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가 도화지를, 작가가 노트를 캔버스 삼아 작업을 한다면, 건축가의 캔버스는 무엇일까요? 건축가에게는 아마 ‘도시’가 캔버스일 거예요. 도시를 도화지 삼아 건축물을 만들고, 도시의 경관을 디자인하니까요. 이 때 중요한 건, 건물 하나 하나를 잘 만드는 것이 아니라 캔버스인 도시 전체를 가꾼다는 관점이에요. 그림을 그릴 때 특정 부분을 잘 그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전체적인 그림이 의미를 가지고 조화로워야 하는 것처럼요.
그런 관점에서 건물을 도시를 구성하는 '레고 조각'이라고 말하는 건축가가 있어요. 2025년 올해로 87세의 거장, '모쉐 사프디'예요. '사프디 아키텍츠'라는 팀을 꾸려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죠. 그 중에서도 모쉐 사프디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도시가 하나 있는데요. 바로 싱가포르예요.
'싱가포르'하면 떠오르는 상징적인 건축물들이 몇 개 있어요. 단연 '마리나 베이 샌즈'와 창이 공항의 '주얼 창이'예요. 모두 모쉐 사프디의 작품이죠. 그는 싱가포르의 아이코닉한 건축물들을 디자인하며 도시 경관, 더 나아가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어요. 싱가포르에 그가 넘긴 굵직한 프로젝트들을 함께 살펴 보며, 이 건축가가 어떻게 도시인들의 삶을 바꾸어 나가는지 알아 볼까요?
모쉐 사프디 미리보기
• #1. 건물은 도시를 구성하는 ‘레고 조각’이다
• #2. ‘맥락화’와 ‘지역화’를 원칙으로 도심에 휴식처를 심다
• #3. 인본주의와 고밀도 주거 공간 사이의 균형을 찾다
• 87세의 거장, 직업으로서의 건축가를 말하다
중국에는 4개의 직할 시가 있어요. 베이징시, 상하이시, 톈진시, 그리고 충칭시. 그 중에서 지리적으로 가장 넓은 충칭은 중국의 동쪽에 위치한 나머지 3개 도시와 달리 서부에 위치해 있어요. 충칭은 자연스레 중국 서부의 중요한 공업 도시로 손꼽히는데요. 충칭은 현재 중국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도시이자, 3천만 명이 넘는 인구 수를 보유해 중국에서 4번째로 인구가 많은 대도시이기도 해요.
2020년, 이런 충칭에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개관했어요. 양쯔강과 자링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래플스 시티 충칭(Raffles City Chongqing)’이 문을 연 거예요. 충칭의 수로 운송 문화를 모티브로 한 래플스 시티 충칭은 강 위에 돛을 단 듯한 형태로, 충칭의 급격한 성장을 상징하고 있어요.
ⓒSafdie Architects
총 112만 제곱미터의 방대한 부지에 쇼핑몰, 사무실, 주거용 아파트, 레지던스, 호텔 등으로 구성된 래플스 시티 충칭은 무려 8개 타워로 구성되어 있어요. 아이코닉한 입지와 엄청난 규모에 더해, 래플스 시티 충칭을 충칭의 랜드마크로 급부상시킨 요소가 한 가지 더 있는데요. 래플스 시티 충칭을 구성하는 8개 타워 중 4개의 타워에 걸쳐 자리 잡은 ‘크리스탈(The Crystal)’이라 불리는 스카이 브릿지예요. 250m 상공에 위치한 크리스탈은 클럽 하우스, 레스토랑, 바, 전망대 등으로 구성되어 충칭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어요.
ⓒSafdie Architects
웅장한 매력도 잠시,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래플스 시티 충칭에서 몇 가지 단서를 통해 다른 도시 하나를 떠올릴 수 있을 거예요. 먼저 ‘래플스’라는 이름부터 중국답지 않아요. 래플스라는 이름은 ‘래플스 호텔’, ‘래플스 병원’, ‘래플스 시티’ 등 싱가포르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이름이에요. 지금의 싱가포르를 만든 ‘토마스 스탬포드 래플스’ 경의 이름을 따 지은 건물들이 싱가포르에 많기 때문이죠.
거기다 수변에 위치한 초고층 빌딩, 여러 개의 타워를 연결하는 스카이 브릿지, 직선이 아닌 곡면 등 래플스 시티 충칭 또한 싱가포르의 한 건물과 매우 닮아 있어요. 어떤 건물인지 짐작이 가시나요?
그 주인공은 싱가포르의 랜드마크이자, 싱가포르의 스카이라인을 바꿔 놓은 ‘마리나 베이 샌즈(Marina Bay Sands, 이하 MBS)’예요. 래플스 시티 충칭과 MBS 사이에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까요? 바로 두 건축물을 건축한 사람이 ‘모쉐 사프디(Moshe Safdie)’라는 건축가라는 점이에요. 래플스 시티 충칭은 싱가포르의 부동산 개발회사인 ‘캐피탈랜드(Capitaland)’와 모쉐 사프디가 이끄는 ‘사프디 아키텍츠(Safdie Architects)’가 협업한 프로젝트죠.
마리나 베이 샌즈 ⓒ시티호퍼스
모쉐 사프디는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이스라엘 출신의 건축가예요. 2025년 올해로 87세의 나이인 노익장이죠. 그는 2011년 개장한 MBS를 기점으로 싱가포르에서 굵직한 프로젝트들을 도맡아 설계하며 싱가포르 건축 씬(Scene)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어요. 싱가포르에는 MBS 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걸작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요. 싱가포르의 또 하나의 상징, ‘주얼 창이(Jewel Changi)’, 스타 호텔리어 이안 슈레거가 만든 ‘에디션(EDITION hotels)’의 싱가포르 지점 등도 모쉐 사프디의 건축물들이에요. 그가 싱가포르에 남긴 건축물들을 통해 그의 건축 철학을 함께 알아 볼까요?
주얼 창이 내 레인 보텍스 ⓒ시티호퍼스
#1. 건물은 도시를 구성하는 ‘레고 조각’이다
모쉐 사프디의 건축에서는 현대 건축에 대한 그의 문제 의식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고민이 엿보여요. 대도시라면 보통 고층 빌딩이 경관을 장악하고 있어요. 그렇다 보니 자연광, 공기, 프라이버시, 커뮤니티 등 인 간이 사는 데 필요한 요소들이 결여될 때가 있는데요. 모쉐 사프디는 도시의 거대한 규모를 인간답게 만들기 위해서는 새로운 공공 영역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지역 기후의 특수성과 조화를 이룬 공원, 거리, 광장 등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죠.
이런 그의 생각은 싱가포르에서 그의 대표작이자, 도시의 아이콘이 된 MBS에서 발견할 수 있어요. MBS가 유명해진 건, 비단 독보적인 외관이나 최첨단 건축 기술 때문만이 아니에요. MBS는 싱가포르에서 완전히 새로운 도시 공간을 만들어 낸 건축물이라는 평가를 받죠. 자연과 연결되고, 거대하면서도 인간적인 규모를 갖추고, 실내와 실외 공공 공간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거든요.
ⓒSafdie Architects
싱가포르 마리나 베이에 위치한 MBS는 호텔, 뮤지엄, 극장, 카지노, 쇼핑몰 등 다양한 공간들이 한 데 어우러진 복합 리조트예요. 그 규모만 해도 어마어마한데요. 57층 규모의 호텔, 3개의 타워를 잇는 1.2헥타르 규모의 스카이파크, 해안가 곶에 위치한 아트 사이언스 뮤지엄 등 부지가 16헥타르에 이르러요. 이런 엄청난 규모의 복합 리조트를 설계할 때 모쉐 사프디가 중점에 두었던 건 ‘공공 공간’이에요.
MBS의 공공 공간과 그 구조는 로마의 ‘척추(Spine)’ 도시 컨셉에서 영감을 받았는데요. 로마의 척추란, 주요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를 따라 양쪽에 건물들이 배치된 모습을 말해요. 마치 사람의 척추와 비슷한 형태를 이루고 있어 이렇게 표현하죠. MBS는 기존 강변 산책로의 연장선에 ‘MBS 워터프론트 산책로’를 만들어 새로운 건축물과 기존의 실외 산책로가 하나로 어우러지도록 의도했어요. 내부 공간도 투명하게 드러나도록 디자인해 자연광을 실내에 들이고, 실내와 실외의 경계를 흐렸죠.
ⓒSafdie Architects
MBS를 따라 길게 이어진 MBS 워터프론트 산책로는 자연스럽게 MBS의 몰 내부로 이어지는데요. 해안 산책로와 상업 시설을 하나의 축을 통합한 거예요. 즉, 실외와 실내, 냉방 시설과 자연 환기가 가능한 구조를 구현한 거예요.
ⓒSafdie Architects
몰 내부의 통로는 MBS 프로젝트의 상징이자 호텔 건물로 쓰이는 3개짜리 타워로 이어져요. 그런데 1개의 타워를 크게 지어도 되었을텐데, 왜 3개의 타워를 구상하게 된 것일까요? 이는 모쉐 사프디의 아이디어예요. 애초에 MBS는 1개의 타워로 계획되었지만, 그는 만약 커다란 1개의 타워를 짓는다면 싱가포르 도심과 해안가를 분리하는 ‘벽’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상징적으로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그 위에 세 개의 탑을 세우는 걸 제안했어요. 그렇게 해서 바다를 향해 큰 창문이 생겼는데, 정말 극적이었어요. 건물을 통해 어느 쪽이든 도시의 다른 지역이 다 보였어요. (중략) 이것은 쇼핑몰 위에 우뚝 솟아 있는 고층 빌딩들이 도시의 나머지 부분에 등을 돌리고 있는 현재의 지배적인 유형과는 정반대로, 새로운 종류의 공공 영역을 재고하고 제안하는 것입니다."
- 모쉐 사프디, <Dezeen>과의 인터뷰 중
ⓒSafdie Architects
모쉐 사프디는 타워를 ‘레고 조각’처럼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타워를 하나의 독립된 조각품이 아니라, 도시의 구성 요소로서 공공 영역을 조성하는 방식으로 타워를 배치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 결과 1개가 아닌 3개의 타워가 등장했고, 공공 영역에 대한 의지는 57층의 타워 꼭대기까지 이어져요.
MBS의 3개 타워는 57층에서 하나로 이어지는데요. 3개의 타워에 걸쳐 있는, 약 1만 8천 제곱미터 규모의 ‘스카이파크’ 덕분이에요. 이 스카이파크에는 정원, 레스토랑, 전망대, 그리고 MBS의 상징 격인 인피니티 풀 등이 있어요. 이 곳에서는 도시와 바다를 360도 전망으로 감상할 수 있죠. 지상에서 시작된 공공 영역은 건물 꼭대기에도 펼쳐져 이 프로젝트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 요소가 되었죠.
ⓒSafdie Architects
“MBS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싱가포르의 상징으로 각인된 것은 기쁘지만, 그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어요. ‘한 순간에 감탄을 자아내는’ 건물이 아니라, 강력한 아이디어가 담겨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스카이파크는 단순한 시각적 장치가 아닙니다. 고층 공원을 조성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도시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제시합니다. 깊은 의미와 흥미로운 형태가 결합되었고, 그게 바로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입니다.”
- 모쉐 사프디, <Tatler Asia>와의 인터뷰 중
#2. ‘맥락화’와 ‘지역화’를 원칙으로 도심에 휴식처를 심다
MBS 이후, 모쉐 사프디는 싱가포르에서 굵직한 프로젝트들을 이어 나갔어요. 또 하나의 아이콘이라 할 만한 건축인 싱가포르 창이 공항의 ‘주얼 창이’나 주요 도시의 핫한 부티크 호텔로 자리 잡은 ‘더 싱가포르 에디션(The Singapore EDITION)’ 호텔도 모쉐 사프디의 손을 거쳤죠.
이 두 프로젝트에서는 싱가포르의 지역적 정체성, 즉 ‘싱가포르다움’에 대한 모쉐 사프디의 해석을 엿볼 수 있는데요. 건물을 설계할 때 싱가포르의의 고유한 문화적, 사회적, 환경적 맥락을 고려한 결과예요. 글로벌화로 인해 건축물들이 획일화되는 현상을 반대하고, 지역적 정체성을 보존하고자 하는 ‘비판적 지역주의(Critical regionalism)’에 영향을 받았죠.
"저는 건축가로서 우리가 디자인하는 특정 건축물에 역사, 유산, 지역 문화, 그리고 지역 생활 방식을 어떻게 접목할 수 있는지에 매료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스칸디나비아에서 건축을 한다면 나무를 사용하고, 그 지역의 문화를 반영하며, 계절을 고려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세계가 세계화되고 사람들이 곳곳을 여행하고 일하기 때문에,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획일성이 만연합니다. 지역적 특성은 이제 도시의 오래되고 역사적인 부분에서만 발견될 뿐, 다른 곳에서는 상하이인지, 요하네스버그인지, 상파울루인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 모쉐 사프디, <Prestige>와의 인터뷰 중
그의 경력 전반에 걸친 핵심 디자인 철학 중 하나는 ‘맥락화’와 ‘지역화’였어요. 싱가포르에서도 이런 디자인 원칙은 이어졌는데요. 싱가포르는 흔히 ‘정원 도시(Garden city)’라고 불려요. 이 별칭은 싱가포르의 도시 계획에서 비롯된 이름인데요. 싱가포르의 도시 계획은 자연과 도시 개발을 조화롭게 융합하는 것을 강조해 왔어요. 덕분에 싱가포르는 도시 어디에서나 풍부한 녹지, 지속 가능한 환경을 찾아볼 수 있어요. 싱가포르의 이런 정원 도시 컨셉은 주얼 창이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나요.
"주얼 창이는 ‘자연’과 ‘시장’의 경험을 하나로 엮어 공항을 활기차고 활기찬 도심으로 극적으로 표현하고, 여행객, 방문객, 주민을 사로잡으며 싱가포르의 '정원 속 도시'라는 명성을 반영합니다."
- 모쉐 사프디, 사프디 아키텍쳐 웹사이트 중
주얼 창이는 싱가포르 창이 공항과 연결되어 있는 종합 엔터테인먼트 공간이에요. 한 지붕 아래 호텔, 몰, 레저 시설, 실내 정원 등 다양한 시설을 제공해 비행을 위해 거쳐가는 공항 이상의 역할을 하죠. 여기에서도 공용 공간은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요. 이 공용 공간을 통해 ‘정원 도시’라는 싱가포르의 컨셉을 제대로 구현했어요.
주얼 창이의 중심에는 계단식 실내 정원인 ‘포레스트 밸리(Forest Valley)’가 있어요. 여기에는 유리 지붕 꼭대기에서 건물 중앙으로 물을 쏟아 내는 실내 폭포, ‘레인 보텍스(Rain Vortex)’가 자리 잡고 있죠. 세계에서 가장 높은 실내 폭포이기도 한 레인 보텍스는 그 주변으로 200종이 넘는 다양한 나무와 식물들이 우거져 있어요. 그 규모가 마치 대형 식물원을 방불케 해요.
ⓒ시티호퍼스
존재 자체가 정원 도시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건 물론, 실제로 실내 온도를 내려 조경 환경에 도움을 줘요. 폭포에서 사용되는 물 또한 빗물을 활용해 친환경적이에요. 전체적인 환기 시스템과 채광 또한 자연에서의 원리와 효과를 닮아 있죠. 시설이나 겉모습만 자연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를 실내에 구현한 셈이죠. 정원 도시라는 싱가포르의 명성에 걸맞는 건축 설계였어요.
한편 이번에는 도심 중의 도심, 싱가포르 오차드에 위치한 ‘더 싱가포르 에디션(The Singapore EDITION)’으로 가 볼게요. 더 싱가포르 에디션은 밀집된 도시 안에 자연과의 풍부한 연결을 만들어 낸 것으로 호평을 받는 호텔이에요. 부지 중앙의 안뜰 정원을 조성해 호텔의 3면이 정원을 감싼 형태죠. 번잡한 도심과 단절되어 자연 속에 파묻혀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에요.
ⓒThe Singapore EDITION
ⓒSafdie Architects
호텔의 전체적인 공용 공간 뿐만 아니라 1층에 위치한 ‘로비 바’도 마치 온실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요. 좌석 사이사이에 배치된 풍성한 녹음은 기본, 투명한 천장 덕분에 자연광을 포함한 외부의 자연이 실내로 그대로 들어오는 듯 해요. ‘정원 도시’라 불리는 싱가포르의 풍부한 녹지와 자연을 호텔 공용 공간에 들이고자 했던 모쉐 사프디의 의도를 알 수 있죠.
ⓒSafdie Architects
ⓒThe Singapore EDITION
#3. 인본주의와 고밀도 주거 공간 사이의 균형을 찾다
사실 모쉐 사프디는 MBS, 주얼 창이 등과 같은 대규모의 상업 시설로 유명하지만, 정작 그가 건축계에서 처음 주목 받았던 계기는 ‘주택’이었어요. 1967년, 캐나다 몬트리올에 지었던 ‘해비타트 67(Habitat 67)’라는 이름의 주거단지였죠. 해비타트 67은 조립식 건축 기술을 활용해 354개의 콘크리트 직육면체를 쌓아 만든 도시 주택이에요. 실제로 콘크리트 박스를 쌓고 조립하듯이 지어 독특한 외관을 유지하고 있어요.
ⓒSafdie Architects
ⓒSafdie Architects
그런데 해비타트 67이 건축계의 주목을 받은 이유는 비단 겉모습 때문은 아니에요. 해비타트 67은 158세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모든 세대가 개인 전용 테라스를 갖추고 있어요. 독립 주택만이 누릴 수 있던 테라스를 갖추는 동시에 도시 생활의 경제성과 편의성을 제공하고 있어, 고밀도 도시 환경에 맞는 주택이라는 평가를 받았죠.
해비타트 67은 이후 많은 공동 주택에 영감을 주었어요. 모쉐 사프디와 그의 팀 또한 해비타트 67에 깃든 아이디어를 계속 발전시켜 왔고, 이는 모쉐 사프디가 남긴 프랙탈 기하학에 기반한 구조물 시리즈에 반영되어 있죠. 그 대표적인 예 중의 하나가 싱가포르 비샨 지역에 위치한 콘도미니엄, ‘스카이 해비타트(Sky Habitat)’예요.
ⓒSafdie Architects
38층짜리 2개의 타워에 509세대가 들어선 스카이 해비타트는 일부 세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세대가 루프탑 테라스와 발코니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에요. 해비타트 67과 마찬가지로 개별 세대가 집 안에서 자연을 누릴 수 있도록 설계한 거죠. 그리고 이렇게 생긴 테라스형 아파트 세대가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어요. 배열 시 각도를 달리하고, 계단식 구조를 선택해 세대마다 루프탑 테라스같은 개방감을 느낄 수 있도록 했죠.
"이 단지의 견고한 계단형 구조는 고대 언덕 개발 지역의 공동체적 질감을 연상시켜요. 무성한 수직 녹지, 햇빛을 향한 다양한 방향, 자연 통풍이 가능한 유닛, 탁 트인 전망을 제공하며, 계획이나 구조적 효율성을 저해하지 않습니다.”
- 모쉐 사프디, <Dezeen>과의 인터뷰 중
ⓒSafdie Architects
그러면서도 각 세대가 단절되지 않도록 전체적인 구조를 설계했어요. 일단 다공성이 뛰어나 공기과 빛이 잘 투과되는 것은 물론, 각 타워를 연결하는 3개의 스카이 브릿지에 수영장, 산책로 등을 개발했어요. 밀도를 낮추고 자연을 흠뻑 누릴 수 있도록 한 것은 물론, 입주민들이 모일 수 있는 공공 공간을 통해 ‘마을’과 같은 주거 단위 클러스터를 형성하고자 했죠.
ⓒSafdie Architects
ⓒSafdie Architects
이렇게 고밀도, 고층 주거 공간일 수록 자연을 들이고, 커뮤니티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건 중요해요. 규모가 클 수록 웅장하고 위압감을 주기 마련이지만, 그 사이에 식물이 있고,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오히려 규모 덕분에 살기 좋은 공간이 되니까요.
"500미터 길이의 건물을 보면 작고 웅장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건물을 더 작은 부분으로 나누면 더 편안하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아스팔트 정글을 형성하는 건물을 보면 빛과 자연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식물을 들여놓으면 항상 기분이 좋아집니다. 식물이 있으면 자연이 함께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식물이 살아남을 수 있다면 우리도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대규모 단지에서 회복하고자 하는 웰빙의 요소들입니다.”
- 모쉐 사프디, <Prestige>와의 인터뷰 중
87세의 거장, 직업으로서의 건축가를 말하다
모쉐 사프디는 싱가포르의 아이코닉한 건축물부터 일상의 기본인 주거 단지까지, 싱가포르의 도시 풍경은 물론 싱가포르 사람들의 생활을 바꾼 건축가예요. 실제로 그는 건축가로서 가져야 할 막중한 책임감에 대해 강조해요. 올해로 87세인 노익장이자 평생의 대부분을 건축가로 지낸 그가 말하는 건축가로서의 사명에는 남다른 깊이가 느껴져요. 특히 그 어느 때보다 건축가의 역할이 중요해진 지금, 건축가에 대한 그의 생각은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줘요.
“건축가는 ‘건물 설계’라는 미시적인 차원을 넘어 그 책임을 확장해야 합니다. 도시 생활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거시적인 차원에서 노력해야 해요. 제 경력의 초점은 바로 도시 생활의 거대한 틀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 모쉐 사프디, <Stir World>와의 인터뷰 중
단순히 한 도시를 대표하거나 시각적 놀라움을 주는 건축물을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 거주와 도시 환경의 질적 향상이라는 문제에 진지하게 관심을 갖는 건축가라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가져야 해요. 사람들이 자신의 공간에 있는 것을 즐기는지, 건물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건물은 도시, 즉 거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등 고찰이 필요하죠. 모쉐 사프디가 그랬던 것처럼요.
모쉐 사프디가 가진 건축가로서의 직업 의식, 더 나아가 윤리 의식은 2009년 발간한 그의 에세이 <윤리, 질서, 복잡성에 관하여(On Ethics, Order and Complexity)>에 잘 드러나요. 그는 건축물을 짓는 데 필요한 윤리적 틀의 구성 요소들을 끊임없이 정의하고자 노력한다고 밝혔어요. 건축가로서 가져야 하는 체크리스트라고 말하면서요.
“수십억 명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직업, 그리는 모든 선과 만드는 모든 디자인이 경제적, 생태적, 사회적, 행동적, 심리적, 영적 영향을 미치는 직업은 반드시 심각한 토론이 가능한 윤리적 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 모쉐 사프디, <On Ethics, Order and Complexity> 중
그는 건축가에게 건축하는 대상의 행복을 위해 봉사할 의무가 있다고 말해요. 건물을 설계하는 모든 과정에서 그 건물에 살 사람들에 빙의한다면 그것이 성공의 절반이라고 하면서요. 건물을 사용할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으로 설계하는 거장 덕분에 더 많은 사람들이 생활자 친화적 일상을 누릴 수 있는 것 아닐까요?
Reference
safdie architects' monumental 'raffles city chongqing' begins phased opening in china
Moshe Safdie on Marina Bay Sands: a single tower would have been "unbearable”
The Problem Solver, an Interview with Moshe Safdie
Moshe Safdie completes Singapore Sky Habitat featuring aerial "streets" and gardens
Moshe Safdie believes the world needs architects now more than ever
Marina Bay Sands / Safdie Architects
Jaron Lubin, Principal, Council on Tall Buildings and Urban Habitat (CTBUH) Journal, 2016 Issue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