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물 1잔과 컵 3개를 서빙하는, 수상한 스페셜티 커피숍

푸어 오버 랩

2022.09.28

와인을 한 병 땁니다. 아무런 첨가물을 섞지 않고 이 와인병에 담긴 와인의 맛을 다르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와인잔을 바꾸면 됩니다. 똑같은 와인이라도 와인잔의 형태에 따라서 잠재된 과실미, 산도 등 기분 좋은 아로마가 살아나 맛이 미묘하게 달라지니까요.


이번엔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먹습니다. 똑같은 샌드위치를 먹는데 맛을 다르게 느낄 수 있을까요? 회의실에서 미팅을 하면서 먹을 때와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주말에 여유롭게 먹을 때의 샌드위치는, 같은 샌드위치여도 맛에 차이가 생깁니다. 맛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상태가 다르기 때문이죠.


이처럼 똑같은 음료나 음식이어도 담는 그릇, 먹는 맥락 등에 따라 맛이 달라집니다. 커피라고 예외일 리 없죠. 방콕의 스페셜티 커피숍 ‘푸어 오버 랩’은 커피의 본원적 경쟁력은 기본이고 커피 외적인 요소를 크리에이티브하게 활용해 커피의 숨은 맛까지 끌어올립니다. 어떻게냐고요?


푸어 오버 랩 미리보기

• #1. 1가지 커피에 3개의 컵을 제공하는 이유 - 도구적 경쟁력

 #2. 커피와 함께 서빙되는 파란 물의 정체 - 맥락적 경쟁력

 #3. 기본기는 기본, 시그니처가 된 블렌딩 메뉴 - 창의적 경쟁력

 시장의 수상한 움직임에서 시작된 수상한 카페




마케팅 용어 아닌가요? 커알못이라면 ‘스페셜티 커피(Specialty coffee)’에 대한 오해를 할 수도 있어요. 프리미엄 커피와 같이 커피를 조금 더 고급스럽게 포장하기 위한 수식어구 정도로 말이죠. 하지만 스페셜티 커피는 마케팅 용어가 아니에요. 전 세계 커피 생산국과 소비국에 퍼져 있는 스페셜티 커피 협회(Specialty Coffee Association)에서 정한 기준을 충족시킨 커피만 스페셜티 커피라고 부를 수 있어요.


‘스페셜티 커피는 공인된 커피 테이스터(SCAA) 또는 자격증을 소유한 큐그레이더(Q Grader)’가 100점 만점에 80점 이상의 점수를 부여한 커피를 말합니다.’



ⓒ시티호퍼스


방콕의 스페셜티 커피숍 ‘푸어 오버 랩(Pour Over Lab)’ 매장 벽면에 적힌 스페셜티 커피에 대한 정의예요. 정의에서 출발할 만큼 푸어 오버 랩은 스페셜티 커피에 정통한 카페를 추구하죠. 여기에다가 매장 이름에서도 정통성이 엿보여요. ‘푸어 오버’는 분쇄한 커피 가루를 필터지 위에 담고 주전자에 담긴 물을 부어 커피를 내리는 방식을 의미해요. 가장 전형적이고 기본적인 커피 추출 방식인데, 이 푸어 오버를 ‘연구’하는 곳으로 이름을 지었어요. 



푸어 오버 랩 에까마이 지점이에요. ⓒ시티호퍼스


‘완벽한 한 잔을 추구(The pursuit of a cup of excellence)’하며 스페셜티 커피를 연구하는 푸어 오버 랩은 브랜드의 컨셉을 비주얼과 고객 경험에 녹여 내요. 말로만 ‘최고의’, ‘맛있는’ 커피를 제공하겠다는 카페들과는 다르죠. 매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스페셜티 커피숍으로서의 정체성을 고객이 경험할 수 있도록 매장 공간, 커피 메뉴, 서빙 방식 등을 디자인했어요.



ⓒ시티호퍼스



#1. 1가지 커피에 3개의 컵을 제공하는 이유 - 도구적 경쟁력

푸어 오버 랩에서 스페셜티 커피를 주문하려면 크게 3가지를 결정해야 해요. 그 날 준비된 스페셜티 원두, 커피 추출 방식, 그리고 Hot 또는 Cold 중 원하는 커피 온도까지 고르고 나면 주문이 끝나요. 따뜻한 커피 한 잔도 원두, 추출 방식, 커피 온도의 함수에 따라 수십 가지로 확장되는 거죠.


먼저 커피 콩을 고르는 과정부터 스페셜티 커피의 면모를 제대로 느낄 수 있어요. 주문하는 곳 앞에는 그 날 준비된 스페셜티 원두들이 병에 담겨 늘어서 있는데, 병에 붙어 있는 라벨지에는 각 커피 콩에 대한 정보가 빼곡히 손으로 적혀 있어요. 스페셜티 원두답게 원산지, 농장, 원두 품종, 고도 등 커피의 맛을 좌우하는 정보들이 빠짐없이 적혀 있고, 고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테이스팅 노트도 잊지 않았어요.



ⓒ시티호퍼스



ⓒPour Over Lab


선택한 원두를 추출하는 방식도 7가지 중 하나를 고르면 되어요. 기계를 활용한 푸어 오버 스테디(Pour steady)를 선택하거나 푸어 오버, 사이폰(Syphon), 프렌치 프레스(French Press) 등 ‘커피 프로페셔널(Coffee Professional)’이라 불리는 바리스타가 손수 내려주는 6가지 추출 방식 중 하나를 고를 수 있어요. 자신이 선택한 커피콩에 최적의 추출 방식을 찾고 싶다면 커피 프로페셔널에게 문의해도 되고요.



ⓒ시티호퍼스



ⓒ시티호퍼스


엄선한 스페셜티 커피콩을 전문가의 노하우를 담아 내렸으니, 이제는 맛있게 즐길 차례예요. 그런데 푸어 오버 랩에서는 스페셜티 커피를 주문하면 컵을 무려 3가지나 서빙해줘요. 보통 컵은 주문 수에 맞춰 서빙해 주는 것이 보통이지만, 푸어 오버 랩에서는 기능에 따라 1인당 3개를 내어줘요.


3가지 컵은 모양과 크기, 기능이 조금씩 달라요. 스페셜티 커피와 마찬가지로 향이 중요한 음료인 와인을 마실 때, 와인의 특성이나 품종에 따라 아로마를 극대화하기 위해 다른 모양의 와인잔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원리예요.



ⓒPour Over Lab


위로 갈 수록 넓어지는 ‘아로마 디켄터(Aroma Decanter)’는 커피의 향을 깨우는 역할을 해 커피의 꽃향을 강조하고 싶을 때 사용해요. 케냐, 에티오피아 산 커피의 매력을 느끼기에 좋아요.


‘모어 밸런스(More Balance)’ 잔은 샤도네이 화이트 와인잔처럼 컵의 위와 아래가 직선으로 떨어져 특정 풍미보다는 균형잡힌 풍미를 느낄 수 있어요.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 커피처럼 비교적 밸런스가 좋은 커피에 적합하고요.


마지막 ‘아로마 콜렉터(Aroma Collector)’는 바닥이 넓은 부르고뉴 레드 와인 모양의 잔으로, 초콜릿, 카라멜 등 부르고뉴 레드 와인에서 느낄 수 있는 아로마와 비슷한 아로마를 가진 커피를 시음하기에 적합해요. 브라질, 볼리비아 등지에서 재배된 커피에 딱이에요.


원두별로 더 잘 어울리는 컵이 있기는 하지만, 커피의 풍미란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주문한 커피를 3가지 컵에 따라 마시면서 조금씩 다른 뉘앙스를 즐겨 보고, 가장 마음에 드는 컵을 사용하면 돼요. 스페셜티 커피에는 객관적 기준이 있지만, 스페셜티 커피를 즐기는 방법에는 주관적 취향이 우선이니까요.



#2. 커피와 함께 서빙되는 파란 물의 정체 - 맥락적 경쟁력

푸어 오버 랩에서 맛있게 내린 스페셜티 커피를 즐기다보면, 커피를 연구한다는 컨셉이 오감으로 와 닿을 거예요. 수준급의 커피뿐만 아니라 ‘공용 연구실(Shared laboratory)’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한 매장 내부가 커피 연구에 대한 진심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하죠.



ⓒPour Over Lab


푸어 오버 랩은 방콕에 3개, 외곽 지역에 3개 매장을 갖고 있는데, 매장마다 조금씩 디자인이 다르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화이트 톤의 내부에 실버톤의 메탈릭한 요소로 미래지향적이고 과학적인 분위기를 풍겨요. 커피만으로는 전달하기 어려운 브랜드의 정체성을 공간감이 대신 전해주는 거예요.



ⓒPour Over Lab



ⓒPour Over Lab



ⓒPour Over Lab


스페셜티 커피를 주문하면 커피를 비커에 서빙해 주는 것도 연구실 컨셉을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요소 중 하나예요. 그런데 스페셜티 커피뿐만 아니라 어떤 메뉴를 주문하든 파란색 물이 담긴 비커가 하나 더 제공되는데, 이 정체가 묘연해요. 연구실에서나 볼법한 비커에 의료용 알콜처럼 보이는 파란색 물이라니, 기능 없는 장식용 소품이라기에는 존재감이 커 보여요.



ⓒPour Over Lab


이 파란색 물의 정체는 태국에서 흔히 마시는 차 중 하나인 ‘나비 완두콩 차(Butterfly pea tea)’예요. 나비 완두콩 차를 깨끗한 정수물에 우려 내 비커에 담아 서빙하는 거죠. 그렇다면 도대체 왜 스페셜티 커피 전문점에서 별안간 차를 내어주는 걸까요?



ⓒPour Over Lab


푸어 오버 랩이 고객에게 나비 완두콩 차를 함께 제공하는 이유는 파란색을 보면 눈이 시원하고 편안해 지기 때문이에요. 고객이 커피를 마시기 전에 파란 물을 바라보면 마음에 평화가 생기고 스트레스와 불안이 완화돼요. 이러한 심리적 여유가 커피의 풍미를 더 잘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줘요. 동시에 커피를 마시기 전 혀를 맑게 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요.


이처럼 푸어 오버 랩은 스페셜티 커피를 찾는 고객의 커피 취향은 기본, 마음까지 꿰뚫어 경험을 디자인했어요. 일반 커피보다 가격은 더 비싸지만 취향에 꼭 맞는 스페셜티 커피를 찾아 마시는 고객이라면, 정신적인 만족도가 중요한 사람일 거예요. 그런 고객이 더 편안한 마음으로 커피를 즐길 수 있도록 창의적이면서도 동시에 브랜드 컨셉에 맞는 서빙 방식을 구현했다고 볼 수 있죠.



#3. 기본기는 기본, 시그니처가 된 블렌딩 메뉴 - 창의적 경쟁력

푸어 오버 랩의 스페셜티 커피는 매장 내 ‘슬로우 바(Slow bar)’ 구역에서 만들어요. 전문가가 푸어 오버, 텔터 프레스, 프렌치 프레스 등의 수동 도구들을 사용해 직접 커피를 내리죠. 그런데 이 슬로우 바에서는 커피를 내릴 때 압력을 가하지 않아 에스프레소와 같은 강한 맛의 커피를 만들지 못하고, 무엇보다 시간이 오래 걸려요.


아무리 스페셜티 커피숍이라지만 보다 캐주얼하게 커피를 즐기고 싶은 고객들의 니즈를 외면하란 법은 없어요. 그래서 푸어 오버 랩은 에스프레소 머신을 구비해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라떼 등의 평범한 에스프레소 커피 메뉴들도 판매해요. 물론 메뉴는 평범하지만, 맛은 평범하지 않죠.



ⓒPour Over Lab


푸어 오버 랩의 에스프레소 커피 머신이 훌륭한 맛을 자랑하는 건 원두뿐만 아니라 남다른 에스프레소 머신을 사용하기 때문이에요. 푸어 오버 랩에서는 하이엔드 에스프레소 머신의 대장급인 네덜란드 키스 반 더 웨스턴(Kees Van Der Westen)의 ‘스피릿(Spirit)’을 사용해요. 옵션에 따라 다르지만 가격대가 보통 3~4천만 원정도로 웬만한 차 한 대 값이에요. 비싼 만큼 동일한 퀄리티의 커피를 안정적으로 추출할 수 있어 바리스타들 사이에서는 ‘꿈의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불리기도 해요.


푸어 오버 랩에는 에스프레소 커피와 스페셜티 커피와 같이 탄탄한 기본기뿐만 아니라 개성 만점의 개인기가 빛나는 메뉴들도 있어요. ‘시그니처 커피’ 메뉴는 더치 커피 머신으로 뽑아 낸 더치 커피를 다른 음료와 블렌딩해 만든 메뉴로, 푸어 오버 랩에서만 볼 수 있는 메뉴들이에요. 태국 최초로 ‘원 더치(One Dutch)’ 더치 커피 머신을 매장에 들이며 유명세를 떨쳤던 푸어 오버 랩은 아예 더치 커피를 활용한 신박한 메뉴들로 시그니처 메뉴를 만들어 버렸어요.



푸어 오버 랩의 시그니처 메뉴 중 하나인 온더락이에요. ⓒPour Over Lab



마르가리타 칵테일에서 영감을 받은 초코 마르가리타 더치는 칵테일 잔에 서빙되어요. ⓒPour Over Lab


‘온더락(On the rock)’은 위스키에 커다랗고 동그란 얼음을 넣어 마시는 데에서 착안한 메뉴로, 위스키 온더락 잔에 위스키 대신 더치 커피를 담았어요. 그 밖에도 테킬라 베이스의 칵테일인 마르가리타를 더치 커피와 코코아로 재해석한 ‘초코 마르가리타 더치(Choco margarita dutch)’, 유자 쥬스로 만든 스무디와 더치 커피를 블렌딩한 ‘스피어 문(Sphere moon)’, 소다, 복숭아, 더치 커피로 만든 ‘피치 더치(Peach dutch)’ 등 10여 가지 시그니처 커피 메뉴를 개발했어요.



유자의 상큼함이 돋보이는 스피어 문이에요. ⓒPour Over Lab



더운 날씨에 시원하게 마시기 좋은 피치 더치예요. ⓒPour Over Lab


이처럼 푸어 오버 랩에서는 때로는 위스키를, 때로는 칵테일을, 때로는 디저트를 먹는 기분으로 커피를 즐길 수 있어요. 커피가 아닌 커피를 활용한 창의적인 메뉴를 시그니처로 내세워 커피에 대한 진중한 태도 못지 않게 창의적인 연구 결과를 보여줘요. 커피를 제일 잘하는 집이지만, 그건 기본이라고 말하는 듯 해요.



시장의 수상한 움직임에서 시작된 수상한 카페

푸어 오버 랩은 2020년에 첫 매장을 열었어요. 이후 코로나19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오프라인 매장의 사세를 넓혀 현재 6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죠. 푸어 오버 랩의 순항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시장의 흐름을 읽고 스페셜티 커피 시장에 뛰어든 포착력을 빼 놓을 수 없어요.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는 여러 곳에서 제 4의 물결을 보기 시작했으며, 이는 런던, 베를린, 뉴욕, 도쿄와 같은 대도시에서 일상적인 일이 되기 시작했습니다.(In the recent years we have started to see the 4th wave in different places and it is starting to be an every day thing in the big cities like London, Berlin, New York and Tokyo.)”


푸어 오버 랩 팀이 자신의 브랜드 스토리를 소개하며 한 말이에요. 여기에서 말하는 4차 물결이란, 스페셜티 커피와 같은 고품질 커피의 대중화 혹은 민주화를 의미해요. 커피 산업에서 1차 물결은 인스턴트 커피의 유행, 2차 물결은 프랜차이즈 커피의 전성기, 3차 물결은 스페셜티 커피의 부상을 말해요. 그리고 지금은 4차 물결을 맞이하고 있고요.


특히 태국의 커피 시장은 흥미로우면서도, 스페셜티 커피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을 갖고 있는 시장 중 하나예요. 태국은 커피콩 생산지이자 동시에 소비국이기도 한데, 커피 생산량보다 소비량이 훨씬 많죠. 커피 소비 시장이 최근 10년 간 연평균 10% 이상씩 성장했고 이같은 추세는 지속될 전망이에요. 커피콩 주요 산지인 아프리카, 남미, 동남아시아 일부 국가의 경우 커피 소비 시장이 뒷받침되지 않아 양질의 커피를 미국, 유럽, 동아시아 등으로 수출하는 것과 대조적이죠. 그 중에서도 감각적인 맛의 스페셜티 커피에 대한 수요는 더 증가하고 있고요. 


푸어 오버 랩은 이러한 시장의 흐름을 읽고, 기회를 잡았어요. 그리고 단순히 스페셜티 커피 시장이 성장하고 있으니 스페셜티 커피 전문점을 내자는 생각에 그친 것이 아니라, 스페셜티 커피 시장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본원적 경쟁력뿐만 아니라 차별적 경쟁력을 고민했죠. 커피 외적인 요소를 크리에이티브하게 활용해 스페셜티 커피의 숨은 맛까지 끌어올린 거예요. 


시장이 성장한다고 브랜드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스페셜티 커피 시장의 성장과 더불어 푸어 오버 랩의 미래만큼은 기대되는 이유예요.




Reference

푸어 오버 랩 공식 웹사이트

푸어 오버 랩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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