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률을 거스르는 흥행의 비결, 픽사에는 3P가 있다

픽사

2022.06.29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한다면 받아들여야 할 2가지 숙명이 있어요. 하나는 흥행에 성공할 확률보다 실패할 확률이 훨씬 더 크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어떤 작품이 흥행에 성공할 지 모른다는 거예요. 이게 숙명이라면 콘텐츠를 흥행시킨다는 건 사실상 운에 의존한다고 볼 수 있죠. 그런데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픽사’는 이 숙명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해요.


픽사가 내놓은 작품들을 보면 흥행에 성공하는 것보다 실패하는 게 더 어렵다고 말하는 듯해요. <토이 스토리>, <인크레더블>, <카> 등 시리즈물부터 <라따뚜이>, <인사이드 아웃>, <코코> 등 본편만 있는 애니메이션까지 냈다하면 히트를 쳤어요. 한두 편의 흥행이야 운이 좋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정도라면 비결이 있다고 밖에 볼 수 없죠.


그렇다면 픽사는 어떻게 콘텐츠 제작사의 숙명을 거스를 수 있는 걸까요? Place, Process, Philosophy 등 3P로 설명할 수 있어요.  



픽사 미리보기

• #1. Place - 메이커의 시간에 어울리는 공간은 따로 있다

 #2. Process - 문제를 발견하면 누구라도 손을 든다 

 #3. Philosophy - 새로운 아이디어에겐 친구가 필요하다

 3P는 공룡도 춤추게 한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워>,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공통점은 뭘까요? 크리스 에반스가 등장한다는 점, 슈퍼히어로 장르라는 점, 마블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영화라는 점, 속편이라는 점 등이 있어요. 이중에서 속편이라는 점은 인기있는 다른 할리우드 영화와도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요. 할리우드 영화를 가만히 보면 캡틴 아메리카나 어벤져스 말고도 <스타워즈>, <007>, <미션 임파서블>, <분노의 질주> 시리즈 등 속편이 넘쳐나죠. 그렇다면 도대체 속편은 왜 만드는 걸까요? 본편만한 속편이 드문데 말이죠.


속편이 계속 나오는 이유를 알기 위해선 영화 산업에 대한 이해가 필요해요. 영화 산업은 ‘블록버스터’ 비즈니스 모델을 가진 산업이에요. 제작한 모든 영화에서 수익이 나는 것이 아니라, 흥행한 몇 개의 영화에서 큰 수익을 얻고 나머지 영화에서는 손해를 보는 특징을 가지고 있죠. 대박이 난 몇개의 영화에 의존하기 때문에 영화 산업의 수익률은 편차가 커요. 한국 영화 시장을 예로 들어볼게요.




한국 영화 중 상업적 목적으로 제작한 영화의 평균 수익률이에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특수성이 있어서 2020년 데이터를 제외한다 하더라도 지난 10년 간 수익률이 들쑥날쑥하죠? 이 정도면 과거 데이터를 바탕으로 혹은 산업의 손익 구조를 바탕으로 수익성을 예측하거나 평균값을 찾는 건 사실상 어려워요. 각 해의 평균 수익률을 분석적으로 들여다보면 영화 산업의 특징이 더 또렷하게 보이죠. 


2019년에 45편의 상업 영화가 제작되었고, 평균 수익률은 10.9% 기록했어요. 이 중 손익분기점을 넘긴 영화는 20편으로 절반에 못 미쳐요. 수익을 낸 영화는 평균적으로 20% 이상의 수익률을 달성했다는 뜻이죠. 하지만 이 마저도 평균을 이야기하기 어려워요. 수익을 낸 20편의 영화 중 10편은 수익률 50% 이상, 5편은 수익률 100% 이상을 달성했으니까요. 이 정도의 수치면 수익률이 50% 미만인 영화는 수익이 거의 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죠. 제작비는 어느 정도 평균값이라는 게 있으니 영화 산업의 평균 수익률은 결국 손익분기점을 크게 넘은 소수의 영화에 달려있는 셈이에요.


여기에 영화 제작사들이 속편을 만드는 이유가 있어요. 영화 산업이 이러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흥행한 영화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하는 거죠. 속편이 나오면 본편의 팬들을 끌어들여 안정적인 수익을 기대할 수 있으니 영화 제작사의 속이 편해져요. 여기에다가 기존 팬들이 만들어 내는 초반의 흥행몰이 덕분에 본편을 보지 않았던 사람들도 영화관으로 불러들일 수 있죠. 미국 영화 산업 사례를 보면 속편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이해할 수 있어요.




미국 영화 박스오피스 첫 주말 흥행 순위 베스트 10을 보면, 2개 빼고 다 속편이 차지하고 있어요. <어벤져스>나 <블랙 팬서>의 경우 시리즈의 첫 편이기는 하지만 마블 세계관 속에서 나온 작품이라 사실상 속편이라고 볼 수 있죠. 작품성 관점에서는 본편만한 속편을 찾기 어렵지만, 흥행성 관점에서는 속편만한 본편을 찾기가 쉽지 않아요. 


일부 흥행작에 기대는 게 영화 산업의 구조적 속성이라, 영화 제작사라면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이에요. 그런데 이를 거스르는 영화 제작사가 있어요. 바로 ‘픽사’죠. 엄밀히 말하면 애니메이션 제작사지만, 실사냐 애니메이션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 본질적인 속성은 같아요. <토이 스토리>, <인크레더블>, <카> 등 시리즈물부터 <라따뚜이>, <인사이드 아웃>, <코코> 등 본편만 있는 애니메이션까지 픽사가 내놓은 작품들을 보면 흥행에 성공하는 것보다 실패하는 게 더 어렵다고 말하는 듯해요. 한두 편의 흥행이야 운이 좋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정도라면 비결이 있다고 밖에 볼 수 없죠. 그렇다면 픽사는 어떻게 조직적 창의성을 유지하길래, 제작사의 운명을 거스를 수 있는 걸까요? Place, Process, Philosophy 등 3P로 설명할 수 있어요. 



#1. Place - 메이커의 시간에 어울리는 공간은 따로 있다

픽사는 일하는 곳을 사무실이 아니라 캠퍼스라 불러요. 이름에서부터 대학교와 같은 자유로움이 느껴지고, 창의적인 생각을 자극할 것만 같아요. 이름만 그런 게 아니에요. 사무실의 공간 구성 역시도 창의성을 끌어올릴 수 있게 설계했죠. 고 스티브잡스의 이름을 딴 메인 빌딩에 들어서면, 중앙에 4~5개층을 터 놓은 듯한 탁 트인 공간이 있어요. 미네소타 대학의 조앤 마이어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30cm 높아질 때마다 창의성과 상상력이 2배씩 높아진다고 하는데, 이정도의 층고라면 창의성이 높아지지 않는 게 이상하죠. 



ⓒ시티호퍼스


이걸로 부족했는지 픽사는 천장을 유리로 만들었어요. 그래서 하늘이 보여요. 천장 때문에 생기는 창의성의 제약이 사라지는 셈이죠. 그런데 이 유리 천장을 가만히 살펴보면 창의적인 환경을 구현하기 위해 디테일까지 고민한 흔적이 눈에 들어와요. 유리 천장이 평평하지 않고 직각 삼각형을 여러 개 붙여놓은 듯이 솟아 있어요. 그리고 빗면은 빛이 투과되지 않는 소재로, 세로로 서있는 면은 유리로 구성했죠. 평평한 부분을 입체적으로 바꾸면 천장의 면적이 늘어나 공사비가 올라갈텐데, 어떤 이유로 천장 모양과 소재에 변형을 준 걸까요?




맞아요. 이렇게 하니 온실 효과를 방지할 수 있어요. 천장을 유리로 만들면 하늘을 볼 수 있지만 그 안의 공간은 찜통이 될 거예요. 햇살이 강한 캘리포니아 지역이라 더 그렇겠죠. 그런데 천장의 모양과 소재에 변형을 주니 유리 천장을 통해 하늘을 볼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작렬하는 태양 아래에서도 실내 공간을 쾌적하게 유지할 수 있어요. 이미지를 보면 건물 중앙 바닥에 삼각형 모양의 그림자가 보이죠?        


이제 건물 중앙으로 시선을 옮겼으니,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게요. 픽사 캠퍼스 설계를 진두지휘한 스티브 잡스는 사람들이 섞여서 일하는 환경의 힘을 믿었어요. 그래서 메인 빌딩 중앙에 아트리움을 구성해 사람들이 만나고, 소통하면서 생각이 교차하도록 유도했어요. 이곳에는 식사 공간, 게임 공간, 우편실, 화장실 등 업무 외에 필요한 공간 요소들을 넣어 사람들이 오고 가면서 우연히 마주칠 확률을 높였죠. 


어느 정도로 사람들을 마주치게 만들고 싶었냐면, 처음 설계할 때는 화장실을 하나만 만들려고 했어요. 누구나 화장실을 가게 되니, 화장실을 하나만 만들면 반드시 사람들이 마주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죠. 하지만 동선이 너무 길어지는 문제와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고려해 최종적으로는 각 코너에 화장실을 배치했어요. 화장실을 하나만 두려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로 그 큰 건물에 출입구도 하나만 만들었어요. 누구나 건물을 드나드니 출입구가 하나만 있으면 서로 마주칠 확률이 높아지죠. 픽사 캠퍼스를 안내해주셨던 직원 분이 자기도 스티브 잡스와 직접 인사한 적이 있는데, 스티브 잡스가 출입구에서 뒤따라 들어가는 자기를 위해 문을 잡아주면서 인사를 건넸다는 거예요. 그의 계획대로 된 셈이죠.       


이처럼 우연한 만남을 유도하는 개방형 오피스는 실리콘밸리의 많은 기업에서 볼 수 있어요. 하지만 픽사 캠퍼스가 차별화되는 지점은 창의적 업무의 속성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공간 구성에 녹여냈다는 거예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매니저의 시간’과 ‘메이커의 시간’의 차이를 알아야 해요.


전설의 액셀러레이터 ‘와이 콤비네이터’의 폴 그레이엄은 시간을 구분해서 봤어요.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들의 시간인 메이커의 시간과 업무를 관리하는 사람들의 시간인 매니저의 시간으로요. 메이커에게는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집중과 몰입의 시간이 필요해요. 그리고 집중과 몰입 단계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초반에 예열하는 시간이 있어야죠. 그래서 메이커의 시간은 덩어리로 구성되어야 해요. 상사가 불렀건, 커피 타임이건 한 번 끊기면 예열 시간이 반복되어 비효율이 발생하죠. 반면 매니저는 시간을 쪼개서 사용해야 해요. 다양한 이해관계자를 만나고, 조율하고, 진행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서죠. 


업무 속성에 따라 시간의 성격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개방형 오피스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어요. 개방형 오피스는 우연한 만남을 통해 직원들과의 소통과 정보 교류는 활성화할 수 있지만, 메이커들의 창의성과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구조죠. 그래서 픽사 캠퍼스 메인 빌딩 2층은 독립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창작 작업에 몰입할 수 있게 자기만의 방이나 팀으로 일하는 방으로 이루어져 있죠. 이렇게 개인의 작업 공간을 할애한 또다른 이유도 있어요. 방을 각자의 개성에 따라 꾸밀 수 있도록 해 개개인이 자기 표현을 할 수 있게 한 거예요. 


창의성을 끌어올리기 위해 층고를 하늘까지 높이고, 직원들과의 우연한 만남을 유도해 아이디어가 교류될 수 있게 만들면서도, 메이커의 시간을 확보하는 구조로 공간을 구성해 창작 활동에 몰입할 수 있게 만들었으니 조직적 창의성이 구현될 수 있는 물리적 환경은 마련이 되었어요. 하지만 공간만으로 조직적 창의성을 높일 수 있다면, 어느 기업이건 픽사같은 창의적인 조직을 만들 수 있겠죠. 일하는 장소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해요. 그 공간에서 펼쳐지는 작업 방식도 살펴봐야 하죠. 



#2. Process - 문제를 발견하면 누구라도 손을 든다



ⓒ시티호퍼스


픽사에는 2가지 원칙이 있어요. 제 1원칙은 ‘스토리가 왕’이죠. 작품 제작 과정에서 어떠한 요소도 스토리보다 우선할 수 없어요. 아무리 혁신적인 기술이라도, 혹은 아무리 캐릭터 상품화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라도 스토리 전개에 적합하지 않다면 넣지 않는 거죠. 관객은 그래픽 기술이나 캐릭터 상품이 아니라 감동을 주는 스토리에 픽사의 팬이 되니까요.


제 2원칙은 ‘프로세스를 신뢰하라’는 거예요.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창작의 과정에서 다양한 문제에 부딪히고, 실수를 저지르며, 벽에 막히는 상황이 발생하지만, 프로세스를 작동시키면 끝끝내 해결이 된다는 믿음이에요. 정신승리 같은 주문일 수 있어도, 프로세스를 신뢰하라는 원칙은 실체가 있는 접근 방식이기도 해요. 그렇다면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돕는 픽사의 프로세스는 무엇일까요?


픽사 CEO 에드 캣멀은 프로세스를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도요타의 생산 시스템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그중에서도 ‘안돈’ 시스템에 주목했죠. 안돈 시스템은 제조 과정에서 생산 라인에 있는 직원이 문제를 발견할 경우, 직급에 관계 없이 누구라도 생산 라인을 멈출 수 있도록 한 시스템이에요. 가장 창의적인 기업에서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을 벤치마킹하다니, 뭔가 아이러니하죠? 하지만 그는 도요타의 효율적인 생산 시스템과 픽사가 추구해야 할 창의적인 제작 시스템의 본질이 맞닿아 있다고 봤어요. 


도요타에서 누구나 생산 라인을 멈출 수 있게 한 건 문제를 조기에 발견하고 해결하기 위해서죠. 이 시스템 덕분에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아야 하는 상황을 방지할 수 있어요. 생산 관리 관점에서 보면 효율성을 높이는 거지만, 조직 관리 관점에서 보면 자발성을 끌어올려줘요. 직원들이 컨베이어벨트 위의 부품을 조립하는, 톱니바퀴 같은 영혼 없는 존재가 아니라 제조 과정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데 기여하는 구성원이라고 느끼기 때문이죠. 여기에다가 효율을 높이는 진짜 목표는 비용 절감이 아니라 품질 개선에 있어요. 


도요타 안돈 시스템의 본질만 놓고 보면 자동차 제조 과정을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으로 바꿔도 무방해요.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창의적인 작품으로 구현하는 건 결국 사람이 만드니까요. 둘 사이에 본질이 맞닿아 있는 건 이해가 가지만,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은 컨베이어벨트와 달리 현황이 실시간으로 눈에 보이지 않아요. 또한 문제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명확한 판단 기준이 있지 않죠. 또한 컨베이어벨트처럼 작업 과정이 눈에 보이지도 않아요. 그렇다면 픽사는 어떻게 도요타의 생산 시스템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소화하고 적용했을까요?


도요타에 안돈 시스템이 있다면, 픽사에는 ‘브레인 트러스트’ 시스템이 있어요. 브레인 트러스트를 간단하게만 보자면 직원들을 한 공간에 모아 놓고, 제작 중인 애니메이션의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할 수 있도록 솔직하게 의견을 주고 받는 거예요. 애니메이션 제작팀이 해당 작품을 가장 잘 이해할텐데, 굳이 제작팀 밖의 직원들 의견을 듣는 이유는 창작 과정의 보편적 속성에 있어요.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은 제작 프로세스 도중 종종 길을 잃어요. 작품에 빠져있다보면 놓치거나 잘 보이지 않는 부분들이 생기죠. 이럴 때 주변 사람들의 훈수가 큰 도움이 돼요. 


쉽게 말하면 제작 팀 외부의 조언을 듣는 건데, 브레인 트러스트가 어느 기업에나 있는 피드백 시스템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2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어요. 첫째는 브레인 트러스트에 참여하는 사람이에요. 작품 제작에 참여해 본 경험이 있는 감독, 각본가 등 스토리텔링에 대한 이해가 깊은 사람들이 브레인 트러스트에 참여하죠. 그래서 현재 작품을 제작하고 있지 않더라도 그들에 대한, 그리고 작품에 대한 이해와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할 수 있어요. 둘째는 피드백의 수용 여부예요. 브레인 트러스트 회의에서 나온 피드백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결정하는 것은 감독의 몫이죠. 또한 브레인 트러스트에서 감독의 고민과 문제를 대신해서 해결해 주길 바라지도 않아요. 결국 작품을 만드는 건 감독을 중심으로 한 제작팀이니까요. 


토이 스토리를 비롯해 대부분의 작품이 브레인 트러스트를 거쳐 업그레이드 되었죠. 하지만 브레인 트러스트라는 프로세스가 있다고 해서 작품이 반드시 더 나아지는 건 아니에요. 그랬다면 많은 기업들이 흉내낼 수 있었겠죠. 픽사의 조직적 창의성이 어떻게 지속적으로 구현되는지를 알기 위해선, 눈에 보이진 않지만 작품의 클래스를 높이는 데 일관되게 영향을 미치는 철학을 이해해야 하죠.    



3. Philosophy - 새로운 아이디어에겐 친구가 필요하다


할리우드에는 스토리를 만들 때 이런 공식이 있다고 해요. 


(캐릭터 + 욕망) / 방해물 = 이야기


<소설가의 일>에서 김연수 소설가가 설명하는 이야기의 구조예요. 어떤 주인공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방해물을 만날 때 이야기가 만들어진다는 거죠. 여기서 중요한 건 ‘방해물’이에요. 캐릭터가 무탈하게 욕망을 달성한다면 해피엔딩이 될 수는 있어도,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될 수는 없죠. 가만히 보면 픽사가 제작한 애니메이션도 그래요. 뭐하나 순탄하게 전개되는 일이 없어요. 


애니메이션만 그런 게 아니에요.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과정도 마찬가지죠. 감독을 비롯해 팀원들이 감동을 주는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작업을 시작하지만 이내 난항을 겪죠. 그것도 여러 번이나요. 애니메이션에서는 해결이 가능한 방해물을 인위적으로 설정한 것인 반면, 제작 과정에서 마주치는 방해물은 예상하기도 어렵고 해결이 가능한지도 모를 문제들이에요.  


이 때 방해물을 이해하는 2가지의 관점이 있어요. 하나는 방해물을 제거의 대상으로 보는 거예요. 애니메이션이야 방해물로 인해 이야기가 재미있어 지지만, 경영에서는 방해물이 없어야 효율성이 올라가죠. 또다른 하나는 방해물을 극복해야할 대상으로 보는 거예요. 창작이라는 미지의 세계에서 어차피 방해물은 생길 수밖에 없으니 제거하려고 애쓰기보다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접근이죠.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어요. 전자는 경영자의 관점이고, 후자는 창작자의 관점이니까요. 예상 가능하겠지만, 픽사는 창작자의 편에 서죠. 이처럼 방해물에 관대해지기 위해 픽사는 마인드셋을 달리 해요. 



ⓒ시티호퍼스


첫째, 정직함이 아니라 솔직함을 강조해요. 문제를 해결하려면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아야 하죠. 그래서 픽사는 문제가 생겼을 때, 혹은 문제를 인지했을 때 숨김 없이 이야기하도록 장려해요. 그러기 위해 정직(Honesty)하기보다 솔직(Candor)하기를 기대하죠. 두 단어의 뜻은 비슷하지만 솔직함에는 윤리적인 함의가 적어요. 그만큼 숨길 이유가 줄어들죠. 게다가 솔직함이라는 단어에는 사실을 말한다는 뜻뿐만 아니라 숨기지 않고 털어놓는다는 의미도 있어요. 단어가 가진 힘 때문에 문제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가능성도 높아져요.       


둘째, 실패를 필요악이 아니라 필요선으로 여겨요.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다는 건 누구나 알지만 막상 실패를 하면 아파요. 실패의 긍정적인 효과보다 실패로 인한 부정적인 감정이 앞서기 마련이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실패를 필요악으로 보지만, 픽사에서는 실패를 악으로 보면 실패의 가치를 제대로 향유하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실패를 새로운 일을 하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긍정적인 경험으로 받아들이고, 실패할 경우 학습 혹은 성장의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실패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쓸모 없을 수도 있지만 최소한 몰랐던 곳을 탐색해봤다는 의미가 있고, 또한 나중에 다른 작품에서 활용할 소재가 될 수도 있다는 식이죠.  


셋째, 아이디어 파괴자가 아니라 아이디어 보호자를 자처해요. 이는 픽사 CEO 에드 캣멀의 경험에서 우러난 철학이에요. 그는 여러 해 동안 어느 컨퍼런스에 배포할 논문을 선정하는 위원회에 참가했는데, 여기에서 두 부류의 심사자들이 있다는 걸 보게 되었죠. 한 부류는 결함을 찾아내 논문을 기각하는 데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아이디어 파괴자. 또다른 부류는 논문에서 새로운 아이디어의 결함을 발견하면 개선하길 바라면서 피드백하는 아이디어 보호자. 그는 생각했어요. 부정적인 피드백은 재미있을지 몰라도, 검증되지 않은 아이디어를 옹호하고 그 아이디어가 성장할 여지를 주는 피드백보다 덜 담대하다고요. 만약 논문에 비유한 게 어렵게 느껴진다면, 그가 고민이 있을 때마다 떠올리는 <라따뚜이>의 마지막 장면을 참고해도 괜찮아요. <라따뚜이>에 등장하는 음식 평론가 안톤 이고는 주인공 레미가 운영하는 구스토 레스토랑의 음식을 평가하며 이렇게 말하죠.


“음식 평론가 일은 여러모로 쉽습니다. 우리는 별다른 위험 부담 없이, 자신의 작품을 평가받으려는 요리사들이 제공하는 음식을 즐기는 유리한 입장에 있습니다. 우리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놓을수록 인기를 끕니다. 부정적인 평론은 쓰기도, 읽기도 재밌습니다. 하지만 우리 평론가들이 직면해야 하는 냉혹한 진실이 있습니다. 극히 평범한 음식일지라도 음식 평론가의 글보다는 더 의미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론가가 진정으로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옹호하는 순간입니다. 세상은 종종 새로운 재능, 새로운 창조물에 불친절합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지지해줄 친구가 필요합니다.”



3P는 공룡도 춤추게 한다

Place, Process, Philosophy. 이 3P가 픽사의 조직적 창의성을 만들어내는 필요조건이에요.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어요. 픽사니까 가능한 일 아닌가라는 회의적인 시선이죠. 물론 3P를 갖춘다고 조직적 창의성이 생기진 않아요. 3P는 필요조건일 뿐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3P가 있다면 어떤 조직도 창의적 조직으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어요. 픽사의 경영진이 바꿔놓은 디즈니의 사례를 보면요.


잘 나가던 픽사는 디즈니와 인수합병하기로 결정해요. 픽사 경영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전략적으로 서로에게 도움이 될 거란 판단에서였죠. 픽사는 디즈니의 전 세계적인 배급력과 굿즈, 테마파크 등으로 상품화하는 역량이 부러웠고, 디즈니는 픽사의 창의적인 작품 기획 및 제작 능력을 얻고 싶었죠. 디즈니는 한 때 애니메이션 왕국이었으나 인수합병을 통해 픽사의 애니메이션 제작 역량을 필요로 할만큼 조직적 창의성이 무너진 상황이었죠. 제대로 된 히트작을 못 낸 건 물론이고요.    


합병 후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없애려는 논의가 있었어요. 각 회사가 핵심 역량에 집중하면서 효율적인 운영을 하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픽사 경영진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부활시키기로 결정했어요. 그리고는 픽사와 디즈니의 두 스튜디오를 철저하게 별개의 회사로 운영했죠. 아무리 문제가 심각하고, 인력이 부족해도 절대 서로 인력을 교환하지 않을 정도였어요. 이런 원칙을 가지고 픽사 경영진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조직적 창의성을 끌어올리기 시작해요. 


픽사 CEO 에드 캣멀이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맡으면서 가장 먼저 한 업무 중 하나가 일터(Place)를 바꾸는 일이었어요. 경영진 중심으로 구성된 공간을 창작자에게 적합한 공간으로 바꿨죠. 그리고는 브레인 트러스트를 디즈니에 도입했어요. 스토리 트러스트라는 이름으로요. 디즈니 제작진을 브레인 트러스트에 참관시키고 픽사 제작진을 스토리 트러스트에 참여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형태가 아니라 속성을 이전시켰죠. 그뿐 아니라 솔직한 소통을 통해 문제를 조기에 발견하고 해결하는 문화를 설파했어요. 디즈니가 봉착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행동으로 보여졌죠.     


결과는 성공. 픽사 경영진이 변화시킨 디즈니는 <라푼젤>을 히트시키며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어요. <라푼젤>은 그 때 당시를 기준으로 <라이언킹>에 이어 역대 디즈니 애니메이션 중 2위에 올랐고, 16년만에 박스 오피스 흥행 1위를 기록했죠. 그 이후 <주먹왕 랄프>, <겨울 왕국>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다시 애니메이션 왕국의 명성을 되찾았어요. <겨울 왕국>은 그야말로 전 세계적인 대박이 터졌죠. 서서히 쓰러져가던 공룡 기업도 일으켜 세웠으니, 3P를 제대로 활용한다면 어떤 조직이건 창의성을 끌어올릴 수 있지 않을까요.




Reference

영화 <라따뚜이>, 2007

<창의성을 지휘하라>, 에드 켓멀, 와이즈베리

<소설가의 일>, 김연수, 문학동네

메이커와 매니저, 너와 나는 다른 시간을 달린다, Platum

• Opening Weekends, Boxoffice Mo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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