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닷 디자인 뮤지엄은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수상작들을 모아둔 곳이에요. 독일 에센에 처음 문을 열었고, 아시아 지역에는 싱가포르에 첫 번째로 진출했죠. 그리고 아시아의 두 번째 도시로 타이베이를 선정했는데요. 이 세 곳의 공통점이 있어요. 바로 오래된 공간을 활용해 뮤지엄을 만든 거예요.
에센에서는 탄광 공장을, 싱가포르에서는 교통 경찰청을, 타이베이에서는 담배 공장을 리모델링 했죠. 이유가 뭘까요?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페터 제흐 회장의 말을 들어볼게요.
"완벽한 창조는 없듯 무에서 만들어지는 혁신은 없습니다. 낡은 건물에 최신의 디자인을 추가하면 감각과 새로운 활력이 생기고, 사람들이 찾아오는 드라마가 펼쳐집니다."
담배 공장이 있었던 송산문화창조단지는 그의 말에 딱 들어 맞는 곳 중 하나예요. 이 곳에 자리잡았던 레드닷 뮤지엄은 이제 ‘타이완 디자인 뮤지엄’으로 바뀌었지만, 디자인적으로는 더 깊어졌어요. 대만 디자인 연구원이 뮤지엄 외에 주요 디자인 어워드 수상작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디자인 핀’ 매장과 디자인 관련 서적이 2만권 가량 있는 ‘낫 저스트 라이브러리’를 추가로 오픈했으니까요.
대만 디자인 연구원의 주도 하에 지금 대만의 디자인 씬에서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뽐내는 세 곳을 함께 둘러 볼까요?
대만 디자인 연구원 미리보기
• #1. 일상의 무감각을 파고든다 - 타이완 디자인 뮤지엄
• #2. 주요 디자인 어워드 수상작을 한 자리에 - 디자인 핀
• #3. 옛 목욕탕에서 즐기는 ‘북 배스(Book bath)‘ - 낫 저스트 라이브러리
• 창조를 견인하는 ‘낡음’의 힘
‘송산문화창조단지(松山文創園區)’는 대만이 일본의 지배를 받던 시기인 1937년에 지어진 담배공장이에요. 이후 역할을 다하고 한동안 폐허로 버려졌다가 2001년에 창조 파크로 거듭났죠. 넓은 부지에 흩어져 있는 담배 공장과 보일러실, 생태 수영장, 바로크 정원, 목욕탕 등의 옛 흔적은 그대로 보존하면서, 그 안을 예술가와 마이크로 기업가의 영혼으로 채웠어요.
우선 담배 공장은 다양한 전시가 수시로 생겼다 사라지는 행사장이자 인재 육성 프로그램, 각종 강의가 열리는 공간이 됐어요. 공원 안에 들어선 서점과 카페도 한두 개가 아니고, 공터 곳곳에서 주말이면 가수들의 미니 콘서트가 열리죠. 이름에 문화 창조라는 키워드가 들어있는 만큼 거의 모든 공간에서 대만의 미학적 감성을 느낄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디자인의 정수를 가득 느낄 수 있는 건물이 있어요.
이 건물에는 3개의 디자인 공간이 존재해요. 대만 최초로 디자인을 전시의 축으로 삼은 ‘타이완 디자인 뮤지엄(Taiwan Design Museum)’, 각종 디자인 어워드 수상작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디자인 핀(Design pin)’, 그리고 2만권의 디자인 서적과 잡지를 보유한 도서관 ‘낫 저스트 라이브러리(Not Just Library)’예요. 모두 대만 디자인 연구원(TDRI, Taiwan Design Research Institute)에서 운영하고 있죠.
ⓒ시티호퍼스
그런데 잠깐, 디자인 하면 독일, 영국, 프랑스, 일본 혹은 북유럽 국가 등이 먼저 떠오른다고요? ‘대만=디자인 강국’이라는 공식이 다소 생소하게 들릴 수 있어요. 하지만, 사실 대만은 그 어디에 내놔도 밀리지 않을 만큼 디자인 강국이에요.
세계 무대에서 얼마나 인정을 받고 있는지 예를 들어 보자면요. 2011년 독일 ‘iF 디자인 어워드’에 약 990개의 작품이 출품했는데, 그중 대만 출신 작가의 작품이 95개로 10% 가까이 차지했어요. 수상작은 50개 중 7개가 대만 것으로 독일과 일본 다음으로 많았죠. 12년 전부터 이미 대만의 디자인은 월드 클래스에서 경쟁하고 있었던 거예요.
사례는 하나 더 있어요. ‘레드닷 디자인 뮤지엄’은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독일 ‘레드 닷 디자인 어워드’의 수상작을 따로 모아 전시하는 뮤지엄이에요. 독일 에센에 첫 번째 뮤지엄을 세운 후 싱가포르 마리나 베이에 해외 첫 번째 지점을 열었죠. 그런데 이 레드닷 디자인 뮤지엄의 해외 2번째 거점으로 발탁된 곳이 대만 타이베이예요. 지금부터 살펴볼 타이완 디자인 뮤지엄의 전신이죠.
송산문화창조단지는 면적만 2만평이에요. 이 엄청난 면적이 숲길로 둘러싸여 있어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휴식처가 되는데, 현재 가장 트렌디하고 뜨거운 주목을 받는 디자인까지 볼 수 있다니 시티호퍼스라면 안 가볼 이유가 없죠. 송산문화창조단지에 자리잡은 디자인 3형제를 하나하나 만나볼게요.
#1. 일상의 무감각을 파고든다 - 타이완 디자인 뮤지엄
독일의 iF,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처럼 대만에도 유명한 디자인 상이 있어요. 1981년부터 시작한 ‘골든 핀 디자인 어워드’예요. 대만을 넘어 미국, 일본, 중국, 홍콩 등 전 세계 작가들이 경쟁하고 뛰어난 수상작을 배출하는 국제적인 디자인 대회죠. 타이완 디자인 뮤지엄에선 매년 이 골든 핀의 수상작들을 전시하고 있어요.
ⓒ시티호퍼스
뮤지엄은 2011년 개관 이후, 2013년부터 레드닷 디자인 뮤지엄과 병행으로 사용되다가 다시 지금의 타이완 디자인 뮤지엄으로 공식 변경됐어요. 그래서 현재는 레드닷과 골든 핀의 수상작들을 비롯해, 대만 내외의 디자인 트렌드를 살펴보는 곳으로 톡톡히 자리매김했죠. 전시회 테마는 2~3개월 주기로 쉼없이 돌아가는데, 시티호퍼스가 방문한 무렵엔 2022 골든 핀 디자인 어워드의 수상작을 전시하고 있었어요. 잠깐 이 전시회를 통해 타이완 디자인 뮤지엄이 어떻게 전시를 구성하는지 들여다보도록 할게요.
2022 골든 핀 디자인 어워드의 주제는 ‘엄지손가락을 멈추게 하는 크리에이티브(Thumb-Stopping Creative)’였어요. 정보가 폭증하는 시대에 사람들은 실제로 뭔가를 경험하는 대신 스마트폰 세상에서 손가락으로 정보를 스와이핑하는데, ‘좋은 디자인과 창의력으로 손가락을 멈추게 하라’는 게 대회의 골자였죠. 뮤지엄도 이 개념을 반영해 전시 공간을 몰입형 체험 공간으로 탈바꿈시켰어요.
ⓒ시티호퍼스
ⓒ시티호퍼스
우선 전시 공간은 4개의 구역으로 나뉘는데요. 이를 색, 기하학, 소재, 합성 중척 영역으로 구분했어요. 단순한 기능과 디자인에서 점점 복잡한 기능과 디자인으로 관람객의 동선을 유도한 거예요. 디자이너가 각 작품을 만들기 위해 쏟은 노력과 시간을 점층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죠.
이는 대회 주제와도 상통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한 페이지에서 다른 페이지로 건너뛰는 웹 브라우징은 정보를 제대로 흡수할 시간이 부족하지만, 뮤지엄은 이 전시회를 통해 사람들이 각 디자인의 세부 사항과 독창성을 자세히 관찰하며 그 의미를 충분히 소화하기를 바란 거예요.
작품의 면면도 재밌었어요. ‘뇌 두부’, ‘젠 스타일 두부’, 말주머니가 달린 ‘인사하는 두부’ 등 수천년 동안 변하지 않았던 두부를 리디자인해 고정관념을 벗긴 작품부터 견고한 종이로 플라스틱을 대체한 일회용 면도기, 노트북과 태블릿 PC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폴더블 스크린 등 손가락을 멈추게 할 만한 아이디어 제품이 가득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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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공간의 끝에는 칠판을 둬 관람객이 자유롭게 분필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했어요. 흑판은 너무 커다라서 그림을 완성하기 어렵고, 이전 내용을 지워도 과거 드로잉의 흔적이 중첩된다는 특징이 있어요. 분필로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가 창작의 일부가 되면서, 작가가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관람객이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도록 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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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가 유독 특별하게 아니에요. 이처럼 생각을 자극하는 전시가 주기적으로 열려요. 더 다양하고 재밌는, 뮤지엄의 중후함은 빼고, 키치하면서 자본주의의 화려함을 강조하기까지 한 전시회를 기획하기도 하죠. 대표적인 예를 하나 더 들어볼게요. 바로 2020년 개최했던 ‘현대 쇼핑 경험 메이커’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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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상자에 숨은 현대 소비의 비밀 ⓒTDRI
이 전시회에선 4개의 구역을 투표, 체험, 데이터, 포토 스팟으로 만들었어요. 투표와 체험 스팟에서 관람객은 다양한 유형의 카리파이팅 중 자신이 선호하는 것을 선택하고, 돈을 내지 않고 가상의 바코드로 구매할 수 있었죠. 체크아웃 영역으로 이동하면 가상의 바코드로 구매한 내역을 바탕으로 영수증이 나오는 것처럼 나의 쇼핑 습관, 욕구 등을 분석한 결과물이 나왔고요. 디자인과 브랜딩의 유혹에서 벗어나 카피라이팅만으로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나의 잠재의식이 끌어당기는 쇼핑은 무엇인지 스스로 알아보도록 설계한 거였어요.
그 다음 스팟에선 종이 상자를 ‘언박싱’해 소비자 심리학, 행동 경제학, 브랜드 스토리와 구매 전략 등을 데이터로 확인할 수 있게 했어요. 이는 핀코이 같은 브랜드 채널 11개를 인터뷰한 결과물이었죠. 마지막으로 쇼핑백을 든 귀여운 캐릭터들이 그려진 카드 월에서 사진을 남길 수 있었고요. 그런데 사진을 찍고 뮤지엄을 나와서도 전시는 계속됐어요. 반대편 매장에서, 앞선 전시장에서 나온 쇼핑 테스트 결과에 따라 분류된 상품을 직접 보고 구매할 수 있었거든요. 이게 바로 ‘디자인 핀’ 매장이에요.
#2. 주요 디자인 어워드 수상작을 한 자리에 - 디자인 핀
ⓒ시티호퍼스
디자인 핀의 로고는 못이에요. 못은 일종의 마킹을 나타내요. 물건을 눈에 띄게 걸어놓고 식별할 수 있도록 도와주죠. 즉, 디자인 핀에서 판매되는 상품은 못으로 마킹된, 주목할만한 제품이라는 걸 의미해요. 이 못의 역할을 해주는 게 대만의 골든 핀 디자인 어워드, 독일의 iF 및 레드 닷 디자인 어워드, 미국의 ‘IDEA 디자인 어워드’, 일본의 ‘굿 디자인 어워드’예요.
이처럼 디자인 핀은 대만, 독일, 미국, 일본 등 각종 국제 디자인 대회에서 수상한 제품들을 전시하고 판매해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집중된 이목을 토대로 수상 이력이 없는 젊은 대만 디자이너의 제품도 선보이거든요. 좋은 디자인을 소개해 사람들의 삶 한복판에 디자인을 접목시키는 것, ‘Life can be design’이 디자인 핀의 핵심 컨셉이에요.
ⓒDesign Pin
ⓒDesign Pin
디자인 핀에서 몇 가지 재미난 제품을 봤어요. ‘히방’은 세계 최초 100% 재활용이 가능한 안경이에요. 어떻게 이런 소재가 존재할 수 있냐고요? 비결은 폐어망이에요. 그물의 나일론 재질은 무척 좋은 탄성을 갖고 있는데, 히방의 디자이너들은 버려진 어망을 녹여서 나일론 알갱이로 만든 뒤 테를 성형하고, 여기에 렌즈를 삽입해 안경을 완성한 거죠. 그물망으로는 안경 체인도 만들 수 있어요.
ⓒDesign Pin
ⓒDesign Pin
또한 탁상 달력도 인상적이었어요. 보통 달력이라 하면 디자인보다는 실용성에 기반을 둬 ‘예쁘다’는 느낌을 주지 않잖아요. 하지만 ‘오데이 퍼페추얼 캘린더’는 이런 탁상 달력을 인테리어 용품으로 한 단계 격상시켰어요. 디자인 자체가 예쁜 건 물론, 특수 펜으로 마음껏 메모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수동식으로 요일과 숫자를 조절해 몇 년이 지나도 문제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달력을 만들었죠. 히방 안경처럼 100% 재활용이 가능한 셈이에요.
ⓒDesign Pin
이번엔 맥주잔이이에요. 이 맥주 잔의 이름은 ‘우 숙취 글라스’. 유리잔 바닥에 흡착된 주석 인형이 보이시죠? 이게 핵심이에요. 예로부터 주석은 술 향을 강화하고 쓴맛을 제거해주는 금속 재료로 유명했어요. 영국, 독일, 일본에선 황실 도구를 만드는 데 쓰이기도 했죠. 주석 인형으로 술맛을 부드럽게 만들고 숙취를 확 날려준다고 해서 이런 재미난 이름이 붙었어요.
이처럼 디자인 핀에 입점한 제품들에는 공통된 특징이 보였어요. 바로 지속 가능성이에요. 실용적이고 오래 사용할 수 있으면서 환경을 생각하는 마음까지 두둑이 담은 제품이 많았죠.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의 창립자이자 회장인 페터 제흐는 과거 MOT TIMES와의 인터뷰에서 좋은 디자인에는 4가지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어요. 실용적인 ‘기능’, 사람을 한눈에 반하게 하는 ‘유혹’, 오래 사용할 수 있는 ‘사용성’, 마지막으로 ‘책임’이었어요. 그러면서 이 한 마디를 덧붙였죠.
“대만에는 우수한 디자인 제품이 많지만, 브랜딩이 부족해 국제 시장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딜레마를 겪고 있어요. 대만이 나아가야 할 다음 단계는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페터 제흐가 역설한 것처럼, 대만은 브랜드 가치를 올리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어요. 디자인 핀도 그 노력의 한 부분이라 볼 수 있죠. 대만의 우수한 디자인을 증명하는 동시에 대만의 젊은 브랜드를 소개하면서, 각 브랜드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디자인 핀은 입장료가 없어요. 누구나 공짜로 와서 마음껏 참신한 아이디어 제품을 보고 구미가 당기면 일상으로 가져갈 수도 있는, 말 그대로 ‘Life can be design’을 실천하고 있는 스토어예요.
#3. 옛 목욕탕에서 즐기는 ‘북 배스(Book bath)‘ - 낫 저스트 라이브러리
디자인 핀 데스크에서 타이완 디자인 뮤지엄, 낫 저스트 라이브러리 티켓을 합쳐 50위안에 구매할 수 있어요. ⓒ시티호퍼스
그런데 정작 입장료를 받는 곳은 따로 있어요. 2만권의 디자인 서적으로 가득찬 도서관, 낫 저스트 라이브러리예요. 도서관인데 돈을 내라니 의아한 생각이 들겠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게 될 거예요. 일반적인 도서관의 형태를 벗어난 독특한 구성으로 되어 있거든요. 게다가 흘륭한 작업 공간도 되죠. 작은 소리라도 낼까 조심해야 하는 엄숙한 도서관과 달리, 재즈 음악이 흐르는 자유분방한 분위기 속에서 책을 읽고 노트북을 두들기는 사람을 볼 수 있어요. 그럼 그 안으로 들어가 볼까요?
북 배스 ⓒ시티호퍼스
영화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 ⓒTDRI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신은 뒤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공간은 북 배스, ‘책 탕’이에요. 이름이 특이하다고요? 낫 저스트 라이브러리는 이름처럼 그냥 도서관이 아니에요. 과거 80년 동안 담배 공장의 여직원들이 사용하던 공동 목욕탕을 도서관으로 개조한 거죠. 몸에 물을 끼얹고 비누칠을 했던 공간은 더 넓게 확장해 책을 읽는 공간이 되었고요. 중앙의 텅 빈 공간은 강연과 콘서트, 드로잉 워크샵 등이 열리는 커뮤니티의 장으로 변신하기도 해요.
계단을 내려가면 배스하우스, 대중목욕탕이 나타나요. 이곳 역시 옛 목욕탕의 흔적을 남겨뒀어요. 오히려 북 배스보다 더 생생하게, 긁힌 콘크리트 벽, 일제 지배 시대의 타일과 창문 문양, 환기 테라스 등을 그대로 간직해두었죠. 중앙에 커다란 반원형 무대가 보이나요? 과거의 반원형 목욕탕인데, 이곳 역시 다양한 이벤트가 열리는 공간으로 구성했어요.
배스하우스 ⓒ시티호퍼스
ⓒ시티호퍼스
ⓒ시티호퍼스
이 반원형 무대의 뒷편은 작은 전시장이 되기도 해요. 왜 도서관에 가면 회원 카드와 대출증을 발급하잖아요. 낫 저스트 라이브러리는 여기에 착안해 카드를 만들고, 이 카드를 크리에이터들의 추천서로 만들었어요. 크리에이터들이 자필 서명과 추천하는 책 이름, 출간 연도 등을 적은 카드를 반원형 욕조 뒷편에 꽤 오랜 기간 전시했죠. 누가 어떤 책을 추천했는지 확인하는 재미도 쏠쏠하고, 유명인과 독서 취향을 공유하며, 시공간을 넘어 생각을 연결하도록 유도한 의미있는 프로젝트였어요.
ⓒTDRI
ⓒTDRI
낫 저스트 라이브러리는 다양한 의자 형태와 열람석, 잔잔하게 흐르는 배경 음악, 수시로 열리는 문화 이벤트 등 도서관의 틀을 벗어나 버려요. 창작자와 대중을 연결하고 영감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도서관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죠. 복합 문화 공간이나 코워킹 스페이스처럼요.
그래서 다양한 쓰임을 가진 만큼 다양한 목적으로 와도 좋아요. 책을 읽으려고, 개인 작업을 위해, 혹은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찍기 위해서라도 말이에요. 게다가 입장료도 겨우 50위안(2,250원)에 불과해요. 이 티켓 한 장만 있으면 타이완 디자인 뮤지엄까지 같이 둘러볼 수 있죠. 단돈 2,000원에 누리는 공공시설의 미학이에요.
창조를 견인하는 ‘낡음’의 힘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의 수상작을 전시하는 레드닷 디자인 뮤지엄. 독일 에센에 문을 연 이 뮤지엄은 원래 오래된 탄광 공장이었어요. 싱가포르 마리나 베이에 자리한 레드닷 디자인 뮤지엄 역시 1920년대 지어진 교통 경찰청이었죠. 그리고 담배 공장의 역사를 간직한 송산문화창조단지까지. 왜 독일, 싱가포르, 대만의 오래된 공간은 문화 예술의 메카로 탈바꿈한 걸까요?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페터 제흐 회장의 말을 들어볼게요.
"완벽한 창조는 없듯 무에서 만들어지는 혁신은 없습니다. 낡은 건물에 최신의 디자인을 추가하면 감각과 새로운 활력이 생기고, 사람들이 찾아오는 드라마가 펼쳐집니다."
송산문화창조단지는 그의 말에 딱 들어 맞는 곳 중 하나예요. 단순히 낡은 건물을 활용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과거의 맥락까지 담아냈죠. 담배 공장의 창고에서 쓰였던 철은 디자인 핀의 선반으로 재생됐고, 이 선반은 골든 핀 디자인 어워드를 상징하는 금색으로 새롭게 칠해졌어요. 공장 여직원들이 퇴근하기 전 몸에 달라붙은 담뱃재를 씻어내던 목욕탕을 리모델링한 낫 저스트 라이브러리는, 오늘날 책에 영혼을 담그고 복잡한 생각의 재를 털어내는 공간으로 변모했고요.
ⓒTaiwan Designers' Week
타이완 디자인 뮤지엄은, 디자인 핀은, 낫 저스트 라이브러리는 그렇게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요즘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고 있어요. 과거의 정신 속에서 새로운 영감의 씨앗을 선물하고, 더 다양한 가치를 창출하도록 도와주면서 말이에요. 이 광활한 숲길에 사람들이 찾아오는 드라마가 펼쳐지는 이유는 바로 그래서가 아닐까요?
Reference
• 紅點設計博物館進駐台灣松菸,獨家專訪設計奬總裁Peter Zec, Chienwei Wang, MOT TIMES
• Taiwan's Design Power, Wang Wan-chia, Taiwan Panorama
• 松菸古蹟澡堂變身「不只是圖書館」! 新鮮書澡堂、神秘小花園,還有2020年度新票券亮相, 洪雅筠, Shopping Desig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