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도서관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카타르 국립 도서관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만들어진 도서관입니다. 국가를 막론하고 독서 인구가 줄고 있는 상황이라 질문이야 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카타르 국립 도서관을 지으며 제시한 나름의 답은 뻔하지 않을 수 있죠. 그렇다면 이 도서관은 디지털 시대에 도서관을 어떻게 재해석했을까요?
“일반적으로 도서관은 정보 제공과 지식 교환을 위한 활기찬 공간이었으나, 인터넷의 발달로 정보 접근이 즉각적으로 가능해지면서, 정보 제공보다는 지식 공유의 장으로서 도서관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이 도서관을 디자인한 네덜란드 건축 디자인 회사 ‘OMA’의 ‘Ellen van Loon’의 설명입니다. 도서관의 역할을 정보 제공과 지식 교환으로 구분하고 그중에서 시대의 변화에 맞는 역할인 지식 교환에 더 집중하자는 뜻입니다.
©OMA
©Qatar National Library
©O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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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카타르 국립 도서관은 책을 읽는 환경을 바꿈으로써 사람들의 발길을 도서관으로 이끌고, 도서관을 지식 공유의 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도서관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대한 카타르 국립 도서관 나름의 깊이 있는 답인 거죠. 이 도서관이 재해석한 도서관은 모범적이지만, 이 질문에 대한 유일한 답은 아닙니다. 또다른 답도 있습니다. 서울에 있는 ‘소전서림’이 도서관을 재해석한 것처럼요.
입장료를 내야 들어갈 수 있는 도서관
소전서림은 '흰 벽돌로 둘러싸인 책의 숲'이라는 뜻입니다. 갤러리였던 공간을 도서관으로 탈바꿈한 곳이죠. 책의 숲이라는 이름처럼 소전서림은 큐브를 차곡차곡 쌓아 올린 형태로 도심 속의 숲을 형상화했습니다. 그 안에는 인문학 중심으로 선별한 4만여 권의 장서가 채워져 있고, 강연과 공연이 진행되기도 합니다. 여기까지야 이름이 세련되고 건물이 감도 있으며 문학 중심의 도서관인가보다 라고 여길 수 있는데, 도서관 이용 방법을 알게 되면 보통의 도서관과 확연히 다른 곳이란 생각이 듭니다.
©소전서림
도서관의 상식에 도전하면서 입장료를 받는 걸 보니 분명 소전서림에는 기존의 도서관과는 다른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 것 같습니다. 도서관의 문턱을 낮춰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을 끌어들이기보다 오히려 문턱을 높여 독서에 진심인 사람들을 불러모으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소전서림은 도서관을 어떻게 재해석해 입장료를 내면서까지 가고 싶은 공간으로 만들었을까요?
1. 책뿐만 아니라 공간을 빌린다
똑같은 음식이라도 어디서 먹느냐에 따라 음식의 맛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미쉐린 스타 셰프 요리를 먹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요리를 집에서 배달 시켜 먹을 때와 미쉐린 스타 셰프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먹을 때 맛이 같을까요? 만약 배달 시켜 먹는 것과 현장에서 바로 먹는 것 사이의 차이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면, 이런 상황을 떠올려 봅시다. 치킨을 집에서 시켜 먹는 때와 한강 고수부지에서 시켜 먹을 때를 말이죠. 레시피가 완벽히 똑같다고 해도 아마 어디서 먹느냐에 따라 맛이 다르게 느껴질 겁니다.
음식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책을 읽는 것도 환경이 중요합니다. 어디서 책을 읽느냐에 따라 독서의 경험이 달라지죠. 그래서 소전서림은 책만큼이나 공간에 신경을 썼습니다. 독서에 진심인 사람들이 돈을 지불하고도 이용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책 읽는 경험을 최상으로 끌어올리는 공간을 구현했죠. 그렇다면 소전서림은 책 읽을 맛이 나는 공간을 어떻게 꾸몄을까요?
©소전서림
우선 책을 읽는 환경을 다양하게 구성했습니다. 중앙 서재인 메인 홀은 반듯하면서도 감각적인 공간입니다. 이러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벽면 상단의 디자인에 있습니다. 이곳은 층고가 높은데, 책장 위의 상단부가 벽돌을 쌓은듯이 반듯하게 구성되어 있고, 이 벽돌같은 벽면에서 하얀 빛이 발산되고 있어 감각적으로 보이는 거죠. 공부를 시작할 때 책상부터 정리하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곳입니다. 또한 예술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인 예담은 담백하면서도 묵직한 곳입니다. 공간을 가득 채우지 않아 여백의 미가 느껴지고, 벽면에 걸린 예술 작품들이 여백에 무게감을 더해줍니다. 여기에다가 창밖으로 보이는 빈 그네가 공간을 낭만적으로 만들죠. 책을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공간입니다. 여기에다가 개인 서재 공간도 마련해 두었습니다. 도서관이라고 해서 여러 명이 함께 책을 보란 법은 없으니까요. 자기만의 오롯한 시간을 가지면서 책을 읽고 싶은 사람을 위한 공간입니다.
공간 구성뿐만 아니라 각 공간에 비치된 의자에도 신경을 썼습니다. 앉아서 읽는 행위에 최적화된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죠. 보통의 경우 일상에서는 앉아볼 기회가 없을 핀 율, 칼 한센앤선, 아르텍, 카시나, 프리츠 한센 등의 디자인 체어를 곳곳에 두었습니다. 이런 디자인 체어는 단순히 디자인이 멋져서가 아니라 앉았을 때 편안함을 주기 때문에 유명한 거죠. 또한 디자이너와 협업하여 정육면체 좌판이 움직이면서 자세를 올곧게 유지해주는 의자까지 제작했습니다. 여기에다가 그네처럼 움직이는 스윙 체어, 황금알 낳는 거위 체어 등 앉는 행위에 대해 자유로운 상상력을 시도한 의자도 볼 수 있습니다. 독서에서 의자를 떼어 놓기는 어렵기에 소전서림은 고객들이 더 편하게 혹은 새롭게 독서를 할 수 있도록 의자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죠.
©소전서림
©소전서림
2. 책뿐만 아니라 관계를 빌린다
소전서림과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하는 곳이 일본에도 있습니다. 도쿄의 롯폰기에 위치한 분키츠입니다. 이곳은 전시장과 업무 공간 대여, 카페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1,500엔(약 15,000원)을 내야 입장 가능한 서점이죠. 이곳이 입장료를 받는 이유는 서점에서 책을 보며 우연한 발견을 할 수 있는 시간에도 가치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입장료를 받는 이유만큼이나 입장료로 1,500엔을 책정한 이유도 흥미롭습니다. 이 금액은 전시회 등의 가격대와 유사한데, 전시회장에 가서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서점을 바라봐 달라는 의미입니다.
소전서림은 반일(5시간) 입장권이 분키츠보다 2배 정도 높습니다. 이 가격엔 분키츠와 마찬가지로 책을 보며 우연한 발견을 할 수 있는 시간에 대한 가치가 포함되어 있죠. 그렇다면 분키츠와 차이나는 금액엔 어떤 가치가 담겨 있는 걸까요?
소전서림은 도서관이면서 동시에 살롱을 지향합니다. 그래서 강연, 공연, 이벤트 등을 주기적으로 열어 인문학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교류할 수 있는 장을 만들죠. 입장료에는 이러한 강연, 공연, 낭독, 이벤트, 워크숍 등의 가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전서림
연간 멤버십 가격이 이렇다면 얼마나 자주 가야 연간 멤버십으로 경제적 이득을 볼 수 있을까요? 방문할 때마다 반일(5시간)을 머문다고 가정한다면 A타입은 44회, B타입은 80회를 방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갈 때마다 반일 입장료를 끊고 들어가는 편이 낫죠. 1주일에 한 번 정도는 방문해야 이득을 보는 구조이니, 자주 방문하지 않을 거면 연간 멤버십에 가입할 엄두가 안납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연간 멤버십에 가입할 경우 자주 가게 되는 거죠. 인문학 책에 관여도가 높은 사람들이 자주 와서 만나고 교류할 수 있다면 그만큼 살롱으로서 기능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3. 책뿐만 아니라 안목을 빌린다
보통의 경우, 없는 책이 없을 수록 도서관의 가치가 높아집니다. 도서관은 최대한 많은 책을 갖춰 놓고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사람들이 어떤 책이건 간에 읽을 수 있게 만들려고 노력하죠. 하지만 소전서림은 소장한 장서의 수보다, 책을 선별해 제안하는 것으로 도서관의 가치를 높입니다.
흰소설전 ©소전서림
또한 책을 추천하는 방식에도 보통의 도서관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책 제목이 아닌 작가의 이름으로 섹션을 구분하기도 하니까요. 한 명의 작가를 찾으면 그의 아카이브를 모두 볼 수 있는 거죠.
그뿐 아닙니다. 소전서림의 히든 카드는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도록입니다. 전 세계의 갤러리와 미술관에서 출판한 도록부터 최근 전시한 감각적인 도록까지 소장하고 있죠. 다른 도서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해외 문학잡지와 해외 전시 동향을 파악할 수 있고 희귀 서적, 절판본, 빅북 등도 열람할 수 있습니다.
이걸로 부족했는지 2021년 1월, 소전서림은 또다른 시도를 합니다. 3명의 작가와 함께 '흰소설전'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죠. 도서관을 소재로 한 단편 소설로, 일반 서점에는 유통하지 않고 소전서림 회원만 무료로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한정판을 구해 오는 것을 넘어 한정판을 만드는 이들의 실험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비일상을 일상화하는 도서관
소전서림은 우리가 도서관이라고 부르던 곳에서는 상상도 할 수도 없었던 시도를 벌이고 있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눈에 보이는 여러 시도들도 기존의 도서관과 차별화되지만, 도서관을 만들 때의 철학과 원칙 등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도 남다릅니다. 실제로 소전서림은 도서관을 설계할 당시 7가지 모티브를 가지고 도서관을 구상했습니다.
• 도서관은 책의 향으로 온기를 만드는 장소다.
• 빛은 벽에 스며들어 선이 아닌 빛의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
• 섬세한 디테일은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여 도서관의 리듬을 만든다.
• 먼 시선으로 외부가 보여 눈을 쉬게 만들어야 한다.
• 바깥으로 나설 때 외부공간은 안과 밖의 전이공간이 되어 낯설게 느끼지 않아야 한다.
• 눈은 책으로 향하지만 모든 감각이 열리는 장소가 도서관이므로 그 공간은 비일상적인 공간이다.
•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타자의 생과 다른 세계에 이르는 길이라 그 공간은 익숙함에서 벗어난 공간이어야 한다.
7가지의 모티브를 관통하는 말을 찾자면 ‘비일상의 일상화’입니다. 도서관을 책을 읽는 공간으로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매개로 비일상적인 경험을 하는 공간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해서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을 도서관으로 끌어들이기는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독서에 진심인 사람들이 떠나가지 않게 만들 수는 있죠.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도서관의 상식에 도전하는 소전서림이 이어나갈 실험이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