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가 존중받는 사회에선, 천재적 혁신이 꿈틀거린다

인텔 뮤지엄

2023.01.11

주객이 전도된 법칙이 있어요. OO의 법칙은 원래 어떤 현상의 원리를 설명하거나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에요. 하지만 ‘무어의 법칙’은 예외인 듯해요. 이 법칙은 반도체 집적회로의 성능이 18~24개월마다 2배씩 증가한다는 거예요. 인텔의 공동 창업자인 ‘고든 무어’가 1965년에 발견해, 그의 이름을 땄죠.


물론 무어의 법칙도 초기에는
 귀납적인 현상을 설명하는 수단이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법칙에 맞추기 위해 반도체 업체들이 경쟁적으로 기술 개발을 했죠. 인텔의 고든 무어가 이를 의도했는지는 모르지만 무어의 법칙이 법칙일 수 있게 업계의 혁신이 계속될 수 있었어요.


인텔은 기술적 혁신 말고 마케팅적 혁신도 선보였어요. 인텔은 기기가 아니라 반도체칩을 주로 만드는 B2B 기업이라 볼 수 있어요.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인텔을 알죠. 바로 ‘인텔 인사이드’ 마케팅 덕분이에요. 겉으로 보이지 않아서 아무도 관심 갖지 않던 대상을, 겉으로 보이지 않아서 더 눈여겨 확인해야 할 대상으로 바꾼 거예요.


이렇게 혁신을 주도했던 기업이 그들의 역사를 기록한 뮤지엄을 만들었어요. 기록의 혁신이 있을 거란 기대로 찾아가봤죠.





혁신을 거듭했던 기업도 스스로의 역사를 혁신적으로 보여주기는 어려운가 봅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인텔 뮤지엄’을 방문했었는데, 혁신의 기록은 있었지만 ‘기록의 혁신’은 없어 아쉬웠어요. 그렇다고 시간이 아까웠던 것은 아니에요. 그 공간을 둘러보는 동안 기대하지 않았던 자극과 영감을 충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혁신의 기록 중에서 눈에 띄었던 것은 5G를 설명하는 코너였어요. 5G가 더 빠르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구슬이 통과하는 속도로 표현해 놓았어요. 반복해서 떨어지는 구슬을 멍때리면서 바라보고 있는데, 중학생 쯤 되어 보이는 아들과 함께 온 중국인 엄마가 불쑥 말을 걸어왔습니다.


“5G 쪽이 코스가 더 긴데 구슬이 왜 더 빠르게 통과하는 건가요?”


그리고는 아들이 궁금해 하는데, 자기는 답을 해줄 수가 없어서 물어본다는 말을 덧붙였어요. 낯선 이방인에게 서툰 영어로 물어볼 만큼 용기를 낸 엄마의 마음을 모를 리 없지만, 저는 답을 해줄 수가 없었어요. 저 역시도 이유를 몰랐으니까요.



ⓒ시티호퍼스


문과생의 관점에서 봤을 때 5G 코스와 4G 코스의 차이점은 발견할 수 있었어요. 5G 코스는 4G 코스와 달리 구슬이 두 갈래로 갈라져 떨어졌죠. 하지만 두 갈래로 갈라진 각 구슬이 더 긴 코스를 어떻게 더 빨리 통과하는지는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설명을 해줄 수 없어 미안하다는 대답에 중국인 모자는 자리를 옮겼지만, 저는 자리를 뜰 수 없었어요. 나름의 답을 찾고 싶어서가 아니라 근본적인 질문을 놓쳤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죠.


물론 5G가 얼마나 더 빠른지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해요. 하지만 그보다는 5G가 왜 더 빠른지에 대해 궁금해하는 과정이 필요했어요. 이름 모를 중학생이 남기고 간 자극을 뒤로한 채 뮤지엄을 서둘러 나오려는데, 출구 쪽에 적혀 있는 인텔의 공동 창업자이자 인텔의 혁신을 이끌었던 ‘로버트 노이스(Robert Noyce)’의 말에 또 한 번 발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어요.



ⓒ시티호퍼스


‘Don’t be encumbered by history. Go off and do something wonderful.’


‘역사에 갇히지 말고 나가서 멋진 일을 하라’. 이 문구는 역사를 가두어둔 뮤지엄에 적혀 있기에는 아이러니한 말처럼 보였지만, 곱씹어 생각해보면 역사를 기록해 둔 뮤지엄이 가져야 할 본질을 표현한 조언이었어요. 과거의 성과를 바탕으로 미래를 개척해 나가야지, 과거의 영화에 묻어가는 조직엔 미래가 없기 때문이죠. 혁신을 주도했던 장본인이 던진 메시지이기에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어요. 물론 이런 말이 있다고 해서 인텔의 미래가 보장되는 건 아니겠지만요.


나가서 멋진 일을 하라는 문구를 따라 뮤지엄을 나서니 기념품 숍이 있었어요. 인텔의 로고가 새겨진 제품들을 판매하는 공간이었어요. 컵, 옷 등을 팔고 있어 특별할 것이 없었지만, 한쪽 벽면에 눈길을 사로잡는 코너가 있었죠.



ⓒ시티호퍼스


‘Nerd wear collection’


누가 봐도 패션 감각이 없어 보이는 옷을 ‘너드를 위한 옷’이라는 컨셉으로 팔고 있었어요. 이 코너 앞에서 두 번의 감탄이 나왔어요. 하나는 평범해 보이는 옷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기술이에요. 그냥 일반적인 면 티셔츠, 부모님 세대에는 힙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유행이 지난 것만 같은 자켓 등에 너드라는 컨셉을 입히니 그 옷들의 개성이 살아나요. 컨셉 덕분에 티셔츠에 적힌 ‘Eat Sleep Code Repeat’과 같은 문구가 위트로 보이고요.


또 다른 하나는 스스로를 너드라고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는 문화가 마음에 들었어요. 너드라는 표현에는 어느정도 부정적인 뉘앙스가 섞여 있어요. 위에서 예시를 든 티셔츠 문구만 하더라도 그렇죠. 하지만 그 부정적인 뉘앙스의 뒷면에는 다른 일에는 관심 없지만 자기가 좋아하고 선택한 일에 대해서는 몰입한다는 긍정적인 특성이 담겨 있죠. 이처럼 패션(Fashion) 대신 열정(Passion)을 택한 사람들이 존중받을 수 있는 환경이 있기에 실리콘 밸리가 세상의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거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시티호퍼스


인텔 뮤지엄에 기록의 혁신을 찾으러 갔던 거라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어요. 그래서 허탕을 친 셈이지만 그래도 뮤지엄을 나오는 발걸음은 가벼웠어요. 필연적 진보로 도배된 곳에서 우연한 생각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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