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베이는 과거의 모습을 간직하고도 미래로 나아가는 힘을 가진 도시입니다. 도시 곳곳에서 옛 거리와 시장, 건축양식 등을 그대로 보존하면서도 여전히 제 기능을 하는 곳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단수이 강 옆을 따라 형성된 다다오청(Dadaocheng) 지역은 19세기 말 가장 번화한 해외 무역항으로, 청나라 때부터 각종 물품과 찻잎, 한약재, 원단 등이 거래되던 곳입니다. 서구 문화의 영향을 받은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과 대만의 전통 문화가 어우러져 독특한 정취를 풍기는 이 곳은 여전히 활기찬 재래 시장의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다다오청 지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건축 양식입니다. 서구 문화의 영향을 받아 이국적인 정취를 풍깁니다. ⓒ트래블코드
다다오청의 메인 스트리트이자 다다오청의 축소판인 디화제(Dihua Street)에는 다다오청을 닮은 비누 가게, ‘다춘 솝(Dachun’s Soap)’이 있습니다. 무려 3대째 운영하고 있는 다춘 솝은 가업을 현대적으로 리뉴얼하면서도 선대의 유산을 존중합니다. 먼저 비누의 용도에 따라 피부용, 머리카락용, 세탁용으로 나뉘고, 그 안에서 효능에 따라 세분화해요. 그리고 효능을 내기 위해 쌀, 우롱차, 숯 등의 자연 재료를 사용하죠. 이처럼 시간과 지혜를 축적한 제품력은 기본이고,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디자인으로 제품의 가치를 높입니다. 창립 때부터 쓰였던 ‘미소짓는 얼굴’ 로고를 지금까지도 사용하되, 제품 패키지에 비누의 재료나 대만의 풍경을 세련된 디자인으로 표현합니다.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현대적 감각이 돋보이는 패키지 덕분에 다춘 솝의 매력이 빛을 발합니다.
디화제에 위치한 다춘 솝 매장입니다. ⓒ트래블코드
다춘 솝의 창립 때부터 쓰였던 ‘미소짓는 얼굴’ 로고입니다. ⓒ트래블코드
비누의 패키지는 비누의 재료나 대만의 풍경을 모티브로 디자인되었습니다. ⓒ트래블코드
헤리티지가 중심이 되는 건 디자인뿐만이 아닙니다. 다춘 솝은 창립자인 리슈이투(李水土)의 철학까지 계승하죠. 리슈이투는 자연을 해치지 않으면서 가족이 안심하고 쓸 수 있는 비누를 만들고자 했어요. 다춘 솝은 창립자의 뜻을 이어받아 여전히 환경이나 사람에 해로운 재료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덕분에 다춘 솝의 비누를 사용하고 난 비눗물은 생분해되어 강물의 생태계에 흡수됩니다. 매장에서는 이런 선대의 뜻이 담긴 브랜드 컨셉과 역사를 흑백 판화 질감의 일러스트와 함께 설명하기도 해요. 과거에 만들었던 비누는 녹아 없어졌지만, 철학은 지금까지도 녹아 있습니다.
나이도, 국경도 무효한 두유 가게, 소이프레소
오래된 비즈니스가 생명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과거에 뿌리를 두되 현재를 살아야 합니다. 제품의 용처, 용량, 디자인 등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변화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오랜 내공을 증명하는 일이죠. 이처럼 '오래됨'에서 '신선함'을 찾은 라이프스타일 브랜드에서 앞으로 브랜드가 나아가야 하는 미래의 방향을 읽을 수 있습니다. 타이베이 디화제에 전통 비누를 현대적으로 리뉴얼한 다춘 솝이 있다면, '타이베이의 홍대', '미식의 메카'라 불리는 융캉제(Yongkang Street)에는 대만 전통 음료인 두유를 재해석한 '소이프레소(Soypresso)'가 있습니다.
소이프레소의 매장입니다. ⓒ트래블코드
소이프레소는 노인들이 좋아하는 콩을 갈아 만든 음료, 두유를 판매하지만 매장을 방문하는 고객층에는 나이도, 국경도 없습니다. 두유를 많이 마시는 출근길이나 외부 관광객들이 많은 주말에는 주문을 하기 위해 줄까지 서야 할 정도니까요. 할머니 입맛을 가진 '할메니얼'들을 타깃한 것으로 보기에는 몰려드는 고객의 규모와 꾸준한 인기를 설명하기에 역부족이에요. 1978년에 문을 열어 4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소이프레소가 젊은 유동인구가 많은 상권에서 이토록 인기를 끄는 데에는 그만의 비결이 있습니다. 소이프레소의 탄탄한 기본기에서 브랜드의 생명을 연장하는 기술을 배울 수 있습니다.
현대적인 레시피와 신메뉴로 설 자리를 넓힌다
대만의 두유는 달콤하고 가벼운 우리 나라의 두유와 달리 더 걸죽하고 묵직한 질감에 콩맛이 진하게 납니다. 그래서 대만 사람들은 두유를 음료로 마시기 보다 아침식사 대용으로 대만식 밀가루 튀김과 함께 즐겨 먹죠. 소이프레소는 이런 대만의 전통 음료인 두유를 꼭 아침식사가 아니어도, 대만의 전통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쉽게 즐길 수 있도록 매장의 메뉴를 현대화합니다. 소이프레소의 메뉴에는 어떤 변신이 준비되어 있을까요?
먼저 두유의 맛입니다. 보통의 두유집에 단일 메뉴로 콩맛이 나는 두유가 준비되어 있는 데에 반해, 소이프레소는 두유에 아몬드, 코코아, 홍차 등 현대적인 맛을 가미한 10가지 이상의 두유를 개발해 젊은 사람들이나 외국인들도 쉽게 두유를 시도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춥니다. 오이 두유같이 실험적인 맛은 호기심마저 자극하죠. 두유의 용량도 380ml와 850ml 두 가지로 나누어 적은 용량으로 여러 가지 맛을 구매하거나 취향에 맞는 두유를 대량으로 구입할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유리 진열장에 여러 가지 맛 두유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트래블코드
주력 제품인 두유뿐만 아니라 두부, 두유 아이스크림, 두유 요구르트, 두부 푸딩 등 콩으로 만든 다른 제품도 선보입니다. 중국, 대만, 홍콩 등 중화권에서 주로 먹는 두부 푸딩 위에는 팥, 땅콩, 타로 등의 토핑을 선택할 수 있게 구성되어 있어 골라 먹는 재미가 있어요. 두유 아이스크림이나 두유 요구르트는 고소한 콩에 새콤달콤한 맛이 더해져 간식이나 디저트로 인기가 좋습니다. 아침식사로 마시는 두유는 기본, 간식이나 디저트가 중요해진 현대적인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오후에 먹기에 좋은 음식들을 콩으로 만들어 사람들이 두유집을 찾아야 하는 이유를 더 만드는 셈입니다.
두유를 부어 먹는 또우화입니다. ⓒ트래블코드
매장 앞 커다란 아이스크림 오브제를 두어 두유 뿐만 아니라 아이스크림도 대표 제품으로 판매하고 있음을 넌지시 알립니다. ⓒ트래블코드
보통 대만의 두유집에서는 대만 사람들이 두유와 함께 먹는 대만식 밀가루 튀김인 요우티아오(油条)를 판매해요. 하지만 소이프레소는 빵 메뉴마저 현대적인 감각을 자랑합니다. 콩으로 만들어 건강에도 좋고 맛도 고소한 베이글을 판매하는데, 소금&바질, 크랜베리, 견과류 등을 넣어 서구적인 맛을 구현하죠. 또한 베이글과 함께 먹을 비건 두유 크림치즈도 판매하고요. 두유집에서 베이글과 크림 치즈라니, 과거의 명성에 기댄 올드한 두유집이 아니라 새로운 과거를 만드는 세련된 두유 가게가 되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소이프레소에는 클래식, 소금&바질, 베리, 넛츠 등 4가지 맛의 베이글이 있습니다. 콩의 고소한 맛과 각각의 식재료가 어우러져 동서양의 조화, 구(舊)와 신(新)의 조화를 엿볼 수 있는 맛입니다. ⓒSoypresso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타깃 고객을 넓힌다
대만에서 두유가 전통 음료이자 국민 아침 메뉴인 만큼, 대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두유집은 대체로 작고 오래된 곳이 많습니다. 해외 관광객들에게 유명해져 대형 프랜차이즈화된 매장들을 제외하고는 간판이나 메뉴도 모두 예스러운 중국어로 되어 있고, 매장 분위기도 소박한 편이죠. 반면 소이프레소는 현대적인 두유를 파는 매장답게 매장 디자인으로도 두유 소비층을 넓힙니다.
대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전형적인 두유집의 모습입니다. ⓒ世界豆漿大王
소이프레소 매장 내부와 전면의 심플한 모노크롬 캐릭터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 잡습니다. 이 캐릭터는 전 세계적인 팬층을 보유한 일본 일러스트레이터 노리타케(Noritake)의 캐릭터에요. 노리타케의 캐릭터는 서양사람들과 달리 감정을 표정으로 잘 드러내지 않지만 무표정 속에 온화한 마음을 품고 있는 동양인의 얼굴로, 영국 '모노클(Monocle), 일본 '브루터스(Brutus)' 등 해외의 유명 잡지의 커버를 장식하기도 했죠. 소이프레소는 그가 그린 두유 마시는 소년 캐릭터를 매장 전면에 내세워 젊은층뿐만 아니라 외국인 고객들과도 접점을 늘립니다.
소이프레소 매장 내부입니다. ⓒ트래블코드
소이프레소 매장 앞에서 볼 수 있는 노리타케 캐릭터입니다. ⓒ트래블코드
소이프레소에서 노리타케와 협업해 한정판으로 판매했던 에코백입니다. ⓒSoypresso
한정 기간 동안 노리타케의 캐릭터가 그려진 두유 병에 두유를 넣어 판매했습니다. ⓒSoypresso
다른 분야의 공법을 차용해 맛의 수준을 높인다
대만에는 오래된 두유 가게부터 젊은 두유 가게를 표방하며 이제 갓 문을 연 가게들까지 많은 두유 가게가 있습니다. 하지만 두유를 마셔보면 가게마다 맛에 차이가 있고, 두유 특유의 비린 맛과 텁텁함을 잡지 못한 곳도 있어요. 소이프레소의 두유를 한 번 마셔보면 현대적인 브랜딩에 힘입은 일시적인 인기가 아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고소한 콩맛을 살려 진한 두유를 만들되, 끈적임이나 기분 나쁜 맛은 전혀 남기지 않아 맛있고 깔끔한 두유의 표본이죠. 브랜딩만큼이나 남다른 두유 맛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소이프레소가 가진 명성의 기본은 양질의 재료와 창의적인 레시피에 있습니다. 소이프레소는 두유에 방부제, 소포제 등을 일절 첨가하지 않고 캐나다에서 수입한 유전자 비변형 대두만을 사용합니다. 좋은 재료를 사용했으니, 맛을 살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소이프레소는 상호명에서 유추할 수 있듯 '에스프레소'에서 영감을 받아 레시피를 개발했습니다. 커피콩을 고압력으로 추출해 에스프레소를 만들 듯, 대두의 아로마를 130도에서 높은 압력의 스팀으로 추출해 무게감 있고 진한 두유를 만듭니다. 덕분에 식감은 끈적이지 않으면서도 단백질 함량이 높고, 맛 좋은 두유를 내놓을 수 있는 것이죠. 100ml당 5.5g의 단백질을 함유하고 있는 소이프레소의 두유는 보통 같은 용량에 3.5~4.5g의 단백질을 함유한 다른 두유 대비 단백질 함량이 높아 단백질을 보충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좋습니다.
소이프레소는 브랜드의 근간이 되는 두유 만드는 장면을 고객들이 볼 수 있도록 매장을 설계했습니다. 매장의 한 쪽 벽을 통유리로 만들어 매장 밖에서도 두유를 만드는 공간을 볼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 잡는 것은 물론, 깨끗한 콩과 제조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되니 고객들의 신뢰감이 올라갑니다.
콩을 압착해 두유를 짜는 모습을 매장 밖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트래블코드
오래된 두유 가게가 낡지 않는 이유
소이프레소의 창업주 정 마오위(鄭茂彧)가 처음 소이프레소를 만들었던 1978년에는 소이프레소도 여느 두유 가게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청과물 시장 한 켠의 작은 두유 가게로, 대만식 두유와 요우티아오를 판매했죠. 그러나 2대 정 쯔청(鄭自成)이 아버지가 장인정신으로 쌓아 온 가업에 힘을 더하기 위해 새로운 변화를 시도합니다. 그는 일본 교토에서 맛 본 우유처럼 향긋한 일본식 두유를 소이프레소의 두유에 접목하고자 했습니다. 일본으로 가서 두유 제조 기술을 배우고, 수년간의 실험과 연구 끝에 창업주의 정신과 일본의 기술을 결합해 소이프레소만의 두유를 개발했습니다.
소이프레소가 시간이 지날 수록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두유 가게가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창업주와 가업을 잇는 후대에 깃든 장인 정신, 그리고 혁신의 DNA 덕분입니다. 과거의 유산을 존중하되 미래를 고민하고 준비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현대적인 리뉴얼을 거친 현재의 모습 또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소이프레소는 어떤 모습일까요?
'Beyond Milk(두유 이상의 것)'
소이프레소의 슬로건이자 지향하는 바입니다. 두유가 단순히 대만 사람들의 아침 식사 메뉴로만 머무르지 않고 전 세계인의 일상이 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그렇기에 두유나 콩을 활용한 다양한 메뉴를 시도하고, 아침 외의 시간에도 즐길 수 있는 음식으로 확장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젊은 두유 브랜드가 아니라 두유 이상의 두유 브랜드가 되고자 하는 꿈을 가졌기에 소이프레소의 변신은 오늘도 현재 진행 중입니다.
Refer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