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대는 픽 디자인의 삼각대가 나오기 전과 후로 나뉘어요. 그래봐야 삼각대인데, 뭐가 그리 대단하냐고요? 삼각대는 좋은 사진을 위한 필수 장비예요. 하지만 문제는 부피와 무게죠. 완성도와 휴대성 사이의 딜레마를 픽 디자인 삼각대가 풀었어요. 방법은 간단해요. 삼각대 다리 모양을 원형에서 타원형으로 바꾼 거예요. 이렇게 하니 빈공간이 사라지고 부피와 무게가 확 줄어요.
이 콜롬버스의 달걀 같은 아이디어를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인 킥 스타터에 올렸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어요. 후원금액 약 1천 2백만 달러(약 164억원), 후원자수 27,166명. 2019년 킥스타터 펀딩 순위 1위, 그리고 역대 킥스타터 펀딩 순위 8위. 픽 디자인이 디자인한 삼각대 ‘트래블 트라이팟(Travel Tripod)’의 기록이에요. 제품을 출시하기도 전에 160억원 이상의 매출을 기록한 셈이죠.
운이 좋아 어쩌다 한 번 성공한 것도 아니에요. 그동안 10개의 프로젝트에서 무려 3천 4백만 달러(약 450억원)이 넘는 펀딩 금액을 달성했죠. 비결은 기존에 없던 제품으로 새로운 기준을 세우는 데 있어요.
픽 디자인 미리보기
• 기존에 없던 제품으로 ‘새로운 기준’을 세운다
• #1. 당연함을 부정하면 혁신이 시작된다
• #2. 제품에도 버전업이 필요하다
• #3. 온라인의 장점을 접목하면 매장도 새로워진다
• #4. 해결책은 문제를 인지하는 데서 나온다
• 새로워지되, 새로워지지 말아야 하는 것
시작하는 데만 8년이 걸린 사업이 있어요. 때는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미국에서 오스트리아 아티스트의 공연을 열고 싶었던 페리 첸은 고민에 빠지죠. 지금이야 글로벌 투어가 익숙하지만 당시에 유명하지 않은 가수를, 그것도 해외에서 데리고 오는 것은 개인의 힘으로 어려운 일이었죠.
그때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콘서트를 보고 싶은 팬들을 모아 돈을 마련하면 주최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죠. 한 명이었다면 상상의 영역이지만, 여럿이라면 가능의 영역이니까요. 결국 아쉽게도 콘서트는 열리지 못했지만, 새로운 사업의 기회는 열렸어요. 미국의 대표적인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킥스타터’의 시작이에요.
크라우드 펀딩이란, 사업 초기의 참신한 아이디어 제품 또는 서비스를 대중으로부터 후원 받아 제작하는 시스템이에요. 보상으로 개인은 누구보다 먼저 제품과 서비스를 만나볼 수 있죠. 처음에는 제품 위주였지만 지금은 영화, 출판, 예술 등 다양한 크리에이트브의 영역으로 확장했어요.
그 규모도 놀라워요. 2022년 11월, 기준 총 229,844 프로젝트가 펀딩을 받았으며 누적 펀딩 금액은 약 63억달러(약 8조 3천억원)에 달해요. 1억원 이상 투자를 받은 프로젝트의 개수도 10,000개가 넘죠. 그렇다고 모두가 빛을 보는 건 아니에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프로젝트도 많으니까요. 킥 스타터에서 밝힌 성공율은 전체 프로젝트의 37% 수준. 나머지는 기한 내에 펀딩을 받지 못하여 사라지는 프로젝트죠.
이렇게 한 개를 제대로 런칭하기도 어려운데 무려 10개의 제품을 펀딩 받은 브랜드가 있어요. 게다가 성적도 화려해요. 누적 후원자는 136,584명, 후원 금액은 약 3천 4백만 달러(약 450억원)을 올린, 픽 디자인이에요.
기존에 없던 제품으로 ‘새로운 기준’을 세운다
픽 디자인은 카메라 장비와 가방을 디자인하는 브랜드예요. 창업자 피터 데링은 세계 여행을 하며 사진을 찍는 사진 작가였죠. 그는 좋은 사진을 위해 DSLR을 가지고 다녔지만 이동 시마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카메라에서 불편을 느꼈어요. 카메라 기술의 발전에 비해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기술은 아직 더디다고 생각한 그는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10개월간 제품 개발을 했어요.
픽 디자인이 제작한 최초의 카메라 장비, '캡쳐'입니다. ⓒPeak Design
그렇게 개발한 첫 번째 제품 ‘캡쳐(Capture)’. 이 제품을 킥 스타터에서 크라우드 펀딩받기 시작했어요. 캡쳐는 기존에 없던 방식의 카메라 탈부착 장비예요. 일반적으로 DSLR은 목에 걸고 다니는데 움직일 때 좌우로 흔들려 불안정하고, 목에도 무리가 가죠. 안전하게 가방에 넣고 다니자니 정작 필요한 순간에 꺼내기가 번거롭고요.
캡쳐는 한 번의 손놀림으로 탈부탁이 가능해요. 흔들림이 최소화 되도록 설계되어 안정적이고, 벨트나 가방에 부착한 후 필요할 때 버튼 하나로 탈착이 가능하죠. 모든 카메라 모델에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고요. 안전성과, 편의성, 범용성을 동시에 갖췄죠.
ⓒPeak Design
기존에 없었지만, 기본에 충실한 제품에 소비자들은 반응해요. 2011년 5월부터 한 달 반 남짓한 기간동안 하나의 제품으로 5,258명의 후원자를 모아요. 펀딩 금액은 약 36만 달러(약 4억 5천만원)으로 원래 목표였던 800만원의 37배 이상이죠. 펀딩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제품의 가능성을 본 그는 2011년에 픽 디자인을 설립해요. 그리고 그 후로도 계속해서 히트 제품을 출시하며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죠.
#1. 당연함을 부정하면 혁신이 시작된다
픽 디자인은 기존에 없던 제품을 선보여요. 단순히 디자인을 보완하거나, 몇 가지 기능이 추가되는 정도가 아니에요. 삼각대, 가방 등 다양한 카메라 장비를, 기존에 생각하지 못한 발상으로 해석하죠. 기존의 있는 제품을 개선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리스크가 적을텐데 기존에 없던 제품을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기반에는 픽 디자인의 철학이 녹아 있어요. 픽 디자인은 1) 문제 해결 2) 사용의 범용성 3) 심플함 이라는 3가지 디자인 철학을 바탕으로 제품을 만들어요. 픽 디자인의 시그니처 제품인 삼각대를 보면 알 수 있어요.
2019년 킥스타터 펀딩 순위 1위, 그리고 역대 킥스타터 펀딩 순위 8위. 후원금액 약 1천 2백만 달러(약 164억원), 후원자수 27,166명. 픽 디자인이 디자인한 삼각대 트래블 트라이팟(Travel Tripod)의 기록이에요. 여행용 삼각대가 뭐가 그리 다르길래 이정도의 반응을 이끌어낸 걸까요?
삼각대는 좋은 사진을 위한 필수 장비예요. 카메라가 흔들리지 않게 고정할 수 있으면서 높이 조절이 가능해 완성도에 큰 영향을 미치죠. 좋은 사진을 위한 삼각대의 필요성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문제는 무게와 부피에요. 휴대성이 떨어지니 촬영 때 가지고 나갈지 고민이 되고, 이동 중에는 짐이 되기도 하는 존재니까요.
가운데가 픽 디자인의 삼각대 Travel tripod입니다. 빈 공간이 많은 기존 삼각대에 비해 효율적으로 디자인되었습니다©Dpreivew
삼각대의 발을 타원형으로 제작하여 기존 삼각대의 빈 공간을 없앨 수 있었습니다.©Peak Design
픽 디자인의 삼각대는 오랜 시간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을 바꿔 버렸어요. 삼각대 발의 모양을 원형에서 타원형으로 바꾼 거죠. 작은 변화였지만 큰 차이를 가져왔어요. 삼각대의 빈 공간이 사라지고 자연스럽게 부피와 무게가 감소하는 효과가 있었죠. 디자인적으로 안정된 느낌을 주는 것은 덤이고요. 사이즈가 줄었다고 기능까지 줄어든 것은 아니에요. 숨겨진 수납공간, 다양한 촬영 모드 등을 제공하니 매니아들도 열렬하게 반응해요. 이처럼 픽 디자인에서 선보이는 삼각대, 스트랩, 클립 등은 모두가 기존에 없던 새로운 제품들이에요.
픽 디자인에서 출시한 에브리데이 라인 가방들입니다.©Peak Design
#2. 제품에도 버전업이 필요하다
픽 디자인의 시도는 카메라 장비에서 멈추지 않아요. 카메라 장비를 디자인하면서 얻은 노하우와 기술로 일상 제품까지 라인업을 확대하죠. 2016년에는 캐주얼한 디자인으로 일상에서 사용하기 좋은 에브리데이 라인, 2018년에는 수납 등이 편리한 여행용 트래블라인을 선보였어요. 카메라가 일상과 여행 모두에서 사용되는 제품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과정이에요. 카메라 장비로 이미 픽 디자인에 빠져버린 팬들은 새로운 라인업에도 열광했어요. 킥 스타터에서 에브리데이 라인은 총 1천 백만 달러(약 150억 원)을, 트래블라인은 520만 달러(약 70억 원)의 후원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시장에 진출해요.
4번째 버젼인 V4까지 개선한 클립 제품의 발전과정입니다. ©Peak Design
그런데 픽 디자인의 제품들을 가만히 보다보면 흥미로운 표시가 보여요. 제품에다가 V1, V2와 같이 버전을 의미하는 표시를 써놓았거든요. 소프트웨어나 보고서 파일 등과 마찬가지로 숫자가 높아질수록 이전 제품에서 발견한 불편함을 개선한 제품이라는 뜻이죠.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 것만큼이나 기존 제품에 대한 고민도 계속한 결과예요.
물론 오래된 고객을 배려하는 것도 잊지 않아요. 초기 버전의 V1 제품도 V4의 제품과 호환이 가능해요. 초기부터 지금까지 픽 디자인의 제품을 사랑해주는 충성 고객들의 불편을 최소화기 위함이죠. 완전한 새로움뿐만 아니라 오래된 새로움까지도 놓치지 않으려는 픽 디자인의 노력이에요. 이렇게 온라인에서 영향력을 확보한 픽 디자인은 오프라인으로도 진출해요.
#3. 온라인의 장점을 접목하면 매장도 새로워진다
카메라는 세심한 장비에요. 장비를 얼마나 익숙하게 사용하는지, 피팅은 얼마나 정확하게 했는지에 따라 촬영의 결과물이 달라지죠. 그래서 초보자는 물론이고 전문가들도 기존에 사용해보지 않은 장비를 구매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해요. 전에 없던 장비를 만드는 픽 디자인이 이를 모를리 없죠.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플래그십 매장에서는 픽 디자인이 새로운 제품을 낯설지 않게 제안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시티호퍼스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한 판에 정렬된 부품들이에요. 장비를 구성하고 있는 부품을 분리해 디스플레이 함으로써 부품 하나하나의 존재감을 강조하고, 기술력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효과가 있죠. 모든 부품들은 픽 디자인에서 자체 제작한 부품들이고요. 픽 디자인의 대부분의 제품들이 개별적으로 부품 교체가 가능하고 호환되기 때문에 고객들은 마음 놓고 새로운 장비를 편하게 사용해볼 수 도 있어요.
ⓒ시티호퍼스
ⓒ시티호퍼스
매장 내 제품에는 작은 종이가 붙어 있어요. 얼핏 가격표 같아 보이지만 이는 제품의 설명을 적어놓은 설명쪽지예요. 특징적인 점은 제품 앞에 간략한 소개를 써놓은 게 아니라 제품 위에 붙여 놓여 놓았다는 거예요. 제품에서 강조하고 싶은 부분, 고객들이 궁금해할 만한 포인트를 적어 놓았죠. 온라인 쇼핑몰에서 상세 페이지와 FAQ 등을 통해 설명하는 내용을 오프라인 매장 버전으로 구현한 셈이에요. 이 설명쪽지가 어느정도 점원의 역할을 대신하는 건 물론이고요.
ⓒ시티호퍼스
제품을 디스플레이하는 방법도 새로워요. 픽 디자인의 가방은 의류 매장과 같이 전부 옷걸이에 걸려있어요. 보통의 매장에서 가방을 선반에 진열하거나 벽에 걸어 놓는 것과 다른 느낌이죠. 이렇게 옷걸이에 걸려있으면 통일감을 주는 디자인적인 효과와 함께 패션웨어로서의 포지셔닝도 가능해져요. 가방을 옷걸이에 디스플레이함으로써 새로운 포지셔닝을 고객들이 인지할 수 있도록 넌지시 제안하는 거예요.
ⓒ시티호퍼스
옷걸이에서 가방을 꺼내다 보니 옆에 눈에 띄는 물건이 보여요. 다양한 크기의 나무 판자예요. 바로 잠재고객의 전자제품이 가방에 들어가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모형이죠. 구매할 가방에 자신의 전자제품이 잘 들어가는지 확인하는 것은 필수예요. 그렇다고 가방을 구매하기 위해 랩탑을 챙겨 나가기는 귀찮고, 설령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가지고온 가방에서 꺼내서 테스트하는 건 번거롭죠. 그냥 지나가다 들른 사람도 있을 거고요.
그래서 픽 디자인에서는 전자제품의 크기대로 나온 나무판자를 준비해요. 15인치, 13인치 크기의 맥북은 물론 타블렛 사이즈도 크기 별로 준비하여 고객들이 자신의 기기가 가방과 맞을지, 넣고 나서의 수납 공간은 충분한지를 바로 확인할 수 있죠.
#4. 해결책은 문제를 인지하는 데서 나온다
픽 디자인의 고민은 역설적으로 제품이 잘 팔린다는 것이에요. 제품이 팔릴수록 환경에 작게나마 안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죠. 파타고니아처럼 우리 제품을 사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환경보호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하죠.
우선, 픽 디자인은 그들이 만들고 판매하는 제품에서 공해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요. 그리고 생산하기 전부터 공해를 만들지 않을 의무가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요. 최근 유행하는 친환경, 지속가능성 트렌드에 올라타기 위해 숨기거나 포장하기보다 투명하게 드러내고 개선방안을 찾는 거예요.
친환경 소재를 사용하는 것이 그 시작이죠. 2018년 이후부터 생산된 가방은 100% 재활용 나일론, 폴리스터 소재를 활용해서 제작해요. 물론 R&D를 꾸준히 하면서 새로운 재활용 소재를 연구하기도 하고요. 생산 과정의 지속가능성도 신경써요. 동남아시아에 위치한 픽 디자인 공장에서 일하는 수백명의 근로자들에게 높은 수준의 작업환경을 보장해주고 정당한 일자리를 제공하거든요.
단순히 제품뿐만 아니라 크리에이티브의 지속가능성도 서포트해요. 픽 디자인은 카메라 관련 장비와 가방을 판매하는 회사예요. 회사가 지속하기 위해서는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있어야 하지만, 사진을 찍기 위한 대상, 즉 환경도 지속 가능해야 하죠. 픽 디자인이 환경 콘텐츠를 제작하는 작가들을 후원하고 매출의 1%를 환경 보호를 위해 기부하는 이유예요. 콘텐츠가 필요하지만 제작 능력이 부족한 환경 재단과 자연보호에 관심이 있는 작가들을 연결해주기도 하고요. 서로를 도우며 지속가능한 생태계를 만드는 교집합에 픽 디자인이 있어요.
새로워지되, 새로워지지 말아야 하는 것
ⓒ시티호퍼스
No venture capital
No board of directors
No Investors dictating design
Just us and our customers
매장 한 가운데 걸려 있는 문구에요. 간단한 문장이지만, 픽 디자인의 간단하지 않은 철학을 담았죠. 픽 디자인이 신경을 쓰는 건 벤처 캐피탈도, 이사회도, 투자자들도 아니에요. 픽 디자인이 귀기울이는 유일한 목소리는 자기자신과 고객의 피드백뿐이죠.
그 배경엔 크라우드 펀딩이 있어요. 크라우드 펀딩을 받을 수 있었기에, 벤처 캐피탈 등의 투자자 없이도 제품 양산을 알 수 있었죠. 크라우드 펀딩으로 제품을 양산해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픽 디자인과 고객이 원하는 혁신적인 제품을 그 어떤 방해없이 오롯이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 더 큰 의미가 있어요. 그래서 픽 디자인은 투자자나 이사회 등 외부의 목소리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고객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그리고 귀기울일 수 있는 거고요.
이미 10번 이상의 펀딩을 진행했고, 안정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한 픽 디자인이 계속해서 크라우드 펀딩을 하는 이유는 하나예요. ‘고객을 위한 혁신’이죠. 초기의 자신들을 지지해준 기반을 잊지 않고, 그들과 계속해서 관계를 이어나가려는 거예요. 이처럼 픽 디자인에게 크라우드 펀딩은 매출을 일으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고객을 향하는 철학을 구현하기 위한 도구예요. 픽 디자인의 고객이 오래될수록 픽 디자인의 미래는 계속 새로워질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