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에 카페를 오픈한다면?

식물성 도산

2022.05.20

"어떤 곳에서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하면 그곳을 정복했다고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나는 화성을 정복했다고 할 수 있다. 닐 암스트롱, 내가 더 낫죠?"


우주 비행사 마크 와트니의 생존을 그린 영화 <마션(The Martian)>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화성 탐사 임무를 수행하던 화성탐사대가 갑작스럽게 모래 폭풍을 만나 철수하던 도중, 와트니는 홀로 화성에 낙오됩니다. 탐사대는 구출을 시도했지만 결국 와트니가 사망했다고 판단하고 지구로 떠납니다.


©마션


하지만 죽은 줄만 알았던 와트니는 놀랍게도 살아 있었습니다. 다만 앞으로가 문제였습니다. 남아 있는 식량은 31일치. 구조대가 화성까지 오려면 무려 5년이나 걸립니다. 아껴 먹는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이대로 죽을 순 없습니다. 치열하게 살아남을 방법을 고민하던 와트니는 본인의 과학지식을 총동원해 지구에서 가져온 박테리아가 섞인 토양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인분을 거름 삼아 감자를 심고 우여곡절 끝에 작은 싹을 보게 됩니다. 지겨울 정도로 감자 요리만 먹기는 하지만, 마침내 살아 남았습니다.


©마션


©마션


편의점 음식과 배달 음식을 먹으며 영화를 보자니, 그저 강 건너 화성 구경 같나요? 머지않아 영화가 현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안 그래도 환경 변화에 민감한 농업인데 최근에 이상 기후 현상이 급증했어요. 세계기상기구(WMO)에 따르면 2020년은 기후 역사에 있어 최악의 한 해로 기록될 정도라고 하죠. 여기에 코로나19로 식량 수급길이 막히자 식량 안보 문제가 목전으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와트니가 생존을 위해 화성에서 우주선 안에 감자를 재배했던 것처럼, 서울에도 비슷한 위기 의식을 가지고 도심 속에 스마트팜을 만드는 기업이 있습니다. 바로 엔씽(N.thing)입니다. 스마트팜은 농업에 정보통신 기술을 적용해 재배 환경을 최적화하는 말 그대로 '똑똑한 농장'입니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팜을 체험하고 효용에 공감하게 만드는 방법을 고민하던 엔씽은 서울 압구정동의 도산공원 근처에 카페를 하나 냅니다. 이름하여 '식물성 도산'입니다. 동물성의 반댓말인가 싶지만, '지구와 화성 사이에 위치한 신선함의 별'이라는 뜻입니다. 이 별난 행성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엔씽



#1. 2050년 화성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

식물을 내세운 카페라면 흔히 자연을 담은 인테리어와 초록색 화분이 가득한 생기있는 공간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식물성 도산은 완전히 다른 노선을 택합니다. 화성을 모티브로 하여 마치 미래에 온 듯한 느낌을 주는 공간을 구현한 것이죠. 화성은 인류의 새로운 미래로 비유되는 상징적인 행성입니다. 2050년 화성에 우주 농장을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가진 엔씽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메타포예요. 바닥에 전체적으로 벽돌색 타일을 깔고, 붉은 화산석을 쌓아 화성의 거친 표면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원스리스트


ⓒ시티호퍼스


그렇다고 우리가 영화나 소설에서 익히 보던 화성의 모습만을 그대로 옮겨온 것은 아닙니다. 2050년의 화성을 상상한 만큼, 미래 지향적인 소재들도 과감하게 섞어요. 아크릴, 스테인리스 스틸, 네온 사인 등 차가운 소재가 화성을 표현한 투박한 소재와 충돌하며 전에 없던 장면을 연출합니다. 마치 화성에 착륙한 우주선을 보는 듯 해요. 여기에 형광에 가까운 연두색 포인트 컬러도 곳곳에서 강렬한 대비감을 줍니다. 


화성이 모티브이니만큼, 은하계에서 영감을 받은 디스플레이나 디자인도 눈에 띱니다. 매장 한켠에는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수경재배 중인 바질이 얹어진 원형 플레이트들이 천천히 움직이는데요. 마치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행성처럼 신비롭습니다. 곳곳에 놓인 원형 좌석과 테이블도 모두 은하계를 떠도는 행성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로고, 쿠폰, 심지어 라떼 아트에서까지 은하계 디자인을 더하며 식물 행성의 컨셉을 강화합니다. 음료 쿠폰은 보딩 패스 디자인으로 만들어, 지구에서 화성으로 가는 여정의 중간에 만난 거점이라는 메시지를 넌지시 전합니다.



2050년 화성에 불시착한 듯한 이 공간에서 가장 시선을 끄는 부분이 있습니다. 모듈형 컨테이너 수직농장인 ‘큐브(CUBE)’입니다. 신선함의 별에서 '신선함'을 담당하고 있는 구역으로, 벽면 전체에 채소가 한 데 줄지어 진열되어 매장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매장 안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해 매장에 들어온 누구나, 어느 위치에서든 볼 수 있어요. 심지어 매장 밖에서도요. 미래 지향적인 다른 인테리어들과 더불어 큐브 역시 미래의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집니다.



ⓒ원스리스트


ⓒ시티호퍼스


실제로 이 큐브는 식물성 도산에서 가장 미래 지향적인 지점입니다. 다른 요소들은 컨셉을 디자인적으로 구현한 것이라면, 큐브는 실제 가까운 미래가 될 수 있거든요. 큐브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히 수확한 채소를 예쁘게 진열해둔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수경재배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매일 5시간씩 자동화 로봇이 투입되어 정밀하게 작물 관리를 하는 모습은 다른 카페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이색적인 광경입니다.


어림잡아 세어봐도 수백여 개 채소 뿌리가 있어보여요. 카페 한쪽 벽면만으로도 이 정도 생산성이 나오는 건 스마트팜의 수직농장이기에 가능한 부분입니다. 스마트팜의 수직농장은 블록처럼 수직으로 쌓아 올리거나 병렬로 이어 붙일 수 있어 확장성이 좋습니다. 단위면적당 생산성은 기존 방식 대비 최대 100배가량 높고, 물 사용량은 98%나 적어요. 카페에 있는 내내 풀멍하며 수직농장의 효용을 몸소 느낄 수 있답니다.



#2. 카페 메뉴가 된 채소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식물성 도산은 왜 '카페' 형태로 구현했을까요? 공간 가득 스마트팜으로만 채워 도심 속 녹지 공간처럼 구성할 수도 있고, 더 쉽게는 샐러드 바나 브런치 레스토랑도 채소의 신선함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에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을텐데요.


첫 번째 이유는 '접근성'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스마트팜 산업이 크게 성장 중이지만, 대중, 특히 재배 환경이 안정적인 한국에서는 아직 거리감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채소에 별 관심이 없던 사람들에게도 가장 문턱이 낮은 옵션이 카페입니다. 단가가 낮고, 이용 빈도도 높기 때문이죠. 두 번째 이유는 '경험'입니다. 그저 슥 보고 지나가는 게 아니라 공간에 체류하며 먹고 마시는 경험을 통해 인상을 오래 남기는 것입니다. 또 다른 경험으로 확대할 여지도 크고요.


이렇듯 카페라는 형태로 접근성과 경험을 확보하는 데서 더 나아가, 메뉴로 화제성을 더합니다. 완두콩 두유/에스프레소/바닐라/연유로 만든 '식물성 화이트', 초코 완두콩 두유/카카오 등을 넣어 만든 '식물성 블랙' 같은 시그니처 음료는 기본이고요. 미쉐린 셰프와 협업하여 하루 한정 수량으로 제공되는 바질 파인 소르베도 인기입니다. 식물성 도산의 소르베는 우유나 달걀 노른자를 넣지 않고 스마트팜에서 자란 바질과 파인애플, 레몬즙 등 100% 천연 재료로만 만들어집니다. 보통 소르베는 안정제를 넣어 아이스크림이 녹는 시간을 지연하는데, 식물성 도산의 소르베는 안정제 없이 깔끔하고 시원한 맛을 냅니다. 바질 스프레드를 곁들인 베이컨 스콘도 식물성 도산만의 한 방이 있는 메뉴입니다.



식물성 블랙 시그니처 커피 ⓒ시티호퍼스



바질 파인 소르베 ⓒ시티호퍼스


그런데 식물성 도산의 시그니처 메뉴를 특별하게 만드는 비결은 따로 있습니다. 이 메뉴의 원재료가 되는 채소들의 원산지가 바로 여기, 식물성 도산 매장이라는 점입니다. 원산지 표기만 되어 있지 어떤 과정을 거쳐 식탁에 올랐는지 모르는 식재료들이 요새 많은데요. 스마트팜 기술을 활용해 맞춤 환경에서 자란 신선하고 깨끗한 채소를 눈 앞에서 보니 신뢰도 같이 자라납니다. 말하자면 재배 과정까지 메뉴에 포함된 셈이죠.


식물성 도산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채소 자체를 판매합니다. 바질, 로메인, 바타비아, 버터헤드 상추 등 스마트팜에서 수확한 최상급 채소입니다. 재배 과정을 봤으니 수확물에는 더 믿음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눈으로 보고, 입으로 먹고, 채소를 구매하는 일련의 경험을 통해 식물성에서의 여정이 깊이를 더해갑니다.



카페 내부에서 판매중인 채소 ⓒ시티호퍼스


ⓒ시티호퍼스



#3. 집에서도 이어지는 슬기로운 파밍생활

식물성 도산은 스마트팜에 눈을 뜨는 계기를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촉발된 관심을 매장 밖에서도 고객 스스로 이어갈 수 있도록 돕습니다. 매장에 방문해야지만 스마트팜을 경험한다면 한계가 있을테니까요.



식물성 도산에서 판매 중인 수경재배 키트 ⓒ시티호퍼스


그래서 집에서도 채소를 키울 수 있는 수경재배 키트를 매장에서 판매합니다. 키우고 싶은 채소만 선택하면 필요한 도구가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체, 최초 발아를 돕는 친환경 소일(인공토양), 소일을 담는 포트, 씨앗, 부스터 영양제, 본체 커버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실내에서는 빛이 부족해 식물 생장이 더뎌질 수 있기 때문에 LED도 3가지 종류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재배하고 싶은 채소가 많다면 수직 농장처럼 층으로 재배대를 쌓을 수도 있고, 포트 등은 재사용이 가능해 씨앗팩만 새로 구입해 다양한 채소에 도전할 수 있어요.




ⓒ엔씽


수경재배 자체가 워낙 간단하고 크게 전문성을 요하지 않기에 가능한 시도입니다. 기존 농업에서는 토양이 식물의 양분을 공급하지만, 수경재배는 흙이 아닌 물로 양분을 흡수하는데요. 그래서 흙에 꼬이던 벌레나 오염이 발생할 일이 없고 농약과 화학비료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계절과 장소에 관계없이 개인도 일정한 품질의 채소를 기를 수 있습니다. 식물성 도산은 안 그래도 쉬운 수경재배를 스타터 키트로 하여금 더 쉽게 만들어줍니다. 집에서 나만의 작은 농장을 만드는 것이 더 이상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We build our farms all over the world to supply food. Even on Mars." (전 세계에 농장을 짓고, 언제 어디에서나 신선한 먹거리를 공급한다. 심지어 화성에서도.)


엔씽의 이 비전과 철학을 가장 작은 단위로 구현한 것이 이 수경재배 키트 아닐까요. 농업에 있어서 대개 소비자로 남아있던 개인이 얼마든지 생산자가 될 수 있음을 직관적으로 보여줍니다. 그저 재미 삼아 키워본다는 차원을 뛰어 넘습니다. 내 손으로 직접 재배해 먹는 건강하고 안전한 먹거리에 대한 경험 하나하나가 앞으로의 식탁을 서서히 변화시켜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집 안에서 자라고 있는 수경재배 채소를 바로 수확해 요리하고, 식당에서도 수경재배중인 채소를 골라 신선하고 안전한 한끼를 먹는 게 당연해질지도요. 


엔씽의 시작은 IoT 기반의 작은 스마트 화분이었습니다. 이 화분이 컨테이너가 되고, 컨테이너가 농장이 되고, 중동 사막에 이어 이제는 화성에서 싹을 틔우는 꿈을 꾸게 만들었습니다. 식물성 도산에서 품어 온 이 작은 키트가 또 다른 문화를 만드는 문익점의 목화씨가 될 지 기대해봅니다. 



채소가 브랜드가 된다는 것의 의미

엔씽은 B2B에서 큰 성과를 내고 있는 기업입니다. 농업 부문 최초로 굴지의 전자제품박람회인 CES2020에서 최고 혁신상을 받았고요. 아랍에미리트에 300만 달러 규모의 수직농장을 구축하기도 했어요. 특히 식량자급률이 낮은 중동 지역에서 열렬히 환영받고 있습니다. 다만, 국가나 규모 큰 기업 단위로 거래되는 사업의 특성상 그 위상에 비해 대중적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엔씽 수직농장 ⓒ엔씽


엔씽은 식물성 도산을 시작점 삼아 B2C로도 사업을 확대하려는 계획입니다. 사실 여태껏 채소를 브랜드화해서 성공한 사례가 없습니다. 농업은 동일한 퀄리티와 가격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하지만  365일 균일한 신선도, 품질, 수확량을 약속할 수 있는 엔씽이라면? 채소가 브랜드로 자리잡는 것도 별나라 이야기만은 아닌 듯 합니다. 언젠가 식탁에서 '식물성 채소'를 콕 집어 찾는 날이 올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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