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트 모던은 보통의 뮤지엄과 구조적으로 달라요. 화력 발전소로 쓰이던 건물을 리모델링 했기 때문이죠. 이 때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공존’이라는 철학을 내세웠어요. 높다란 굴뚝을 유지하는 등 발전소의 원형을 그대로 보전했고, 내부도 발전소 특유의 심미적인 기능을 살리면서 미술관의 기능이 돋보이게 했어요.
뮤지엄 형태뿐만 아니라 전시 구성도 기존의 틀을 벗어났어요. 테이트 모던은 시대나 사조별로 전시관을 나누지 않아요. 예술가와 사회(Artist and Society), 작업실에서(In the Studio), 소재와 사물(Materials and Objects), 미디어 네트워크(Media Networks)라는 4가지 주제로 전시관을 구성하죠.
이렇게 구분된 각 전시관의 작품들을 보는 것도 물론 중요해요. 하지만 테이트 모던이 주로 다루는 모던 아트에 대한 배경과 정신에 더 집중해볼 필요가 있어요. 디자인, 주거 형태, 실용성과 효율성 중심의 사고관까지 21세기의 대부분이 현대 예술의 기반 위에서 작동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현대 예술이 미친 영향을 하나씩 알아볼까요?
뮤지엄은 ‘영감의 창고’예요. 그래서 이번 런던 위크에서는 V&A 뮤지엄, 코톨드 갤러리, 테이트 모던, 사치 갤러리, 스트릿 아트 등 런던의 뮤지엄을 둘러보면서 인사이트를 찾아볼게요. 오늘의 스토리는 <이제서야 보이는 런던의 뮤지엄>의 일부입니다.
💡 인사이트를 찾기 위해 눈여겨 볼 포인트
현대 예술이 어떻게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에 영향을 미치는가?
테이트 모던 미리보기
• 전쟁이 파괴하고, 전쟁이 일으킨 세계관
• 네모반듯한 그림과 계획 도시 뉴욕의 상관관계
• 현실을 초월한 아이의 마음으로
• 화장실에서 나온 현대 미술의 아버지
• 전시 방식이 예술의 경험을 바꾼다
• 지역의 표정을 만드는 예술의 힘
테이트 모던에 대한 이야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선뜻 발길이 닿지는 않았다. 현대 미술은 나에게도 좀처럼 다가가기 어려운 분야였다. 마음으로 느끼고 감정이 동하기에는 아직 깨야 할 벽이 두텁게만 느껴졌다. 미술관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는 진작에 알았다. 템즈강변에 솟은 높다란 굴뚝을 매일 봐 왔으니까.
그런데 테이트 브리튼에 대한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관심은 테이트 모던으로 흘렀다. 테이트 갤러리가 품은 미술관이라면 단순히 밀레니엄 프로젝트의 일부라는 이유로, 혹은 매스컴에 자꾸 노출되기 때문에 유명한 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의 문을 열자 테이트 모던의 개관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느꼈던 호기심이 튀어 올랐다. 폐발전소를 미술관으로 개조했다니. 극과 극의 두 공간 아닌가?
테이트 모던은 우리가 익히 아는 고풍스럽고 화려한 미술관과는 거리가 멀다. 그도 그럴 것이, 테이트 모던의 전신은 한때 상당량의 전기를 만들어 냈던 템즈강 남쪽 뱅크사이드 지역의 화력 발전소이기 때문이다. 발전소는 2차 세계 대전 직후 런던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준공되었는데, 1980년대 석유 파동을 겪으면서 문을 닫고 이후 20년간 산업 폐기물로 방치되었다. 버려진 발전소가 있는 황폐한 지역에 관광객이나 근처 주민이 방문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렇게 도시의 흉물로 전락한 건물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테이트 재단이다. 테이트 재단은 발전소를 새롭게 단장해 미술관으로 개관한다는 발표와 함께 리모델링 현상 공모를 진행했다. 네덜란드의 렘 콜하스, 일본의 안도 다다오 등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미술관의 도안은 스위스의 젊은 건축가 듀오 헤르조그와 드 뫼롱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소를 탈바꿈하기보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공존’이라는 철학을 내세웠다. 건물 상부에 불투명 박스 형태를 증축해 발전소의 원형을 그대로 보전했고높다란 굴뚝과 길게 배치된 창문이 남아 있는 이유다, 내부도 발전소 특유의 심미적인 부분을 살리면서 미술관의 기능이 돋보이도록 했다. 이듬해 두 사람은 건축계에서 가장 영예로운 프리츠커상을 수상했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공존. 이 철학이 뻗쳐 있는 영역은 비단 테이트 모던만이 아니다. 테이트 모던 건너편에는 영국의 르네상스-바로크 건축 양식의 백미이자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세인트 폴 대성당이 있다. 템즈강을 사이에 두고 한쪽은 중세 유럽의 종교 사회를 상징하는 교회가, 그 건너에는 산업 혁명과 과학의 시대를 대표하는 발전소 건물이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 발전소는 2000년을 맞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현대 미술의 온실로 변신했다.
이렇게 뜻깊은 장소를 그냥 놔둘 런던 사람들이 아니다. 종교와 과학, 과거와 현대를 상징하는 두 장소를 밀레니엄 브릿지로 연결했다. 영국 건축의 대가 노먼 포스터 경*이 키를 잡고서, 현수교의 줄을 일반 다리처럼 수직으로 배치하는 대신 사선으로 배치해,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이 두 건물의 경관을 모두 시야에 담을 수 있도록 했다. 이렇듯 테이트 모던을 둘러싼 환경 덕분에 테이트 모던은 더 다채롭고 역동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영국 박물관의 그레이트 코트를 건축한 바로 그 인물이다.
테이트 모던은 다른 미술관처럼 시대 및 사조별로 전시관을 나누지 않는다. 예술가와 사회(Artist and Society), 작업실에서(In the Studio), 소재와 사물(Materials and Objects), 미디어 네트워크(Media Networks)라는 네 가지 주제로 전시관을 구성한다. 각각의 전시관을 들여다보는 일도 좋은 공부가 되겠지만, 여기서 우리는 테이트 모던을 이루고 있는 배경과 정신에 더 집중해보려고 한다. 테이트 모던의 정신과 거기서 촉발된 큐레이팅을 이해하는 일은, 종종 난해하다는 평을 받는 20세기 예술에 한 발짝 가까워지는 길이 될 테니 말이다.
전쟁이 파괴하고, 전쟁이 일으킨 세계관
테이트 모던은 20세기 이후의 작품을 전시한다. 예술은 시대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테이트 모던을 관람하기 전에 20세기 유럽의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1815년 이후 유럽에는 100년의 평화가 찾아왔다. 벨 에포크, 유럽의 아름다운 시절이다. 미술계에는 모네와 마네, 고흐와 고갱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등장했다. 나름의 사회적 시선을 갖고 있었지만, 그나마 평온한 세상을 살았던 이들의 그림에는 다른 시대의 그림에 비해 사랑스러움이 가득했다. 자연과 사람, 일상의 여유로운 풍경이 담겼고, 아름다운 색과 빛이 연등처럼 반짝거렸다. 19세기 인상주의 그림은 그 어느 시대의 그림보다 풍요롭고 따뜻했다.
영원할 것 같던 벨 에포크는 1914년 1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함께 끝이 났다. 산업 혁명 이후 일어난 1차 세계 대전은 그전까지의 전쟁과는 형태도, 규모도 달랐다. 무기가 기계화되었다. 하늘에서 폭격이 날아들고 바다에선 잠수함이 충돌했다. 유럽은 큰 혼돈에 휩싸였다. 그리고 2차 세계 대전이 터졌다. 양차 세계 대전은 유럽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특히 예술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태도를 180도 바꾸었다. 전쟁이 남긴 상흔에 가장 커다란 충격을 받은 부류는 지식인들이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태어나 100년의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점진적으로 쌓아온 믿음,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존재라는 이들의 굳건한 믿음은 뿌리째 흔들렸다.
전쟁은 이 믿음을 산산이 부숴버렸다. 이성적으로 돌아가던 사회 기능이 마비되고, 만천하에 나치의 만행과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공개되었다. 사람들은 경악했다. 인간 이성의 힘을 믿었던 작가와 음악가, 건축가, 화가들이 느꼈던 회의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제 그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너무도 난해하고 복잡했다. 서양 예술이 추구했던 아름다움과 이성에 대한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인간이 정말 합리적이고 도덕적이며 그림에 표현된 것처럼 아름답다면, 20세기의 혼란과 공포는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결국 20세기 예술가들은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인간은 결코 합리적이지도 도덕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존재다.’
이 시점부터 새로운 움직임이 펼쳐졌다. 작가는 작가대로, 음악가는 음악가대로, 화가는 화가대로 그동안 아름답다고 여겨 온 기준을 거부하고 자신이 사는 혼돈의 세상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작가들은 메시지가 분명한 글, 기승전결과 끝맺음이 확실한 글의 법칙을 파괴했다. 삶의 공허함, 환멸감, 모순된 인간의 모습을 부각한, 흐름이 부자연스러운 부조리극을 써나갔다.
클래식은 쇼팽, 멘델스존, 드뷔시, 차이코프스키 등이 연주했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선율에서 벗어나 의도적으로 듣기 거북하고 난해한 방향으로 변했다. 스트라빈스키, 쇤베르크 등으로 대표되는 20세기 음악가들은 음악의 규칙과 형식에 반항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불안한 심리와 긴장감, 무력감, 충동 등을 표현했다. 건축물의 형태는 외형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기 위한 곡선의 장식적 부분이 사라지고, 실용성을 중시한 직선 위주로 바뀌었다.
그림도 마찬가지였다. 형체를 깨버리고 과감한 시도가 이어졌다. 이 모든 이유는 분명했다. 예술가들이 살았던 시대가 시각적으로 아름답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에 집중했다. 여기서 20세기 예술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 발견된다. 대상을 보지 않고, 내면의 감정을 다양한 방법과 재료로 묘사했다는 점이다.
특히 미술계에선 예술로 현실을 탈피하거나 치유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런 움직임은 신조형주의, 초현실주의, 개념 미술, 추상표현주의라는 새로운 예술 사조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바로 지금부터 소개할 테이트 모던을 이루는 주된 전시 키워드들이다.
네모반듯한 그림과 계획 도시 뉴욕의 상관관계
본질이란 무엇일까? 철학적으로 파고든다면 무척 복잡하겠지만, 다행히 우리에게는 서양 미술사가 있다. 시대와 작가의 화풍에 빗대어 이해한다면 좀 더 수월하게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 서양 미술사는 르네상스 이후 19세기까지 500년간 재현 미술을 추구했다. 입체적인 사물과 깊이 있는 현실의 공간을 평면인 캔버스에 얼마나 그럴싸하게 묘사하느냐의 싸움이었다. 소실점은 오직 하나이고, 그걸 기준으로 원근법을 적용해야만 3차원의 현실이 표현될 수 있었다.
그런데 19세기 중후반에 세잔이 나타났다. 세잔의 눈에 우리가 보는 이미지는 사물이 갖고 있는 여러 모습 중의 하나였다. 세잔은 인간의 눈은 사진처럼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간파하고, 사물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이미지를 묘사하려 했다. 그는 평생에 걸쳐 수도 없이 사과를 그렸는데, 세잔의 사과는 다양한 각도에서 본 여러 개의 이미지가 합쳐져 있기도 하고, 일그러져 있거나 색이 분명하지 않기도 했다.
Still Life with Apples, circa 1878, Paul Cezanne
세잔이 공간과 사물에 대한 주관성을 처음 회화에 적용했을 때 사람들은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잘 몰랐다. 하지만 피카소는 달랐다. 세잔의 그림을 마주한 뒤 ‘아, 사과를 아니, 사물을 저렇게 주관적으로 묘사할 수도 있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피카소는 공간과 사물의 주관성을 확대해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제서야 사람들은 피카소의 독특한 그림에 주목했다. 그리고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테이트 모던에는 피카소로 대표되는 입체주의 그림이 많이 걸려 있다. 사물의 여러 면을 표현하기 위해 서로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이미지를 독립적으로 캔버스 위에 묘사한 화풍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입체주의가 어렵게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입체주의는 ‘하나의 소실점’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서양 회화의 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시대가 지나가고 전쟁이 일어났다. 종전의 예술과 미의 기준에 환멸을 느낀 작가들은 최대한 선배 예술가들과 다른 방향으로 그림을 그리려 노력했다. 르네상스 이후 500년 동안 예술가들에게 꽃이 아름다운 이유를 물으면, 그들은 한결같이 꽃이 가진 유려한 곡선과 화려한 생김새 때문이라고 답했다. 반면 20세기 예술가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곡선의 아름다움과 화려한 외형을 좇은 결과가 처참한 전쟁이라면, 그 외의 다른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그때부터 본질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본질 연구의 선두 주자가 되었던 사람이 네덜란드의 피에트 몬드리안이다.
Composition C (No.III) with Red, Yellow and Blue, 1935, Piet Mondrian
몬드리안은 들판, 강물, 풍차 등 처음에는 차분한 인상주의 풍경을 그리다가 차츰 입체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던 중 1차 세계 대전이 터졌다. 참혹한 광경을 목격한 몬드리안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때부터 폐허가 된 시대를 바로잡기 위해 외형적 아름다움이 아닌, 본질적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한다는 강력한 목적의식을 갖게 된다. 그래서 몬드리안은 친구 테오 반 되스버그와 뜻을 합쳐 1917년에 잡지 ‘데 스틸(De Stijl)’을 발행했다.
데 스틸은 ‘더 스타일(The Style)’, 양식이란 뜻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데 스틸 운동가들은 형태와 색에 대한 자신들만의 고유한 원칙을 세웠다. 먼저 그들은 형체의 본질을 직선으로 정의했다. 자연이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표면의 곡선 때문이지만 이는 단순히 시각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지구상 모든 사물의 본질적인 형태는 직선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또한 색의 본질을 빨강, 노랑, 파랑에 더해 밤과 낮을 상징하는 검정, 흰색으로 정했다. 데 스틸은 자신들의 고유한 미학과 이념에 신조형주의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회화, 건축, 실내 장식, 디자인, 가구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 신조형주의적 관점이 적용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제 우리는 몬드리안을 이해하기까지 8부 능선을 넘었다. 그렇다면 한발 더 나아가 근원적인 질문에 다가가보자. 몬드리안과 테오는 왜 면과 선의 형태를 정의하고, 삼원색을 강조하며, 이를 신조형주의라 명명하면서 자신들의 그림 세계를 고집했을까? 데 스틸이라는 그룹을 결성하면서까지 세상에 내고 싶었던 목소리는 무엇이었을까?
두 사람은 사람들의 삶을 바꾸고 싶었다. 전쟁으로 모든 게 무너졌으니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을 새롭게 정의할 필요가 있었다.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규칙과 규율이 존재하는 새로운 유토피아’였다. 얼핏 기하학적으로만 보이는 몬드리안의 그림에는, 더 이상 외형적 아름다움에 현혹되지 말고 본질에 집중해 세상을 바로 세우자는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전쟁 같은 혼돈의 시대가 다시는 오지 않기 바라는 마음이 신조형주의를 탄생시킨 것이다.
전쟁 전의 입체주의가 예술적, 회화적으로 사물의 본질을 표현한 것이라면, 전쟁 중 나타난 신조형주의는 단순히 회화만을 겨냥하지 않았다. 신조형주의는 본질 추구라는 목적을 삶의 전반적인 영역으로 확대했다. 그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분야가 건축이었다. 신조형주의 운동은 독일의 건축 디자인 학교 바우하우스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며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디자인의 원형이 되었다.
이제부터 예술, 특히 건축은 눈부신 혁명을 거치게 된다. 19세기까지 서양 사회의 건축물은 재력과 사회적 지위를 보여 주는 상징물이었다. 과거 유럽인들이 실용성과는 별개로 아름다운 조각과 금박으로 건물을 장식했던 이유다. 단번에 떠올릴 수 있는 좋은 예는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이다. 그러나 세계 대전 이후 신조형주의에 영향을 받은 건축가들은 직선 위주의 실용성을 중심으로 건물을 쌓아올렸다.
이런 신조형주의 운동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가 바로 뉴욕이다. 바둑판처럼 정비된 도로, 직선으로 하늘 높이 솟은 건물은 20세기의 상징과도 같다. 몬드리안은 수직 수평의 도시인 뉴욕을 유독 사랑했다. 뉴욕에서 영감을 받아 ‘뉴욕 시티’ 시리즈와 ‘브로드웨이 부기 우기’라는 작품을 남기기도 했으니, 뉴욕에 대한 그의 애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Broadway Boogie Woogie, 1942-3, Piet Mondrian
이처럼 21세기의 근본에는 전쟁이 바꾼 세계관이 있다. 아파트가 만들어진 이유도 신조형주의 운동의 연장선으로 이해하면 20세기 현대 예술이 우리 삶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나는 아파트의 도면을 볼 때마다 항상 몬드리안이 떠오른다. 차가운 추상주의의 대가로 유명하지만, 어쩌면 그는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본질에 다가가고자 했던 뜨거운 예술가가 아니었을까.
현실을 초월한 아이의 마음으로
전쟁의 고통에 대처하는 예술가들의 반응은 제각각 달랐다. 신조형주의 등 추상 미술가들이 고통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본질에서 해답을 찾으려 했다면, 꿈과 상상 속으로 들어가 현실을 도피하고자 했던 이들도 있었다. 추상과 함께 20세기 초중반 나타난 예술관, 초현실주의 작가들이다. 대표적인 화가가 스페인의 살바도르 달리와 호안 미로, 벨기에의 르네 마그리트, 미국의 만 레이다.
Metamorphosis of Narcissus, 1937, Salvador Dalí
그들은 세상이 난장판이 된 이유를 인간이 순수함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유일하게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아이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고, 어떻게 하면 아이들처럼 그릴 수 있을지 몰두했다. 여기에 1900년에 출간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 커다란 영향을 미치며, 초현실주의 장르가 탄생했다.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작가 달리를 예로 들어 보자. 그의 작품에는 대상이 없다. 정상적인 인물도, 현실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장소도 없다. 철학적, 종교적 이상을 내포하고 있지도 않다. 초현실주의 작가에게 영감이 되었던 건 오직 꿈과 무의식, 관념의 세계였다. 그들은 인간의 목숨이 가치를 잃어버리고, 인간성이 몰살된 세상을 잊고 싶었다. 그래서 더더욱 환상의 세계에 천착했다. 꿈을 묘사한 것은 미래 사회에 대한 바람이자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그들 나름의 방식이었을지 모른다.
초현실주의 작품을 본다면 그저 알쏭달쏭하기만 한, 신선하고 창의적인 그림이라는 감상을 넘어 20세기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잠시나마 떠올려 보았으면 좋겠다. 꿈에서 깨면 현실은 멀리 사라져 있고 더 나은 세상이 펼쳐져 있기를 소망한 그들의 마음을 조심스레 읽어 본다.
화장실에서 나온 현대 미술의 아버지
마르셀 뒤샹은 ‘샘’이라는 작품으로 전대미문의 충격을 던진 인물이다. 동시에 개념 미술의 선구자이자 모든 21세기 예술가들의 아버지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개념 미술이 대체 뭔데?’라는 질문에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완성된 작품 자체보다 그 작품이 탄생하는 과정과 아이디어에 초점을 맞춘 미술. 다시 말해 개념 미술이란 ‘누가’ 붓을 들고 ‘직접’ 그림을 그리고 정과 망치로 석상을 조각했느냐가 아니라, 작품에 깃든 ‘개인의 생각 혹은 개념’에 초점을 맞춘 미술 양식이다.
Fountain, 1917, Marcel Duchamp
뒤샹은 철물점에서 평범한 소변기 하나를 사왔다. 그리고 이 소변기에 ‘샘’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소변기 어디에도 자신의 서명은 새겨 넣지 않았다. 작가의 서명에 따라 진품이 판가름나는, 오리지널리티의 정의를 단방에 날려버린 것이다. 20세기 예술의 핵심은 20세기 이전의 미술사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뒤샹이 깨고 싶었던 건 진품이라는 정의였다. 이때까지 사람들은 오리지널리티에 들어간 작가의 노동력을 매우 중요하게 보았는데, 뒤샹은 값어치에 대한 부분을 떠나 진품과 유명세 그 자체를 숭배하는 사람들의 관성을 깨고자 했다.
오리지널리티의 성역을 무너뜨린 뒤샹이 허락한 소변기는 그 개수만 17개에 달한다. 10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뒤샹의 ‘샘’은 세계 여러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많은 사람이 찾아와 유심히 살펴보고 사진도 찍는다. 명성만 놓고 보자면 루브르의 ‘모나리자’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지만, 작품을 대하는 작가와 관람객의 태도는 상이하다. 뒤샹은 ‘샘’을 설치했을 때 누군가 와서 망치로 이 소변기를 깨버렸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고 한다. 중요한 건 예술가의 생각이지 작품의 외형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개념을 중시하는 뒤샹의 가치관은 노동력을 최소화한 미니멀리즘, 기성품 통조림 캔에서 아름다움을 찾은 앤디 워홀로 대표되는 팝 아트, 작가의 의도에 따라 공간과 오브제를 구성하는 설치 미술 등 후대 예술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며 모던 아트의 뼈대로 자리 잡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뒤샹의 영향력은 계속되고 있다.
전시 방식이 예술의 경험을 바꾼다
테이트 모던의 특별한 점은 전시 방법이 다른 미술관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미술관이 시대순이나 화가별, 지역별로 작품을 배치한다면 테이트 모던은 주제별로 전시관을 꾸린다. 주제가 같거나 연결 고리가 있다면 시대, 화가, 지역을 초월한다. 테이트 모던은 모네의 말년 작품 ‘수련’과 추상표현주의 작가 마크 로스코의 작품들을 함께 전시했다. 백내장 진단을 받은 모네는 78세가 됐을 무렵, 색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시력을 잃었다. 그럼에도 모네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렸다.
로스코는 인간의 감정을 세심하게 다루었던 화가다. 도시민의 삶, 고립된 도시, 사회 문제 속 인간의 감정에 관심을 갖고 이런 이미지들을 초현실적 상상에 기대어 그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화풍은 초현실주의에서 벗어나 형체가 사라지는 추상화로 발전했다. 1949년에 앙리 마티스의 ‘빨간 작업실’이라는 작품을 만나며 로스코는 깊은 깨달음을 얻는다. 이미지와 형태를 최소화하고 색과 면으로만 이뤄진 그림이 인간 본연의 감정을 드러내는 데 가장 탁월하다는 것을 깨우친 것이다. ‘본다’는 것을 아예 배제하고 그리는 것, 이것이 마크 로스코가 정립한 추상의 개념이었다.
Water-Lilies, 1916, Claude Monet
테이트 모던은 시력 문제로 형체가 불분명한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던 모네의 ‘수련’ 반대편으로 로스코의 전시관을 배치했다. 그럼으로써 20세기 추상표현주의 회화의 특징을 관람객에게 이해시킨다. 모네와 로스코는 둘 다 터너의 열렬한 팬이었다. 터너를 향한 동경의 뜻을 담아 모네는 기차 연작을 터너의 작품이 걸려 있는 국립 미술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로스코는 본인 작품의 상당수를 테이트 브리튼에 기증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현재 모네의 ‘수련’은 국립 미술관으로, 로스코의 그림은 그의 유언에 따라 테이트 브리튼의 터너관으로 돌아갔다. 모네의 ‘수련’이 모던과 브리튼을 순회한 것처럼, 어떤 작품들은 특별한 전시 컨셉 아래 테이트 재단이 운영하는 갤러리를 순례한다. 꼭 보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방문 전 각 미술관의 홈페이지에서 확인해보기를 추천한다.
테이트 모던의 입구는 세 곳인데 어디를 통해 들어오더라도 뻥 뚫린 거대한 공간을 마주치게 된다. 발전소로 운영될 당시 발전 터빈이 자리하던 곳이어서 터빈 홀이라 불리는 공간이다. 이곳에서도 다양한 전시가 열린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전시는 유니레버 시리즈의 일환으로 터빈 홀을 채웠던 루이즈 부르주아의 ‘마망’이란 작품이다. 부르주아는 터빈 홀에 9미터 높이의 대형 거미 ‘마망’을 설치했다.
‘마망’은 어머니를 뜻한다. 작가는 어려서부터 유독 어머니에 대한 애착과 사랑이 강했다. 어릴 적 병든 어머니를 두고 자신의 영어 교사와 불륜을 저지르는 아버지를 목격한 뒤로, 어머니에 대한 애착과 애처로운 감정은 더욱 커졌다. 부르주아는 거미줄을 친 뒤 먹이를 잡아 새끼 거미에게 건네는 암거미에게서, 평생 실을 엮어 베를 짜는 일로 가족을 먹여 살렸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거미처럼 가족을 위해 희생한 어머니, 그 어머니의 모성애를 표현하기 위해 ‘마망’이라는 위대한 거미 작품을 남겼다.
또한 터빈 홀은 방문객을 위한 자유로운 공간이 되기도 한다. 터빈 홀에서 자주 목격되는 장면은 아이들이 자유롭게 스쿠터를 타는 모습이다. 때로는 넓은 바닥을 잔디로 채우고 말을 타는 행사를 진행하기도 한다. 이런 모습을 보면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항상 강조하는 ‘만지지 마시오’, ‘조용히 하시오’, ‘뛰지 마시오’와 같은 제약을 보란듯이 무너뜨리고, 자유로운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다는 생각이 든다. 앞서 뒤샹이 서양 미술사가 2000년간 쌓아올린 오리지널리티의 고정관념을 깨뜨렸다면, 테이트 모던은 미술관 특유의 경직된 문화와 아우라를 깨고자 노력한다.
현대 예술은 모호하고 어려운 것, 작가의 개인적인 사색이 돋보이는 미술 장르 정도로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그 각각의 의미를 이해하고 다시 그림을 관찰하면, 온갖 디자인과 주거 형태 그리고 실용성과 효율성 중심의 사고관까지, 21세기의 대부분이 현대 예술의 기반 위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현대 예술은 우리 삶 속에 들어와 있다. 인상주의가 19세기 사람들의 생활상을 비추는 거울이었던 것처럼, 테이트 모던은 20세기부터 21세기의 시대와 정신을 비추고 있다.
지역의 표정을 만드는 예술의 힘
10여 년째 봄과 가을이 오면 나는 일본 나오시마 섬으로 작품 해설을 하러 떠난다. 나오시마 섬은 구리 제련소가 위치해 있던 곳이다. 인간의 욕심으로 자연이 파괴되고 사람들이 빠져나가며 활기를 잃었지만, 동시대의 예술가들이 참여하면서 예술의 섬으로 탈바꿈했다. 매년 이곳을 방문할 때면 21세기 예술과 사회가 갖는 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테이트 모던도 넓은 의미에서 예술과 사회의 공생을 보여 주는 뮤지엄이다. 뱅크사이드는 한때 폐발전소로 생기를 잃은 도시였지만, 이제는 영국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이 찾는 관광지 중 하나가 되었다. 뱅크사이드와 강 건너를 잇는 밀레니엄 브릿지 덕분에, 도시는 늘 사람들로 북적이고 지역 경제는 살아난다. 21세기 예술은 건축과 사회, 경제와 상호 작용한다. 예술을 통해 삶은 더 윤택해지고 혜택을 보는 사회 구성원은 늘어난다.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테이트 모던 옆에는 16세기 셰익스피어가 사용했던 글로브 극장이 있다. 16세기 이 자리에 극장이 있었다는 단서를 발견하고 미국 배우 샘 워너메이커가 모금 운동을 벌여 1970년대에 새롭게 지은 셰익스피어 시대의 극장이다.
만약 여름에 테이트 모던을 방문할 계획이라면, 꼭 극장 시간표를 확인하고 공연을 보기를 추천한다. 셰익스피어가 활동했던 500년 전에는 전기가 없어 햇빛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글로브 극장은 당시를 재현하기 위해 일부러 지붕을 만들지 않고 햇빛을 조명 삼아 공연을 연출한다. 그러다 보니 여름에만 자연광을 조명 삼아 공연을 진행한다. 관객의 3분의 1은 아직도 바닥에 서서 연극을 봐야 하는,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글로브 극장에서 템즈강변을 따라 10분 정도 산책하다 보면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식자재 시장, 버로우 마켓이 나온다. 16세기의 모습 그대로 햇빛을 맞으며 즐기는 연극과 전통 시장 버로우 마켓. 과거와 현재를 잇는 밀레니엄 브릿지와 현대 예술의 상징물인 테이트 모던까지. 템즈강변을 쓱 둘러보는 것만으로 벌써 런던에서의 설레는 하루가 계획되었다.
Reference
• 테이트 홈페이지
• Tate Modern Handbook, Mathew Gale
• 열려라 현대미술, 모니카 붐 두첸, 아트북스