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된 안내판도, 간판도 없어요. 눈에 보이는 것은 알파벳 세 글자와 작은 초인종뿐이죠.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면 초인종을 눌러야 해요. 그 전에 미리 예약을 해야 하고요.
게다가 이 비밀스러운 건물은 저녁에만 사람의 입장을 받아요. 초대할 수 있는 최대 인원은 하루에 단 11명. 모두가 모이면 그제야 3시간의 식사가 시작돼요.
이곳의 이름은 ‘스몰 디너 클럽(Small Dinner Club)’이에요. 레스토랑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비밀스러운 구석이 많은 이곳은 실제로도 손님들에게 숨기는 것이 많아요. 셰프가 주는 단서는 딱 하나고, 답은 손님들이 직접 찾아야 해요. 도대체 스몰 디너 클럽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스몰 디너 클럽 미리보기
• #1. 브런치에서 실패하고 팝업 디너로 복귀하다
• #2. 요리사가 숲속 수도승이 된 이유
• #3. 손님에게 숨기는 것이 많은 레스토랑
• 직선이 아닌 곡선이 일으킨 반란
한물간 거리로 젊은 크리에이터들이 돌아오고 있어요. 그것도 새로 지은 빌딩은커녕 허름한 건물들만 모여있는 오래된 상점가로 말이죠. 이 상점가는 방콕에서 가장 오래된 포장도로가 있는 차로엔크룽 로드에 위치하고 있는데요. 옛 정취를 가득 품은 이 거리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티호퍼스
빛바랜 거리는 원래 오래된 가게들로 들어서 있었어요. 저녁 6시만 되면 인적이 사라져 주변이 온통 조용해졌죠. 사람들이 사라지고 옛 건물만 남은 거리에 다시 활기를 불러들인 것은 ‘차로엔 43 아트 & 이터리(Charoen 43 Art & Eatery)’ 프로젝트예요. 오래된 건물의 매력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예술, 문화,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이도록 하는 리뉴얼 프로젝트였죠.
이 프로젝트의 시작점에 건물의 주인인 Dong-Prakrit Sudsat가 있어요. 그는 가족들로부터 건물을 상속받았죠. 비록 사람들에게 점점 잊혀가는 구역이었지만 Dong-Prakrit Sudsat은 건물을 팔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유명 브랜드 카페나 호스텔, 편의점으로 사용할 수 있게 임대할 생각이었죠.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 오래된 공간 안에 창조적인 에너지와 활기를 만들어내는 것이었어요. 그러려면 다양한 관점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들 이유가 필요했죠.
그렇게 리뉴얼한 공간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새롭게 입점한 상점들은 각기 독특한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강조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볼게요. ‘바이시클 보이즈(Bicycle BOYS)’는 자전가 애호가들을 위한 클럽 하우스로, 태국은 물론 외국 사이클리스트까지 찾아오는 랜드마크예요. 스페셜티 커피를 전문으로 하는 마디 카페(Madi Café)는 전 매거진 편집장이 오픈한 공간으로 1층은 카페, 2층은 크리에이터 허브로 쓰이고요. 이 밖에도 C43이라는 패션 공간에서는 태국 디자이너의 라이프 스타일 제품을 판매하는 등 다양한 분야의 애호가들이 밀집해 있어요.
차로엔 43 아트 & 이터리에 입점한 가게들은 서로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에요. 이웃처럼 하나의 거리를 공유하며 서로 다른 매력과 장점으로 사람들의 창의성을 자극하죠. 업종은 다르지만 차로엔 크룽을 다시 활기차게 만들겠다는 공통된 목표와 비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트 & 이터리라는 이름 하에 하나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중에서 유난히 독특한 아우라를 뽐내고 있는 매장이 있어요. 밖에서 봤을 때는 업종조차 가늠할 수 없는 이곳의 이름은 SDC예요. 스몰 디너 클럽(Small Dinner Club)의 약자죠. 매장을 찾아가면 문은 굳게 닫혀 있고 초인종만 하나 있어요. 그 위에는 ‘예약 필수(Reservation Required)’라는 글자가 쓰여 있죠. 마치 비밀 클럽인 것 같은 SDC에서는 실제로 고객에게 말하지 않는 비밀이 많아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미리 예약을 해서 SDC를 찾아오죠. SDC는 무엇을, 왜 숨기고 있을까요? 그리고 고객들은 무엇을 알아내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올까요?
ⓒSDC Instagram
ⓒ시티호퍼스
#1. 브런치에서 실패하고 팝업 디너로 복귀하다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스몰 디너 클럽의 단서를 찾으려면 일단 방콕이 아닌 호주 멜버른으로 가야 해요. 그곳에서 이 클럽이 처음 시작됐거든요. 클럽을 만든 사람은 사린(Sareen Rojanametin)과 진(Jean Thamthanakorn)이에요. 사린은 사진작가이자 광고 분야에서 전문 경력을 쌓아 온 디렉터였고, 진은 전직 세무사였죠. 태국에서 태어난 사린은 예술을 공부하러 멜버른에 온 상황이었어요.
하지만 정작 사린을 사로잡은 것은 멜버른의 커피였어요. 멜버른은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 온 이민자들이 독보적인 커피 문화를 만들어 온 것으로 유명하거든요. 커피의 도시라 불릴 정도죠. 그래서 사린은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요. 이 시기에 큰 변화를 목격하게 돼요. 당시 미슐랭 레스토랑 출신 셰프들이 멜버른의 카페로 장소를 옮겨 브런치를 만들기 시작한 거죠. 고급 레스토랑에서 볼 법한 요리 테크닉이 브런치에 적용됐고, 카페의 브런치 문화가 본격적으로 태동했어요. 이를 현장에서 지켜보던 사린과 진은 초보자지만 이 변화에 동참하기로 하죠.
"우리가 진정으로 준비되는 순간은 결코 없어요. 진짜 준비가 될 때쯤이면 기회는 이미 지나가고 없죠. (…) 저는 야심이 아주 큰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들보다 잘하고 싶어 하죠.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해야 해요. 여러분도 자신이 준비되기를 기다리지 마세요. 그냥 지금부터 시작하세요.”
- The Cloud 인터뷰 중
누군가는 무모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두 사람은 주저하지 않았어요. 사린은 커피를, 진은 빵 굽는 법을 독학했죠. 그리고 두 사람은 결국 2014년 10월에 카페 ‘노라(Nora)’를 오픈했어요. 작은 공간이었지만 이 카페에서 두 사람은 다른 곳에서는 팔지 않는 색다른 브런치를 판매했어요. 태국의 가정식을 결합한 태국식 브런치였죠. 예를 들어 달걀 요리를 흔히 볼 수 있는 스크램블이나 계란 프라이가 아니라 조리 시간만 30분이 걸리는 수비드* 방식으로 요리했어요. 여기에 칠리 페이스트, 두리안과 연근으로 만든 뮤즐리, 코코넛, 절인 삼겹살 등을 하나의 플레이트에 담았죠.
*수비드(Sous-vide): 재료를 진공 팩에 넣어 수조나 스팀 기계에 넣고 저온으로 오랫동안 익히는 기법이에요.
사린이 만든 브런치는 그야말로 태국의 풍미를 담은 접시였어요. 호주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브런치와는 어긋나는 음식이었죠. 사람들이 브런치에서 기대하는 음식은 으깬 아보카도나 수란이었지만 사린은 이 고정관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었어요. 무엇보다 사린은 태국에서 태어나 전형적인 브런치를 먹으며 자란 사람도 아니었고요. 그래서 좀 더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식사가 나올 수는 없는지, 사람들이 더 창의적이고 혁신적으로 생각할 수는 없는지 정면으로 부딪힌 거예요.
그렇다면 ‘복사해서 붙여넣기’식으로 어디서나 판매하는 브런치를 먹던 호주 사람들은 노라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아방가르드 한 컨셉의 노라를 감당할 수 없었어요. 늘 먹던 음식으로 짜인 멜버른식 브런치의 표준을 원했죠. 그렇다 보니 노라에 방문했다가 그냥 나가버리는 고객들이 부지기수였어요. 마치 사람들의 평범하고 평화로운 아침 식사를 노라가 망칠 거란 듯이요.
카페 노라의 브런치는 누가 봐도 실패였어요. 하지만 대신 얻은 것이 하나 있었죠. 노라에 계속 찾아와주는 사람들 대부분이 다른 식당의 셰프들이었거든요. 사린과 진은 많은 셰프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어요. 그리고 두 사람은 이를 계기로 카페의 방향키를 조정하기로 하죠. 모두를 만족시키기보다 특정 대상을 공략하기로 한 거예요. 그래서 2015년 8월부터는 팝업 디너를 운영하게 돼요. 매주 금요일 밤에만 열리는 ‘스몰 디너 클럽’이 탄생했죠.
노라의 아침 식사가 멜버른의 브런치에 도전했다면, 스몰 디너 클럽은 고급 식사가 무엇인지에 관한 관념에 의문을 제기했어요. 일주일에 단 한 번, 금요일 밤마다 6가지 내외의 코스 메뉴를 최대 16명에게 제공하며 실험적인 태국식 요리를 선보였죠. 때로는 게스트 셰프들을 초대해서 각자의 경험과 기술을 합친 혁신적인 요리를 만들어내기도 했고요. 그뿐 아니라 작은 디테일 하나까지 직접 준비했어요. 진은 8주간 그릇 수업을 수강하며 직접 만든 그릇에 음식을 담아냈고, 방콕의 대중적인 레스토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티슈를 재현하기 위해 리넨 식탁보도 직접 제작했죠. 홍보도 기발했어요. 스몰 디너 클럽에 관한 정보를 직접 엽서로 만들어서 서점에 있는 요리책마다 넣어뒀어요. 그렇게 하면 음식에 진심으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찾아와줄 테니까요.
일주일에 한 번만 열리는 스몰 디너 클럽은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어요. 호주 주요 언론 매체의 높은 평가도 이어졌죠. 심지어 메뉴 중 하나는 Age Good Food Awards 2015에서 멜버른의 10대 요리로 인정받기도 했어요. 매주 금요일이 예약으로 꽉 찼죠. 그 결과 사린과 진은 2016년 2월부터 카페를 닫고, 팝업 디너였던 스몰 디너 클럽을 주 5일간 확장 운영하게 됐어요. 정식 요리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던 사린과 진이 일궈낸 성공이었죠. 그런데 그로부터 약 2년이 흐른 2017년 12월, 두 사람은 뜻밖의 결정을 내렸어요. 잘나가고 있던 스몰 디너 클럽의 문을 닫기로 한 거예요.
#2. 요리사가 숲속 수도승이 된 이유
스몰 디너 클럽은 확실히 상승세를 타고 있었어요. 사린이 선보이는 요리들은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유형의 태국 음식이었죠. 정식 요리 교육을 받은 적 없었던 사린과 진은 모든 것에 질문을 던지며 답을 찾아 나갔어요. 질문을 통해 기존의 요리법을 해체하고, 분리해서, 재구성했죠. 요리를 독학으로 배워서 오히려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었어요. 덕분에 사람들로부터 태국 음식에 대한 새로운 기대치를 이끌어낼 수 있었죠. 그런데 왜 돌연 가게의 문을 자발적으로 닫은 걸까요?
사린과 진은 두 가지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어요. 첫 번째 문제는 장소였죠. 멜버른에서 많은 영감을 받기도 했지만 태국 음식을 제공하는 가게 입장에서 봤을 때에는 접근성이나 노출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한편 신선하고 다양한 식재료를 공수받기 어려운 점도 큰 단점이었어요. 물론 멜버른에도 태국산 냉동식품이 있고, 호주산 재료로 태국 요리를 만들 수도 있지만 사린은 식재로야말로 태국성을 대표한다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식재료는 아이디어의 원천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1,000여 가지가 넘는 다양한 식재료가 있는 방콕으로 돌아가고 싶었죠.
두 번째 한계는 바로 요리 기술이었어요. 지금껏 유명 셰프의 요리책을 읽고, 동료 셰프와 협업하며 직접 기술을 터득해왔지만 아직 자신의 요리에서는 날카로움과 아름다움, 그리고 우아함과 같은 기교가 부족하다고 생각했죠. 광고나 사진 등의 예술 분야에서 일해온 사린은 자신의 요리를 바라보는 기준선 또한 높았어요. 특히나 요리를 통해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만큼, 사린은 지금보다 더 나은 기술을 필요로 했죠.
결국 두 사람은 멜버른에서의 마지막 영업을 마쳤어요. 이제 남은 것은 방콕으로 돌아가는 일뿐이었죠. 그런데 사린은 여기서 다시 한번 방향을 바꿨어요. 종착지인 방콕에 도착하기 전에 여러 곳의 경유지를 거치거든요. 그것도 무려 1년 동안이나요. 어떻게 된 일이냐고요? 가게 문을 닫은 사린은 곧장 다른 가게에 지원해서 직원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정육점에서는 고기를 썰고 소시지를 만드는 법을 배우고, 고급 미슐랭 레스토랑에서는 하이엔드가 무엇인지 배우는 식이었죠.
사린의 여정은 샌프란시스코와 뉴욕, 스웨덴, 도쿄까지 계속됐는데요. Benu, INUA 등 세계 유수의 레스토랑에서 일하며 사린이 얻고자 했던 것은 그들의 레시피가 아니라 정교하고 섬세한 기술이었어요. 요리 기술뿐만 아니라 레스토랑의 업무 시스템과 동선, 리더가 직원을 대하는 법, 하물며 수도관 배치 형태까지 보고 배웠죠. 이 작은 디테일들이 모여서 레스토랑을 만든다는 것을 아는 사린은 모든 것을 빠르게 흡수하며 유명 레스토랑과 셰프의 일을 터득해 나갔어요.
ⓒBenu Instagram / ⓒINUA Instagram
마침내 1여 년간의 훈련을 마치고 사린은 태국으로 돌아왔어요. 이제 경험을 통해 기술을 체득했으니, 자신의 레스토랑을 열어서 실력을 보여줄 차례였죠. 그런데 레스토랑을 열기는커녕, 사린은 숲속 사찰로 들어갔어요. 사찰의 전속 셰프로 채용이라도 된 걸까요?
숲속 사찰에서 사린은 셰프가 아니었어요. 수도승이었죠. 원래 이곳에서 한 달만 수행을 하려던 사린의 계획은 그 후로 2년 반 동안 계속됐어요. 그간 애써서 배운 요리 기술들이 전부 다 잊히는 것 아니냐고요? 실제로는 정반대였어요. 사찰에서 보낸 시간은 사린의 요리법에 많은 영향을 끼쳤거든요. 마음을 단련하고 멀리서 바라보는 연습을 하다 보면 좋고 나쁨에 관한 편견이 사라졌죠. 스스로에게 솔직해지자 만드는 음식도 더욱 정직해졌고요. 덕분에 사린은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가게의 컨셉과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며 드디어 방콕에 레스토랑을 오픈할 준비를 마쳤어요.
#3. 손님에게 숨기는 것이 많은 레스토랑
2022년 2월에 방콕에 오픈한 이 매장의 이름은 ‘스몰 디너 클럽(SDC)’이에요. 멜버른에서 시도했던 팝업 디너의 컨셉을 동일하게 적용했죠. 그런데 방콕에 있는 스몰 디너 클럽은 한층 더 비밀스러워요. 검은색으로 뒤덮은 2층짜리 건물에는 명판도, 표식도 없이 SDC라는 세 글자만 쓰여있죠.
ⓒSmall Dinner Club Instagram
스몰 디너 클럽은 저녁에만 문이 열려요. 매주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저녁 1회만 손님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기 때문이죠. 1회 당 수용할 수 있는 손님은 최대 11명인데, 예약을 한 사람들만 매장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어요. 마치 비밀 클럽의 회원들처럼요. 게다가 사람들이 예약을 하면 스몰 디너 클럽에서는 독특한 안내를 하나 해줘요. 저녁 식사 시간으로 3시간을 잡아달라는 것이죠.
ⓒSmall Dinner Club Instagram
ⓒSmall Dinner Club Instagram
저녁 식사는 오후 6시 30분에 동시에 시작돼요. 사람들이 미리 스몰 디너 클럽에 도착하면 1층에 있는 라운지에서 전원이 도착할 때까지 함께 기다리게 되는데요. 어두운 색조의 인테리어와 조각상은 갤러리를 떠올리게 해요. 사린의 예술적인 면모와 개성이 반영되어 있죠. 곧이어 사람들이 다 도착하면 다 함께 2층에 있는 다이닝 공간으로 이동해요. L자형의 카운터 바 테이블 위에는 각자의 이름이 적힌 카드가 올려져 있고, 자리에 앉으면 누구나 조리 스테이션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죠. 이곳에서 사린은 최대 12코스로 구성된 저녁 식사를 제공해요.
ⓒSmall Dinner Club Instagram
ⓒSmall Dinner Club Instagram
스몰 디너 클럽의 목표는 관습적인 요리법에 질문을 던지고 새롭게 재해석한 코스들을 선보이면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인데요. 여기서 끝이 아니에요. 이 미스터리한 디너 클럽에서는 12개의 코스를 제공하면서 음식의 재료가 무엇인지에 대해 미리 알려주지 않아요. 힌트는 손님 스스로 직접 음식을 경험하며 찾아내야 하죠. 그것이 스몰 디너 클럽의 규칙이에요.
그렇다면 메뉴를 한번 살펴볼게요. 코스 중 ‘Crying tiger’라는 이름의 메뉴는 음악에서 영감을 받은 음식이에요. Apartment KhunPa라는 태국 밴드의 곡 중에 동명의 노래가 있죠. 이 곡의 가사는 태국계 이산족이 더 나은 삶을 찾아 고향을 떠나 대도시인 방콕에 정착하는 경험을 담고 있는데요. 사린은 이 서사를 음식으로 풀어냈어요. 이산 지역에서 공수한 돼지 목살이나 야생 허브 등의 식재료로 음식을 만들어서 이산족의 고난과 인내심을 표현하고자 했죠. 사린은 이 메뉴를 통해 눈에 보이는 것보다 간과된 것이 훨씬 큰 의미를 갖는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어요. 예술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음식을 만드는 셈이죠.
‘Crying tiger’ 메뉴예요. ⓒSmall Dinner Club Instagram
메뉴 중에는 하나의 소재를 주제로 한 시리즈물도 있어요. ‘멀리서 똠얌 새우를 바라보며(Looking at tom yum prawn from far away)‘라는 이름의 메뉴는 특유의 풍미를 특징으로 하는 태국 수프인 ‘똠얌’을 재해석해서 만든 음식이에요. 메뉴명은 동일하지만 디시가 버전별로 다양하죠. 야채로 껍질을 만든 랍스터, 얼음처럼 차갑고 매콤한 맛이 나는 오렌지 케이크, 계란 노른자를 얹은 풀맛이 나는 태국식 빙수처럼요. 이처럼 사린은 누구나 다 아는 전통적인 메뉴로부터 DNA와 에센스만 분리시켜서 새롭게 태국의 식문화를 풀어내고 있어요.
ⓒSmall Dinner Club Instagram
ⓒSmall Dinner Club Instagram
‘멀리서 똠얌 새우를 바라보며(Looking at tom yum prawn from far away)‘라는 메뉴는 여러 가지 버전으로 제공돼요. ⓒSmall Dinner Club Instagram
사린이 손님들에게 알려주는 것은 요리의 이름뿐인데요. 그것조차 내용물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비밀스러워요. ‘입에서 연주되는 다프트 펑크’, ‘너무 많은 이탈리안과 단 한 명의 아시안’, ‘서양인이 되고 싶은 태국 컵케이크’처럼 말이죠. 이름을 알려주고 난 후에 사린은 커튼 뒤로 사라져 주방으로 가버려요. 요리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는지는 오롯이 이를 직접 먹어본 손님들의 몫이죠.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의 해석이 모두 다르듯 각자의 감각과 판단만을 믿고 따르면 돼요.
이곳에서는 손님들이 코스가 끝날 때마다 자신이 발견한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공유해요. 메뉴의 재료를 파악하는 고유의 배경지식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서로 의견을 나누다 보면 선입견이 깨지는 경험을 할 수 있어요. 함께 대화를 하다보면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폭도 넓어지죠.
요리의 진짜 정체와 재료들은 식사가 완전히 끝나고 난 뒤에 공개돼요. 음식 자체에만 집중하던 고객들은 비밀이 공개되는 순간 다시 한번 발견의 즐거움을 느끼게 되죠. 스몰 디너 클럽은 어떤 정보도 미리 주지 않는 레스토랑이지만 역설적으로 손님들은 이곳에서 훨씬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고 돌아갈 수 있어요.
직선이 아닌 곡선이 일으킨 반란
사린은 스몰 디너 클럽을 통해 미식 세계에서 통용되는 공식에 의문을 던져왔어요. 질문의 방향은 총 2가지예요. ‘왜(Why)?’와 ‘왜 안 돼(Why not)?’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죠. 사린은 사진작가이자 아트 디렉터, 수도승이라는 길을 걸어왔어요. 정식으로 요리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 비하면 사린은 계속해서 길을 우회한 것이나 다름없죠. 하지만 그 덕분에 자신만이 제시할 수 있는 창의적인 관점으로 남다른 요리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어요.
“디자이너가 새로운 글꼴을 만드는 것과 같아요. 디자이너들은 기존 글자의 디자인을 좀 더 세련되고 현대적으로 보이도록 조정하거든요. 우리도 우리만의 음식 언어를 창조해요. 그리고 우리가 창조할 수 있는 것들의 경계를 계속 확장시키는 중이죠.”
- Coconuts Bangkok 인터뷰 중
그렇지만 기존과는 다른 이색적인 음식으로 사람들을 놀랍게 하는 것만이 사린의 목표는 아니에요. 사린은 스몰 디너 클럽의 가장 핵심적인 매력은 음식의 맛 그 자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디자인을 위한 디자인처럼 음식을 만든다면 그것은 자기만족일 뿐, 레스토랑의 본질은 결국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거예요.
누군가는 지금의 스몰 디너 클럽을 만들기까지 사린이 너무 먼 길을 돌아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사린은 자신이 걸어온 모든 여정에서 힌트를 얻어 스몰 디너 클럽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죠. 그 결과 스몰 디너 클럽은 ‘복사해서 붙여넣기’식의 예측 가능한 업계에서 새로운 타입의 레스토랑 트렌드를 만들어나가는 중이에요. 그러니 틀에 박힌 일상에서 환기가 필요하다면 스몰 디너 클럽의 초인종을 한번 눌러보면 어떨까요?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세상을 직선이 아니라 곡선으로 바라보는 힘이 있으니까요.
Reference
• In Search of the Finesse, Small Dinner Club
• Prestige Gourmet: Reviewing Small Dinner Club, Bangkok’s Latest Secret Venue, BRUCE SCOTT, Prestige
• Thai fare reimagined at gallery-like Small Dinner Club, Porpor Leelasestaporn, Coconuts bangk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