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매장의 중심에는 커피를 내리는 푸어오버 도구, 에스프레소 기계, 생맥주 탭이 있어요. 전형적인 카페 겸 바의 모습이에요. 그런데 여기, 카페도, 바도 아니에요. 커피는 취급도 하지 않죠. ‘왕티 랩(Wangtea Lab)’이라는 이름의 ‘찻집’이에요.
실제로 메뉴판을 보니 수십 가지의 차를 판매해요. 그런데 메뉴판도 수상해요. 익숙한 차부터 생소한 차까지 다양한 차를 판매하면서도, 차에 대한 설명이 없어요. 대신 각 차마다 숫자 몇 개를 적어 두었어요. 설명 한 줄 없이, 숫자만 적혀 있는데도 이 매장의 고객들은 기가 막히게 원하는 맛의 차를 골라내요. 차를 잘 모르는 젊은 고객이나 외국인 고객도요.
수상한 이 찻집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이런 찻집을 운영하는 것일까요? 더 중요한 건, 호기심 어린 눈을 장착한 젊은 고객들이 오래된 거리의 이 찻집으로 몰려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왕티 랩 미리보기
• 차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기준을 세우다
• 요즘의 음료 문화로 차를 우려내다
•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제 3의 장소’를 만들다
• 변화와 변질 사이, 헤리티지를 가꾸며 진화하는 법
푸드 페어링에도 실패하지 않는 조합이 존재해요. 치킨에는 맥주, 삼겹살에는 소주, 스테이크에는 레드 와인, 디저트에는 스위트 와인 등 이미 검증된 조합이 있죠. 그런데 최근 푸드 페어링의 공식이 달라지고 있어요. 전형적 조합을 넘어 점점 더 이색적인 조합이 생기고 있어요.
이런 흐름은 대만 타이베이도 마찬가지예요. 기존 푸드 페어링의 공식을 깨고, 의외의 케미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어요. 무려 80년 간 미국식 프라임 립 스테이크로 전 세계인들에게 사랑 받고 있는 레스토랑이 그 주인공이죠. 바로 ‘로리스 더 프라임 립(Lawry’s The Prime Rib, 이하 로리스)’의 타이베이 지점이에요.
로리스는 원래 미국 비벌리 힐스에서 시작되었지만 현재는 전 세계 주요 도시에 지점을 두고 있어요. 타이베이에는 2021년에 첫 지점을 냈죠. 이후 타이베이에서 본격적으로 인지도를 높이고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재밌는 프로모션을 고안했어요. 타이베이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대만의 문화에 딱 맞는 푸드 페어링을 활용해서요.
어떤 푸드 페어링이었을까요? ‘와인 잔’에 힌트가 있어요. 대부분 스테이크에 딱 맞는 궁합으로 ‘와인’을 가장 먼저 떠올리겠지만, 이 공식을 비틀었죠. 와인 잔에 와인이 아닌 대만의 ‘차’를 담아 내, 4가지 코스 요리를 선보였어요. 와인의 풍미를 풍성하게 느낄 수 있도록 돕는 와인 잔을 활용해 차의 풍미를 극대화해요. 여기에 단순히 차와 서양식 음식을 페어링한 데에서 그치지 않아요. 페어링하는 차도 음식과의 궁합을 고려해 새롭게 재해석했거든요.
식전주로는 가벼운 차를 한 잔 내어주는데, 탄산이 들어 있어 마치 식사 전 샴페인으로 입맛을 돋우는 듯한 효과를 내요. 다음 전채 요리에는 질소(N2)를 넣어 부드러운 질감이 일품인 ‘귀비홍 질소 차(貴妃紅氮氣茶)’를 페어링하고요. 메인 요리인 기름진 스테이크에는 콜드브루(Cold Brew) 용법으로 우린 ‘과일 철관음 차(果韻鐵觀音)’를 페어링하죠. 특유의 발효된 과일 향과 산미가 스테이크의 느끼한 맛을 잡아줘요.
ⓒLawry’s The Prime Rib
ⓒLawry’s The Prime Rib
ⓒLawry’s The Prime Rib
다음 메뉴에는 차를 페어링하는 것을 넘어 요리의 한 부분으로 활용했어요. 녹두 향이 나는 ‘벽라춘(碧螺春)’을 우린 찻물에 닭고기를 넣어, 은은하게 벽라춘의 향이 나는 치킨 스프를 개발했어요. 녹두와 닭고기는 식재료로서도 궁합이 좋아 자주 함께 사용되는데, 이 녹두를 식재료가 아니라 ‘향’으로 음미할 수 있죠. 신선하면서도 조화로운 미식 경험을 디자인한 거예요.
ⓒLawry’s The Prime Rib
서양식 요리와 대만의 차, 이 이색적인 조합은 타이베이 사람들의 취향을 저격해요. 여기에 음식의 특성을 고려해 약간의 변주까지 갖췄으니 금상첨화였죠. 그런데 제 아무리 스테이크 전문가라지만, 코스 요리의 각 메뉴에 어울리는 차를 페어링하고, 또 그 차를 각 메뉴의 특성에 맞게 변형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거예요. 게다가 타이베이 역사 깊은 대만의 차를 잘못 활용했다가는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어요. 차에 관해서라면 조예가 깊은 타이베이 사람들이니, 서투른 푸드 페어링을 시도했다가는 혹평을 받을 테니까요.
로리스와 대만 차의 성공적인 만남에는 숨은 공신이 있어요. ‘왕티(Wangtea)’라는 대만의 차 브랜드예요. 왕티는 13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오래되었다고 해서 과거에만 머물지 않아요. 브랜드의 헤리티지를 계승하면서도 현대적인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진화를 시도하거든요. 대표적인 예가 창립자의 5대손이 런칭한 ‘왕티 랩(Wangtea Lab)’이에요. 이름처럼 차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곳이죠. 말로만 실험실인 것이 아니라, 메뉴부터 공간까지 실험에 충실해요. 왕티 랩은 어떻게 대만 차 문화의 수명을 연장하고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내고 있을까요?
차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기준을 세우다
‘차(茶)의 왕국’이라고 불리는 대만은 차 생산도, 소비도 어마어마한 나라예요. 인구의 약 60%가 매일 차를 마실 정도로 차를 사랑하는 나라죠. 차에 대한 애정만큼이나 차와 관련된 비즈니스도 발달해 있어요. 19세기부터 차를 해외로 수출했고, 수십 년 동안 차 재배 및 무역의 중심지였죠. 왕티 본점이 위치한 다다오청(大稻埕)은 당시 대표적인 무역항이었어요. 다다오청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차를 구매하려는 상인들로 북적거렸다고 해요.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차 시장도 변했어요. 세대가 바뀌면서 차를 소비하는 방식이 달라지기 시작한 거예요. 여전히 전통적인 방식으로 차를 즐기는 기성세대와는 다르게, 젊은 세대는 커피와 같은 차의 대체재를 찾기도 하고, 버블티 같이 변형된 형태의 차를 선호하고 있어요.
왕티 창립자의 5대손, 제이슨 왕(Jason Wang)은 이런 시장의 변화를 위기가 아닌, ‘기회’로 생각했어요. 그는 시대의 변화를 피부로 느끼고 있었어요. 카페와 칵테일 바 주변은 밤낮없이 젊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반면, 오래된 찻집을 찾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었죠. 누군가는 차에 대한 수요가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제이슨은 사람들이 음료를 소비하는 패턴이 변화되었을 뿐 여전히 차 시장에는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어요. 바뀐 사람들의 패턴에 맞게 차가 진화한다면요. 이런 생각으로 문을 연 곳이 바로 왕티 랩이에요.
‘당신의 차를 해석하세요.(Decode your tea.)’
왕티 랩 매장 입구, 매대 등 곳곳에서 고객을 맞이하는 문구예요. 차를 해석하라니 이건 무슨 의미일까 싶은데, 그 실마리는 음료 메뉴판에서 찾을 수 있어요. 메뉴판에는 ‘어떻게 해석할까요?(How to decode?)’라는 문구와 함께 차의 맛을 구성하는 몇 개의 요소와 숫자 등이 적혀 있어요. 왕티 랩의 메뉴판은 차를 해석하고 마시는 데에 도움을 주는 가이드예요.
ⓒWangtea Lab
ⓒWangtea Lab
먼저 차를 ‘해석(Decode)’하라는 것에는 의도가 있어요. 차의 맛이나 종류 등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 고객들에게 보다 쉽게 차의 맛을 알려주기 위한 목적이에요. 메뉴판 첫 장에는 차의 맛을 구성하는 요소 ‘발효(Fermentation)’, ‘로스팅(Roasting)’, ‘강도(Strength)’에 대한 설명이 있어요. 고객들은 차의 종류를 선택하기 이전에, 차 맛을 구성하는 개념을 먼저 이해할 수 있어요. 발효, 로스팅, 강도는 각각 0부터 9까지 숫자로 표현되는데, 숫자는 ‘정도’를 나타내요. 이 말은 즉, 같은 종류의 찻잎이라도 발효, 로스팅, 강도의 정도에 따라 수백 가지의 조합이 나올 수 있다는 의미예요.
ⓒ시티호퍼스
예를 들어 ‘브라더후드(Brotherhood)’라는 차의 경우 차의 발효 정도는 0, 로스팅 정도는 2+3, 전체적인 맛의 세기는 2 정도예요. 여기에서 로스팅에서 2와 3이 더해진 이유는 2가지 차가 블렌딩되었기 때문이에요. 2 정도로 로스팅된 치종 우롱(奇種烏龍)차와 3 정도로 로스팅된 원산 바오중(文山包種) 차를 섞어 만든 차라는 의미죠. 메뉴판의 모든 차는 이런 식으로 3가지 기준과 각각의 정도를 나타내는 숫자로 해석되어 있어요. 덕분에 차를 잘 모르는 사람도 어렵지 않게 차의 맛을 추측하고 비교하며 취향에 맞는 차를 고를 수 있어요.
요즘의 음료 문화로 차를 우려내다
왕티 랩은 차의 맛을 구성하는 요소를 세분화해 차의 맛을 판단하고 고르는 객관적 기준을 세웠어요. 그야말로 차를 해석한 거죠. 이런 기준에 따라 전통적인 차를 전통 방식대로 우려 판매한다면, 아쉬울 거예요. 차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차를 소비하는 방식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거니까요. 왕티 랩의 진가는 여기에서 드러나요. 변화한 현대인들의 입맛에 맞춰 새로운 차 추출 방식을 연구하고 그에 따른 혁신적인 차 메뉴를 판매하거든요.
매장에 카페에서나 볼 법한 푸어오버(Pourover) 기구, 에스프레소 기계, 심지어 생맥주 집에서 사용하는 드래프트 탭(Draft tab) 등이 있는 이유예요. 왕티 랩은 커피, 맥주 등 사람들이 익숙한 음료를 제조하거나 서빙할 때 사용하는 방식을 차에 적용했어요. 그야말로 차 실험실다운 행보예요. 차 메뉴들도 ‘푸어 오버 시리즈’, ‘드래프트 시리즈’, ‘리브프레소 시리즈(Leavepresso Series)’ 등의 재치 있는 이름으로 구분해 두었어요.
ⓒ시티호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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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푸어오버는 커피를 핸드 드립으로 내릴 때 쓰는 방식이에요. 원래는 필터 지에 분쇄한 커피 가루를 넣고 뜨거운 물을 천천히 부어 커피를 내리죠. 왕티 랩에서는 분쇄한 커피 가루 대신 찻잎을 넣어 차를 핸드 드립으로 내려요. 리브프레소 시리즈의 경우 커피를 고압으로 추출한 에스프레소에서 따온 이름인데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찻잎을 고압으로 추출해 진하고 부드러운 차를 우려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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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드래프트 시리즈는 왕티 랩의 시그니처예요. 이산화탄소(CO2)를 주입해 탄산이 느껴지는 ‘스파클링 티’, 질소(N2)를 활용해 더 섬세하고 부드러운 풍미를 경험할 수 있는 티, 차로 만든 맥주 등 가장 파격적인 메뉴들이 여기에 속하죠. 드래프트 시리즈에 있는 메뉴는 만드는 방식 뿐만 아니라 서빙하는 방식도 독특해요. 차를 주문하는 즉시 마치 생맥주처럼 드래프트 탭에서 차를 내려주죠.
ⓒ시티호퍼스
ⓒWangtea Lab
그 외에도 대만의 추적 가능한(Traceable) 고품질 신선 우유로 유명한 ‘시안루팡(鮮乳坊)’의 우유나 ‘본소이(Bonsoy)’의 두유를 사용한 밀크티 메뉴들도 있어요. 심지어는 익숙한 티 메뉴의 변형을 벗어나 칵테일, 초콜릿의 영역까지 넘봐요. 갓 갈아서 추출한 생잎차에 우유로 만든 술을 섞어 칵테일을 만들고, 대만 초콜릿 브랜드 COTE와 찻잎이 들어간 초콜릿을 개발하기도 하고요.
ⓒ시티호퍼스
왕티 랩은 이처럼 젊은 세대가 음료를 소비하는 방식을 차에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경계를 넘나 들며 창의적인 차 메뉴를 개발해요. 그리고 특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수준급의 맛을 구현해 미각적인 만족도를 높이는 것을 기본으로 하죠. 하지만 이런 혁신적인 실험실을 자처하는 왕티 랩에게도 반드시 지키는 원칙이 있어요. ‘모든 음료에는 설탕과 토핑을 넣지 않는다’라는 원칙이에요. 왕티 랩의 목적이 다양한 세대가 차 ‘본연의 맛’을 더 새롭고, 다양하게 즐길 수 있도록 제안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왕티 랩의 실험이 변질이 아닌 진화인 이유이기도 하고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제 3의 장소’를 만들다
왕티 랩은 실험적인 차를 만드는 브랜드인 만큼, 매장 공간도 전통 찻집과는 사뭇 달라요. 단순히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인테리어로 분위기를 환기하는 정도의 일차원적인 이야기가 아니에요. 제이슨 왕이 왕티 랩의 매장을 구상하며 영감을 받은 공간이 있어요. ‘제 3의 장소’라 불리는 대표적인 사례, ‘스타벅스’예요.
제 3의 장소라는 개념은 미국의 도시사회학자 레이 올든버그(Ray Oldenburg)가 처음 만든 개념이에요. 제 1의 장소인 가정, 제 2의 장소인 일터 혹은 학교에 이어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리는 장소가 바로 제 3의 장소죠. 그는 그의 저서 <The Great Good Place>에서 동네에 있는 이발소, 서점, 카페 등 동네 커뮤니티 같은 공간을 제 3의 장소로 언급했어요. 이런 공간을 비즈니스적으로 가장 잘 구현한 사례로 손꼽히는 것이 바로 스타벅스고요.
제이슨도 왕티 랩으로 스타벅스 같은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기존의 조용하고 차분해서, 경직된 분위기마저 느껴지는 찻집이 아니라 사람들이 따로 또 같이 모여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제 3의 장소가 되고자 했죠. 그래서 그는 왕티 랩의 매장 공간을 전형적인 찻집이 아니라 왕티 랩만의 제 3의 장소를 만들어 나가요.
먼저 위치를 볼게요. 요즘 힙한 동네나 유동인구가 많은 거리에 있을 법도 한데, 의외의 동네에 있어요. 과거 대만 최대의 무역항이었지만 지금은 재래 시장 정도로 남은 다다오청에 위치해 있어요. 그리고 다다오청 지역에서도 1890년에 문을 연 왕티의 차 공장이자 본점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았어요. 제이슨은 130년을 쌓아온 왕티의 헤리티지와 현대적 감각이 만난 공간이라면,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의도적으로 왕티의 역사가 그대로 있는 자리를 선택한 거죠.
ⓒ시티호퍼스
ⓒWangtea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두 매장의 외관은 한눈에 봐도 대조적이에요. 왕티 차 공장이자 본점은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붉은 벽돌의 외관을 유지하고 있고, 그 옆 왕티 랩은 카페인 듯 칵테일 바인듯 모던한 디자인을 뽐내죠. 두 매장 사이에는 각각을 가리키는 화살표와 함께 ‘Something Modern’, ‘Something Classic’이라는 문구가 쓰여져 있어요. 왕티 랩 브랜드 로고에도 이런 의미를 담아냈어요. 검정색과 초록색 선들이 교차하는 알파벳 W는 과거와 현재, ‘세대 간의 교차와 융합’을 표현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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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 내부 공간에도 과거와 현대를 오가는 요소들을 찾아볼 수 있어요. 1층의 음료 제조 공간에 있는 천장 조명이 대표적이에요. 이 조명은 옛날에 왕티 공장에서 찻잎을 구울 때 사용하던 대나무 통의 뼈대를 활용해서 만들었어요. 과거의 재료에 새로운 용도를 부여해 왕티 랩만의 특별한 조명이 탄생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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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의 더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면, ㄷ자 형태의 공간이 있어요. 위치도 형태도 다소 뜬금없지만, 이 곳 역시 손님들을 위한 좌석이에요. 여기는 원래 100년 넘게 왕티의 차를 볶던 로스팅 룸이었는데, 그 형태를 보존해 과거의 온기를 담은 다실로 활용했어요. 로스팅 룸에 있던 붉은 벽돌로 의자를 만들었고, 조명과 그 주변에 걸린 천 조각도 모두 과거에 사용하던 재료를 활용한 것이고요.
ⓒ시티호퍼스
매장 2층에서도 과거와 현재의 교차 작용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붉은 벽돌 벽이에요. 여기저기에 금이 가고,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이 벽은 리모델링하기 전 건물의 벽을 그대로 활용했어요. 덕분에 다다오청과 어울리는 레트로한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었죠. 중앙의 기다란 테이블에서도 의도된 세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어요. 원래 이 건물의 창틀을 테이블 다리로 재활용해 새로운 쓸모를 찾았죠.
ⓒ시티호퍼스
왕티 랩이 찻 집을 ‘제3의 공간’으로 재정의하는 방식은 찻 집이 가지고 있던 고정된 이미지를 탈피하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았어요. 왕티가 130년 동안 쌓아온 브랜드의 유산이자, 정체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일이었죠. 덕분에 제 2의 스타벅스가 아니라 왕티 랩만의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었고, 타이베이 사람들이 찾는 제 3의 공간이 되었어요.
변화와 변질 사이, 헤리티지를 가꾸며 진화하는 법
2020년생 왕티 랩은 이제 세상에 나온 지 4년 차예요. 짧은 시간이지만 전에 없던 찻집의 모습을 보여 주며 현대인들의 일상과 발맞추어 성장 중이죠. 왕티 랩의 혁신성은 사실 모태가 되는 왕티로부터 물려 받았어요. 왕티는 1890년에 설립된 이래로 왕티 랩 못지 않게 매번 새로운 시도와 발상으로 자기만의 길을 닦아 왔거든요.
차 무역의 전성기였던 시기, 다다오청에는 200개가 넘는 차 제조 공장이 있었어요. 왕티도 그 중 하나였고요. 대만산 차가 불티나게 해외로 수출되자, 왕티는 수출 사업을 키우고 안정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내수 시장과 달리, 산지의 차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좋은 찻잎만으로는 부족했어요. 배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차의 맛과 향을 유지하기 위한 ‘기술’이 중요했죠.
왕티는 이 영역에서 독자적인 기술을 개발했어요. 대부분의 차 제조 공장처럼 높은 온도에서 빠르게 차를 ‘볶아내는’ 대신, 오랜 시간 동안 숯불에서 천천히 차를 ‘굽는’ 방식을 선택한 거예요. 차를 굽고 보관하는 상자도 직접 만들었어요. 대나무로 만든 이 상자는 차의 변질을 막고, 맛과 향은 더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죠.
ⓒWangtea
ⓒWangtea
하지만 1990년대 후반, 왕티는 새로운 변화를 맞닥뜨려요. 여러 가지 문화적, 경제적 이유로 대만 차 수출량이 급격하게 줄었거든요. 한때 차 향기로 가득했던 다다오청에는 몇 개의 공장만이 살아남아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죠. 이런 상황 속, 왕티의 4대 회장 왕례위안(王連源)은 사업의 방향성을 전환하기로 해요. 왕티의 브랜드 구축에 힘을 실어, 국내 시장을 공략하기로 하죠.
왕례위안은 어떤 방식으로 국내 시장에 왕티라는 브랜드를 알렸을까요? 그는 국내 소비자들에게 왕티라는 브랜드를 알리려면, 왕티의 공간에 사람들을 초대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차와 교류하는 공간’을 만들기로 하죠. 그렇게 2004년, 다다오청에 있는 왕티의 차 공장은 ‘차 박물관’으로 재탄생해요.
이 공간은 차의 역사뿐만 아니라, 차의 종류와 효능, 마시는 방법까지, 고객들이 왕티라는 브랜드를 통해 차의 세계에 입문할 수 있도록 설계했어요. 이곳에 방문한 고객들은 마치 ‘차 백과사전을 읽는 것’ 같다고 말하죠. 2층 공간은 원래 찻잎을 세척하고 분류하던 공간이었는데, 문화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했어요. 고객들은 이곳에서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음악을 감상할 수 있죠.
ⓒ시티호퍼스
10년, 50년, 100년을 지나 지금의 5세대에 이르기까지 왕티는 시대의 변화에 좌절하지 않고, 설 자리를 개척해 왔어요. 꾸준히 거듭해 온 변화 속에서도 5대째 바뀌지 않는 신념이 하나 있어요. ‘모습을 바꾸어도 본질을 바꾸지 않는다’는 거죠.
왕티 랩이 다음 세대를 위한 ‘차 실험실’을 만들었지만, 차 본연의 맛에 집중하는 것도, 수많은 상권 중에 다다오청을 선택한 것도 모두 이 신념 때문이에요. 이곳이 왕티가 ‘시작’된 곳이자, ‘본질’이 되는 장소이기 때문이죠.
“오래된 집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것, 다양한 차 마시는 방식을 제시하는 것, 지역사회를 연결하는 것, 다다오청의 번영을 기대하는 것, 그리고 차 문화를 다음 세대로 전하는 것. 이곳에서 세대 간의 소통의 불꽃을 만들고 싶어요.”
- 제이슨 왕, 왕티 랩 공식 홈페이지
제이슨 왕은 백년의 이야기가 쌓인 이 동네에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또 다른 백년의 이야기를 쌓고 싶다고 말해요. 과거를 뒤로 하는 것이 아닌 과거를 뒷심 삼아 미래를 준비하고 있기에, 왕티 랩의 여정은 언제나 희망적이에요.
- Reference
Lavie_美式牛肋排遇上台灣茶——勞瑞斯Lawry’s攜手有記名茶,演繹西餐與氣泡、氮氣茶的搭配可能
Rti_오랜 차(茶) 역사를 독창적으로 실험하다, 왕티 랩(Wangtea Lab)
Careher_ WANGTEA LAB – 以茶香開展百年新光景
Lavie_大稻埕百年老茶廠打造新茶坊!「Wangtea Lab x 有記」輕鬆汲飲台灣茶的風格茶空間
500times_炭火慢焙百年茶香,氳染當代飲茶新貌:Wangtea Lab by 有記名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