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P 92점’
와인샵에 가면 종종 RP로 시작하는 점수가 붙어 있는 와인들을 볼 수 있어요. 여기에서 RP는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Robert Parker)’의 이니셜을 딴 것으로, 그가 그 와인에 대해 평가한 점수에요. 로버트 파커는 50~100점 사이로 점수를 매기는데, 그의 점수는 해당 와인의 판매량과 가격을 좌지우지 할 정도죠. 로버트 파커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와인 평론가 중 한 명이지만, 원래 와인 분야에 종사하던 사람도 아니고 와인 종주국인 이탈리아나 그에 버금가는 프랑스 사람도 아니에요. 로버트 파커는 미국 메릴랜드 볼티모어 출신으로, 자기 고향에 있는 은행의 변호사였죠. 와인과 전혀 관련 없는 커리어를 가졌던 그가 어떻게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와인 평론가가 될 수 있었을까요?
1967년, 대학생이던 로버트 파커는 휴가 차 프랑스 파리에 갔다가 우연히 와인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어요. 미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학교에 와인 테이스팅 클럽을 열어 계속 와인을 공부했죠. 학교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이후에도 와인에 대한 흥미와 재능을 개발하는 데에 소홀히 하지 않았고, 프랑스로 넘어가 와인 메이킹을 배우기도 했어요. 그는 와인을 수집하기 시작하면서 그가 사는 아파트의 온도까지 와인을 보관하기에 가장 좋은 섭씨 13도에 맞추고 살았다고 해요.
그러던 그가 본격적으로 와인업계에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계기는 1978년, 와인 평론을 다룬 뉴스레터 ‘와인 애드보키트(Wine Advocate)’를 발행하면서부터에요. 로버트 파커는 와인 애드보키트에 매년 12,000개가 넘는 와인을 리뷰했고, 업계 최초로 대중들이 익숙한 100점 만점 체제를 와인 평가에 도입했어요. 게다가 96점 이상은 ‘특출난(Extraordinary)’, 90~95점은 ‘뛰어난(Outstanding)’, 80점대는 ‘평균 이상의(Above the average to excellent)’, 70점대는 ‘평균의(Average)’, 60점대는 ‘평균 이하의(Below average)’, 50점대 이하는 ‘형편없는(Apalling)’ 와인으로 분류해 누구나 쉽게 대략적인 와인의 품질을 짐작할 수 있도록 기준을 세웠어요. 여기에 더해 그의 냉철하고 객관적인 와인 평가는 그를 와인 평론계의 신성으로 떠오르게 했죠. 유럽 출신의 기존 평론가들은 와인 메이커들과의 친분 때문에 종종 리뷰에 객관성을 잃기도 했거든요.
격월로 지면 뉴스레터를 발행하던 와인 애드보키트는 현재 온라인 웹사이트에 와인 관련 기사와 리뷰를 발행하고 있어요. 매월 15달러(약 1만8천 원)의 유료 서비스죠. 뿐만 아니라 와인 주요 산지를 기준으로 각 빈티지마다 점수를 매긴 ‘와인 애드보키트 빈티지 가이드’를 업데이트해 와인 애호가들이 와인 빈티지를 선택할 때 참고할 수 있도록 해요. 그의 와인 리뷰와 빈티지 차트는 일반 소비자들이 와인을 구매할 때 믿을 만한 길라잡이가 되죠. 그래서 로버트 파커의 평점이 와인 시장에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와인을 빈티지별로 점수를 매긴 빈티지 차트에요. ⓒRobert Parker Wine Advocate
그런데 전문 평론가의 점수만을 참고해 와인을 구매하는 데에는 맹점이 있어요. 평론가의 점수는 와인의 전반적인 품질을 기반으로 할 뿐, 누구나 ‘맛있다’고 느끼는 기준이 될 수 없어요. 소비자 개개인이 와인에 대한 경험치도 다르고, 각기 다른 입맛과 와인 취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평론가의 높은 점수를 보고 와인을 구매했다가 낭패를 보기도 하고, 평론가 점수는 높지 않았지만 맛있는 와인을 발견하기도 해요. 와인 평론가의 입맛이 아니라, 와인을 구매하는 개개인의 입맛에 꼭 맞는 와인을 구매할 수는 없는 걸까요?
질문: 고객의 취향에 다가가기
와인은 일명 ‘살아있는 술’이라 불려요. 지역, 와인 메이커, 포도 품종, 블렌딩 비율, 양조 방식 등에 따라 와인의 질감과 아로마, 맛이 모두 달라요. 심지어 같은 와인이더라도 포도를 생산한 년도인 빈티지에 따라, 보관 상태에 따라서도 맛이 달라지죠. 와인의 이런 다변적인 성질은 와인을 즐기는 재미이자 매력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구매를 망설이게 만드는 심리적 허들이기도 해요. 미국 캘리포니아의 대표적인 와인 산지 나파(Napa)에 본사를 둔 ‘퍼스트리프(Firstleaf)’는 와인 초보자들의 이런 심리적 허들을 낮추고, 입맛에 맞는 와인을 구매할 수 있도록 도와줘요. 와인 전문가들의 노하우와 데이터 기술을 결합해서 말이죠.
‘미국에서 가장 개인화된 와인 구독 서비스(America’s most personalized wine subscription service)’
퍼스트리프를 가장 잘 표현한 한 줄 소개에요. 퍼스트리프는 개인의 취향에 기반해 와인들을 추천하고, 또 집 앞까지 배송해주죠. 퍼스트리프가 개인의 취향을 파악하는 방법은 간단하면서도 고유해요. 퍼스트리프에 처음 가입하면 10가지 퀴즈에 대해 답변을 해야 해요. 이 10개의 퀴즈들은 고객의 와인에 대한 취향을 파악하기 위한 질문들이에요. 질문에는 와인에서 느낄 수 있는 풍미에 대한 것도 있지만, 커피나 차를 마실 때 달게 마시는 걸 좋아하는지, 와인을 마실 때 모험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등 와인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쉽게 자기 취향을 드러낼 수 있도록 난이도를 조절해요. 그리고 질문에 대한 답변도 ‘좋아요’, ‘싫어요’ 또는 객관식 보기 중에 고를 수 있도록 디자인해 와인 초보자들도 쉽고 재밌게 선택할 수 있어요.
ⓒFirstleaf
고객이 질문에 대한 답을 마치고 나면, 수집된 고객의 취향에 기반해 6종류의 와인을 추천해 줘요. 이 때 퍼스트리프의 방대한 와인 포트폴리오와 데이터 분석 기술이 빛을 발해요. 퍼스트리프는 와인을 분석하는 고유한 독점 기술을 개발해 판매하는 수천 종의 와인에 대한 정보를 데이터로 보유하고 있어요. 고객이 선택한 답변에 따라 가장 잘 맞을 것으로 예상되는 와인들을 선별해 배송하는 거죠. 물론 퍼스트리프가 선별한 와인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확인할 수도 있고, 그 중 마음에 들지 않는 와인이 있다면 다른 와인으로 대체할 수도 있어요. 게다가 첫 구매는 6병에 39.95달러(약 4만8천 원)으로, 환영의 의미를 담아 파격적인 할인 혜택을 주니 퍼스트리프를 외면하기 어렵죠.
구독: 고객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퍼스트리프는 매력적인 첫 구매 옵션을 제시해 고객을 유치해요. 그리고 첫 배송을 받은 고객이 각 와인에 대한 의견과 호불호를 리뷰하면 미래의 와인 추천에 반영해요. 고객이 퍼스트리프에서 와인을 리뷰하면 할 수록 고객의 취향에 대한 정보는 정교해지고, 그에 따라 취향 적중률이 더 높아지죠. 고객 한 명 한 명의 고유한 미각에 방대한 와인 포트폴리오를 매핑하는 셈이에요. 즉, 고객과의 관계를 오래 유지할 수록 더 끈끈해질 수 밖에 없는 거죠.
이렇게 고객 개인별 취향에 맞춤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의 장점 중 하나는 고객이 자기에게 맞는 선택을 하기 위한 시간, 자본, 노동을 투자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고객은 맞춤형 서비스에 결제만 하면 되죠. 그래서 퍼스트리프는 자신들의 강점을 이용해 멤버십을 기반으로 한 구독 서비스를 운영해요. 즉, 첫 구매를 통해 멤버십에 가입한 고객은 이후부터 정기적으로 결제만 하면 되어요. 그러면 취향에 맞는 와인을 테이스팅 & 페어링 카드, 뉴스레터 등과 함께 원하는 주기마다 배송받을 수 있어요. 물론 배송 주기는 1달에 1번, 2달에 1번, 3달에 한 번 이런 식으로 와인 소비량에 따라 고객이 결정할 수 있고요.
ⓒFirstleaf
퍼스트리프의 맞춤형 구독 서비스를 더욱 탄탄하게 만드는 건 와인의 품질이에요. 퍼스트리프에 소속된 소믈리에들은 꾸준히 새로운 와인을 선보이기 위해 매년 10,000개 이상의 와인을 샘플링하고, 그 중 품질 좋은 것들만 선별해요. 현재 퍼스트리프는 와인 대회에서 수상하거나 품질을 인정받은 1,400여 종의 와인들을 취급하고 있어요. AI나 데이터가 대체할 수 없는 신규 와인 발굴은 전문 인력들이 담당하고 있죠. 이렇게 선별된 와인 중에서 개별 고객 취향에 맞는 와인을 보내주니 구독자가 느끼는 혜택의 수준이 더 견고해져요.
수상 내역이 있는 품질 좋은 와인을 판매한다고 하니 가격대가 높을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아요. 오히려 정상 소매가에서 최대 60%나 할인된 가격에 와인을 구매할 수 있죠. 그럴 수 있는 이유는 퍼스트리프가 유통 과정을 줄였기 때문이에요. 보통 와인은 도매 회사나 수입사를 거쳐 소매 판매점으로 유통되고, 최종 소비자들은 소매점에서 와인을 구입하죠. 하지만 퍼스트리프는 전 세계 유수의 와이너리와 계약을 맺고 와인을 최종 소비자에게 바로 판매해 유통 마진을 줄였어요. 1회의 정기 배송에 6병의 와인이 포함되는데, 가격은 90달러(약 10만8천 원)로 1병당 2만 원이 채 안 되는 꼴이에요. 취향 맞춤 서비스로 가심비를, 와인의 품질과 가격으로 가성비를 모두 잡아 고객 만족도를 높이는 거죠.
교육: 고객의 취향을 개발하기
퍼스트리프의 서비스가 지속적으로 흥할 조건 첫 번째. 신규 고객이든 기존 고객이든 와인에 대한 취향이 있어야 해요. 고객이 취향을 가지고 있어야 취향 맞춤 서비스가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죠. 취향이 있다는 건 한 분야에 대해서 좋은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요. 그 분야에 호기심을 가지고, 많이 보고 경험할 수록 좋은 감각이 쌓이기 마련이죠. 그래서 퍼스트리프는 고객들이 와인의 세계를 깊고 다양하게 탐험할 수 있도록 와인에 대한 교육 콘텐츠를 제공해요.
고객들은 퍼스트리프의 ‘와인 학교(Wine School)’에서 와인에 대한 온갖 정보들을 공부할 수 있어요. 물리적인 학교라기보다는 웹사이트 상의 온라인 아티클 형태를 띄지만, 정보의 범위와 정제된 수준을 보면 학교라는 명칭이 과하지 않죠. 포도 품종, 와인 산지, 와인의 색과 맛, 타닌감, 바디감 등 와인을 이해하기 위한 정보부터 와인을 스월링하는 방법, 와인잔에 얼룩 지우는 방법, 와인 따르는 법 등 와인을 즐기기 위해 알아두면 좋을 지식들도 찾아볼 수 있죠. 고객들은 와인을 마시다 궁금한 점이 있거나, 와인을 마시기 전 참고하기 위해 와인 스쿨을 찾아요. ‘지식의 술’이라 불리는 와인은 알고 마실 수록 더 맛있는 법이거든요.
ⓒFirstleaf
각 아티클의 목차와 내용을 보면 여느 와인 강의 커리큘럼 못지 않은 전문적인 지식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볼게요. ‘초보자를 위한 프랑스 와인 가이드 총정리(The Ultimate French Wine Guide for Beginners)’라는 아티클에서는 초보자들이 프랑스 와인에 대해 궁금해 할 만한 정보들을 ‘프랑스 와인 라벨 읽기’, ‘포도 품종 파헤치기’, ‘프랑스 와인 산지’ 등의 목차에 따라 정리해 두었어요. 하나의 주제에 대해 전방위적인 내용을 제공하면서도, 지나치게 학문적이거나 어렵지 않도록 용어나 정보의 난이도를 조절하고 있어요. 전문적인 내용을 비전문가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한 덕분에 누구나 쉽게 와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죠.
살아남는 구독 서비스의 비밀
퍼스트리프는 회원들이 와인을 소비하면서 발생한 데이터를 활용해 개인화된 맞춤형 구독 서비스를 운영하고, 유통 구조를 혁신해 양질의 와인을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하며, 동시에 교육 콘텐츠를 통해 고객들이 취향을 쌓아 가는 여정을 돕고 있어요. 덕분에 2015년 처음 문을 열어 오프라인 매장없이 온라인으로만 고객을 모집해 왔는데도, 벌써 15만 명이 넘는 회원 수를 보유하고 있어요. 구독 모델의 핵심을 간파한 서비스 설계로 와인에 대한 단발적인 니즈를 일상적인 니즈, 반복적인 소비로 전환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죠.
구독 서비스는 소비자와 기업 모두에게 득이 많은 비즈니스 모델이에요. 기업 입장에서는 구독자를 통해 안정적인 매출을 얻으면서 동시에 수요 예측이 가능해 생산 잉여나 불필요한 비용을 줄일 수 있고, 고객은 반복적으로 필요한 제품이나 서비스를 매번 결제할 필요없이 더 저렴한 단가에 이용할 수 있죠. 미국에서는 구독 서비스를 도입한다고 하면 높은 확률로 주가가 오른다고 해요. 그렇다고 모든 구독 서비스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에요. 과거의 신문, 우유 구독 서비스 등은 사라진지 오래고, 비교적 최근에 출시된 영화, 화장품, 바 호핑 등 다양한 분야의 구독 서비스들도 자취를 감춘 것들이 태반이죠.
실패한 서비스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사라졌지만, 성공한 서비스들은 비슷한 이유로 시장에서 살아 남았어요. 바로 개인화된 고객 니즈를 정확히 분석하고 정교한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했다는 거죠. 넷플릭스, 유튜브, 스포티파이 등 잘 나가는 구독 서비스들을 몇 개만 떠올려도 개인에 꼭 맞춘 듯한 추천 서비스로 사용자를 맞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구독 경제가 보편화되고, 구독 서비스를 도입하는 분야가 늘어날 수록 고객 개개인의 만족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발전할 거에요. 구독 경제를 가능하게 만드는 건 결국 기한없이 정기 결제를 허용할 정도로 만족한 고객이기 때문이니까요.
Refer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