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육점에서는 왜 붉은색 조명을 사용할까요? 붉은색은 활력을 느끼게 만들고, 식욕을 자극하는 색입니다. 게다가 신선한 고기일 수록 붉은색을 띄기 때문에, 정육점의 붉은색 조명은 고기를 더 맛있고, 신선하게 보이게 만들기도 합니다. 한편 정육점은 이런 붉은색 조명과 도살이 가진 이미지 때문에 거칠고 부정적인 공간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최근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는 정육점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깨고, 식생활을 풍성하게 만드는 장소로서의 정육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중 타이베이에 위치한 '루 바이 티햄(ROU by T-HAM)'은 고급스러운 정육점과 레스토랑을 함께 운영하며 정육점의 진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티크 호텔(Boutique hotel)', '부티크 펌(Boutique firm)' 등에서 '부티크'라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부티크'는 원래 '값비싼 옷이나 선물류를 파는 작은 가게'를 뜻하는 프랑스어로,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고급스러움, 소수를 위한 특화된 서비스, 전문성 등의 의미를 내포합니다. 보통 호스피탈리티, 투자, 법률, 패션 등의 업계에서 소규모 하이엔드를 지향할 때 매장 앞에 '부티크'라는 단어를 붙여 회사가 제공하는 서비스나 재화의 특별함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호주 시드니에는 이례적인 업종에 '부티크'라는 용어가 붙어 별칭으로 불리는 매장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부티크 정육점'이라 불리는 '빅터 처칠(Victor Churchill)'입니다. 빅터 처칠은 1876년 문을 연 '처칠스 부처 숍(Churchills Butcher Shop)'이 모태인 정육점으로,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정육점이기도 합니다. 빅터 처칠은 14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과거에 기대기보다는 미래를 개척하는 정육점을 지향하며 정육점의 고급화를 추구합니다.
빅터 처칠 매장의 클래식한 외관입니다. ⓒVictor Churchill
먼저 빅터 처칠은 호주 최고의 축산농가들과 협업하여 최상급 품질의 호주산 고기와 낙농 제품을 판매합니다. 100% 순혈 와규로 유명한 '블랙모어(Blackmore)'의 와규, 자연방목한 흑소로 명성 높은 '레인저스 밸리(Rangers Valley)'의 블랙앵거스, 돼지고기계의 와규라 불리는 '쿠로부타 포크(Kurobuta pork)' 등이 그 예입니다. 게다가 고급 정육점답게 소고기, 돼지고기 뿐만 아니라 거위 고기, 토끼 고기, 오리 고기 등 좀처럼 구하기 힘든 고기들도 갖추고 있습니다.
최상급 고기를 취급하는 만큼, 고기를 판매하는 매장 내부도 감탄을 자아냅니다. 빅터 처칠의 인테리어는 고급 레스토랑이나 바는 물론, 포시즌스, 세인트 레지스, 아만, 힐튼 등 5성급 호텔의 인테리어를 도맡았던 드림타임 오스트레일리아 디자인(Dreamtime Australia Design)에서 맡았습니다. 클래식한 유럽의 정육점 분위기를 모티브로 하되, 매장 전면 외관에 투시형 이중 냉장 유리창을 쇼윈도처럼 비치해 고기를 마치 작품처럼 걸어 두고, 매장 안쪽에는 정육업자들이 고기를 손질하는 공간을 통유리벽으로 만들어 고객에게 구경하는 재미를 선사하기도 합니다. 고전적인 분위기를 현대적인 인테리어로 구현한 이 매장은 2010년 뉴욕 국제 실내인 디자인 어워드에서 '올해 최고의 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빅터 처칠은 히말라야산 소금으로 만든 벽이 있는 에이징룸에서 최상급 고기를 숙성합니다. ⓒVictor Churchill
빅터 처칠은 고급스러운 하드웨어와 함께 그에 걸맞는 소프트웨어, 즉 인력과 콘텐츠를 갖추고 있습니다. 정육업계에서 여러 차례 수상 경력이 있거나, 20년 이상의 셰프 경력이 있는 등 전문성을 갖춘 인력들이 모인 것은 물론, 정육과 관련된 다양한 수업과 다이닝 이벤트로도 고객들의 경험을 다채롭게 만듭니다. 호주산 소고기에 대한 이해를 돕는 수업, 집에서 고기를 손질할 때 필요한 기술을 알려주는 수업, 소세지를 만드는 수업, 시식과 함께 하는 토크 세션 등을 매주 열어 고기를 소비하는 데에 필요한 지식과 방법을 제안합니다. 최고급 고기를 판매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를 충분히 즐기고 누릴 수 있도록 전문 인력들이 도와주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육점'으로 손꼽히며 호주 전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찾는 빅터 처칠은 시드니를 방문한다면 꼭 한 번쯤 들르고 싶은 곳입니다. 하지만 남반구에 위치한 부티크 정육점은 서울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쉬워 하기는 이릅니다. 정육점의 진화가 시드니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도시 타이베이에도 빅터 처칠과는 다른 결로 정육점의 진화를 보여주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루 바이 티햄(ROU by T-HAM)'입니다. 루 바이 티햄은 2016년에 문을 연 매장으로, 1층에는 정육점을, 2층에는 정육식당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운영한지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고기 애호가들을 중심으로 팬층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과연 루 바이 티햄이 제시하는 정육업계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요?
루 바이 티햄의 매장입니다. 통유리를 통해 들여다 보이는 매장 내부는 언뜻 보아도 고급스러움이 느껴집니다. ⓒROU by T-HAM
#1. 품격을 높인 고기
대만은 1990년대 세계 2위의 돈육 수출국이자 대만 내 돈육 생산량의 40%를 수출할 정도로 세계적인 양돈 대국이었습니다. 그런데 1997년 발발한 대규모 구제역을 겪으면서 대만산 양돈에 대한 신뢰도가 하락하고 수출 판로가 막혔고, 현재는 전성기 생산량의 절반 정도를 생산하고 생산량보다 더 많은 양의 양돈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 구제역이 발생할 때마다 대만 축산업의 과거를 언급하며 위기 의식을 다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구제역 대란 이후 대만은 철저한 방역 대책을 실시하여 미연에 사태를 예방하고 있지만, 과거의 광명을 되찾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루 바이 티햄은 대만산 고기를 집중적으로 판매하는 대신, 고급 정육점으로서 전 세계에서 공수한 국가대표급 고기들을 판매합니다. 일본 가고시마 흑돼지, 미국 블랙 앵거스, 뉴질랜드 양 등 세계적으로 알아 주는 고기들이 즐비합니다. 여기에 기존 정육점에서 의무적인 표기의 대상으로만 여겼던 원산지를 국기와 국가명으로 표현해 마치 그 나라를 대표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국가대표급 고기들을 취급하는 만큼 일일이 깔끔하게 진공포장하여 나무로 만든 고급스러운 매대 위에 진열해 둡니다. 원산지에 대한 관점을 바꾸고 관점에 걸맞는 디스플레이를 선보이니, 판매하는 고기에 품격이 더해집니다.
루 바이 티햄은 원산지를 넓히는 것뿐만 아니라, 취급하는 제품의 범위도 넓혀 고기를 소비하는 방식을 제안하거나 고기 애호가들의 소장욕을 자극합니다. 1층의 정육점에서는 신선육과 함께 가공육은 물론, 고기와 함께 소비하는 고급 식음료인 치즈, 와인, 오일 등을 판매합니다. 그 중에서도 각종 치즈와 소시지를 먹기 좋게 잘라 판매하는 '종합 플래터'는 술 안주나 파티용으로 인기가 좋습니다. 함께 판매하는 식재료가 고급이니, 주력 제품인 고기가 한층 더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여기에 소시지의 외관과 디테일을 본 떠 만든 쿠션, 키링 등의 굿즈도 판매합니다. 수요가 많은 제품은 아니지만, 정육점으로서 재밌는 행보이자 고기 애호가들이라면 호기심을 가질 만한 제품입니다.
#2. 가심비(價心比)를 채우는 식당
보통 정육점에서 운영하는 정육 식당은 양질의 고기를 저렴한 가격에 푸짐하게 제공하는 것이 가장 큰 장점입니다. 그래서 고객들은 정육 식당의 가성비를 위해 고급스러운 분위기나 서비스는 기꺼이 포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루 바이 티햄이 운영하는 정육 식당은 1층의 정육점만큼이나 남다릅니다. 루 바이 티햄은 정육 식당을 고기의 다양한 매력을 발견하는 곳으로 재정의하고, 고기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도록 인테리어부터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처럼 꾸며 정육 식당의 틀을 깹니다. 각 테이블에는 식사 후 사용할 수 있는 치실까지 구비해 두었습니다.
식당에서 판매하는 메뉴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통의 정육 식당들이 고기의 신선함을 내세워 구워 먹는 메뉴를 주로 판매하는 것과 달리, 루 바이 티햄에서는 고기가 들어간 다채로운 요리를 갖추어 고기의 매력을 여러 가지 메뉴를 통해 발견할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고기를 구운 메뉴는 물론, 햄버거, 핫팟, 햄 플래터 등 약 30여 가지의 메뉴가 준비되어 있어 정육 식당의 영역을 넓힙니다. 입맛에 따라 원하는 고기 요리를 우아한 분위기에서 즐길 수 있으니 고기 애호가들이 이 곳을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루 바이 티햄은 식당에서 요리로 고기의 향연을 선보이기도 하지만, 이벤트로도 고기의 풍미를 살립니다. 스페인 이베리코 등 특정 육류를 맛보는 테이스팅 이벤트와 같이 자체적인 자리는 물론 외부 전문가들을 초빙해 고객 경험을 입체적으로 만듭니다. 유명 와이너리, 위스키 브랜드 등과 협업해 고기의 매력을 배가하는 다양한 페어링을 제안하기도 하고, 셰프들과 함께 한 이벤트에서는 피자, 햄버거 등 고기가 들어간 음식을 요리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도 합니다. 머물고 싶은 공간을 만들고, 즐기고 싶은 콘텐츠로 공간에 활력을 더하니 고객의 마음이 루 바이 티햄을 향합니다.
#3. 컨셉에 공명하는 매장
루 바이 티햄이 고급 정육점으로서 포지셔닝하는 데에는 품질 좋은 고기의 무대인 매장 디자인의 공이 큽니다. 루 바이 티햄은 정육점으로서는 이례적으로 iF 디자인 어워드,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A' 디자인 어워드 등 세계적인 디자인 어워드에서 매장 인테리어 디자인으로 수상을 한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기존 정육점과 달리 현대적인 디자인의 매장이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는 아닙니다. 그보다는 매장 컨셉을 매장 디자인에 창의적인 방법으로 반영하였기에 루 바이 티햄의 수상이 설득력을 가집니다.
ⓒROU by T-HAM
1층에 위치한 정육점의 디자인 컨셉은 '냉장고'입니다. 매장을 디자인한 'WZWX 아키텍처 그룹(WZWX architecture group)'은 냉장고 조명, 냉장고 내부의 둥근 모서리 등에서 받은 영감을 매장 인테리어 곳곳에 반영했습니다. 음식을 신선하게 보관하는 냉장고를 컨셉으로 매장 전체를 거대한 냉장고처럼 만드니, 정육점의 고기가 더욱 신선해 보입니다. 컨셉이 디자인을 만들고, 디자인이 컨셉을 살린 셈입니다.
1층과 2층 모두 천장이 낮은 편이지만, 통유리를 통해 빛을 들여 오고 공간을 나누지 않고 크게 터 놓아 공간감을 확보했습니다. 인테리어적으로도 1층은 회색계열의 원목을 사용하고, 고기 단면에서 볼 수 있는 마블링 무늬를 흑연으로 표현하여 고급 정육점으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2층에서는 진한 색을 지닌 월넛 원목을 활용하고, 식사를 하는 동안 매장 앞 큰 길을 따라 늘어선 나무가 보이도록 내부를 설계하여 차분한 식사 공간에 자연의 무드를 더합니다.
업계의 미래를 이끄는 1인자
업계의 1인자가 업계의 진화를 이끌 때 그 파급력과 반응은 힘을 얻습니다. 대만에서 가장 현대적인 정육점인 루 바이 티햄을 만든 회사는 역설적이게도 대만에서 가장 오래된 정육회사 '타이완 팜 인더스트리(Taiwan Farm Industry)'입니다. 5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타이완 팜 인더스트리는 오래된 회사 이미지를 탈피하고, 정육점의 새로운 판도를 이끌고자 루 바이 티햄을 만들었습니다. 루 바이 티햄의 '루'는 중국어로 고기를 뜻하는 '肉'을 읽은 발음이고, '티햄'은 타이완 팜 인더스트리를 줄여 부르는 말로, '티햄이 선보이는 고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티햄이 런칭한 새로운 정육점 브랜드를 위한 직관적인 네이밍입니다.
1967년에 설립된 타이완 팜 인더스트리는 대만 최초의 현대화된 정육 회사로, 돈육농가의 수익성을 개선하고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생고기나 냉동 고기는 물론, 당시에는 생소했던 서양 스타일의 햄, 소시지, 훈제 고기 등을 개발해 고기의 쓸모를 넓히고, 고기에 대한 수요를 창출했습니다. 정육 회사 설립 이듬해에는 처음으로 냉동 돈육을 일본에 수출한 대만 회사가 되었고, 이후에도 대만 육가공 회사 최초로 인도적 도축을 인증 받고, 초고압 살균 공정을 도입하는 등 업계의 굵직한 마일스톤을 만들며 대만 육가공업계를 이끌어 왔습니다.
루 바이 티햄이 비교적 짧은 시간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데에는 든든한 모회사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루 바이 티햄에 투영된 모회사의 비전에서 업계를 진화시키는 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틀을 깨는 1인자의 진화는 업계의 미래를 만들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