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대한 존중에 지금을 입혀, ‘영원한 멋’을 만들다

비즈빔

2023.07.19

'미래 빈티지(Future Vintage)'


상반되는 두 단어를 함께 썼어요. 빈티지는 오래된 물건인데 여기에 미래를 붙이다니, 무슨 뜻일까요? 남의 손을 타면서 이미 멋이 난 오래된 패션을 사는 것이 빈티지한 라이프스타일을 즐기는 거예요. 반면 미래 빈티지는 입는 사람과 함께 ‘잘 낡을 수 있는’ 옷을 만들고, 직접 자신만의 빈티지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의미해요.  


미래와 빈티지의 조합이 ‘비즈빔’의 철학을 가장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말이에요. 이러한 지향점을 가진 비즈빔을 이해하기 위해선 이 브랜드의 수장이자 디자이너인 ‘나카무라 히로키’를 알아야 해요. 1971년생인 그는 15살이 되던 해, 부모님의 권유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요. 그가 스스로 고른 곳은 다름 아닌 ‘알래스카’예요. 지금에서도 가기 어려운 곳을, 1980년대 중반에 15살의 학생이 선택한 거예요. 


그런데 이 결정이 그의 인생을 뒤바꿔 놓았죠. 비즈빔의 출발점이 되기도 했고요. 도대체 알래스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비즈빔 미리보기

 멋은 기본, 기능은 더 기본을 깨닫기까지

 알래스카의 추억 + 영국 팝 보이 밴드 + 일본 디렉터 = 비즈빔?

 오래된 멋을 지금으로 불러오는 3가지 방법

 논문을 발표하고 연구실을 세운 스트릿 패션 브랜드

 비즈빔을 설명하는 키워드, ‘미래 빈티지 라이프스타일’




오래된 부츠가 두 켤레 있어요. 한 켤레는 낡고 헤진 채로 딱딱하게 굳어 있어서 별로 신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다른 한 켤레는 달라요. 똑같이 오래 되긴 했지만, 왠지 윤이 나고 주인의 발에 맞게 길들여져서 세월의 힘이 느껴져요. 두 부츠 중에서 갖고 싶은 건, 당연히 시간의 흐름이 만든 멋이 깃든 부츠겠죠. 


똑같이 낡았지만 다른 힘을 가진 두 부츠. 비즈빔의 창업자 ‘나카무라 히로키’에게 어렸을 때부터 ‘멋’에 대한 화두를 던져준 물건이었어요. 이때부터 히로키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낡지 않는 힘을 가진 물건, 더 나아가서 그런 옷과 신발을 만들고 싶어했어요. 그렇게 어린 시절의 부츠에서 영감을 받아, ‘영원히 신는 신발’이라는 모토를 가지고 2001년에 비즈빔 브랜드를 시작하게 되죠.


출발점에서 알 수 있듯 비즈빔은 시간이 깃든 멋에 집중하는 브랜드예요. 공장에서는 재현할 수 없는 멋을 추구하는 거예요. 이러한 정체성 때문에 존 메이어, 칸예, 트래비스 스캇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셀럽들이 비즈빔의 광팬을 자처할 정도로 컬트적인 팬층을 보유하고 있어요.


레전드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은 도쿄까지 직접 찾아와서 한 시즌 컬렉션을 몽땅 쓸어가기도 했어요. 심지어 BTS의 RM이 비즈빔 옷을 구하려고 한국에서 직접 중고 거래를 했다는 일화도 유명하죠. 이렇게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히로키의 비즈빔은 어떻게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힘을 가진 멋을 만드는 걸까요?



칸예, 존 메이어, 트래비스 스캇, 에릭 클랩튼, RM ©Complex ©Koreaboo ©PAUSE Online ©Pinterest ©데일리패션뉴스



멋은 기본, 기능은 더 기본을 깨닫기까지

비즈빔이라는 브랜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브랜드의 수장이자 디자이너인 나카무라 히로키를 알아야 해요. 1971년에 태어난 그는 도쿄에서 몇 시간 떨어진 고후라는 시골 동네에 살면서 자연을 좋아하는 소년이 됐죠. 그러면서도 직물 제조업에 종사하며 옷을 좋아하셨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패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나카무라 히로키 ©Visvim


어린 히로키는 당시 80년대 일본 패션 씬(Scene)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미국 문화를 일본식으로 받아들인 ‘아메카지’를 좋아하면서 미국에 대한 동경을 키워나갔죠. 14살부터는 틈만 나면 빈티지 숍들을 돌아다니면서 미국의 데님과 항공 점퍼들을 찾아다닐 정도였어요. 그러면서 빈티지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었죠. 이 과정에서 앞서 설명한 두 부츠도 보게 된 거고요. 유복한 집안, 큰 키, 잘생긴 외모, 눈에 띄는 패션 덕분에 히로키는 어렸을 때부터 ‘도련님’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어요.


패션과 자연을 좋아하던 도련님이 15살이 되던 해, 부모님께서 더 큰 세상을 보라며 유학을 권했어요. 부모님은 유학 장소를 히로키에게 직접 정하라고 했죠. 자연을 좋아했던 히로키는 뜬금없이 알래스카를 선택해요. 날 것의 자연이 살아있으니까 자신이 좋아하는 캠핑과 여행을 많이 할 수 있겠다는 이유로 오지인 알래스카를 고른 거죠. 놀랍게도 부모님도 딱히 반대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도련님의 알래스카 유학 생활이 시작됐어요.


알래스카에 도착한 히로키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열심히 찾아낸 미국 데님과 빈티지 옷으로 꾸미고 다녔어요. 일본에서 그랬듯이요. 하지만 알래스카 사람들은 이런 모습에 아무런 감탄도, 반응도 하지 않았죠. 히로키는 자신의 멋이 무시당한 것 같아 충격을 받았지만 여전히 멋을 부리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어요.


친구들과 떠난 스노우보딩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히로키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색감을 맞춰 멋을 냈어요. 하지만 추위를 견딜 수 없어 스키복을 사러 친구들과 쇼핑을 가게 됐죠. 그는 어떻게든 기존의 옷과 어울리는 디자인의 옷을 찾으려고 온 매장을 다 돌아다녔어요. 반면 친구들은 색감이나 멋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스노우보드를 타기에 적합한 소재, 봉제, 스타일의 옷을 골랐어요. 


히로키는 친구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어요. 옷이 단순히 멋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특정한 목적에 따라 기능을 달리하는 도구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가치관을 가지게 됐죠. 옷을 대하는 새로운 관점이 열리면서 멋만 알았던 도련님이 기술자의 마인드도 가지게 된 거예요.


이후 히로키는 옷이 가질 수 있는 기능성을 이해하기 위해 스노우보더 기능성 의류 브랜드인 ‘버튼 스노우보드 (Burton Snowboard)’에 디자이너로 입사했어요. 그곳에서 8년간 경험을 쌓았어요. 이를 바탕으로 아름다움과 기능성이 뒷받침된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비즈빔을 시작했죠.


비즈빔이라는 브랜드명을 지은 스토리에서도 히로키의 자유분방한 성격을 알 수 있어요. 딱히 특별한 뜻을 두지 않고 단순히 V가 들어간 단어가 멋있다고 생각해서 라틴어 Vis와 Vim을 합쳐서 만든 거예요. 굳이 뜻을 찾기 위해 라틴어 사전을 보면 ‘vis’는 ‘원한다’, ‘vim’은 ‘힘’을 뜻해요. 그래서 ‘힘을 원한다’라는 의미로 해석해볼 수는 있지만, 히로키는 그것보다는 V라는 알파벳이 주는 힘과 미감에 더 초점을 맞췄어요.



알래스카의 추억 + 영국 팝 보이 밴드 + 일본 디렉터 = 비즈빔

비즈빔은 처음에, 지금처럼 종합 패션 브랜드가 아니라 신발 브랜드로 시작했어요. 부츠에서 빈티지의 멋을 깨우쳤던 히로키에게는 당연한 시작점이었죠. 그런데 처음 출시한 신발이 대히트를 쳤어요. 지금은 전설의 반열에까지 올랐죠. 바로 비즈빔의 ‘FBT’예요. 이 신발의 탄생 배경도 흥미로워요. 히로키가 아니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던 아이템이죠. 



FBT ©Visvim


히로키가 버튼 스노우보드에서 일하던 당시, 일본 스트릿 패션계의 대부이자 프라그먼트 디자인의 수장 후지와라 히로시를 만나게 됐어요. 이름도 비슷한 두 사람은 뜻이 맞아 금방 친해졌고 온라인 커뮤니티를 만들어 자주 교류했죠. 그러던 어느 날 히로시가 영국 밴드 Fun Boy Three의 LP의 앨범 커버를 보여주면서 그룹의 보컬인 테리 홀이 신고 있는 모카신 같은 신발을 만들어보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했어요.



가운데 모카신을 신고 앉아 있는 테리 홀 ©Amazon


이 말을 들은 히로키는 알래스카 유학 당시 봤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모카신을 떠올렸어요. 그리고 한 장의 가죽으로 어퍼부터 밑창까지 만드는 모카신의 편안한 착용감에 주목하고 자신만의 모카신을 만들기로 마음먹었죠. 이후 모카신에 대해 연구하는 과정에서 과거 버튼 스노우보드에서 일할 때 친해졌던 업체 관계자에게 순록 스웨이드가 모카신에 쓰인다는 얘기를 듣게 돼요. 


순록 스웨이드라는 소재에 꽂힌 히로키는 단숨에 핀란드로 날아가 순록을 찾아 헤매요. 그런데 추운 날씨 때문에 발에 동상이 걸리기 직전까지 간 히로키에게 핀란드 전통 마을의 한 여성이 순록 가죽 모카신을 뚝딱 만들어줬어요. 그는 부드러운 순록 가죽을 사용해서 발의 모양에 맞추고 보온성을 위해 지푸라기를 넣어 만든 모카신을 신고 감동했어요. 이를 계기로 히로키는 모카신의 기능과 특성을 몸으로 이해하게 돼죠.



나카무라 히로키 모카신 콜렉션 ©Visvim


이후에도 히로키는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모카신을 수집했어요. 과거에 원주민들이 살았던 환경에 따라서 조금씩 달라지는 모카신의 구조에 집중했죠. 특히 평원이나 돌이 많은 지역에서 살았던 원주민들이 모카신 바닥에 단단한 가죽을 여러겹 덧댄 것을 보고 현대 사회에 모카신을 적용하는 방법에 힌트를 찾게 돼요. 그러고는 모카신에 쓰이던 엘크와 순록 가죽 어퍼는 유지하면서 폴리우레탄 아웃솔을 달고 아스팔트에도 적합한 기능까지 담은 신발의 뼈대를 완성시켜요.


기능적인 측면에서 전통 모카신의 장점과 현대 기술의 장점을 섞은 히로시는 모카신을 디자인적으로도 새롭게 접근해요. 대개 모카신에는 전통 장식이 달려있어요. 머리카락처럼 신발 전체를 두르고 있는 장식은 특유의 에스닉한 멋을 보여주긴 하지만 요즘 사람들에게는 거추장스럽거나 부담스러울 수 있어요. 그래서 이 부분을 탈부착할 수 있도록 디자인을 변경했어요.



FBT 프로토타입(좌)과 출시 제품(우) ©Visvim


이렇게 히로키가 1순위로 여겼던, 오래된 멋을 지키면서도 지금에 맞는 기능성과 스타일을 갖춘 신발이 완성됐어요. 그러고는 히로시가 보여준 밴드인 Fun Boy Three의 이름을 따서 FBT라는 이름을 붙였죠. FBT는 시간이 흐르면서 사용자의 발에 맞게 늘어나는 모카신 특유의 편안함과 멋으로 대중의 인기를 끌었어요. 또 아웃솔이 다 닳더라도 교체할 수 있어서 내 발에 맞게 늘어난 가죽 어퍼를 계속해서 신을 수 있었고요. ‘영원히 신는 신발’이라는 히로키의 이상을 실제로 만들어낸 거예요. 이 제품으로 시작한 비즈빔은, 지금은 일본에만 51개 매장에 입점해 있고 23개국에 매장이 있을 만큼 큰 인기를 끄는 브랜드가 됐죠.



오래된 멋을 지금으로 불러오는 3가지 방법

히로키는 2001년부터 지금까지 20년이 넘는 시간동안 비즈빔을 이끌었어요. 그 과정에서 여러 옷들과 신발들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어요. 전통과 빈티지에서 얻은 영감을 패션에 활용하는 비즈빔만의 방식을 정리해보면 크게 3가지로 요약할 수 있어요.


첫 번째는 과거의 제조법을 그대로 재현해서 소개하는 방법이에요. 비즈빔의 제품 중 도테라 코트는 일본의 전통 의복인 기모노와 미국 밀리터리 봄버 자켓의 디자인을 섞어서 제작한 제품인데요. 기모노 형태로 동양적인 멋을 내고 봄버 자켓처럼 충전재를 더해서 보온성을 챙겼죠. 흥미로운 점은 보편적으로 쓰는 충전재인 깃털이나 합성 소재 대신 실크를 가공한 일본 전통 소재인 ‘마와타’를 사용했다는 거에요.


마와타의 경우 극악의 공정을 가지고 있는 비효율적인 소재에요. 실크를 이용해 만들기 때문에 누에고치부터 제조 과정에 포함돼요. 우선 수작업으로 모든 누에고치를 물에 불리고 불순물을 제거해요. 그리고 누에고치를 하나하나 손으로 펼쳐서 섬유를 살리고 건조시키죠. 그 후 건조된 실크 섬유를 층층이 쌓고 다림질로 눌러서 솜 같은 텍스처를 만들어내요. 이렇게 폭신하게 만들어진 마와타는 단열을 위한 충전재로 쓰여요.


물론 오리털이나 거위털을 사용하는 다운 자켓에 비하면 보온성은 떨어질 수 있어요. 하지만 부피가 작아서 기모노의 전통적인 실루엣을 지킬 수 있는 소재죠. 이런 특성이 있어 실크 가격도 높고 까다로운 공정까지 거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와타를 사용했어요. 전통 의복의 외형뿐만 아니라 과거의 제조법까지 그대로 재현한 제품이라고 할 수 있어요.



도테라 코트 ©Visvim



마와타 공정 ©Visvim


두 번째는 빈티지의 요소를 현대 의상에 부분적으로 적용하는 방법이에요. 빈티지의 원형을 대중이 소화하기 어려운 경우에 사용해요. 비즈빔의 옷들은 아메리카 원주민, 미국의 극보수주의 기독교 집단인 아미쉬, 핀란드의 원주민 수오미족 등 세계 각국의 전통 의상을 참고해 만들고 있어요. 이들의 전통 의상은 화려한 무늬와 색감을 지니고 있고, 추위나 더위 같은 극한의 환경을 이기기 위해 디자인한 경우가 많아서 그 형태 그대로 도시인들이 입기엔 어려움이 있어요.


이런 경우에는 그 요소들을 부분적으로만 적용해요. 비즈빔의 다양한 셔츠와 티셔츠가 이러한 방식으로 제작되고 있어요. 팔꿈치, 앞가슴 혹은 밑단에 다양한 전통 원단을 덧대어 전통 소재를 부분적으로만 활용하는 거죠. 그런데 그 깊이감이 달라요. 기계로 모양만 어설프게 프린팅하는 게 아니라 전통 방식 그대로 만들 수 있는 장인들을 찾아 옷의 일부로 쓰일 원단과 패치 장식을 제작하거든요. 이처럼 지금에 맞게 빈티지를 변화시키면서도 그 전통을 존중하는 태도를 지키고 있죠.



©Visvim


마지막 방법은 빈티지를 오마주한 외형에 현대의 기술력을 적용해 한 단계 진화시키는 방식이에요. 비즈빔의 시작점인 FBT 신발도 이 방법을 적용한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죠. 또 다른 제품을 살펴보자면, 스트레블러 다운 자켓이 있어요. 


오토바이를 사랑하는 라이더들 사이에는 라이더 패션의 근본 아이템으로 알려진 Perfecto Leather Jacket이 있는데요. 앞으로 몸을 숙이고 운전을 해야하는 오토바이의 특성상 지퍼가 몸 중앙에 달린 일반적인 자켓은 라이딩할 때 불편해요. 지퍼가 저절로 내려가기도 하고요. 이러한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몸의 중심에서 살짝 빗겨 지퍼를 달고 몸에 딱 맞는 핏으로 만들었어요. 특히 빠른 속도로 라이딩할 때 강하게 부는 바람을 막아주고 사고가 날 경우에 보호력도 갖춰야 하기 때문에 두꺼운 말가죽으로 제작했죠.



(좌) 오리지날 Perfecto Leather Jacket 원판 ©SCHOTT NYC / (우) 스트레블러 다운 자켓, 지퍼와 리벳, 벨트의 위치가 똑같은 걸 볼 수 있다 ©Visvim


이 자켓은 장점만큼이나 단점이 있어요. 무겁고 착용감이 불편한데다가 몸에 맞춰지기까지 너무 긴 시간이 걸린다는 거죠. 히로키는 이 점을 현대의 소재로 해결했어요. 기존 자켓의 디자인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주 소재를 말가죽에서 나일론/면 혼방 원단으로 바꿨어요. 이 원단은 고어텍스 같은 하이테크 원단이 없던 1970년대 미국의 아웃도어 패션을 지배했던 원단이에요. 그리고 다운 소재를 충전재로 사용해서 경량성과 보온성까지 모두 챙겼어요. 


시간이 지나도 라이더들에게 꾸준히 사랑받는 디자인을 지키면서도 사용자의 편의성을 극대화하는 기능성까지 두루 갖춘 한 단계 진보한 형태의 제품이라고 할 수 있어요. “빈티지는 오래된 제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히로키의 디자인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고요.



논문을 발표하고 연구실을 세운 스트릿 패션 브랜드

비즈빔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Dissertation’ 이라는 꼭지가 있어요. 직역하면 ‘논문’이라는 뜻인데요. 도대체 패션 브랜드가, 심지어 예술적인 패션쇼용 옷을 만드는 것도 아닌 스트릿 브랜드가 왜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서 이 꼭지를 소개하고 있는 걸까요?



공식 홈페이지의 Dissertation 페이지 화면 ©Visvim


이 꼭지에 있는 ‘논문’들은 사실 정식으로 학계에서 인정을 받은 논문들은 아니에요. 히로키가 옷을 만들면서 찾은 다양한 영감들을 아카이빙한 저장소죠. 매 시즌, 매 컬렉션마다 주된 테마로 쓰인 소재나 전통 기법들을 알게 된 경로와 어떤 부분에 집중해서 아이템들에 활용했는지를 알아볼 수 있어요. 한 번 간단하게 둘러볼까요?


처음 살펴볼 기법은 코치닐 염색이에요. 모카신을 모티브로 한 FBT로 첫 성공을 이룬 히로키는 아메리카 원주민 문화를 더 깊이 탐구하고 전통 모카신을 수집하기 위해 뉴멕시코로 여행을 떠났어요. 이 때 나바호 족 보호 구역에서 모카신과 나바호 전통 물품을 5대째 판매하는 ’Shiprock Santa Fe’ 의 후계자인 제드 파우츠를 만나게 되죠. 두 사람은 함께 여행을 하면서 다양한 나바호 족의 전통 기술을 배웠고, 그 중에서 코치닐 벌레를 활용하는 전통 염색 방식에 꽂혔죠.


코치닐 벌레로 만드는 염료는 특유의 톤을 가진 붉은색을 내요. 히로키는 이 색에 빠져서 1kg의 안료를 얻기 위해 8~10만마리에 달하는 코치닐 벌레를 사용했죠. 이 붉은색을 사용한 제품들이 비즈빔의 시그니처가 되기도 했고요. 사실 이렇게 들으면 ‘징그러워서 그 옷을 어떻게 입지?’ 라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사실 이 코치닐 벌레는 우리가 먹는 딸기우유의 색소로도 쓰이는 연지벌레예요.



(좌) 코치닐 염색 자켓 ©Grailed / (우) 코치닐 염료 ©Smithsonian Magazine


코치닐 염색도 멋있지만 비즈빔에서 가장 유명한 염색 기법은 머드 다잉이에요. 일본에서는 도로조메라고 부르는 머드 다잉은 에도 시대 중기부터 이어져오는 일본의 전통적인 염색 기법이죠. 특유의 색감을 살린 염색을 위해서는 철분 성분이 많이 함유된 진흙이 필요해서, 일본에서도 일부 지역에서만 전통이 이어지고 있어요. 그 중 화산이 있는 아마미오 섬에서는 이 방식으로 오시마 명주라는 고급 전통 원단을 제작하고 있어요.


이 기술은 원래 원사 즉, 실을 염색하는 기법이지만 히로키는 완성된 의류 전체를 염색하는 방식으로 활용했어요. 이를 통해 침지, 건조, 헹굼 과정에서 제품에 자연스럽게 생기는 구김과 데미지로 빈티지한 멋이 나는 효과를 노린 거예요. 이렇게 자연적인 염색 과정을 통해서 생기는 우연성을 비즈빔에서는 ‘와비사비‘ 효과라고 불러요. 와비사비는 일본어로 ‘어떤 사물이든 그 자체만의 미학이 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이 철학을 바탕으로 비즈빔은 제품 간의 염색과 상태의 편차도 각각의 자연스러운 멋이라고 소개해요.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비즈빔 패션의 진흙 염색은 노자키 장인 한 명이 맡아왔어요. Dissertation 페이지에 가면 묵묵히 모든 옷을 손수 염색하는 장인의 모습을 볼 수 있죠. 완성품을 염색하기 때문에 기계를 활용하지 못하고 모든 과정을 손으로 진행해야 해요. 진흙과 물을 머금은 무거운 옷을 손과 브러쉬로 하나하나 헹구는 과정에서 전통의 가치를 새기는 거죠. 그래서 일부 제품 중에서는 스냅 버튼에 진흙이 가득 차 있거나, 지퍼에 진흙이 껴있었다는 후기도 종종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이러한 부분까지도 비즈빔의 팬들은 하나의 자부심으로 생각하죠.



머드다잉 ©Visvim


마지막으로 소개할 논문은 Social Sculpture 데님이에요. 데님은 여러 브랜드에서 쓰는 소재죠. 영원한 젊음으로 마케팅되는 에버그린 소재이기도 하고요. 사실 데님은 미국의 노동자들을 위해 개발된 소재예요. 면사를 염색하고 단단하게 엮어서 거친 노동을 해도 오랫동안 입을 수 있는 튼튼한 옷을 만든 거죠. 리바이스에서 데님을 본격적으로 생산했고, 지금까지도 리바이스 빈티지 청바지는 인기를 끌고 있어요.


히로키는 어렸을 때 용돈을 모아 처음으로 샀던 빈티지 리바이스 청바지의 느낌을 재현하고 싶어했어요. 염색 기술이 발전하기 전에 만들어진 빈티지 청바지는 요즘의 청바지와 비교했을 때 염색이 균일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 덕분에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바지를 가질 수 있죠. 게다가 입으면서 점점 염료가 빠지고 주름이 생기는 등 시간이 주는 멋이 있었죠. 


그는 이 빈티지함을 구현하고자 했어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미 너무 발전해버린 기술로는 빈티지의 자연스러운 페이딩을 살리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빈티지 리바이스를 하나하나 뜯어보면서 씨실과 날실을 분석했어요. 한 올 한 올 실의 색상과 원단이 짜여진 구조를 분석한 거예요.



Social Sculpture Denim 원단 ©Visvim


원단의 구조를 파악한 후에는 염색 방식도 전통 방식을 따랐어요. 1880년대 독일에서 화학 인디고 염색법이 발명되기 전부터 일본에는 청색을 내는 아이조메 염색법이 있었어요. 자연에서 추출한 인디고 잎을 발효시킨 안료를 사용해 수작업으로 청색을 만들어내는 방식이에요. 히로키는 데님에 쓰일 원사를 이 방식으로 염색해서 청바지에 자연스러움을 극한으로 끌어올렸어요.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어요. 그가 생각하는 최상의 데님을 위해 준비한 실들을 엮으면서 원단을 만들어냈죠. 한 가닥씩 해체하며 준비한 소재를 다시 하나하나 엮어나가는 과정이 마치 조각품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여긴 히로키는 이 청바지에 Social Sculpture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입는 사람에 따라 변화가 다르게 일어난다는 점이 특징이죠.


히로키는 이 바지를 구매하는 것이 ‘이 옷을 만드는 시작점’이라고 설명해요. 아래 이미지를 보면 세 바지 모두 같은 바지이지만 가장 왼쪽의 바지는 히로키 본인이, 나머지 두 바지는 비즈빔의 광팬이자 기타리스트인 에릭 클랩튼이 입은 바지에요. 분명 입기 시작한 시점에는 같은 바지였지만 두 사람이 보낸 시간에 따라 완전히 다른 바지로 바뀌면서 세상에 하나 뿐인 청바지가 완성된 거예요.



나카무라 히로키(좌)와 에릭 클랩튼(가운데, 우)의 데님 비교 ©Visvim


비즈빔의 매장에서도 자연스러운 멋에 대한 철학을 발견할 수 있어요. 히로키는 사람들의 인식과 취향이 획일화 되고 패션 매장들의 인테리어나 감도마저 비슷해지는 현상에 안타까움을 느꼈어요. 또한 기계화된 공장에서 찍어내는 옷들에 대해서도 아쉬워했죠. 품질의 편차는 줄어들었지만 자연스러운 차이에서 오는 멋을 포기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낡은 트레일러를 개조해 비즈빔의 팝업 스토어인 ICT(Indigo Camping Trailer)를 만들었어요. 오래된 트레일러 자체가 주는 임팩트와 함께 내부 전체를 자연스러운 멋을 내기 위해 만든 전통 인디고 데님으로 꾸며 놓았어요. 사람의 손길이 닿아서 편차도 있고 조금은 틀어진 것처럼 보여도 그 고유의 멋을 전달할 수 있는 제품들만 판매하는 것이 컨셉이에요. ICT는 자신의 취향보다는 다른 사람의 평가에 더 신경 쓰고 패션에서도 정답과 공식을 찾으려는 요즘 세대들에게, 오류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색을 찾는 방식을 보여주는 ‘움직이는 비즈빔’인 셈이에요.



ICT ©The New Order Magazine / ICT 스토어 ©ArchivePDF


이렇게 다양한 기법과 소재들을 탐구하는 히로키의 ‘논문’들을 모아 놓은 공간도 있어요. 바로 Free International Lab인 ‘F.I.L’이에요. 전통과 현대, 문화와 문화를 섞으면서 연구한 내용들을 보여주기 위해 만든 일종의 연구실이죠. 이곳에서는 히로키에게 영감을 준 다양한 전통 문화와 일본 특유의 장인 정신을 보여주고 있어요.


이 공간을 조성할 때도 히로키는 탐구 정신을 발휘해요. 여러 전시회들을 관람해보고 자신이 가장 감동 받았던 공간을 설계한 건축가에게 디자인을 맡겼죠. 또한 옷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 아무런 배경음악도 틀지 않고요. 시부야에서 시작한 이 연구실은 점차 센다이, 카나자와, 히로시마, 교토, 나고야까지 늘어났어요. 



F.I.L ©Visvim


트렌드처럼 우후죽순 생기는 플래그쉽 스토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히로키는 명시적으로 플래그쉽 스토어와는 다른 개념이라고 강조하고 있어요. 그가 의류를 대하는 자세와 의류 하나하나를 고안해내고 제작하는 과정을 전시하는 갤러리라고 설명하죠. 그래서 이 공간을 둘러보면 비즈빔의 철학과 제품들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어요.



비즈빔을 설명하는 키워드, ‘미래 빈티지 라이프스타일’

패션계의 한 획을 그은 브랜드를 20년 넘게 이끌고 있는 히로키지만, 다른 패션 브랜드에는 관심이 없어요. 다른 브랜드들은 물론이고 디자이너들의 이름조차도 모르고, 알고 싶은 생각도 없다고 말하죠. 옷도 비즈빔 옷만 입고요. 트렌드나 셀럽 등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아요. 이 옷이 잘 팔릴지, 어떻게 마케팅할지 고민하기보다는 그가 좋아하고 영감을 받는 것들을 옷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전달할 뿐이에요.



히로키 나카무라가 살고 있는 집 ©Financial Times


그런 그는 녹이 잔뜩 슨 53년식 포르쉐와 48년식 인디언 바이크를 타고 인적이 드문 숲 속의 작고 오래된 집에서 살아가고 있어요. 디자인을 위해 스케치를 할 때도 연필과 일본 전통 종이만 사용하죠. 자신이 좋아하는 옛 것들과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그의 라이프스타일엔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롭고 뚜렷한 자신만의 색깔이 있어요.



(좌) 53년식 포르쉐 ©YouTube ‘Type 7’ / (우) 48년식 인디언 바이크 ©Vogue France 


그렇다고 과거에만 혹은 한 곳에만 멈춰 있는 건 아니에요. 그는 일년에 1/3만 일본에서 머물러요. 집은 미국에 있고 유럽에 의류 소재 전시회를 보러 가는 게 일상이죠. 또한 여전히 빈 트렁크를 가지고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영감을 주는 민족들과 전통 의복들을 찾아다니고요. 그래서 ‘의류 인류학자’라는 별명도 붙었죠. 이렇게 쌓인 히로키의 경험과 과거에 대한 존중을 담아 지금의 감성을 섞은 비즈빔은 단순히 멋진 옷을 만드는 브랜드를 넘어서 과거와 함께하는 미래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고 있어요.


히로키는 여전히 디자인을 하는 과정에서 본인이 입고 싶은지, 또 오래 입을 수 있을지를 우선적으로 생각해요. 일상 속에서도 자신이 만든 청바지들을 직접 입고 시간에 따른 변화를 실험해보죠. 나이가 들어도 시간이 주는 멋에 대한 진지함을 잃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진정성 있는 비즈빔도 비판 받는 대목이 하나 있어요. 바로 가격이에요. 비즈빔이 너무 비싸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히로키는 이렇게 대답해요.


"같이 나이 들고 같이 시간을 보내며 스토리가 생기는 물건을 만드는 것이 비즈빔의 목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섬유, 좋은 원단, 좋은 구조로 만들어진 옷이 필요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가격이 높아지는 것이다. 다만, 이런 옷을 구입하고 함께 낡아가는 경험을 할 수 있다면 고객은 더 큰 효용을 얻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GQ 매거진 인터뷰 중


그러면서 ‘미래 빈티지(Future Vintage)’라는 개념을 제안해요. 남의 손을 타면서 이미 멋이 난 오래된 패션을 사는 것이 빈티지한 라이프스타일을 즐기는 거라면, 미래 빈티지는 입는 사람과 함께 ‘잘 낡을 수 있는’ 옷을 만들고 직접 자신만의 빈티지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의미해요. 상반되는 두 단어의 조합인 미래 빈티지야말로 비즈빔의 철학을 가장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말일 거예요. 앞으로 비즈빔이 선보일 제품들이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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