 원)에 판매하는 등 보통의 책방에서 구매할 수 있는 책과는 가격대가 현격히 달라요. 내용은 일반 서점에서 파는 책과 다를 바 없을 텐데 피터 해링턴은 헌책들을 양장본으로 리커버해 기존의 책들이 누리지 못하던 값어치를 만들어냈어요.



책장에 꽂혀있는 책 중 파란색 양장본이 코난 도일의 《공포의 계곡》이며, 한 권의 값이 975파운드(약 146만 원)입니다. ©시티호퍼스



#3. 헌책 없이 헌책을 파는 기지

피터 해링턴은 헌책들을 양장본으로 리커버해 소장 가치가 있는 헌책의 공급을 늘렸어요. 이 또한 영리한 접근이에요. 하지만 여전히 두 가지 측면에서 경영상의 어려움이 남아 있어요. 하나는 재고 부담. 가격대가 높다보니 일반 서점보다 판매 회전율이 낮은 데다가 위탁 운영 방식이 아니라 사입 방식으로 판매하기 때문에 재고 비용이 만만치가 않아요. 또 하나는 계속되는 공급 부족. 헌책의 특성상 소유자가 내놓아야 헌책을 확보할 수 있는데 수집 가치가 높은 책들은 시장에 팔기보다 보유하고 있으려는 경향이 높아 헌책의 공급 풀을 늘리는 데 한계가 있죠.


이러한 문제점들을 보완해주는 장치가 ‘책 바인딩 서비스’예요. 고객이 소유하고 있는 헌책을 맡기면 가죽 양장본으로 리커버 해주는 거예요. 고객 입장에서는 소장하고 있는 헌책들을 더 가치있게 보관할 수 있는 장점이 있고, 피터 해링턴 입장에서는 헌책을 사입하기 위해 가격 흥정이나 초기 투자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이점이 생기죠. 또한 피터 해링턴은 이미 헌책의 리커버 판매를 위해 세계적인 수준의 기술자를 고용하고 제본 기계를 들여 놓았기 때문에 추가 투자 없이 책 바인딩 서비스를 운영할 수 있고요.


책 바인딩 서비스는 650파운드(약 100만 원)부터 시작해요. 가죽으로 리커버를 하고 금박으로 제목을 입히는 등의 서비스가 기본 사양이에요. 여기에다가 책등에 입체감을 만드는 밴드를 추가하는지 여부, 금박으로 문양을 넣는 정도, 가죽의 종류와 색깔 등에 따라 가격이 올라가죠. 양장본 리커버까지는 아니더라도 책장에 양장본을 꽂았을 때의 분위기만 필요한 고객들을 위해 양장본 형태의 책 케이스도 팔아요. 최저 사양이 300파운드(약 45만 원) 정도이니 책 자체를 양장본으로 리커버하는 것보다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이죠.


책 바인딩 서비스의 가격도 물론 중요하지만, 고객들은 가격만큼이나 양장본으로 리커버하는 과정을 궁금해해요. 소중한 책을 재가공하여 다른 모습으로 만들어 내는 건데, 그 과정에서 책이 망가지지는 않는지 혹은 리커버한 책은 어떻게 달라지는지 등에 대한 내용이 알고 싶을 법하죠. 


그런 점에서 피터 해링턴이 유튜브에 올려둔 책 바인딩 과정 동영상은 고객들의 걱정과 궁금증을 헤아리는 콘텐츠예요. 동영상을 통해 책 바인딩 과정을 11단계로 나누어 보여주며, 각 단계별로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요. 장인정신을 담은 제작 과정과 고급스럽게 재탄생한 책을 보면, 눈녹듯 걱정이 사라지고 눈먼듯 지갑이 열릴 수 있죠. 꼭 헌책이 아니더라도 애정하는 책이 있을 경우 양장본으로 리커버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예요. 책 바인딩 서비스 역시도 헌책을 중심으로 또 하나의 시장 기회를 파생시킨 영리한 접근이에요.



예술 작품도 파는 헌책방

피터 해링턴 매장 1층의 벽면 곳곳과 계단의 벽면, 그리고 지하층의 한쪽 방에는 그림이 걸려 있어요. 인테리어 장식을 위한 그림들이 아니라 판매하는 예술 작품들이죠. 헌책방에서 예술 작품을 파는 것이 어쩌면 생뚱맞아 보일 수 있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나름의 사연과 함께 사업적 필연을 찾을 수 있어요.



층과 층 사이의 계단부에도 예술 작품들이 걸려 있습니다. 인테리어 장식이 아니라 판매하는 작품입니다. ©시티호퍼스


피터 해링턴은 가족 기업이에요. 1969년도에 피터 해링턴이 매장을 오픈했고, 2000년부터는 아들인 폼 해링턴이 물려 받아 운영하고 있죠. 매장을 열고 20년이 지난 시점인 1989년에는 피터 해링턴의 부인인 마티 해링턴이 딸인 니키 해링턴과 함께 별개의 사업으로 ‘올드 처치 갤러리즈(Old Church Galleries)’를 런칭하며 사업가 집안의 면모를 보여주죠. 모녀가 운영하는 갤러리도 2호점을 낼만큼 사세를 확장했지만, 마티는 나이가 들고 니키는 결혼을 하면서 더 이상 정상적인 운영이 어려워졌어요. 그래서 2010년에 올드 처치 갤러리즈는 피터 해링턴과 합병을 하게 돼요.


가족이라는 이유로 합병을 했지만, 사업적 연결 고리가 없는 것은 아니에요. 피터 해링턴의 고객들은 애서가의 성향보다는 수집가의 기질이 크기 때문이에요. 피터 해링턴의 대부분의 고객들은 독서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테리어 장식 혹은 대안적인 투자의 목적으로 피터 해링턴에서 책을 찾아요. 예술 작품을 찾는 고객들과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는 거죠. 


그래서 피터 해링턴 지하 1층에 있는 피터 해링턴 갤러리(Peter Harrington Gallery)에서 판매하는 앤디 워홀(Andy Warhol), 키스 해링(Keith Haring),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등을 비롯한 여러 예술가들의 작품들이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아요. 사연이 있는 합병이 필연적인 성장의 기회를 만든 셈이에요.



지하층의 한쪽 방에서는 데미안 허스트, 스틱 등 유명한 아티스트들의 예술 작품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시티호퍼스



예술 작품들 중 가장 비싼 예술 작품은 크리스토퍼 리차드 윈 네빈슨의 <The Road from Arras to Bapaume>로 7만 5,000파운드(약 1억 1,250만 원)입니다. ©시티호퍼스


기존에 팔던 물건을 가지고 새로운 고객들을 찾아 나서는 것도 사업을 키우는 방법이에요. 하지만 기존 고객들의 특성을 이해하고 그들이 원하는 새로운 물건을 파는 것도 사업을 성장시키는 또 다른 방법이죠. 피터 해링턴에서 앞으로 또 무엇을 팔지가 궁금해지는 이유예요.




Reference

 피터 해링턴 공식 홈페이지

 건축의 표정(송준 지음, 글항아리)

 [뉴스G] 세상 모든 책이 머물다 ‘헤이온와이’, 뉴스EBS

 헌책방 마을 헤이온와이(리처드 부스 지음, 이은선 옮김, 씨앗을뿌리는사람)

 The Chelsea Bindery The Processes of Book Binding, PeterHarringtonBooks

 Peter harrington limited, End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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