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할 뻔한 ‘을’의 가게는 어떻게 디저트 유토피아를 세웠나?

키노토야

2023.09.22

방황하던 청년이 있었어요. 농장과 슈퍼 등을 전전하면서 좀처럼 자리를 잡지 못했죠. 그때 장인 어른이 지나가듯 던진 한 마디가 그의 인생을 바꿨어요.


‘과자 사러 오는 사람 중에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어.’


이 말에 마음이 움직인 청년은 삿포로에 제과점 ‘키노토야’를 열기로 결심했어요. 하지만 기대도 잠시, 가게에는 손님이 오지 않았어요. 하루동안 파는 것보다 버리는 게 더 많을 정도였죠. 과자에 대한 지식도 인맥도 없이 부딪혔던 도전은 또 다시 실패하기 직전이었어요.


궁지에 몰린 그는 발상의 전환을 했어요. 손님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찾아가자’. 그러고는 일본 최초로 생일 케이크 택배를 시작했죠. 결과는 성공. 무려 단일 매장에서 연간 매출액 11억 5천만 엔(약 115억 원)을 달성하며 일본 내 점포당 연간 매출액 1위를 거머쥐게 돼요.


그런데 고비는 다시 찾아왔어요. 이익이 손익분기점을 겨우 넘는 수준이었거든요.  생 케이크를 직접 만들어야 해서 주문이 늘어날수록 비용도 늘어났기 때문이에요. 과연 그는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해피 엔딩이에요. 이익을 내는 것을 넘어 아예 홋카이도에 디저트 유토피아를 만들었죠. 어떻게 했냐고요?


키노토야 미리보기

 #1. '삿포로 농학교'가 쿠키 이름이 된 사연

 #2. 부전자전, 그 아버지에 그 아들

 #3. 한 번뿐인 인생의 두 번째 도전

 #4. 5개의 기업으로 맞춘 퍼즐

 ‘을의 가게’가 만든 디저트 왕국




삿포로에서는 매년 이색 디저트 경연 대회가 열려요. ‘삿포로 스위츠 컴피티션’이죠. 2006년에 처음 시작한 이 대회에서는 매년 삿포로의 얼굴이 될 디저트를 뽑는데요. 지금까지 탄생한 수상작만 21개예요.(생양과자 부문, 구운 과자 부문 합산) 2023년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기획하기 위해 잠시 쉬어가기로 했지만, 이 대회는 20년 가까이 삿포로의 디저트를 지역 차원에서 육성시킨 주역이에요. 


대회는 이렇게 진행해요. 우선 삿포로 시민들을 대상으로 ‘먹고 싶은 삿포로 디저트’에 대한 아이디어를 모아요. 나이 제한없이 그림으로 그려 제출하기만 하면 끝. 삿포로 TV탑을 닮은 몽블랑, 곰을 모티브로 한 슈크림 등 시민의 아이디어는 다양해요. 모집 기간이 끝나면 대회 주최측은 이 아이디어 중에서 10개를 뽑아요. 그리고 대회에 참여하는 파티시에는 10개의 아이디어 중 하나를 골라 독자적인 기술로 디저트를 만들면 되죠.


그렇다면 이 대회에서 어떤 디저트들이 탄생하는 걸까요? 2019년의 그랑프리 수상작을 살펴볼게요. 작품의 이름은 ‘삿포로 호박 가토 쇼콜라’예요. 아이디어를 제출한 시민의 도안을 보면 조건이 상세하게 적혀 있어요. 콩가루 페이스트, 생크림, 호박 가나슈, 초콜릿 케이크 등 필수로 들어가야 하는 것을 정해 놓았죠. 이 조건에 맞춰 파티시에가 실물로 구현한 거예요. 시민의 아이디어를 잘 살리면서도 호박의 풍미와, 단맛을 적게 한 쇼콜라의 밸런스를 잘 맞췄다는 호평을 받았어요.



2019년에 제출된 시민의 아이디어예요. ⓒcity of sapporo



2019년 그랑프리 수상작이에요. ⓒ2013 sweets sapporo


그런데 이 대회엔 독특한 특징이 있어요. 그랑프리 수상작의 레시피가 ‘스위츠 왕국 삿포로 추진 협의회’에 회원으로 가입한 양과자점에 공개된다는 거예요. 다른 점포에서도 이 레시피를 조금씩 변형시켜서 같은 이름으로 판매할 수 있도록 말이죠.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그랑프리 수상작을 여러 버전으로 먹어볼 수 있어요. 처음에는 레시피 공개를 반대하는 양과자점이 많았어요. 그림을 맛있는 디저트로 구현한 레시피는 영업 비밀에 가까우니까요. 하지만 삿포로의 양과자를 활성화한다는 취지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협의회 회원이 증가했죠.


삿포로 스위츠 컴피티션 대회를 기획한 건 ‘스위츠 왕국 삿포로 추진 협의회’예요. 2005년에 삿포로 시, 삿포로 상공회의소, 삿포로 양과자 협회가 모여 만들었죠. 이 협의회의 목적은 이름처럼 삿포로를 디저트 왕국으로 만드는 거예요. 삿포로 디저트를 전 세계에 홍보할 뿐만 아니라 우수한 파티시에를 육성하고 디저트 관광까지 제안하는 역할을 맡고 있어요.


이 참신한 아이디어를 제안한 건 추진 협의회 회장이자 제과 기업 ‘키노토야(きのとや)’의 창업자 나가누마 아키오예요. 그는 처음부터 홋카이도는 디저트 왕국에 딱 어울리는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홋카이도처럼 우수한 재료를 산지에서 직접 구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홋카이도, 특히 삿포로를 디저트 거리로 만들고 싶었어요. 미국 시애틀에서 시작한 스타벅스가 시애틀을 커피의 도시로 만들었듯이요.



ⓒ시티호퍼스



ⓒ시티호퍼스


디저트에 진심인 나가누마 아키오는 추진 협의회에서만 활약하는 건 아니에요. 스스로도 직접 디저트 왕국을 만들어 나가고 있죠. 그는 1983년에 창업한 제과점 ‘키노토야’를 시작으로 세컨 브랜드인 ‘BAKE’와 ‘삿포로 농학교’를 연이어 성공시켰어요. 그 후 직접 낙농업에 뛰어든 키노토야는 이제 ‘홋카이도 콘펙트 그룹’이라는 지주회사까지 만들어서 원재료, 제품 기획, 디자인, 제조, 유통의 고리를 완성했어요.


사실 나가누마 아키오는 과자에 대한 지식도, 인맥도 하나 없는 사람이었어요. 서른 다섯이 될 때까지 농장과 슈퍼 등을 전전긍긍하며 좀처럼 자리를 잡지 못하다가 키노토야를 창업했어요. 제과점을 연 이유도 단순해요. ‘과자 사러 오는 사람 중에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말 한 마디에 마음이 움직였어요. 하지만 경험이 없다고 해서 성과를 못내는 건 아니에요. 키노토야는 점포당 연간 매출액 11억 5천만 엔(약 115억 원)을 달성하며 일본 1등을 거머쥐었죠.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작은 가게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1. '삿포로 농학교'가 쿠키 이름이 된 사연

서른 다섯. 나가누마 아키오가 양과자점 ‘키노토야’를 창업한 나이에요. 그때까지 나가누마 아키오는 좀처럼 자리를 잡지 못했어요. 홋카이도 대학 졸업 후 목장, 슈퍼 등에서 일하며 전전하고 있었죠. 그러던 중 장인 어른이 건넨 ‘과자 가게는 대단해. 손님이 다들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잖아’라는 한 마디가 계기가 되어 1983년 가게를 열었어요.


하지만 이번에도 뜻대로 되는 건 없었어요. 가게는 오픈했지만 손님이 찾아오지 않았거든요. 입지도 좋지 않아 하루에 파는 것보다 버리는 게 더 많을 정도였어요. 나가누마 아키오는 고객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대기의 장사’로는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창업 2년 차에 ‘오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가겠다’는 마음으로 일본 최초 생일 케이크 택배를 시작하게 돼요. 홋카이도는 한번 눈이 내리면 이동이 어려운 날도 많아서 이런 판매 방식이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거든요. 


일단 생일 케이크를 주문 받으려면 맛이 보장되어야 했어요. 최고의 재료로 만든 신선한 케이크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을 거듭했죠. 동시에 언론의 힘도 받았어요. 새로 등장한 케이크 택배 사업이 언론에서 자주 언급됐거든요. 결과는 성공. 맛과 편리함을 동시에 잡은 키노토야는 창업 4년 만에 단일 매장에서 연매출 2억 5,000만 엔(약 25억 원)을 달성하게 돼요.



‘키노토야하면 생케이크’라는 이미지가 있어요. ⓒkinotoya inst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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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가누마 아키오는 이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어요. 기세를 몰아 점포당 매출액 기준으로 일본 1위가 되겠다고 다짐했죠. 당시 친분이 있던 도매상 직원이 ‘양과자 전문점에서 연 매출 5억 엔을 달성하면 일본 제일이 된다’고 했으니까, 매출 규모를 2배로 늘리면 목표를 이룰 수 있었어요. 결국 나가누마 아키오는 창업 12년 차인 1997년에 이 다짐을 현실로 만들었어요. 그것도 단일 매장 연간 매출 11억 4,000만 엔(약 114억 원)이라는 압도적인 숫자로 말이죠.


케이크를 만들 줄도, 제과 분야의 지식이나 인맥도 없었던 ’문외한’이 이룬 쾌거였어요. 나가누마 아키오는 인간의 능력은 무한하다는 걸 깨달았죠. 하지만 기쁨도 잠시, 키노토야를 운영하며 한계를 느끼게 돼요. 매출액은 높았지만 이익률이 낮았거든요. 손익 분기점을 겨우 넘는 수준이었어요. 생 케이크를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들다 보니까 매출이 올라가는 만큼 비용이 올라갔기 때문이에요. 주문이 많이 들어온다고 해서 무작정 기뻐할 일이 아니었죠. 결국 중요한 것은 영업 이익이었으니까요.


이런 이익 구조를 타파하고자 만든 게 바로 ‘삿포로 농학교’예요. 진짜 학교가 아니라 밀크 쿠키죠. 이 쿠키는 2005년 발매 후 17년 간 3억 개가 넘게 팔린 키노토야의 스테디셀러예요. 그런데 왜 쿠키 이름을 학교 이름으로 지었냐고요? 학교 이름이 쿠키의 정체성을 전부 설명하기 때문이에요. 그 이유를 알아볼게요.


‘삿포로 농학교’는 홋카이도 대학의 전신이에요. 미국에서 온 클라크 박사가 초대 교장으로 부임해서 선진 기법의 낙농업을 홋카이도에 정착시킨 곳이죠. 나가누마 아키오는 이런 역사에도 불구하고 대학에 관련된 과자가 하나도 없다는 게 안타까웠어요. 생각해보니 홋카이도 대학을 졸업하고 과자 가게를 하는 사람도 드물었죠. 그래서 직접 학교의 이름을 넣은 밀크 쿠키를 만들기로 결심했어요.



ⓒ시티호퍼스



ⓒkinotoya



ⓒkinotoya


이런 취지에 홋카이도 대학도 동의했어요. 그래서 나가누마 아키오가 만든 ‘삿포로 농학교’라는 이름의 쿠키를 대학 차원에서 인정해줬죠. 그러니 이제 만든 제품을 파는 일만 남았어요. 그렇다면 그가 정한 첫번째 판매 장소는 어디였을까요? 매장도, 백화점도 아닌 홋카이도 대학 입학식이었어요. 반응이 어떨지 몰라서 1,000박스만 준비해 갔는데 순식간에 매진됐죠. 이렇게 홋카이도 대학 기념품의 정석이 된 삿포로 농학교는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으며 홋카이도의 기념품으로 성장했어요. 매출의 1%는 다시 홋카이도 대학으로 돌아가 교육을 지원하는데 쓰이고 있고요.


나가누마 아키오는 삿포로 농학교가 자신의 인생을 바꿨다고 말해요. 가게에서 직접 만드는 생 케이크가 그에게 성공의 발판이 되어줬다면, 삿포로 농학교는 팔리면 팔릴 수록 이익이 나는 성공의 구조를 만들어 줬어요. 오븐으로 대량 생산하는 밀크 쿠키의 탄생으로 생산성과 효율이 올라간 덕분에, 나가누마 아키오는 그제야 경영의 균형점을 찾아낼 수 있었죠.



#2. 부전자전, 그 아버지에 그 아들

키노토야가 유명한 건 생케이크와 쿠키 때문만은 아니에요. 청출어람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자회사 ‘BAKE’가 있거든요. BAKE는 키노토야와는 달리 해외로도 진출해서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치즈 타르트 전문점이에요. 나가누마 아키오의 장남인 나가누마 신타로가 2013년에 창업했는데요. 지금은 투자 펀드사인 폴라리스 캐피탈 그룹이 2017년 8월 BAKE를 인수하면서 현재는 경영에서 손을 뗐지만, BAKE는 나가누마 부자의 저력을 보여준 브랜드예요.


BAKE는 창업 3년 만에 연매출 36억 엔(약 360억 원)을 달성하며 붐을 일으켰어요. 치즈 타르트 단일 제품만 취급하는 BAKE가 시작부터 승승장구한 비결은 무엇일까요? 이걸 알려면 2012년의 신치토세 공항으로 시간을 돌려봐야 해요. 당시 아버지의 회사에 갓 입사한 나가누마 신타로는 신치토세 공항에 입점해 있던 ‘KINOTOYA2’의 점장을 맡게 됐어요. KINOTOYA2는 키노토야가 이미 출시한 제품이 아니라 새로운 제품만을 판매하는 컨셉 매장이었어요. 냉동 치즈 케이크, 홋카이도산 과자 등을 팔고 있었죠. 하지만 당시의 매출 상황은 좋지 못했어요. 하루 매출이 5만 엔(약 50만 원)이었죠. 


이를 해결할 방법을 찾던 나가누마 신타로는 일단 직원들의 의견을 모아 냉장 상태로 팔고 있던 치즈 타르트 하나에만 집중하기로 했어요. 이렇게 개선책을 고민을 하던 도중 싱가포르에서 열린 홋카이도 물산전에 참가하게 됐죠. 키노토야는 이곳에 치즈 타르트를 가져 갔어요. 일본에서처럼 치즈 타르트를 상자에 담아 냉장 쇼케이스에 진열했어요. 하지만 싱가포르에서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어요. 하루 50개 판매가 다였으니까요. 설상가상, 발주 실수로 중간에 포장 상자마저 동이 났어요. 어쩔 수 없이 치즈 타르트를 오븐에서 꺼낸 철판 위에 그대로 두고 팔 수밖에 없었죠.



ⓒit media



ⓒkinotoya


기적은 그때부터 일어났어요. 갓 구운 치즈 타르트의 달콤한 향기에 이끌려 고객이 몰려들기 시작한 거예요. 철판 위에 그대로 올려져 있는 치즈 타르트들은 그 자체로 매장의 인테리어가 됐어요. 판매량이 하루 50개에서 1,000개로 대폭 상승했죠. 매일 매진 행렬을 이어가던 키노토야는 물산전이 종료되기도 전에 준비한 물량을 완판했어요.


이날 나가누마 신타로는 한 가지 깨달음을 얻게 돼요. 제품을 상자에 넣지 말고 고객의 눈 앞에 확실히 보여줘야 한다는 거였죠. 갓 구운 치즈 타르트는 고객의 시각과 후각을 자극시킬수록 매력이 살아났어요. 확신이 생긴 나가누마 신타로는 일본으로 귀국하자마자 이 성공 경험을 KINOTOYA2 매장에 적용하기로 했어요. 


일단 10만 엔(100만 원)을 들여 매장을 ‘치즈 타르트 전문점’으로 바꿨어요. 그리고 싱가포르에서처럼 철판 채로 치즈 타르트를 늘어 놓았죠. 디스플레이 개선뿐만 아니라 상품도 개량했어요. 타르트 원단은 두껍게 하고, 치즈 무스에는 공기 함유량을 바꿔 식감을 개선시켰어요. 먹기 쉽도록 사이즈까지 작게 조절했고요. 그렇게 7개월 후 지금의 BAKE에서 판매하는 치즈 타르트의 원형이 완성됐어요. 이 치즈 타르트는 하루 5,000개씩 팔리는 신치토세 공항점의 간판 상품이 됐죠. 



ⓒkinotoya


치즈 타르트에 대한 확신이 생기자 나가누마 신타로는 2013년에 주식회사 BAKE를 설립했어요. 홋카이도에서만 살 수 있었던 치즈 타르트를 다른 지역에서도 판매하기 위해 새롭게 전문점을 만든 거예요. 도쿄 신주쿠에 첫 매장을 오픈한 그는 매일 홋카이도에 있는 키노토야의 제조 공장에서 치즈 타르트를 받아 팔기 시작했어요. 그 결과 2.7평 짜리 작은 매장에서 오픈 1개월 만에 9만 개의 치즈 타르트가 팔려나갔죠. 이건 BAKE가 일궈나간 성공 신화의 서막에 불과해요. 그후 해외로도 진출하며 연간 3,500만 개(2017년 기준)의 치즈타르트를 판매하는 기업으로 성장했으니까요. 



#3. 한 번뿐인 인생의 두 번째 도전

하지만 세컨 브랜드까지 연이어 성공시키는 키노토야에게도 못다 이룬 꿈이 하나 있었어요. 바로 낙농업이었죠. 제과점이 왜 낙농업에 관심을 가졌냐고요? 나가누마 아키오가 바라보는 제과업은 사실상 ‘농산물 가공업’이었어요. 제과업이 사용하는 주 원료는 계란, 우유, 생크림이이에요. 아무리 좋은 품질의 원재료를 사서 제품을 만들어도, 직접 원재료를 생산하는 게 아닌 이상 타 제과 기업과의 차별화는 생기지 않죠.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어요. 낙농하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진 홋카이도에서 직접 원재료를 생산하는 것이었죠.


그래서 2018년, 키노토야는 ‘유토피아 아그리컬처’를 설립하며 낙농업에 뛰어들었어요. 고령으로 양계업을 그만두게 된 농업법인의 양계장을 양도받고, 이농하는 낙농업자의 목장을 인수했죠. 이름은 ‘유토피아 팜’이라 지었어요. 오랫동안 유토피아를 꿈꿨던 나가누마 아키오는 드디어 질 좋은 원재료를 직접 생산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게 된 거예요. 이제 카로틴, 비타민 등 영양소가 풍부하고 풍미가 좋은 방목 우유로 제과 제품을 만들 수 있게 됐죠.



ⓒ시티호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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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건 나가누마 아키오의 첫번째 도전은 아니었어요.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4년 간 낙농업에 몸담았던 적이 있거든요. ‘같이 유토피아를 만들어보자’던 대학교 스키부 선배의 제안이 계기가 됐죠. 나가누마 아키오는 매일 홋카이도 니캇푸조에 있는 농장으로 출근해서 열심히 일했지만, 안타깝게도 결과는 좋지 못했어요. 오일 쇼크의 영향 등으로 경영 환경이 점점 나빠지면서 4년 만에 꿈을 접었어요.


하지만 나가누마 아키오는 젊은 날의 좌절을 포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키노토야를 창업한 지 30년이 지난 65세 즈음부터는 다시 한번 낙농업에 도전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죠. 남은 인생을 생각하면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모습을 지켜보며 30년 넘게 함께 일한 주변의 전무, 상무도 그를 응원했죠.


낙농업에 뛰어든 키노토야는 곧이어 2019년에 ‘키노토야 농장점’을 오픈했어요. 이곳은 키노토야뿐만 아니라 나가누마 아키오 인생의 집대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매장이에요. ‘스스로 만든 것을 스스로 팔고 싶다’는 나가누마 아키오의 오랜 꿈이 실현된 곳이죠. 이 매장에서는 목장에서 생산되는 계란과 원유를 사용해서 과자를 만들고, 계란이나 우유도 직판해요. 병설된 카페에서 계란이 들어간 밥과 오므라이스 등 식사 메뉴도 제공하고요.



키노토야 농장점이에요. ⓒkinotoya



ⓒ시티호퍼스



키노토야 카페 농장점에서 판매하고 있는 ‘유토피아 달걀 밥’이에요. ⓒkinotoya


“젊을 때 일본의 새로운 농업상을 만들겠다는 꿈을 쫓다 좌절했지만, 72세가 되어 다시 한번 젊을 때 그린 꿈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에 흥분하고 있어요.”

-나가누마 아키오, 리얼 이코노미 인터뷰 중


나가누마 아키오는 앞으로 키노토야처럼 홋카이도산 1차 제품에 부가가치를 붙여 판매하는 사업 구조가 ‘일본의 새로운 농업상’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제는 홋카이도산 버터를 만들어 세계에 수출하는 것이 그의 새로운 꿈이 됐어요. 프랑스 에쉬레(Échiré)에서 생산되는 고급 버터 ‘에쉬레’가 전세계에서 인기리에 판매되는 것처럼 말이죠. 비록 자재 상승이나 관세 인하 등 농업을 둘러싼 환경은 나빠져가고 있지만, 세계에 알릴 수 있는 홋카이도 브랜드를 만든다면 어려운 상황도 거뜬히 돌파할 수 있다고 믿고 있어요.



#4. 5개의 기업으로 맞춘 퍼즐

하지만 일본에서 유일하게 목장 경영을 하는 제과 기업이 되고도 여전히 성에 차지 않았던 걸까요? 키노토야 그룹은 2022년 9월 지주회사 ‘홋카이도 콘펙트 그룹’을 설립했어요. 이 지주회사는 키노토야, K콘펙트, COC, 유토피아 아그리컬처, [센슈안](https://cityhoppers.co/content/story/senshuan) 제과의 총 5개 기업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앞의 4개 기업은 원래 키노토야 그룹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센슈안 제과는 1921년부터 화과자를 만들어 온 별개의 기업이에요. 무엇을 하기 위해서 다섯 개의 기업이 모인 걸까요?



ⓒsocialpress


홋카이도 콘펙트 그룹이 왜 탄생했는지 알기 위해서는 우선 5개 기업이 각각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봐야 해요. 아래의 그림은 원료 생산부터 상품기획, 제조, 판매까지 하나의 제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나타낸 거예요. 홋카이도 콘펙트 그룹에 속해있는 5개의 기업은 각각의 단계를 하나씩 맡고 있죠.



ⓒ홋카이도 콘펙트 그룹


제조 단계의 시작점을 담당하는 유토피아 아그리컬처는 농장을 운영하며 우유, 계란 등의 원재료를 생산하고 가공해요. 이 원재료는 K콘펙트와 센슈안 제과로 흘러가요. 재료를 공급받은 K콘펙트는 과자를 제조하고, 최종적으로 완성된 제품을 키노토야에서 판매해요.


한편 유토피아 아그리컬처의 원재료는 센슈안으로도 전달돼요. 양과자에 집중해 온 키노토야가 화과자에 대한 노하우를 얻기 위해 센슈안을 초대했거든요. 마지막으로 COC는 이 모든 제조, 판매 단계를 전사적으로 지원해요. 신규 사업과 브랜드의 기획, 브랜딩부터 채용, 재무, 회계 등 기본적인 업무까지 전담하죠.



ⓒCOC


이처럼 홋카이도 콘펙트 그룹에 속한 다섯 개의 기업은 각자 분리되어 있지 않아요. 원재료를 제품으로 만들어 고객에게 선보이기까지의 모든 단계에서 서로를 지원하죠. 이제 그룹 체제의 협력으로 인해 다섯 개의 기업이 새로운 도전을 하기 쉬운 환경이 조성됐어요. 진짜 디저트 제국을 만들기 위한 키노토야의 퍼즐이 이 다섯 개의 기업으로 완성된 셈이에요.


홋카이도 콘펙트 그룹의 대표를 맡은 건 나가누마 신타로예요. 그는 각 기업이 가진 상품 브랜드를 강화시켜서 홋카이도 과자를 세계로 유통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혔어요. 여행객이 기념품으로 사는 과자가 아니라 전 세계에서 누구나 살 수 있는 과자를 만들고자 하죠. 5년 뒤의 그룹 매출을 100억 엔(약 1,000억 원)으로 목표하고 있고요.



‘을의 가게’가 만든 디저트 왕국

손닿는 곳마다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온 키노토야가 늘 잘 나가기만 했던 건 아니에요. 사실 실패도 많이 겪었죠. 창업 3년 차의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생산 능력을 뛰어넘는 2,000개의 케이크를 주문 받았다가 제때 배달하지 못하는 대참사가 벌어졌어요. 하루가 지난 크리스마스 당일, 나가누마 아키오는 ‘이제 와서 뭐하냐’는 말을 들으면서도 고객에게 케이크를 직접 하나씩 배달했죠. 판단 실수를 인정한 뒤 앞으로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케이크 배달 주문을 받지 않기로 했고요.


1997년에는 살모넬라균에 의한 식중독 사고도 있었어요. 101명의 고객이 피해를 입었고 5일 간 영업이 정지됐죠. 원인은 케이크에 들어간 계란이었어요. 누구의 실수였는지 알고 있었지만 나가누마 아키오는 직원을 탓하지 않았어요. 한 사람이 잘못한 게 아니라 회사가 환경을 제공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는 전 직원 앞에서 고개를 숙인 뒤 피해를 입은 고객들에게 사과를 하러 혼자 돌아다녔어요.


도산 직전까지 간 적도 있지만 키노토야는 직원들의 도움과 사람들의 응원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어요. 이 사건들은 키노토야가 맛있을 뿐만 아니라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안전한 제품들을 만드는 계기가 됐어요. 이런 우여곡절 속에서도 변하지 않았던 가치는 무엇인지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어요.


“낭만이에요. 계속 꿈을 꾸는 거죠. 저는 농사를 짓겠다고 했을 때에도 ‘유토피아를 만들겠다’는 꿈이 있었어요. 목장 이름을 유토피아라고 지을 정도로요. 작은 것이라도 좋으니까 낭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가누마 아키오, 카와라반 인터뷰 중


나가누마 아키오가 끝까지 낭만을 잃지 않고 지켜온 키노토야는 ‘을의 가게’라는 뜻이에요. 왜 시작부터 ‘을’의 지위를 자처했냐고요? 이건 늘 첫번째를 목표로 겸손하게 노력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에요. 지금보다 더 맛있는 제품으로, 고객을 더 만족시키겠다는 의미로 지은 거죠. ‘을의 가게’ 키노토야는 처음 각오 그대로 삿포로에 디저트 왕국을 만들어나가는 중이에요. 여전히 꿈을 꾸고 낭만을 지키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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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

 키노토야 공식 홈페이지

 「札幌農學校」が 私に菓子店経営のバランスの 大切さを教えてくれた。,NANBAN PRESS

 紆余曲折を経てたどり着いたお菓子屋への道, 瓦版編集部

 さっぽろスイーツ歴代グランプリ作品, City of Sapporo

 "ITスタートアップの考え方で洋菓子ビジネスにイノベーションを起こし、日本を代表する製菓企業を目指したい。”, 藤岡清高, Amateras Startup Review

 世界中で毎日8万個 BAKEの「チーズタルト」が売れるようになった理由, IT media

 「きのとやファーム店」は長沼昭夫会長の夢を実現した“農とお菓子を繋ぐお店”, 経済総合, Real Economy

 ⑦きのとや会長 長沼昭夫氏, The Hokkaido Shimbun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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