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변화가 시작될 경우가 있어요. 19세기 프랑스 예술계가 그랬죠. 당시 프랑스 예술은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었어요. 화가로 성공하기 위해선 이 아카데미에 들어가 기득권이 원했던 역사, 신화, 성경에 관한 그림을 그려 살롱전에 입상해야 했어요.
그런데 19세기 말 파리에서 만국 박람회가 열리고 일본 특산품으로 도자기가 들어오면서, 젊은 프랑스 예술가들 사이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해요. 비싼 도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포장지로 사용했던 종이가 ‘우키요에’ 목판화를 찍었던 종이였고, 이것이 뜻밖에 그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어요.
정식적으로 수입된 그림이 아니라 포장을 위한 완충제로 프랑스에 들어온 우키요에. 포장지에 불과했던 이 그림은 어떻게 19세기 프랑스 예술을 바꿨을까요?
뮤지엄은 ‘영감의 창고’예요. 그래서 이번 런던 위크에서는 V&A 뮤지엄, 코톨드 갤러리, 테이트 모던, 사치 갤러리, 스트릿 아트 등 런던의 뮤지엄을 둘러보면서 인사이트를 찾아볼게요. 오늘의 스토리는 <이제서야 보이는 런던의 뮤지엄>의 일부입니다.
💡 인사이트를 찾기 위해 눈여겨 볼 포인트
견고했던 패러다임은 어떤 계기로 바뀔 수 있는가?
코톨드 갤러리 미리보기
• 영국에 처음 인상주의를 소개한 남자
• 프랑스 젊은 화가들을 사로잡은 자투리 그림
• 시끌벅적한 술집에 그녀를 위한 행복은 없다
• 피사체 너머의 피사체를 보다
• 궁전에서 누리는 모두의 호사, 서머셋 하우스
“20세기 사람이 21세기를 경험하는 것보다 18세기 사람이 19세기에 왔을 때 받을 충격이 훨씬 클 것이다.”
미술사를 공부할 때 들었던 교수님의 말씀은 지금도 뇌리에 강력히 남아 있다. 그만큼 19세기는 인류사에 전례 없는 변화를 가져온 변혁의 시기다. 카메라, 전화기, 버스, 자동차, 기차, 비행기 등이 모두 이 시기에 발명되었다. 19세기 사람들은 21세기의 원형을 살고 있던 사람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가장 흥미를 느꼈던 부분이 이 19세기의 프랑스 예술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그리 멀지 않은, 사람들의 일상 속 모습을 사실적인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 19세기 프랑스의 인상주의이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는 영국과 마찬가지로 산업 혁명의 가속 페달을 밟고 있었다. 자연 과학의 발달로 실증적 정신이 넘쳤고 사람들의 미래관은 진보적이었다. 프랑스 대혁명과 함께 부상한 시민 계급은 이런 정신을 토대로, 신에 의지하거나 왕권에 절대적으로 복종했던 과거에서 벗어나 현실을 중시했다.
이는 예술계에 인상주의라는 이름으로 반영되었다. 인상주의는 그전까지 미술사를 지배해 온 각색된 역사화와는 달랐다. 일종의 ‘도촬’에 가까웠다. 술집에서 만난 사람들의 표정과 그들이 은밀하게 귓속말을 나누는 장면, 발레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이 입고 온 옷을 그대로 표현한 인상주의 작품엔 과장이 없었다.
인상주의는 19세기 파리 사람들의 삶을 여실히 비추었다. 단, 일상을, 주관적으로 말이다. 인상주의에서는 이 ‘주관성’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외부의 이미지를 사실적으로 그리면서도 그것에 주관적인 렌즈를 덧대었다. 태양 빛에 따라 서서히 그림자가 지고 고개가 기우는 풀잎처럼, 대상의 어느 한 순간을 포착해 자신이 보고 느끼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 모네의 ‘인상, 해돋이’는 인상주의의 시초이자 대표격인 작품이다.
Impression, Sunrise, 1872, Claude Monet
그래서일까, 나는 인상주의 그림을 보면 단순히 ‘예쁘다’는 감상을 넘어 날것 그대로의 프랑스 사회와 그림 속에 흐르는 미묘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우아한 옷차림, 아름다운 풍경 속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계급 간의 갈등과 오만 가지 인간의 감정이 보이는 것 같다. 여기에 더해 인상주의 그림에는 기존 화풍에서 벗어난 새로움, 동시대를 공유하는 것만 같은 친근감, 외부 세계를 재현하면서 동시에 일상을 고발하는 메시지가 공존한다. 이것이 내가 19세기 프랑스 예술을 매력적으로 바라보는 이유다.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프랑스에는 인상주의를 벗어난 화풍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시각적 사실성보다도 화가의 개성과 본질에 집중했던 후기 인상주의 사조가 도래한 것이다.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은 인상주의가 강조했던 사실적인 구도, 원근, 명암 등의 공식에서 탈피해 강렬한 색채와 다양한 표현 기법을 사용했다. 다루는 주제 역시 종교, 일상, 개인의 철학 등을 폭넓게 아울렀다. 대표적인 화가가 고흐와 고갱, 폴 세잔이다.
런던에는 이 19세기 프랑스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의 걸작을 소개하는 장소가 있다. 영국은 어떻게 프랑스에서 태동한 인상주의 작품을 보유한 것도 모자라 인상주의의 명소로 거듭나기까지 할 수 있었을까? 영국인으로서 처음 프랑스 인상주의에 관심을 가진 사람, 시대의 반발을 무릅쓰고 교육 기관을 설립해 수많은 미술학도를 길러내는 데 이바지한 사람, 새뮤얼 코톨드란 남자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국에 처음 인상주의를 소개한 남자
1876년, 새뮤얼 코톨드는 직물 사업을 운영하는 영국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의 그는 독일과 프랑스에서 섬유 기술을 공부하며 가업을 이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레이온과 저렴한 가격의 실크를 개발해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코톨드의 관심은 미술이 아닌 사업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40세를 넘어가면서 변화가 찾아왔다. 테이트 갤러리*에서 아일랜드 출신의 미술 수집가 휴 레인의 전시를 만난 뒤, 미술품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테이트 모던과 테이트 브리튼이 구분되지 않아 테이트 갤러리란 이름으로 통칭되었다.
휴 레인은 프랑스 인상주의 예술에서 중요하게 평가되는 수집가이자 거래상이다. 인상주의 대표 화가로 꼽히는 에두아르 마네, 에드가 드가, 오귀스트 르누아르에 관심이 많았고, 자신의 획기적인 비전을 바탕으로 흥미롭고 독특한 현대 미술 작품을 선보이는 일에도 열정적이었다. 휴 레인은 1908년에 아일랜드 더블린에 세계 최초의 공공 현대 미술관을 개관했고, 그 업적을 인정받아 33세의 젊은 나이에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의 안목과 행보는 코톨드에게 큰 자극이었다. 코톨드는 한 사교 모임에서 휴 레인을 직접 만나고, 그 만남을 계기로 본격적인 수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코톨드는 천생 사업가였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가업이 있었고 사업 수완도 좋았다. 하지만 그는 선천적으로 예술적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어렸을 적 예술가를 후원하는 부모님 손에 이끌려 국립 미술관을 몇 차례 방문했지만, 딱딱하고 엄숙한 분위기의 미술관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혼자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었다.
수집가가 된 뒤 코톨드는 혼자서 예술을 향유하던 어린 시절처럼, 자신만의 독특한 감별법을 활용해 작품을 구매해 나갔다.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인기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과 그림의 교감을 중요시했다. 마음에 드는 작품을 발견하면 빌려와 거실에 걸어두고 수일, 수주 동안 감상하기도 했다. 마침내 자신의 직감과 그림이 들어맞는다는 판단이 들면 구입을 결정했다.
실제로 1926년부터 1930년까지 코톨드가 구입한 작품의 목록을 보면, 그가 얼마나 예술적 조예가 깊은 인물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고흐의 ‘붕대를 감고 있는 자화상’, 르누아르의 ‘관람석’, 세잔의 ‘생 빅투아르 산’,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까지. 4년이란 짧은 기간에, 그것도 전문적으로 미술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취향에 의존해 구매했다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들이 그의 거실 벽을 장식했다.
코톨드는 작품을 수집하는 것만으론 성이 차지 않았다. 지인들과 손을 잡고 미술 연구소를 설립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지금이야 미술사를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미술품은 부자들의 전유물이라는 시각이 팽배했다. 영국 의회와 귀족들은 미술관 무료 입장 정책을 고수하면서도, 일반 시민들이 공식 기관에서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는 것에는 상당히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런 상황에서 코톨드는 영국 내 미술 교육 기관 및 연구소의 필요성에 공감한 리 자작, 로버트 위트 경과 함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리 자작은 전쟁에서 명성을 얻은 후 총리 데이빗 로이드 조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던 인물이다. 하지만 로이드 조지가 선거에 패하자 자신의 재력과 열정을 미술에 쏟아붓는데, 여기에 막대한 자본을 태운 사람이 새뮤얼 코톨드였다. 로버트 위트 경은 성공한 변호사이자 고전 드로잉 수집가였다. 지금처럼 이미지를 쉽게 구할 수 없던 시절에 미술 복제품을 여러 점 수집해 영국 미술사학자들을 양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세 사람은 각자 보유한 컬렉션을 기증하고 자신들의 재능과 지위, 부를 이용해 코톨드 미술 연구소를 성공적으로 설립했다. 코톨드 갤러리는 1932년에 코톨드 미술 연구소의 일부로 문을 열었다. 이 미술 연구소는 오늘날 미술 교육 전문 학교인 코톨드 아트 인스티튜트(Courtauld Institute of Art)로 발전해, 영국에서 미술사 분야로는 최고의 지위를 자랑하고 있다.
©코톨드 갤러리
교육 기관을 설립한 뒤에도 인상주의에 대한 코톨드의 사랑은 계속되었다. 그는 사회적으로 계급이 높거나 정계에서 활동하는 사람 중, 자신의 뜻에 동참하는 사람들로부터 기부를 유도해 인수 기금을 조성했다. 국립 미술관, 테이트 갤러리가 인상주의 작품을 구매하는 데에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국립 미술관의 인기작인 조르주 쇠라의 ‘아니에르의 목욕하는 사람들’은 코톨드의 설득으로 국립 미술관이 구입을 결정했을 만큼, 코톨드의 입김이 세게 작용한 작품이다. 유럽을 방문한 미국 사업가들이 평가 절하되었던 인상주의 그림에 관심을 갖고 좋은 가격에 사갈 수 있도록 징검다리 역할을 자처한 것도 코톨드였다.
19세기 인상주의는 정통 미술계에서 크게 인정받지는 못했던 예술 사조다. 기득권이 보기에는 너무 파격적이면서 거부감이 드는 도전적인 화풍이었고, 그래서 저속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새뮤얼 코톨드는 주목받지 못했던 인상주의의 가치를 영국에서 가장 먼저 알아본 선구자였다. 동시에 우리가 런던에서 인상주의 작품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 준 당사자였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코톨드의 안목을 감상해보자.
프랑스 젊은 화가들을 사로잡은 자투리 그림
코톨드 갤러리는 중세부터 20세기까지 각 시대의 대표작을 소장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코톨드 갤러리의 꽃은 후기 인상주의 컬렉션이다. 고흐, 고흐와 애증의 관계에 놓였던 고갱의 걸작 다수가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흐만큼 스펙터클한 드라마를 가진 화가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의 일생에서 복잡한 심경과 감정의 폭발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사건은 고갱과의 다툼 중 스스로 귀를 자른 사건일 것이다. 귀를 자른 후 고흐는 붕대를 감은 자신의 모습을 자화상으로 남겼고, 이 그림이 코톨드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다.
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 1889, Vincent van Gogh
자화상 속 고흐의 눈빛은 차고 쓸쓸하다. 헤아릴 수 없는 연민이 눈동자에 어른거리는 듯도 하다. 짙은 녹색 코트는 꽉 닫힌 고흐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처럼 단단히 잠겨 있다. 털모자를 눌러 썼지만, 섬세한 붓질로 그려 낸 얼굴은 그 무엇으로도 보호받지 못한 채 홀로 남은 방 안의 무거운 공기를 대면하고 있다. 고흐의 처연한 눈빛과 외로움이 묻어나는 얼굴 못지않게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다. 고흐의 얼굴 뒤로 등장하는 일본 풍의 우키요에 그림이다.
우키요에는 일본 에도시대 서민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목판화다. 여인, 가부키 배우,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가는 모습, 파도치는 바다 등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풍경이 주요 소재였다. 우키요에 한 장의 가격이 당시 우동 한 그릇 값과 비슷했다고 하니, 누구나 살 수 있는 대중적인 예술품이었던 셈이다. 고흐는 자화상 속 자신의 얼굴 옆으로 일본 게이샤들과 학이 등장하는 우키요에를 걸어 놓았다.
19세기 프랑스의 젊은 화가들은 우키요에라는 채색 목판화에 열광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 예술은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었는데, 화가로 성공하기 위해선 이 아카데미에 들어가 기득권이 원했던 그림을 그려 살롱전에 입상하는 것이 일반적었다.
*영국에서는 왕립 미술 학교(Royal Academy of Art)로 통칭된다. 본 책에서 해당 교육 기관을 말할 때는 프랑스, 이탈리아와 관련한 부분에선 ‘아카데미’로, 영국과 관련한 부분에선 ‘왕립 미술 학교’로 지칭하기로 한다.
그런데 19세기 말 파리에서 만국 박람회가 열리고 일본 특산품으로 도자기가 들어오면서, 젊은 프랑스 예술가들 사이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비싼 도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포장지로 사용했던 종이가 우키요에 목판화를 찍었던 종이였고, 이것이 뜻밖에 그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아카데미는 화가들에게 역사와 신화, 성경 기반의 서사를 중심으로 그리기를 강조했다. 기법 또한 완벽한 데생과 사실적인 묘사를 추구했다. 그러나 우키요에는 정해진 틀이 없었다. 멋대로 원근법을 과장하거나 생략해도 괜찮았다. 소실점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림은 사실적이기보다 평면적으로 묘사되었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강렬한 색이 사용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우키요에가 표현한 일반인의 일상이라는 주제는 기존의 화풍에 거부감을 가졌던 젊은 화가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기에 충분했다. 이들은 우키요에식 그림에 영감을 받아 일상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마네와 모네, 드가와 세잔 등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에 역사적인 장면이 아니라 파리의 길거리와 유원지, 술집과 예술 공간이 등장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시끌벅적한 술집에 그녀를 위한 행복은 없다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은 마네가 사망하기 불과 1년 전인 1882년 파리 살롱전에서 선보였던 작품이다. 1882년은 인상주의가 파리에 자리를 잡고 인기를 얻고 있던 시기다. 1815년 워털루 전투가 막을 내린 뒤 1차 세계 대전이 터지기 전까지, 유럽은 큰 전쟁 없이 나름대로 평화로운 시절을 보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상주의 화가들 대부분이 이 벨 에포크(Belle Époque), 아름다운 시대를 살았던 예술가들이다. 그래서 인상주의 작품은 대체로 아름다운 일상을 담고 있다. 하지만 현실도 그랬을까?
A Bar at the Folies-Bergere, 1882, Edouard Manet
스무 살의 고흐가 런던에 처음 발을 딛고 충격을 받았던 것처럼 프랑스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세기의 파리뿐 아니라 유럽의 도시들에는 아름다움과 고통이 공존했다. 변두리에는 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고 일터로 내몰린 청소년과 노동자가 가득했고, 교육받지 못한 여성은 매춘을 하거나 몸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극심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에밀 졸라의 소설 《목로주점》에는 이렇듯 하층민 노동자, 남성과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처절하게 살아가는 여성의 삶이 그려져 있다. 인상주의는 단순히 벨 에포크 시대의 풍요만을 묘사한 예술 사조가 아니라, 사회를 내밀하게 관찰한 거울이었다.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은 에밀 졸라의 소설과 맥락을 같이 한다. 폴리 베르제르는 파리에서 유명한 카바레이자 발레, 서커스 공연이 펼쳐졌던 당대 최고의 사교장이다. 그림 중앙에서 초점을 잃은 눈으로 캔버스 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쉬잔이라는 여성을 주목해보자. 빨간 볼과 윤기 나는 머리카락은 그녀가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어린 여성임을 가리킨다. 그녀 앞에는 부르주아들이 마셨던 샴페인과 영국에서 수입해 온 에일 맥주, 탐스러운 과일이 놓여 있다.
마네는 쉬잔의 뒤로 거울을 배치해 이 술집에 있는 사람들을 비추었다. 멋지게 차려 입은 남성과 여성들이 쉬잔 앞 홀에 앉아 음주가무를 즐기고 있다. 다정하게 앉아 있는 남녀는 연인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지만 이들은 정상적인 연인 관계가 아니다. 돈이 많은 남자와 그들로부터 지원을 받으며 관계를 유지하는 직업 여성이 대부분이다. 19세기 프랑스에선 여성이 방문할 수 있는 장소가 매우 제한적이었다. 정실한 부인에게는 가족에 충실하며 집안일을 돌보는 여성상이 요구되었기에, 남성들은 부인이 아닌 다른 여자와 술집과 카바레를 다니며 유흥을 즐기는 일이 공공연했다. 그런 부적절한 관계를 사회적으로 용인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거울 속에는 빼곡한 손님들과 함께 쉬잔의 뒷모습도 비친다. 쉬잔 앞으로 중절모를 쓴 남자가 있다.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쉬잔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을 통해 그가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손님들과 나이 든 남성을 앞에 둔 쉬잔의 표정은 조금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마네가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을 통해 보여 주고자 했던 건 프랑스 부르주아들의 적나라한 현실이었다.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을 지배했던 계급 갈등, 거친 사회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던 하층민 여성의 삶이었다.
인상주의 그림은 르네상스나 고전 그림을 통해서는 느끼지 못하는, 당대 사람들의 일상을 가까이서 들여다볼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는 그 앞에서 풍요와 빈곤이 혼재했던 시대로 여행을 떠날 수 있다. 그래서 더 편안하거나, 혹은 더 불편한 마음으로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을 본다면, 꼭 그림 앞에 멈춰서 세상에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작은 소녀 쉬잔을 위로해 주었으면 좋겠다.
피사체 너머의 피사체를 보다
폴 세잔은 후기 인상주의의 상징적 존재인 동시에 19세기와 20세기 미술을 연결하는 화가로 유명하다. 르네상스 이후부터 세잔 이전까지, 서양 미술사는 사물의 본질적 측면이 아닌 시각적 완벽함에 치중해 왔다. 화가 본인의 시점에서 가까이 있는 사물은 크게, 멀리 있는 사물은 작게, 대상을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데 집중했다는 뜻이다. 여기에 처음으로 문제를 인식한 화가가 세잔이었다. 그는 엑상 프로방스 지역의 생 빅투아르 산을 여러 번 그리면서, 산과 화가 사이에 존재하는 대기의 질감이나 자연의 표면이 숨기고 있는 내적 생명을 포착하는 데 더 집중했다. 이번에 소개할 그림은 세잔이 그린 인물화 ‘카드놀이하는 사람들’이다.
The Card Players, 1892-6, Paul Cezanne
1890년 가을, 세잔은 자신의 농장에서 일하는 농부들이 짬을 내 휴식을 취할 때 담배를 입에 물고 카드놀이를 하는 모습을 포착했다. 그리고 이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는데, 이는 엑상 프로방스의 그라네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르 냉 형제의 ‘카드놀이하는 사람들’을 보고 영감을 받아 자신만의 시선으로 재창조한 것이다.
Card players, 1635-40, Le Nain brothers
르 냉 형제의 작품에는 네 명 혹은 그 이상의 인물이 등장한다. 등장인물들은 각기 다른 포즈로 카드놀이에 심취해 있다. 상대의 생각을 읽으려고 눈치를 보거나 묘수를 부리기 위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다. 르 냉 형제의 작품뿐 아니라 카드놀이하는 사람을 주제로 그린 그림들은 대개의 경우 카드를 쥔 이들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 상대를 이기려는 승부욕, 승자와 패자의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 등을 나타낸다.
그러나 세잔은 단 두 사람만을 등장시켰다. 그리고 두 사람이 미동도 없이 테이블에 앉아 카드놀이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공간은 선술집인지 집 안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다른 화가들이 그린 카드놀이하는 사람들의 그림이 안정적이고 조화로운 구성을 하고 있다면, 세잔은 의도적으로 구성적인 부분을 약화시켰다. 하나의 소실점을 적용하는 대신, 카드놀이하는 인물 각각의 본질을 잘 묘사할 수 있는 각도를 찾아내 그림에 적용한 것이다.
수학 시간에 배웠던 블록 쌓기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같은 블록이어도 바라보는 시점에 따라 평면도에 그려지는 전체 모양이 달라지는 것처럼, 세잔은 서로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인물의 모습을 한 화폭에 그렸다. 이것이 원근법이나 구도 등 미술의 기본 공식을 따르지 않고, 대상 본연의 형체에 집중했던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다. 세잔이 남긴 총 다섯 점의 ‘카드놀이하는 사람들’은 후기 인상주의 미술 사조의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받으며, 런던의 코톨드 갤러리,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 등에 둥지를 틀고 있다.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과 더불어 ‘카드놀이하는 사람들’은 인상주의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회자되는 작품이다. 고흐, 마네, 세잔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세계적인 작품들이 모두 코톨드 갤러리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기에 코톨드 갤러리는 단 세 점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라도 방문할 가치가 충분한 곳이다. 고흐와 고갱의 다른 작품들도 덤으로 만나볼 수 있으니, 후기 인상주의 작품의 매력을 흠뻑 느끼기에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궁전에서 누리는 모두의 호사, 서머셋 하우스
코톨드 갤러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규모 미술관’으로 불린다. 이 정도의 정보만 듣고 갤러리를 방문한 사람은 거대한 건물에 한 번, 크고 아름다운 중정에 한 번 더 놀라고 만다. 웅장한 건물의 이름은 앞서 소개한 코톨드 아트 인스티튜트가 위치한 서머셋 하우스다. 코톨드 갤러리는 서머셋 하우스 건물의 일부로써 운영되고 있다.
코톨드 아트 인스티튜트는 1932년에 개관했지만, 건물의 역사는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547년, 권세가였던 서머셋 공작 에드워드 세이무어가 자신의 궁전을 템즈 강변에 건설했다. 그가 런던 타워에서 처형된 후 궁전의 소유는 왕가로 넘어갔고, 이때부터 많은 왕족이 궁전을 거쳐 갔다. 엘리자베스 1세가 20세 때부터 여왕으로 즉위한 1558년까지, 제임스 1세의 부인 앤은 1603년부터 건물을 사용했으며, 덴마크 공주였던 앤을 기리기 위해 서머셋 하우스는 한동안 덴마크 하우스로 명명되기도 했다. 찰스 2세의 왕비이자 영국에 홍차를 들여온 캐서린 브라간자도 한때 궁전의 주인으로 살았다.
1779년에 왕립 미술 학교가 건물을 잠시 사용했고, 이후 왕립 미술 학교는 피카딜리에 위치한 지금의 벌링턴 하우스로 이전했다. 20세기에 들어서부터 서머셋 하우스는 영국의 세무청 등 여러 국가 기관으로 사용되다가, 1989년에 코톨드 아트 인스티튜트가 자리를 잡으면서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서머셋 하우스는 매년 가을 런던 패션 위크의 런웨이가 되고, 중앙의 커다란 중정은 겨울이 오면 시민들이 즐겨 찾는 스케이트장으로 변신한다. 코톨드 갤러리는 런던의 다른 미술관들과 달리 입장료*를 받지만, 7파운드(약 10,500원) 정도로 가격이 저렴하기 때문에 이용하기에 부담이 없다. 코톨드 갤러리를 방문할 때는 미술관의 앞마당이 되어 주는 서머셋 하우스를 함께 구경해보기 바란다. 대중을 위한 예술의 도시, 런던답게 시민들이 자유롭게 옛 귀족의 궁전을 활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1파운드는 기부 차원으로, 기부를 원치 않는다면 6파운드로도 이용이 가능하다.
Reference
• The Courtauld Collection: A Vision of Impressionism, Courtauld, paul Holberton
• Van Gogh. Self-portraits Exhibition Catalogue, Louis van Tilborgh, Martin Bail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